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선 (1)
인아의 본성이 빗치인 것처럼 내 본성은 인간이라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인아는 그런 내 믿음이 병적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병들었다는 건가?”
“네.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 안전을 추구하는 것은 건강한 생명체의 기본적인 욕구니까요.”
솔직하게 말해달라는 말에 가감 없이 말하는 인아였다. 어쩌면 그녀 말대로 변이되는 세상에서 변이를 거부하는 것만큼 병든 것은 없을지도 몰랐다. 반대로 본성을 찾고 지키려고 하는 내가 정상이라면 본성을 잃고 변이와 식육에 매달리는 세상이 병든 것이라.
인아와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유미가 다리를 까딱까딱 흔들며 말했다.
“정신계 능력을 어떻게 얻을 생각이신데요?”
“오산이나 평택으로 가봐야겠지. 거기에 있는 실험실에 정신지배 능력에 대한 단서가 있을 테니까.”
“변이 억제제를 먹고 있어서 섭식으로는 변이가 일어나지 않을 텐데요. 그렇다고 억제제를 끊었다 다시 먹으면 내성 문제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변이 한계를 넘으면 목숨이 위험해 지잖아요. 저는 반대에요.”
“저도 유미 말에 동의해요. 유현 씨가 무슨 생각으로 정신계 능력을 얻겠다고 하시는지 대강은 짐작하지만 무익한 시도라고 생각해요.”
“하아- 그래 허심탄회(虛心坦懷)하게 말해봐. 가감하지 말고 솔직하게. 생각하는 그대로.”
“솔직하게요?”
“그래 말해봐.”
인아는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표정을 다잡았다. 나를 걱정하던 표정에서 예의 그 냉막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현 씨가 원하는 삶이 자유롭고 안전한 삶이라면 사람들을 버리고 힘을 추구해야 했어요.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어요.”
“두 번의 기회?”
“네. 최소한 두 번의 기회였죠. 한 번은 세종시에서 괴식물과 만났을 때였고 두 번째는 이곳에 있던 기억 조작 능력자를 잡았을 때였어요. 둘 가운데 무엇이든 샘플을 확보했다면 정신계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가능성이 있었어요.”
“......”
“하지만 유현 씨는 두 기회를 모두 버렸어요. 정신계 능력을 원하지 않았다는 소리죠. 그럼에도 갑자기 정신계열 능력을 얻겠다고 하신다는 건.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러니까 기억 조작에 당한 사람들을 정상으로 돌릴 방법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다른 정신계 능력자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정신 방벽을 만들기 위해 정신계 능력을 얻으려고 했다고 생각해요.”
“......”
“하지만 그건 정상적이지 않은 것. 어쩌면 집착이 아닐까요? 인간에 대한 집착. 인간성에의 집착. 저 사람들에 대한 집착. 유현 씨가 안전하기 위해서 세력을 만들겠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집착이 더 크게 있다고 생각해요. 제일 중요한 게 뭐죠? 그건 저 사람들이 아니라 생존이에요.”
“......”
“제가 슬레이브를 도구로 생각하는 것처럼 유현 씨도 이 사람들을 도구로 생각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 보세요. 주객이 전도됐잖아요. 유현 씨는 정신계 면역이에요. 유미와 저도 정신 방벽이 있어요. 그러니 우리만 생각했다면 유현 씨는 굳이 정신계 능력을 얻겠다고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계 능력을 얻겠다고 하시는 건 제가 보기에 집착이라고 생각돼요.”
“집착이 아니라면 괜찮다는 건가? 아니면 정신 지배를 하기 위해서라면 괜찮다는 건가?”
“집착이라고 하더라도 지배자가 되기 위해 집착한다면 차라리 괜찮아요. 완전한 지배를 위해서 정신계 능력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면 저도 납득했을지 몰라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정신 능력을 얻으려는 게 아니잖아요. 정신 지배를 막기 위해 정신계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다니. 대체 사람들에게 뭘 원하시는 거죠? 유현 씨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힘으로 이루는 게 효과적이지 않나요?”
“......”
“제 말이 틀린가요? 정신계 능력은 무엇을 위해서 얻으시려는 거죠? 사람들을 지배할 것도 아니면서 유현 씨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실험실까지 간다고 하고 있는 거잖아요. 안전을 위해서라면 기억 조작에 걸린 사람들을 처리하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추스르는 게 맞지 않나요?”
