폭풍 속으로 (2)
“안 돼요. 또 혼자 가시겠다고요? 절대로 반대에요.”
차가운 표정. 냉정한 얼굴로 인아가 말했다.
“저도 동의해요. 무사히 돌아오셨지만, 거기서 잡혔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뇌를 파먹는 놈들이라면서요? 그놈들이 유현 씨에게 흥미를 가졌었다면서요? 그런데 그놈들보다 더 높은 고위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가겠다고요? 저도 반대에요.”
유미와 인아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절대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라고. 이번 기회를 놓치면 정말 힘들어져.”
“기회요? 힘들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감정이 풍부한 유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하긴 그랬다. 90일에서 120일 예정으로 출발해 놓고 하룻밤 사이에 돌아와서는 전리품이라고 쌓아 놓은 것이 수북했다. 귀족에, 인면 뱀장어, 심지어 괴물로 변한 자들과 싸웠다는 말을 해놓고 또 가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유미와 인아였다.
“고위 귀족들이 여왕을 잡으려고 혈안이 됐어.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고위 귀족들이 밖으로 나오겠어. 지금이야 능력을 얻고 얼마 되지 않아서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감이 넘쳐흘러 밖으로 나왔지만 언제까지 그럴 것 같아? 애초부터 고위층인 놈들이야 아랫것들 시키는 본성이 언제 나올지 모른다고.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래 여왕만 아니었다면 놈들이 나왔을까? 여왕을 잡겠다고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 나온 거잖아. 이번 기회를 놓치면 언제 놈들을 잡을 수 있을까? 그래서 가겠다는 거야.”
“이해해요. 그런데 왜 우리를 두고 가시겠다고 하는 거죠?”
“말했잖아. 귀족들은 정신계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면 뱀장어를 이용하면 되잖아요.”
“인면 뱀장어는 괴물이야. 그걸 먹는다고 초음파 능력을 얻게 된다는 보장이 없어. 우리는 변이 억제제를 먹고 있잖아. 너나 유미가 먹는다고 해서 그 능력을 얻는 건 불가능해. 그렇다고 억제제를 끊기는 너무 위험하고.”
“왜 우리만 생각하죠? 사람들 많잖아요. 그리고 인면 뱀장어의 뇌를 사용하면 확실하게 변이를 일으킬 수 있잖아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변이를 일으키면 중화제나 억제제를 사용해 제어하면 되고요.”
인아가 아까 꺼냈던 서류에 이것저것 뭔가를 적으며 대답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면 뱀장어를 먹이자고? 생존자들에게 특성을 발현시키자는 소리야?”
“네.”
“제대로 된 데이터도 없이 바로 사람에게 적용하자고?”
“능력이 필요하니까요.”
“실패하면 중화제나 억제제를 쓸 시간도 없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잖아. 놈들이 뇌를 먹자마자 변했다고. 먹고 나면 순식간에 괴물로 변해버릴지 모르는데도 먹이자고?”
“저도 알아요.”
인아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녀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나였다. 이곳에 있는 2천 명을 전부 실험체로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검은 매직으로 중요한 정보가 지워진 서류 쪼가리에 의지해 생으로 실험을 하자는 소리였다.
초음파 능력이 생기지 않고 뱀장어로 변하면? 레드 존에서 만났던 소화액 토하는 괴물도. 곤충과 인간이 뒤섞인 모습이었다. 귀족이었던 가슴 큰 여자도 몇 사람의 뇌를 먹자 기괴하게 변했다. 인면 뱀장어를 먹으면 사람의 형태를 유지하기보다 그렇게 괴물 형태가 될 확률이 더 높았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후- 좋아. 그래. 인면 뱀장어가 가진 초음파 능력을 구했다고 치자. 그래도 너희는 여기 있어야지. 안 그래? 너희까지 나와 같이 가면 거점은 어떻게 하고?”
“거점이요? 아니죠. 이번이 기회라면 우리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인아의 눈빛이 어쩐지 서늘했다.
“너. 설마?”
“네. 그렇게 하지 않으실 거라면 가시는 건 반대에요.”
인아가 말하는 것은 하나였다. 이번이 기회라면 모든 것을 쏟아 붓자는 소리였다. 유미와 인아가 언제 입을 맞췄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꼭 가야 한다면. 모든 것을 걸고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아- 생각해보자.”
전쟁이 길어지는 와중에 중소규모의 무장 세력이 범람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작 1년 만에 끝나 버렸다. 전국시대가 된다는 시로의 예측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연방은 귀족을 앞장세워 동맹의 잔당을 정리하면서 중소규모 무장 세력과 식인을 통해 변이를 추구하는 식인종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아마도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높았다.
