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속으로 (1)
R과의 첫 만남은 좋지 않았지만, 결국엔 좋게 헤어졌다. R은 진지한 고해성사를 끝으로 다사다난했던 인생을 마감했다. 내가 R과 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꼬마는 시킨 것을 착실하게 해놓고 있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불꽃 뒤로 꼬마가 자기 몸통만 한 배낭을 메고 왔다. 아무리 꼬마라고 하더라도 슬레이브는 슬레이브. 성인 남성 몇 배에 해당하는 완력을 가지고 있었다.
“주변에 다른 반응은 없지?”
요란하게 한바탕 했으니 혹시라도 다른 생존자들이나, 변종, 빗치가 오면 어쩌나 싶었다. 내 질문에 꼬마는 자기 몸보다 큰 배낭을 내려놓으며 즉답했다.
“없음.”
확실히 말이 짧았다. 아마도 탐지 쪽으로 특화를 시키면서 뇌를 건드린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다른 부분은 정상으로 보였다.
“탐지 능력을 사용하는데 제한 사항 같은 건 있고?”
“에너지 소모. 많음.”
“그래? 그럼 일단 먹고 해라.”
“......”
아파트에서 챙긴 것만 배낭 20개 분량인데 지나가면서 정리한 슬레이브들이 가지고 있던 것까지 합하면 배낭으로만 30개 분량이 나왔다.
‘일단 요트부터 챙겨야 하려나?’
바닷길이 좋기는 했지만, 바다에 사는 괴물들은 육지와 비교해 워낙 크기도 컸고 공격하기도 까다로웠다. 심지어 생명력도 질겼다. 머리가 잘리고 꼬리가 잘린 인면 뱀장어의 몸통이 아직도 꿈틀거리고 있었다.
“혹시 저것도 탐지할 수 있겠어?”
“가능.”
뱃길을 쓰는 게 조금 걱정스러웠는데 바다 괴물도 탐지할 수 있다고 하니 걱정이 줄었다. 아직도 입을 뻐금거리는 인면 뱀장어를 그냥 버리기는 아까웠다. 능력이 능력이니만큼, 아무나 함부로 먹게 하는 건 위험했다.
‘인아의 슬레이브들에게 먹여볼까?’
꼬마는 탐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능력이 있는데 인면 뱀장어가 가진 초음파 발산 능력을 흡수하면 변이를 감당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육체 능력만 강해진 일반 슬레이브들이라면 조금 낫지 않을까 싶었다.
‘무기를 싣고 다니기도 그렇고 일단 다시 돌아가야겠어.’
R에게 들은 내용을 유미와 인아에게도 말해줘야 했다. 정신 지배는 아니더라도 다양한 정신계 능력을 가진 귀족들이 연방에 있었다. 연방이든 패주한 동맹의 잔여 세력이든 언제 거점으로 올지 몰랐다. 최소 30일 최대 120일을 생각하고 출발했던 여정이 고작 하룻밤 사이에 끝났다.
*
다음날 새벽부터 타고 갈 요트를 찾았다. 육지에 가까운 요트일수록 많이 훼손됐고 부식도 심했다. 방파제에 인접한 요트는 인면 뱀장어가 부쉈기 때문에, 100척이 넘게 정박해 있던 선착장에서 움직일 수 있는 요트는 고작 3척이었다.
그나마 처음 백골들에게서 구한 열쇠로 시동을 걸 수 있어 다행이었다. 3척 모두 내가 타고 왔던 요트보다 훨씬 고급이었고 크기도 컸다. 두고 가기는 아깝다고 할까? 위험하긴 했지만 못 먹어도 고였다. 3척을 기차처럼 밧줄로 묶은 뒤 느릿하게 거점을 향해 운전했다.
내려올 때는 고작 4시간 정도 걸렸는데, 두 척을 끌고 올라가다 보니 거의 10시간 가까이 걸렸다. 아침 8시 경에 출발해서 거점에 도착한 것은 날이 어둑해지는 오후 6시쯤 도착했다.
낯선 배가 3척이나 접근하자 조명탄이 터지고 난리가 났지만,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사람들이었다. 어쩐지 집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선착장에 배를 대고 짐을 내렸다. 가방 하나당 무게가 80kg인데 이게 30개가 넘어가니 작은 동산처럼 쌓였다.
“이건 다 뭐에요?”
배낭에 가득 담긴 것을 보곤 유미가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뭐 전리품이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는데 전리품이라는 말 때문인지 유미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전리품이요? 싸웠어요? 혼자? 으악! 이건 뭐에요? 대따 큰 얼굴? 살아있어? 꺅!”
아직도 주둥이를 뻐금거리는 인면 뱀장어의 대가리를 보곤 유미가 비명을 질렀다.
인면 뱀장어의 대가리에 수북하게 쌓이는 전리품을 보곤 그렇지 않아도 냉정해 보이는 인아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변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씀해 주세요.”
서릿발 같은 인아의 목소리가 옆구리를 찔렀다.
“이야기가 긴데.”
유미와 인아가 동시에 나를 째려봤다.
