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36화 (236/261)

거점 (4)

시간이 흘러 정오가 돼서야 유미와 인아가 마취에서 풀려났다. 유미와 인아는 정신을 차린 뒤 안에 있던 옷을 대충 챙겨 입은 뒤 내가 용접해 붙여 놓은 문짝을 뜯어내고 밖으로 나왔다. 유미와 인아가 안에서 나오자, 김경태와 사람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유미와 인아가 마취돼 납치됐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달리 생각했다. 마취돼서 납치된 것이 아니라, 유미와 인아가 이곳에 먼저 들어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웅성거렸다.

내 말을 인정하면, 자신의 막내 여동생이 사실은 식인종이었다는 걸 인정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니 사람들은 어떤 증거를 들이밀더라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실과 기억이 충돌하면 사람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을 믿기 마련이었다. 비록 거짓된 기억이라고 하더라도, 그 행복했던 기억이 잘못됐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었다.

나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복했던 기억에 기대는 것 그게 인간의 본성이었다. 다만 상황이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왜 거기서 나오는 겁니까?”

유미와 인아는 마취된 상태로 끌려왔기 때문에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유미는 사실대로 말했다.

“기억나지 않아요. 자고 일어나 보니 여기였어요.”

“뭐라고요?”

유미의 표정이 변했다. 사실대로 말했는데 김경태를 비롯한 몇 명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자 기분 상한 얼굴이었다. 인아는 아무 말 없이 마취된 슬레이브를 추스르고 있었다. 시끄러운 주변 상황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처음부터 인아는 나에게만 관심을 보였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유미와도 이야기하고 어느 정도 마음을 터놨지만 맨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전부터 인아는 사람들 정확하게 인간들에게 별다른 희망이나 관심이 없었다.

인연이 닿기 전 인아는 자신이 장악한 변종과 함께 죽은 사람들을 먹었었지만, 죽은 사람을 먹은 건 사람을 죽일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사람을 죽이면서 생길 여러 가지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시체만 손댔을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인아는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마치 개가 짖는 것 마냥 무시하고 있었다.

대놓고 기분 나쁘다는 것을 보여준 유미의 표정도 좋지 않았지만, 인아의 깔끔한 무시에 사람들이 달아올랐다. 내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아까 말한 대로, 이 두 사람은 마취된 뒤 납치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수분을 다뤘던 여자와 사귀던 남자였는지 한 남자가 핏발을 세웠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비켜주십시오. 상황을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김경태 역시 막내 여동생이라고 기억하는 여자를 찾기 위해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김경애. 경애야.”

유미와 인아에게 숙소로 가라고 한 뒤, 가로막고 있는 현관에서 비켜섰다. 네다섯 사람이 한 몸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르르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한복판에는 아직도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불꽃이 채 꺼지지 않은 뚱뚱한 남자의 시체가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전신이 숯으로 변해 사지가 부서진 여자의 시체는 머리통만 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당신! 당신이 이런 거야? 엉?”

수분을 다뤘던 여자의 애인격인 사내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심하게 앉아있던 인아가 벌떡 일어나 사내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컥! 컥! 사내가 발버둥 쳤지만, 단순한 허우적거림에 불과했다.

김경태의 얼굴이 사늘하게 식었다.

“동생은. 제 여동생은 어디 있습니까?”

“김경태 무력부장의 지위를 해제하고 이 건물에 살고 있던 모든 사람들을 격리 수용하도록.”

“네? 하지만.”

“당장 격리하도록.”

“알겠습니다.”

건물을 포위하고 있던 사람들이 김경태와 수뇌부를 연행했다. 거점으로 돌아오곤 하룻밤을 편히 쉬지 못했다.

*

인아가 예의 그 서늘한 표정을 감추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처리해 버리는 게 깔끔하지 않을까요?”

“처리라니? 전부 죽이자는 건가?”

“네.”

가장 합리적인 방법이 아니냐는 표정을 짓는 인아였다. 인아에 비해 유미는 김경태를 비롯한 수뇌부들과 안면이 있었다. 인아의 처리하자는 말에 유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지만, 그에 대해 직접적인 반대는 하지 않는 유미였다. 유미는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죽인다? 당장 어제까지 2천 명에 가까운 사람들을 지휘하던 지휘부를 전부 죽인다고? 그 뒤에 생길 여파는?”