한반도에 있는 귀족 숫자는 300명가량 그 가운데 고위 귀족은 3명이라고 했다. 나머지는 고만고만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R의 이야기에 따르면, 연방은 조금씩 중하위 귀족들의 숫자를 늘리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저쪽에서 안정적으로 주변에 남은 자들을 흡수하고 토벌하기 시작한다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울릉도나 제주도 같은 섬으로 도망가기도 쉽지 않았다. 우선 배의 크기가 문제였다. 작은 어선이나 내가 끌고 온 요트엔 아무리 많이 타도 50~60명 정도가 한계였다. 대형 여객선을 구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한다고 하더라도 위험은 여전히 남았다.
바다에는 상상하기 힘든 괴물이 살고 있었다. 인면 뱀장어만 하더라도 20m가 훌쩍 넘어가는 크기다. 만약 상어나 고래 같은 종류가 변이를 일으켰다면 그리고 그런 대형 괴물과 마주친다면? 그걸로 끝이었다.
레드 존의 여왕. 그 여자는 말했다. 운명은 없다고. 그래서 모든 것은 필연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게 있어 현실은 운명과 운명이 엮여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 운명과 그들의 운명이 엮여 만들어진 것이 지금 이 현실. 세상은 그런 운명과 운명이 교차해 만들어진 거대한 그물이었다.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이번이 기회였다.
*
인면 뱀장어의 능력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인면 뱀장어의 초음파 능력을 얻은 자들도 본래 인면 뱀장어가 가진 능력보다 훨씬 약한 능력을 발현했다.
인면 뱀장어는 거의 2km 가까운 사거리를 가졌다면, 변이한 사람들은 고작 90~100m 정도였다. 사거리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위력도 마찬가지였다. 인면 뱀장어가 뇌를 흔들다시피 해 모든 능력을 완전히 마비시켰다면, 변이한 사람들은 그 강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예를 들어 인면 뱀장어가 링커와 슬레이브 사이의 연결을 완전히 끊어버려 슬레이브를 완벽하게 기능정지 시켰다면, 변이한 사람들이 쏜 초음파는 링크에 혼란을 일으키는 수준이었다.
탐지 능력을 가진 슬레이브의 숫자를 늘리는 것도 문제였다. 연방에서 10살 내외의 꼬마 여자아이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었다. 성별도 그렇고 나이도 그렇고 기준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제대로 탐지 능력을 각성하지 못했다.
이 경우 꼭 슬레이브로 만들지 않더라도 탐지 능력을 각성할 수 있었지만, 의미가 없었다. 슬레이브화 시키지 않을 경우 탐지 능력으로 인해서 극심한 불안과 공포에 빠질 뿐 아니라 기절하기까지 했다. 여유가 있다면 좋았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R의 이야기에 따르면 고위 귀족의 숫자는 셋. 한 명은 정치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재벌 총수였다. 이 둘은 그렇다고 치지만 나머지 한 명이 문제였다. 그 사람이 주한 미군 사령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부산에서 만난 귀족들 가운데 외국인들이 셋이나 있었다. 저격수 핸리, 환영 능력의 윌슨 그리고 염력의 알렉스. 외국인이 3인의 고위 귀족 가운데 일각을 차지했으니 그 밑에 있는 자들도 외국인으로 구성된 것은 필연일지 몰랐다.
“근데 그게 왜 문제에요.”
유미가 어차피 싸울 놈들인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주한 미군 사령관이라면 평택이나 오산 일대는 그의 앞마당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숨바꼭질하는데 주변 지형을 잘 알고 있다는 건, 누구보다 유리하다는 의미였다. 연방과 동맹이 주고받았던 전술핵의 숫자도 마음에 걸렸다.
동맹 측이 딱 한 발 수도권에 떨어뜨린 것에 반해, 연방은 동맹으로 넘어간 주요 도시마다 전술핵을 썼다. EMP로 쑥밭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한반도에 남아있는 전술핵의 통제권이 그자에게 있다고 봐야했다. 그가 여왕을 잡아 정신계 능력까지 독점하게 된다면, 실질적으로 견제할 방법은 없다고 봐야 했다.
*
아직 2월. 새벽. 해는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깜깜했던 하늘이 코발트색으로 변할 무렵. 미약한 불안감과 드디어 결착 지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뒤섞여 형용하기 힘은 심정을 싣고 3척의 요트가 출발했다.
요트는 해안선을 따라 이동했다. 내가 한 번 갔었던 해로를 타고 가면서 되도록 육지에 붙어서 이동했다. 고급 요트가 세 척이나 해안선을 따라 줄지어 가는데도 사람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엽총을 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서요?”
“그러게.”
이틀 전에 봤던 풍경인데 낯설었다. 바다도, 해안선도, 멀리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타들어 갔던 건물도 전부 생경했다.
정오가 될 무렵 부산에 도착했다. 탐지 능력이 최장 7km까지 가능했기 때문에 해안 가까운 지역에 슬레이브나 귀족, 변종, 빗치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탐지 결과는 깨끗했다.
