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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240화 (240/261)

귀족 (2)

‘이야기 좀 하자.’는 목소리는 이곳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거리나 방향을 짐작할 수 없는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식인종 두목과 생존자 리더가 가지고 있던 능력이 발전된다면 이런 식으로 발현될 것 같았다.

‘단순한 목소리가 아니다. 강제하는 힘이 있어. 텔레파시와 정신 장악이 섞여 있나?’

당장에라도 붙을 것처럼 서로 으르렁거렸던 윌슨과 왼쪽의 중학생&여자 조가 억지로 참는다는 티를 풍기며 침묵했다. 여자들은 짜증이 난다는 표정으로 살짝 걷어 올렸던 드레스를 다시 내렸다. 억지로 참는다지만, 결과는 침묵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들도 목소리 주인공의 말에 따른다는 소리였다.

소란이 멎자 낮은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놈이 있는 방향을 찾기 위해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바로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으면서도 사방에서 울리는 것 같은 목소리. 미간에 주름이 잡혔지만, 흔적을 찾았다. 원거리에서 느껴지는 위험. 위기 감응이 경고하고 있는 원거리 공격수가 있는 방향과 목소리의 근원이 일치했다.

“이상하게도 어느 곳에도 당신에 대한 자료가 없어. 지금 확인해 봤지만 이쪽 라인에는 없단 말이지. 윌슨의 환상을 견뎠다는 건 격이 있다는 건데. 못 보던 얼굴이군.”

“......”

격이라니? 클래스(class)를 말하는 건가? 못 보던 얼굴이라면 이들은 전부터 서로 안면을 트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남자도 여자도 훤칠하게 생긴 선남선녀였다. 정장을 입어 꼭 사립중학교 교복 같은 느낌이 들어 중학생이라고 생각하게 한 꼬맹이도 미소년이었다.

미노처럼 지능이 있는 변종이라는 건가? 아니면 나처럼 특이한 케이스? 동시에 여러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전부 아니었다. 중학생이라면 미노라는 케이스가 있다고 치지만 윌슨은 백인 남성이었다. 그리고 왼쪽에 있는 두 사람도 남자였다.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들의 비율이 너무 높았다.

‘이건...’

레드 존에서 그년이 지배하고 있던 변종들은 전부 이성이 없는 변종일 뿐이었다. 변이가 일어나 능력이 생긴 일반인이라고 하기엔 이들이 있는 장소가 너무 이상했다. 사람이 없는 도시. 평택 미군기지에서 봤던 이끼와 비슷한 이끼들이 얼룩처럼 여기저기 피어있는 도시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상황. 숫자. 이들의 태도. 모든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이들은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변종 계열이라고 볼 수 없었다. 자연적으로 생긴 변종 계열이 아니라면? ‘격? 클래스? 라인?’ 그 짧은 순간에 떠오른 것은 시로가 했던 말이었다.

‘초능력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이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는 능력을 가진 실험체들이 나오기 시작했지. 방사능에 강한 인류, 신체능력이 월등하고 젊음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인류에서 이제는 능력을 가진 인류라니. 신인류 아닌가? 권력자들은 열광했지.’

신인류? 권력자. 슬쩍 봤을 때는 옷차림 때문에 중학생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세히 보니 단순한 사립 중학교 교복 같은 게 아니었다. 확연하게 고급스러운 옷감과 재질. 다른 사람들도 전부 독특한 차림새였다. 그러고 보니 꼬마와 같이 있는 여자들은 여배우들이 연말 연기대상에 참여할 때나 입는 것과 같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시로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통제에서 벗어난, 그것도 능력까지 있는 괴물들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얌전하게 길들일 수 있을까? 권력자들은 그 힘을 원했고 그 결과 하나의 능력을 찾을 수 있었어 그게...’

정신 지배 능력을 얻어야 한다면서 시로가 했던 말.

‘그래. 맞아. 그래서 연방 놈들은 정신 지배 능력을 독점해 귀족이 되려고 했다.’

부르르- 척추를 따라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고위층이 원하는 정신지배 능력이 연구되기 전 연방과 동맹이 나뉘었다. 통제되지 않는 변이는 가속되고 사방에서 변종과 빗치, 변이를 위해 식육을 마다치 않는 생존자들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고위층은 어떤 판단을 할까?

EMP로 연구시설이 파괴되고 스펙과 중화제 같은 필수 약제를 생산하는 생산시설이 고철 덩어리가 됐다. 거대 곤충들이 달려들고 변종 들개와 멧돼지처럼 변이를 일으킨 동물들의 습격이 시작됐다고 하면 고위층들은 어떤 선택을 할까?

완전한 지배를 위해 정신지배 능력을 찾겠다고 끝까지 기다릴 건가 아니면 정신지배는 아니더라도 그 하위 계열인 정신계 능력을 발현시킬 것인가? 대답은 내 앞에 있는 이들이 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귀족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폼도 그렇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여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디서 왔지? S구역에서 온 건가?”