*
동맹이 연방보다 앞서는 것은 물량이었다. 전쟁 초기 압도적인 물량으로 전선을 밀어붙였던 동맹이었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전선이 고착화 되는 동안 연방이 먼저 정신계 능력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환영, 정신 간섭, 속박, 감정 조절, 감정 증폭, 인식 능력교란, 텔레파시와 같은 다양한 정신계 능력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지배 계층이 원했던 궁극적인 정신 지배는 아니었지만, 정신계는 정신계였다.
연방의 지배층은 이 정신계 능력을 이식했고 계획대로 귀족의 위치에 올라섰다. 젊음을 되찾은 자들과 젊은이들은 이제까지 연구했던 모든 역량을 집약해 자신들의 육체 능력을 최적화하는데 성공했다. 그렇게 귀족들은 생존자들을 장악했고 나아가 전장을 지배했다.
정신계 능력을 갖춘 귀족들이 전선에 등장하면서 싸움은 숫자의 싸움이 아닌 질의 싸움이 됐다. 전쟁의 양상이 질의 싸움으로 변한 순간부터 더 이상 전쟁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 됐다.
정신계 능력을 갖춘 귀족과 적의 위치를 감지하는 탐지 슬레이브의 조합은 동맹의 방어선을 손쉽게 무너뜨렸다. 환영은 동맹 측 병사들을 상잔시켰고, 감정 조절과 증폭은 병사들이 자살하도록 유도했다.
동맹의 링커와 슬레이브들도 마찬가지였다. 속박과 둔화에 걸려 전투력이 감소했고 인식 교란으로 인해 눈앞에 있는 귀족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었다. 동맹은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동맹은 완전히 끝났다고 봐야 하나요?”
“일단 나와 싸운 귀족 놈들도 동맹의 잔당을 처리하겠다고 부산을 들쑤시고 있었으니까. 완전히 끝났다고 보긴 힘들지만 예전처럼 대규모 세력이라고 보긴 힘들겠지.”
내 말에 인아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토벌은 시간문제겠네요.”
“그렇겠지.”
귀족과 탐지 슬레이브의 조합은 그만큼 위험했다. 정신계 면역에 위기 감응을 가진 나도 쉽지 않은데 동맹의 슬레이브들이 연방의 공격을 막기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탐지 슬레이브 때문에 숨어있는 것도 불가능할 테고. 동맹이든 연방이든 우리와 마주칠 확률이 높네요. 그것도 상당히 빨리 마주칠 것 같네요.”
인아의 말에 유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그 레드 존은 어떻게 됐데요? R이라는 사람이 레드 존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레드 존에서 피해가 컸다고 하더라고.”
인아는 내 말에 담긴 의미를 바로 파악했다.
“피해가 컸다는 말은 결국 토벌했다는 소리네요.”
“어. 여왕은 놓쳤지만, 세력을 완전히 박살냈다고 하니까.”
유미는 연방이 레드 존을 토벌했다는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왕이요? 아. 그년 말이군요.”
레드 존의 그녀를 연방에서는 여왕이라고 불렀다. 변종과 빗치들의 여왕. 본래 빗치는 변종을 만들고 만든 변종을 지배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거기에서 벗어나 다른 빗치들까지 복속시켰고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심지어 자체적으로 섭식 변이를 유도해 새로운 종을 만들기까지 했다.
연방은 그녀가 가진 지배력의 비밀을 파악하기 위해 끝까지 추격했지만 결국 놓쳤다고 했다. 연방은 레드 존에서 상당히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그 대가로 다양한 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G-22 특수탄에 들어간 액체나 단도에 사용된 액체는 레드 존과 싸우면서 얻은 곤충형 변종의 소화액을 응용한 것이었다.
“레드 존에서 동쪽으로 도망친다면 이쪽으로 올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네요.”
“레드 존의 위치를 보면 강릉이나 그 아래로 넘어가겠지.”
“강릉이든 그 아래든 그녀가 이 근처로 온다는 소리잖아요. 그렇죠? 이쪽으로 온다는 거죠?”
유미는 그년에게 복수하고 싶었는지 쌩쌩하게 말했다.
“연방에서는 그녀가 서남부로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직 모르는 일이야.”
서쪽으로 갔다면 오산이나 평택, 군산 방면으로 도망쳤다는 소리였다. 좋지 않았다. 만에 하나, 폐허가 된 비밀실험실에서 그녀가 정신 지배와 관련된 무엇을 손에 넣는다면 그것도 재앙이었다.
“귀족들은 어땠어요? 강했어요?”
유미가 주먹에서 오독오독 소리를 냈다.
“정신계 능력이 까다롭긴 했지만, 난 면역이라서 말이지. 게다가 저걸 이용하니까 쉽게 처리할 수 있었어. 마지막에 몰리니까 서로 잡아먹더라고.”
유미는 인면 뱀장어를 이용했다는 것보다 서로 잡아먹었다는 부분에서 화들짝 놀랐다.
“에엣? 서로 잡아먹어요?”
“그래. 골을 빨아먹더라.”
“으엑. 골이면 뇌요?”