“없음.”
“확실히 잡히는 게 없어?”
“없음.”
꼬마 슬레이브는 무표정하게 없다고 대답했다. 일곱이나 되는 귀족과 서른이 넘는 슬레이브를 죽였음에도 추가 지원이 오지 않았다는 건 뭔가 이상했다.
“이거 생각보다 좋지 않은데.”
“네? 왜요?”
“좋지 않다니 무슨 일이죠?”
“귀족이 일곱이나 행방불명됐어. 슬레이브들도 서른 넘게 사라졌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연방의 지원 병력으로 바글바글했어야 정상 아닐까?”
내 말뜻을 바로 알아챈 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도 ‘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쪽에 추가 병력을 보내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일이 벌어졌다는 소리지.”
“무슨 사건일까요?”
“동맹의 잔당이라고 하지만 남아있다면 지휘부가 있겠죠? 그 대전에 있던 여자 과학자 말이에요. 그들의 위치가 발각됐다거나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러면 좋겠는데.”
“그럼 혹시?”
“여왕의 흔적을 발견했다거나. 그랬다면 총동원했을 가능성도 있겠지. 여왕이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망을 구축하려고 할 테니까 말이야.”
내 말에 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에엣? 그럼 큰일이잖아요.”
아니라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한다면 뒷북이 될지 몰랐다.
“속도를 높여야겠다.”
“네.”
남쪽 해안선을 따라가면서도 확실히 이상했다. 여수는 동맹의 도시고 일종의 거점 도시였다. 따라서 귀족이나 연방의 슬레이브 흔적이 탐지에 걸렸어야 했는데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동맹의 슬레이브가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이상하군요.”
“일단 계속 가자.”
여수에서 목포에 이르기까지 슬레이브가 없었다. 확실히 이상했다. 간혹 변종이나 빗치의 흔적이 발견되긴 했지만, 연방이나 동맹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처음 계획은 군산에서 내려 육로를 타고 북상하면서 평택을 거쳐 오산으로 가려고 했었다.
“계획을 바꿔야겠다.”
“바로 평택으로 가시게요?”
“그러기는 너무 위험해.”
만약 여왕의 흔적이 발견돼 포위망을 만든 것이라면 평택 인근은 귀족들과 슬레이브들이 매복해 있을 확률이 높았다. 거리가 어느 정도 떨어졌으면서도 평택이나 오산으로 접근하기 유리한 곳으로 가야 했다. 제부도와 화옹방조제가 있는 방향을 잡고 서서히 속도를 줄여나갔다.
새벽에 출발했지만, 제부도 인근 해역으로 도착했을 때는 서쪽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붉게 물든 바다는 금방이라도 어두워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동해와 비교해서 서해에는 변이된 생물들이 많았는지 탐지 슬레이브가 계속해서 경고했다.
“위험.”
탐지 슬레이브의 경고가 너무 잦았기 때문에 배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날이 저물고 있는데 이렇게 조심스럽게 가다가는 꼼짝없이 바다 위에서 밤을 보내게 생겼다. 그건 사양하고 싶었다.
“크기가 작은 건 무시해.”
유미가 갯벌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기 갯벌에 있는 저 정도 크기면 작은 건가요?”
거의 2m 됨직한 꽃게가 집게발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인아가 어이없었는지 되물었다.
“저게 작아?”
“일단 저 정도 크기까지 무시해.”
따지고 보면 바다뱀은 남쪽해역에서나 볼 수 있는 물고기였다. 인면 뱀장어도 비정상인데 겨울 갯벌에서 집게발을 흔드는 게가 있다고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제부도와 화옹방조제 인근으로 들어섰을 때는 해가 떨어진 다음이었다.
*
작은 항구에 요트를 정박하고 올라서자, 우리를 환영하는 것은 거대한 꽃게들이었다. 크기가 1~2m량 되는 꽃게들 수십 마리가 달려들었다.
“쯧- 슬레이브들을 뒤로 빼. 여긴 나와 유미가 정리한다.”
“G-22라면 게 껍데기를 뚫을 수 있을 거예요.”
인아가 슬레이브들을 지휘하며 대답했다.
“여기서 총소리를 내서 좋을 게 없어. 보급품이나 내려. 타올라라!”
화르르르륵!
거대한 꽃게들이 익어가며 달콤한 냄새를 풍겼다.
“으이쌰앗! 꽃게 뜯기!”
유미가 꽃게 등딱지를 뜯어내며 아저씨같이 입맛을 다셨다.
“꽃게가 이렇게 크니까 조개도 대따 클 것 같아요!”
콰직!
꽃게의 집게발을 생으로 뽑아 던진 유미가 ‘간장 게장 좋아하는데 아깝다.’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