“......”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떠보기 위해서 아무렇게나 묻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7명이 내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이어진 적막이 지루하다는 것처럼 멀리서 윙윙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날 흔들었다.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부터 시작하지. 말해.”

“......”

질문이 아니라 명령? 링커와 슬레이브 사이에나 쓸 수 있는 텔레파시를 사용하고 있었다.

“말해!”

윙-

이명(耳鳴) 귀가 울리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물거품이 터지는 느낌과 함께 윙-소리가 사라졌다. 놈의 정신 간섭을 막아낸 것이었다. 목소리의 연이은 채근에도 내가 입을 합 다물고 있자, 내 앞에 서 있던 일곱 명의 얼굴에 이채가 어렸다.

“호오? 무시한 건가?”

“무시라기보다는 면역 같은걸?”

왼쪽에 있던 두 남자가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둑한 건물 그림자 속에 있는 두 남자의 모습이 뚜렷하게 인지됐다.

“지금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이거야 원 봤지? 다들 봤지?”

두 사람 시야를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들도 일종의 정신 간섭의 일종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따지자면 책상 위에 자동차 열쇠를 올려놓고도, 분명히 봤으면서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였다. 저 능력이 변이를 일으킨 곤충이나 짐승들에게도 통한다면 저들은 위협에서 자유로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흐응. 그러네요.”

“지금쯤이면 발정이 났어야 하는데 말이야.”

꼬맹이의 양옆에 서 있던 두 여자 가운데 한 여자가 옆이 트인 드레스 사이로 미끈한 다리를 내뻗으며 중얼거렸다. 멀리서 내리누르는 목소리도 그렇고 앞에 있는 일곱 명도 그렇고 그들은 각자 나를 시험하고 있었다.

‘좋지 않아. 좋지 않다.’

시로가 했던 말대로라면 귀족들은 정신계열 능력을 탐하고 있었다. 정신계 면역이라는 내 능력이라면 다른 귀족들과 경쟁하는 데 필요한 능력일 터. 최악의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실험체로 잡혀가는 것을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빌어먹을.’

순식간에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는 일곱 쌍의 눈동자. 윌슨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던 라틴계 여자가 윌슨의 셔츠를 풀어헤치곤 혀로 그의 탄탄한 가슴을 핥았다. 윌슨의 가슴을 핥으면서도 그 여자의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봤던 눈빛. 식인하던 사람들의 눈빛. 올백의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면 식인은? 식인 본능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귀족들도 식인 본능에서 먹고 변이하려는 그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간만에 싱싱한 고기를 맛본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싱싱한 고기가 없었는데. 후으.’

‘신기하네. 변종도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처음 윌슨이 나에게 환영을 걸었을 때 했던 말들. 시로 목소리가 그 위에 겹쳐졌다.

‘자연적 변이가. 자연이 인육을 먹도록 하고 있어. 먹이사슬 최상위에 올라간 변종들에게 인간을 먹으라고 하고 있다고.’

인류를 지배하겠다고 했던 귀족이라는 작자들도 결국. 식인종일 따름이라는 생각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곱의 눈빛이 강렬해지자, 낮은 목소리가 주위를 환기했다.

“협약을 잊지 않았겠지?”

그 말에 꼬마가 허공을 보며 씨익 웃었다.

“R? 그래서 이 기회를 포기하라는 거야?”

“그러게.”

꼬마의 머리를 잡아 풍성한 가슴골에 끼워 넣으며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킥- 웃었다.

“나도 동의해.”

인지 능력을 흐리게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내 가운데 한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나를 향해 성큼 다가섰다.

“이것 보라고 R. 당신의 능력이 강하긴 하지만 동시에 우리 전부를 억누르긴 힘들다고. 그 사이에 상황은 종료되고 말이야. 베팅할 때를 놓치면 도태되는 걸 알면서 그럴 건가?”

왼쪽에 있던 또 다른 사내가 고개를 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윌슨도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나도 찬성이야. 흐흐흐.”

탐욕으로 일그러진 웃음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삽시간에 유쾌한 식사시간으로 변한 분위기였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요동치며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옥죄기 시작하는 가슴 어림. 이토록 느릿하게 옥죄는 위기 감응은 처음이었다. R이라고 했던 사내도 이들에게 동조하기로 한 것 같았다.

‘빌어먹을.’

적은 최소 아홉 명. 멀리서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는 R이라는 자는 일종의 정신 간섭계열. 그러니까 행동 강제효과가 있는 텔레파시 능력. 그 곁에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능력자 또는 저격수.

윌슨은 환영능력. 윌슨의 가슴을 물고 빨고 있는 라틴계 여자의 능력은 불명. 왼쪽에 있는 두 남자 가운데 최소한 한 명은 인지․인식능력 교란 능력. 꼬맹이의 능력은 불명. 꼬맹이 머리를 가슴골에 비비고 있는 여자 불명. 옆트임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는 매혹이나 유혹 계열 능력.