“그 뒤에 생길 여파라니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것 아니에요? 반항하는 자들은 변이를 촉진 시킨 뒤 슬레이브로 만들면 되잖아요. 세력이 필요하다고 하셨죠? 그건 이해했어요. 하지만 세력을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확실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뭐죠?”

“확실한 방법이라니?”

“기억 조작을 당한 수뇌부를 제거하거나 그게 아니라면 슬레이브로 만드는 것이요.”

“하? 죽이거나 슬레이브로 만들자?”

“현실적으로 봤을 때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그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타버리긴 했지만 변이를 일으킨 자들의 시체도 있으니 그걸 이용하면 슬레이브로 만들 수 있을 만큼 변이를 일으킬 수 있어요.”

인아의 감염 장악은 일정 수준 이상 변이를 일으킨 자들에게만 효과가 있었다. 그래서 콘도에서 아이를 잡아먹고 변이를 일으킨 자들만을 추려 슬레이브로 만들었다. 당시에 그 사람들을 슬레이브로 만들었던 이유는 아이를 산채로 뜯어 먹을 정도로 힘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김경태를 비롯한 수뇌부들은 서울에서 식인종 토벌을 함께했던 자들이었다. 이들은 힘에 취하지도 않았고 식인종도 아니었다. 오히려 피해자에 가까웠다. 그런 자들에게 다짜고짜 시체를 먹이고 강제로 변이를 일으켜 슬레이브로 만들자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을 강제로 슬레이브로 만들자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좀비가 됐고 변종이 됐고 빗치가 됐어요. 이런 세상에서 유죄나 무죄를 따지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나보고 연방이나 동맹처럼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말라는 건가?”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라면 정신 지배 능력을 얻으라고 조언했겠죠.”

“그게 그 말 아닌가? 수뇌부를 전부 슬레이브로 만들면 그게 정신 지배와 다를 게 뭐가 있어?”

인아가 작게 숨을 토해냈다. 차가운 얼굴 속에 숨겨진 진심을 알았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어째서 문제의 여지가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문제가 있는 방법을 사용한다니?”

“인간에의 집착. 인간성에의 집착을 바탕으로 세력을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제가 보기엔 그렇게 보였어요. 지금도 그래요. 쓸 수 있는 것은 써야 하지 않나요? 이 세상은 이미 거대한 실험장이에요. 진화의 실험장이고 생존의 실험장이죠. 도태되는 순간 멸종하는 실험장. 이미 인간이 의미 없다는 건 알고 있잖아요.”

“......”

인간의 의미 없는 세계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전쟁이 끝난 뒤엔 문명이 회복됐다. 죽고 죽이는 싸움 뒤엔 인간성 회복의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인간은 살아남고 발전했다. 적이기 때문에 죽인다. 지배하기 쉽게 하려고 무조건 슬레이브로 만들면 그 끝에 어떤 문명이 남겠는가? 그 뒤에는 어떤 미래가 남겠는가? 재능 있는 사람을 슬레이브로 만들어 재능을 거세하면 그 뒤에는 뭐가 있겠는가?

김경태와 수뇌부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조직을 이끄는 재능이 있었다. 재능이 있었기에 2천에 육박하는 사람들을 여기까지 끌고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슬레이브로 만들어 버리면 지금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손해였다. 인아의 슬레이브가 일반 슬레이브보다 자율적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범주였다.

“유현 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 선택에 따르겠어요.”

“......”

내 생각에 따르겠다는 말을 끝으로 인아는 입을 다물었다. 자기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내 결정에 따르겠다는 인아의 말이 가진 의미를 나는 이제껏 모르고 있었다. 내 생각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내 의견에 따르는 것이 아니었다.

레드 존을 통과해 갔을 때도, 동맹의 연구단지에서 시로를 납치했을 때도, 세종시에서 괴식물과 싸웠을 때도 인아는 내 생각을 따랐다. 내 생각이 합리적이거나 그녀가 납득해서가 아니라 내 생각이었기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내가 인간에의 집착, 인간성에의 집착으로 세력을 만들고자 한다는 인아의 말은 손가락에 박힌 가시처럼 날 불편하게 했다. 인아는 나를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따르겠다고 하고 있었다.