유미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쪽쪽 소리가 나게 파먹고 괴물로 변하던데.”
“괴물이요?”
“그래 괴물.”
내 대답에 인아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는지 대전에서 가져왔던 서류철을 이리저리 넘기며 자료를 찾았다. 유미는 여자가 괴물로 변했다는 게 신기한 표정이었다.
“신기하네요. 죽지 않고 괴물이 됐다고요? 세포 붕괴는요? 스펙을 많이 맞으면 세포가 붕괴하잖아요.”
따져보면 괴물로 변한 여자의 상태는 심각했다. 팔뚝에 다시 팔이 돋아났고 심지어 입과 눈알까지 생겼다. 거기에 생선과 곤충 사람의 머리가 뒤섞이기까지 했으니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세포가 붕괴했다고 해야 할까? 그 모습이라면 오래 살기는 틀렸으니까.”
“으음. 그렇군요.”
섭식 진화는 한계가 있었다. 한계가 있을 뿐 아니라, 위험했다. 그걸 귀족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는 같이 죽자는 심정으로 뇌를 파먹었으니 이성을 잃거나 괴물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R에 의하면 어느 정도 강한 능력자가 또 다른 강한 능력자를 섭식할 경우 불안정한 변이가 일어난다고 했다. 그래서 귀족은 다른 귀족을 먹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
“뇌를 먹었다고 했죠?”
대전에서 가져온 서류를 찾던 인아가 뭔가를 찾았다.
“여기 있어요.”
신체 일부를 먹어도 변이가 일어나지만, 뇌나 척수 같은 신경계를 생으로 먹을 경우 급속도로 변이가 일어났다.
“이건 왜?”
“여기를 보면 양을 줄이고 중화제를 같이 쓰면 변이를 조절할 가능성이 적혀있어요.”
검은 매직으로 중요한 정보가 지워졌는데도 인아는 용하게 그 부분을 찾아냈다. 스펙의 부작용을 낮추는 중화제나 시로가 만든 억제제를 고려했을 때, 통제 불가능한 변이를 통제하기 위한 연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음.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찾아낸 건 좋은데 이걸로 뭘 하려고 하는지 그게 궁금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약을 잘 사용한다면... 탐지 슬레이브를 더 늘릴 수도 있고, 가져온 인면 뱀장어의 능력도 이식할 수 있다는 소리에요.”
인아의 말에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면 뱀장어 능력이 초음파 같은 걸 발산해서 링크를 끊었다면서요? 정신계 능력도 차단했고요. 그런 능력을 이식할 수 있으면.”
‘으쌰-’ 기합을 내지르며 유미가 알통을 만들며 말했다.
“순수한 힘 싸움이 된다는 거네요. 후후훗.”
힘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강한 게 유미였다.
“순수한 힘 싸움은 아니지. 무기가 있으니까.”
내 말에 인아가 옆에 놓인 G-22를 만지작거렸다.
“G-22 말이군요. 그래도 생산시설이 파괴됐으니 G-22에 사용되는 특수탄이 무한대로 나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인면 뱀장어의 능력은 귀족의 정신계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점이라고 봐요.
“맞아요. 그 능력이 있으면 정신계 능력을 찾기 위해 평택이나 오산을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런 생각이었구나. 인아와 유미는 나 혼자 평택과 오산을 가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날 걱정해주고 기다리려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축복이었다.
“그래도 가봐야 해. 아까 말했잖아. 연방은 여왕이 그쪽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있어, 실제로 그쪽으로 도망쳤는지 도망치지 않았는지 모르지만 연방은 서남부를 수색할 거야. 레드 존에서 서남부면 오산과 평택이 들어가겠지. 거기를 고위 귀족들이 앞장서서 수색한다고 생각해 봐.”
R은 여왕을 잡기 위해 고위 귀족들이 직접 움직인다고 했다. 여왕을 잡으면 귀족이 아니라 왕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
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무슨 소린지 물음표를 동동 떠올렸던 유미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설마 또 혼자 가시겠다고 하는 건 아니죠?”
“미안. 귀족과 싸워보니 같이 가는 건 위험해. 솔직히 말해서 너희와 함께 가는 건 도박이라고 생각해. 너희도 정신계 면역이 있다고 하지만 나보다는 약하잖아. 상대방은 고위 귀족이야. 게다가 여왕이 있을 가능성도 있어.”
유미는 정신지배를 당한 적이 있었고, 인아는 정신지배를 저항하다 의식을 잃은 적이 있었다. 정신계 능력자 그것도 부산에서 만난 놈들보다 더 강한 정신계 능력자인 고위 귀족들과 마주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유미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인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처음보다 단단히 준비하고 가니까.”
탐지 슬레이브도 있고 G-22에 바렛과 비슷하게 생긴 특수 저격총도 있었다. 처음 오산과 평택에 간다고 했을 때보다 훨씬 좋아진 상황이었다. 운이 좋다면 고위 귀족과 그년을 전부 정리할 기회가 생길지도 몰랐다. 아니, 마주친다면 이번에 정리해야 했다.
“안 돼요.”
단호한 목소리. 인아가 차갑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