“지금 상황에서는 김경태를 비롯한 수뇌부를 죽여도 마찬가지야. 누가 그 자리에 앉더라도 또 다른 정신계 능력자가 온다면 무너질 수밖에 없어. 그렇게 소모적인 상황이 닥치는 걸 막기 위해 정신계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게 문제라면 차라리 변이를 촉진 시킨 뒤, 능력이 생긴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슬레이브를 만들면 어떨까요? 1800명이 넘는 인원이니까 비율적으로 따지면 400~600명은 감염 장악할 수 있어요. 슬레이브로 만들면 정신계 능력에 일부 저항력을 갖게 되니까 괜찮잖아요.”
“안 돼. 갑자기 그렇게 많은 슬레이브가 생기면 유지하기 힘들어. 게다가 슬레이브가 되면 아무리 자율성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발전하기 힘들잖아. 자유로운 사람들이 있어야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고.”
노예는 시민이 될 수 없다. 노예는 학생도, 선생도, 발명가도 될 수 없다. 노예는 미래가 없다. 오직 현재와 명령, 생존만 남은 것이 노예였다. 사람들을 전부 노예로 만들자는 것은, 그것도 본래대로 돌아갈 방법이 없는 슬레이브로 만들자는 건 미래를 고정하자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시로를 슬레이브로 만들지 않은 이유도 시로가 가진 지식을 온전히 보전한 상황에서 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슬레이브로 만들자고?
“정신계 능력을 얻는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기억 조작 능력자의 시신이라도 온전히 남았다면 실험이라도 할 수 있었겠지만, 그 여자의 시체도 완전히 태워 버렸잖아요. 왜 태워버리셨죠? 애초에 정신계 능력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그 여자의 시체를 보존했어야 하지 않나요? 태워버렸으면서 정신계 능력을 얻겠다니 저는 반대에요.”
괴식물이 가지고 있던 능력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환영-환각 능력이었다. 그 능력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게 정신 지배나 장악으로 발전하기까지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 시로의 도움을 받는 것은 위험했다.
기억 조작 능력을 가진 여자도 마찬가지,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는 위험한 변수가 많이 있었다. 나와 인아, 유미가 얻기엔 변이 억제제를 먹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기억 조작 능력자를 직접 슬레이브로 만들거나, 그 여자의 시체를 이용해 변이를 촉진시킨 사람을 슬레이브로 만드는 것은 인아가 역으로 장악당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완전히 태웠다.
하지만 인아는 역설적으로 말했다. 내가 정신계 능력에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었다면 시체를 얼려뒀을 것이다. 맨홀 변종의 사체를 얼려뒀던 것처럼 기억 조작 능력자의 시체를 보존했을 것이었다는 것이다. 보존하지 않고 완전히 태웠다는 건 정신계 능력을 얻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랬으면서 왜 정신계 능력을 얻겠다고 하느냐고 묻는 인아였다. 가지 말라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인아였다.
“하아- 그래서 인아 네 생각은 내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네.”
“유미도 인아와 마찬가지고.”
“예. 저도 마찬가지예요.”
*
함박눈이 내리던 하늘엔 함박눈 대신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간에의 집착이나 인간성에의 집착은 미래에 대한 집착이었다. 이제까지 인류 역사가 증명해왔던 인간의 가능성. 인간성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것이 옳을까?
“네. 포기하시는 게 옳아요.”
“가장 발달했던 사회가 예전의 사회라면 그걸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유미와 인아는 쌍둥이라도 된 것처럼 단언했다.
정신계 능력을 싫어했던 이유도 명확했다. 난 인형들의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봉신계약처럼 쌍무계약을 바탕으로 한 왕이라면 모를까, 자율성 없는 노예를 지배하며 왕이라고 자처하고 싶지 않았다.
계급이나 계층이 분화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기에 그걸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 계층과 계급의 분화도 합의에 따라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올라갈 수 있는 사회, 지배계급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회, 기회가 박탈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를 만들고 싶었다. 모든 것이 무너졌기에 다시 처음부터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힘이 있기에,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넘어야 할 문제가 있었다. 변이의 문제와 지배의 문제였다. 변이의 문제는 억제제를 대량 생산하여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배의 문제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었다.
상호 계약을 통해 지배를 추구하고자 하는 나와 완벽한 노예화를 통해 지배하려는 다른 세력들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꼭 가셔야겠어요?”