전면적으로 싸우기엔 여러모로 부담스러웠다. 놈들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이대로 싸우거나 도망치면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최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정보도 얻으면서 틈을 내야 했다.

“귀족이 본능에 휘둘린다는 소린가? 저열하군. 아무거나 주워 먹으면 탈 난다는 것쯤은 알 텐데 말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도발했다. 이놈들이 귀족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었다. 귀족이라는 말을 언급하자, 왼쪽에 있던 두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휘파람을 불었다.

“휘익- 노블(Noblesse)을 안다면 개새끼들 쪽이란 소리지?”

“빙고.”

“헤에.”

“큭큭.”

꼬맹이와 여자, 윌슨이라는 사내까지 대놓고 입맛을 다시기 시작했다. 역시, 예상대로 이놈들은 귀족이었다.

“그놈들이 뭘 믿고 버티나 싶더니.”

왼쪽에 있던 사내 가운데 젊은 사람이 픽-웃었다.

“흐응. 하긴 정신계 면역이라니.”

옆트임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한 걸음 내딛으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아- 보기 좋았지, 자기들끼리 총질하는 꼴은.”

윌슨이 비릿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말했다.

동맹이 무너졌다.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거의 붕괴했다고 봐야 했다. 동맹이 견디지 못하고 먼저 소형 전술핵을 사용한 것 같았다. 아주 조금씩 조여 오는 포위망 뒤로 도망쳐봐야 바다밖에 없었다.

‘바다?’

앞을 보며 견제하던 내가 뒤로 돌아서는 순간 욱신 심장이 내리 눌렀다. 바로 발을 박차, 앞구르기로 데굴 굴렀다. 파각! 주먹만 한 구멍이 뚫리며 콘크리트가 터졌다.

“뭐야 저건?”

“피했어?”

“핸리의 저격을 피해?”

뒤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전방 낙법으로 구른 몸을 용수철처럼 튕겨 선착장을 향해 내달렸다.

지이이잉-

기분이 갑자기 우울해졌다. 이렇게 도망쳐서 뭐하나 싶은 생각이 엄습하며 팔다리가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으아아아앗!”

쩡-

뭔가가 깨지면서 다시 팔다리에 힘이 들어왔다. 욱신- 옆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과 동시에 다시 터져나가는 도로. 삽시간에 성큼 거리를 벌리자 그제야 허겁지겁 내 뒤를 따라오는 놈들이었다.

방금 느꼈던 것은 의욕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정신계 능력 가운데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었다. ‘아니야. 단순한 감정 조절이 아니야.’ 하나가 감정을 조절하면 그 감정을 증폭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감정을 증폭시키는 것 같았다.

정신계 면역인 내가 순간적이나마 우울증에 빠질 정도라면 변화된 감정을 증폭시키는 사람이 있다고 봐야 했다. 또 다른 능력은 정신계와 염력의 중간쯤으로 보이는 능력 같았다. ‘속박’이나 ‘둔화’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그럼 능력을 모르는 라틴계 여자, 꼬맹이와 꼬맹이 머리를 가슴골에 파묻은 여자, 왼쪽에 있던 두 남자 가운데 하나. 이 넷의 능력 가운데 셋이 나왔다. ‘감정(정서) 조작.’, ‘감정 증폭’ 그리고 ‘속박’ 혹은 ‘둔화’

특수탄을 사용한 원거리 저격은 계속 이동하면 피할 수 있었다. 내가 저격을 피한 것에 대해 놀라는 것을 보면, 탄도를 조종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명중률을 보정하는 능력자라고 짐작됐다.

내 능력이 정신계열 면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거기서!”

“정신계열은 전부 면역이야!”

“속박도 둔화도 안 통해.”

“핸리는 뭐하고 있는 거야 저걸 못 맞추고!”

속도를 조금 줄였다. 콰득! 바닥에 밟히는 백골들. 드레스에 하이힐을 신고서 해골을 축구공처럼 걷어차며 달려드는 놈들이었다.

팍- 선착장으로 달려가자. 놈들은 내가 요트를 타고 도망친다고 생각했는지 우르르 달려들었다. 건물들이 시야를 가로막았는지 저격이 멈췄다. 욱신거리는 위기 감응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몸을 돌렸다.

“타올라라!”

화르르르륵!

작열하는 백염이 피어오르자 미친 듯 달려들던 놈들이 비명을 질렀다.

“듀얼이다!”

“다중능력이라고!”

꼬마와 젊은 남자의 입에서 믿지 못하겠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윌슨이 라틴계 여자를 보고 외쳤다.

“알렉스!”

타오르는 백열을 가로막듯 투명한 막이 생겼다. 염력으로 만든 투명한 벽이었다. ‘네놈 여기까지다.’라는 표정으로 무기를 꺼내 들고 달려드는 놈들이었다.

“큭-”

내 미소에 맞춰 선착장 한쪽에서 거대한 인면 뱀장어의 머리통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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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 능력도, 염화 능력을 막던 염력도 아이스크림 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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