“하아- 그래. 고마워. 유미는?”

가만히 나와 인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오빠의 결정에 따르겠어요.”

“일단 죽이거나 강제 변이를 유도해 슬레이브로 만드는 건... 조금 더 생각해 보자.”

“알겠어요.”

“네.”

인간이나 인간성을 집착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불확실한 미래에 대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보다 강한 생물은 지구상에 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빙하기를 견디고 질병의 확산과 여러 재해 같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인간은 버텼다. 인간이 멸종하지 않고 이제껏 만물의 영장이라 불리며 살아남은 이유가 무엇인가?

이성을 가졌기 때문에, 이성을 가지고 사회를 만들었기 때문에. 나아가 미래를 개척하려는 능동성을 가졌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은 약하다고 하더라도 모이면 강해진다. 역사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이 모이면 강한 힘을 발휘했다.

슬레이브들과 인간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슬레이브들을 아까워하지 않고 쓸 수 있었다. 인간은 자율성을 가지고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슬레이브는 자율성이 없고 미래를 개척할 능동성이 없는 단순한 도구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신 장악이나 정신 지배도 아닌, 기억 조작만으로도 변해버린 사람들을 겪고 나니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인간과 슬레이브가 다를까? 과연 다른 점이 있을까? 자신들의 기억이 조작됐다는 것도 모르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가 잘못됐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슬레이브와 다를 게 뭐가 있을까?

내가 만들고자 하는 세상은 과연 가능할까? 회의감이 몰려왔다. 아무리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든다고 하더라도 기억이 조작되고 정보가 조작되는 세상에서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었다.

*

며칠 동안 김경태를 비롯해 격리 조치를 당한 자들과 상담을 시작했다. 기억 조작을 풀 방법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암담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리더가 갑자기 자기 여동생을 죽였다고 하면 그걸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랑하던 사람을 생으로 태워죽였다면 그걸 인정할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포기하는 순간 강제 변이를 유도해 슬레이브로 만들거나 죽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김경태와 수뇌부를 격리한 여파는 생각보다 컸다. 사람들은 내가 김경태와 수뇌부를 숙청한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으음. 사람들 사이에 뜬소문이 돌아요.”

유미의 앙증맞은 입술이 삐죽 삐져나와 있었다. 불만이 많은 표정이었다.

“신경 쓰지 마. 그러기 마련이니까.”

“그게 아니라요. 노란색 사람들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조직화 되는 분위기에요. 반대로 붉은색 사람들은 어수선하고요. 이대로 가면 조직이 둘로 갈라질지도 몰라요. 무력시위를 하는 건 어떨까요?”

“무력시위?”

“네. 그냥 확 건물 하나를 불태워 버리고 제가 철거를 해버리는 거여요. 그럼 딴 생각하지 못할 걸요. 음. 음. 그래요.”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의 격차를 보여줘 불만을 잠재우면 사람들은 힘을 얻을 방법을 추구하기 마련이었다. 지금 상황에서 힘을 얻는 방법은 식육을 통해 변이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억압받는 것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을 명분 삼아 식육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해 식인을 했다.’는 병신 같은 상황이 올지도 몰랐다. 그러니 무력 진압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것 아닌가요? 힘이 생겼다고 만능은 아니에요.”

약했을 때는 생존이 절대 명제였다. 내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 뺏기면 죽는다고 생각하고 싸웠다. 살아남기 위해 다른 것은 모두 제쳐놨다. 바이러스의 여파든 무엇이든 내 생존을 우선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힘을 얻고 난 뒤, 나는 점차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현실만 바라보던 내가 힘을 얻고 미래를 생각하면서 오히려 명확했던 행동원리를 잃어버렸다고 말하는 인아였다.

“그렇게 보였나?”

“네. 그렇게 보였어요.”

인아가 살짝 미소 지었다.

현실을 고려한다고 하지만 기실은 이상적인 미래를 생각했다는 소리였다. 내가 꿈꾸는 미래에 매몰되어 현실에서 무기력하게 변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이대로 가면 현실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정신계 능력을 얻어야겠어.”

마음에 들지 않은 능력이었지만,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한 자들을 원상태로 돌려놓기 위해서라도 능력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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