“그래. 내가 그들과 똑같은 지배, 똑같은 미래를 생각한다면 의미 없다고 생각해. 저들과 다른 세상을 만들려면 어찌 됐든 정신계 능력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
내 고집스러운 목소리에 인아의 차가운 표정이 안쓰럽게 변했다.
“그게 당신의 뜻이라면 따를게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기억 조작에 당한 사람들은 죽이지 않았으면 해.”
“알겠어요.”
“억제제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큰 제약회사는 속초나 강릉 인근에나 있다고 하니까 그쪽을 알아봤으면 해. 제약이나 관련 전공한 사람들이 있으면 자료를 풀어도 괜찮아.”
“꼭 풀어야 하나요?”
“풀지 않아도 괜찮아. 어떡하든 억제제만 대량생산할 수 있으면 되니까.”
“네.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조직을 정비하고 억제제와 기타 약들을 생산하는 것 외에는 인아와 유미가 상의해서 일을 처리했으면 좋겠어.”
인아에게 하는 말을 듣고 유미가 도도독 달려들었다.
“저는 따라갈래요. 전 유현 씨가 없으면 힘을 제대로 못 쓰잖아요.”
대답대신 냉장고를 열었다. 붉은 액체가 담긴 팩이 냉동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피를 모아뒀어. 120팩이다.”
붉은 벽돌처럼 쌓인 혈액팩을 보여주자 유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에엣? 120 팩이요?”
“이틀에 하나씩 먹는다고 하더라도 240일 분량이고, 혹시라도 싸울 일이 있어 급히 소모한다고 하더라도 90일 정도 버티는 덴 문제 없을 거야.”
“버티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유미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미안 그런 뜻이 아니고.”
“알았어요. 늦어도 120일 안에는 돌아오신다는 소리죠?”
“응. 만약 120일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날 찾으러 와.”
“어떻게 찾는데요?”
“120이 지났는데 어떻게 찾으라고요?”
유미와 인아가 동시에 물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는 페니가 대강 위치 추적을 할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거리가 멀리 떨어지면 텔레파시는 연결되지 않더라도 내가 있는 방향 정도는 페니를 통해 알아차릴 수 있으니까. 죽지만 않는다면 찾을 수 있어.”
“으아아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안 되겠어. 같이 가요. 걱정돼서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어요.”
유미가 버둥거렸다.
‘그냥 싹 엎어버리고 따라가야 하나?’ 뭔가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인아였다. 둘을 진정시키고 떠날 준비를 했다. 인아와 유미라면 이곳을 잘 방어하고 조직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
*
부우우우웅-
낮은 엔진 소리와 함께 중형 요트가 물살을 갈랐다. 하얗게 거품이 일어나는 겨울 바다와 해안선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뤘다.
EMP에 고장 나지 않은 멀쩡한 요트가 하나 있어, 배로 움직였다. 식량을 들고 가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도보로 이동하는 것보다 배를 타고 이동하는 게 훨씬 좋았다.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날씨가 나빠지면 인근 항구에 정박해 파도를 피하면서 움직이기로 했다. 군산항까지 배를 타고 이동한 뒤, 군산에서 도보로 평택과 오산을 향해 걸으면 훨씬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배를 타고 간다면 왕복으로 길게 잡아도 일주일 정도면 충분했지만, 120일분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이유가 있었다. 포항이나 부산, 여수 같은 항구도시에 들려 상황을 살펴볼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소형 전술핵이 터진 지도 제법 오래 지났기 때문에 연방과 동맹의 전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부우우우웅-
요트는 거침없이 달렸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거의 2시간이 지나도록 움직이는 배를 보지 못했다. 항구에 정박한 배들이 간혹 보였지만, 제대로 관리된 배는 없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해안선에서 200~300m 정도는 떨어져서 움직였기 때문인지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배로 이동하는 것은 생각보다 빨랐다. 양양에서 포항까지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포항 인근은 도시 여기저기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방과 동맹의 전쟁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배를 대고 상륙하는 건 위험해 보였다.
“어이!”
“어이! 여기!”
멀리서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감각이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속도를 높여 지나갔다.
“야 이 새끼야!”
“쏴! 쏴버려!”
엽총 쏘는 소리가 들렸다. 포항을 지나쳐 계속 아래로 내려가니 1시간도 걸리지 않아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은 포항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고층 빌딩들은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무너져 있었고 정박해 있는 배들 가운데 반절은 불에 탄 흔적이 역력했다. 흔적을 보니,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