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34화 (234/261)

거점 (2)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무거운 느낌.

“팀...”

몽롱했다. 몽롱한 가운데 들리는 목소리.

“팀장님.”

팀장이라고? 누구? 나? 갑자기 무슨 소리지?

“콜록. 한팀장님.”

한팀장이라고?

무거웠던 눈꺼풀이 간신히 올라갔다. 어두웠던 시야가 서서히 밝아졌다.

“모니터? 사무실?”

갈라진 목소리가 낯설었다.

“네?”

컴퓨터 모니터에는 거래처에서 요구한 물품 목록이 떠올라있었다. 삑삑거리며 복사기가 돌아가는 소음과 약간은 탁한 공기에 섞인 방향제 냄새가 감각을 자극했다. 당혹스러운 풍경에 손등으로 눈을 비빈 뒤 눈을 깜박였지만 변하는 게 없었다.

멍한 정신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감색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여자의 높은 목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괜찮으세요? 한팀장님. 콜록콜록.”

“예? 네?”

누구였지? 분명히 아는 얼굴이라는 느낌은 들었지만, 생김새가 흐릿했다. 무엇보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많이 편찮으시면 월차 쓰시고 들어가서 쉬세요. 콜록. 에에엣취. 죄. 죄송해요.”

여자가 티슈로 입을 막고 기침을 했다. 여기저기 들리는 기침소리. 불길한 감각이 슬슬 올라왔다. 얼굴이라는 것은 느껴졌지만 어떤 얼굴이다. 어떤 인상이라고 구체적으로 떠오르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다. 꼭 달걀귀신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 내가 빤히 쳐다보는 것을 뭔가 다른 뜻으로 오해했는지 여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기침이. 죄송해요.”

“아니. 음 아니에요. 그건?”

여자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나에게 건네줬다. 기시감이 들었다. 데자뷰라고 하던가? 꼭 겪었던 일 같은 느낌. 살짝 내민 서류철을 잡으려는 순간, 요란한 기침 소리와 함께 서류철을 바닥에 떨어뜨리는 여자였다.

“콜록. 콜록. 큭.”

“됐으니까 그냥 둬요. 기침이 심한데 물이라도 마셔요.”

“네. 그럼.”

기침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 다른 것 때문인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모습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서류철이 위험 폐기물처럼 보였다. 검은 비닐 서류철 앞부분에는 미세한 방울 무늬가 번져있었다. 기침하면서 침이 튄 것 같았다. 엄지와 검지만 이용해 서류철의 끝은 살짝 집어 들었다.

이렇게 서류철을 집어 든 적이 있었다. 주륵- 송송히 맺혔던 식은 땀방울이 하나로 뭉쳐 흘러내렸다. 서류철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아 있었을 때와 달리 어쩐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짓눌린 상태로 뛰는 것 같았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 찡한 두통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렸다. 심호흡을 해봐도 가슴이 개운하지 않았다. 어딘가 공중에 뜬 것 같은 감각. 몸에서 나고 있는 열 때문인지 두통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감각이 깨끗하지 않았다.

감각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자, 이상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 시선에 닿은 것만 뚜렷했고 시야 밖에 있는 것들은 흐릿했다. 마치 성능이 좋지 않은 컴퓨터로 높은 사양이 필요한 게임을 했을 때 생기는 밀림현상 같았다.

욱신-심장을 찌르는 고통과 함께 두통도 점차 심해졌다. 생각을 떠올릴수록 심해지는 두통.

침이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잊었던 기억들이 꿈틀거리며 형체를 되찾기 시작했다. 깊은 무의식 아래로 수장시켰던 기억이 서서히 부상했다.

욱신-

텅 빈 사무실이 오버랩 되면서 등판이 축축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띵동]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띵동 문이 닫힙니다.]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달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지 못하게 팔을 집어넣었다. 엘리베이터의 안전 센서가 발동하며 닫히던 문이 다시 열렸다.

몸을 밀어 넣자 화들짝 놀라 닫힘 버튼을 누르던 손가락을 떼는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흐릿한 얼굴. 달걀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의 얼굴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눈코입이 있다고만 인식될 뿐 그 형체가 뚜렷하지 않았다.

“뭐야 이게.”

“네? 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의 입에서 소리가 새어나왔다. 뭔가 이상한 사람을 보는 것만 같은 눈빛. 흐릿한 기억이 다시 겹쳐지는 것 같았다.

“씨발.”

나지막한 욕설에 여자는 뒤로 물러섰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기만 하면 밖으로 뛰쳐나갈 것처럼 바들바들 떨며 감시카메라와 나를 번갈아 보는 여자였다. 흐릿한 얼굴이라니. 사무실에 있던 여자도 그렇고 지금 내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여자도 전부 얼굴이 이상했다.

쿡-

여자가 불안해하건 말건 엘리베이터 버튼을 노려봤다. 지하 1층 2층 3층까지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 1층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지하 3층을 눌렀다. 다시 떠오른 기억. 지하 3층에 늘 자동차를 주차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뇌를 헤집기 시작했다. 전신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식은땀이 턱을 타고 내려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뚝-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띵동 문이 열립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구석에 서 있던 여자가 엘리베이터 밖으로 뛰어 나갔다. 여자는 내가 뒤따라 내리는지 아닌지 힐끗 쳐다보고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흐릿한 안개에 쌓인 것처럼 모호한 얼굴. 눈도 코도 입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안도의 표정을 지어?

“빌어먹을.”

쿡-닫힘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는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당장에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꾹 참았다. ‘괜찮다. 괜찮아.’ 다독이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문이 열립니다.] 기계적인 여자 목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비릿한 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건 확실히 그거였다. 사태 초기에 있었던 내 기억이었다. 내 기억을 누군가 건드리고 있었다. 깨닫는 순간, 배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소용없다. 소용없어!”

내 목소리가 지하주차장을 흔들자, 지진이 일어나는 것처럼 지하주차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옥죄는 것을 뿌리치는 것처럼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전력 질주한 것처럼 거칠게 뛰는 심장. 혈관을 도는 피가 뜨겁게 끓어올랐다. 가위에 눌린 몸을 억지로 일으키는 것처럼 앞으로 나갔다.

무거운 몸. 납덩이처럼 가라앉은 몸을 움직였다. 사지를 칭칭 동여맨 거미줄을 끊어 버리듯 앞으로 나가는 순간, 눈이 떠졌다.

*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살덩이. 출렁거리는 두 개의 물방울 모양의 살덩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유미의 것도 인아의 것도 아니었다. 하체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감각이 신경을 콕콕 찌르고 있었다.

[타버렷!]

화르르륵!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이 눈앞에서 출렁이는 살덩이를 불태웠다.

“끼아아아앗!”

여자의 유방이 촛농처럼 녹아내리면서 흘러내린 기름이 내 가슴 위로 떨어졌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내리눌렸던 사지에 힘이 돌아왔다.

콰직!

불타올라 발버둥 치는 여자를 내 위에서 떼어냈다. 하반신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각.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실 같은 것이 내 몸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정신을 집중해 내 하체에 파고든 실들을 태웠다.

화르르륵!

타오르는 불꽃은 여자를 끝없이 녹이고 있었다. 재생력으로 화상을 회복시키기가 무섭게 살을 파먹는 불꽃. 근육이 오그라들고 머리카락과 눈썹이 먼지가 됐다. 여자의 몸에 붙은 불꽃을 더욱 강하게 키웠다.

“끄아아아악!”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는 여자였다. 힘을 더 줘 그대로 잿더미를 만들어 버리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묻는 말에 대답해. 대답하지 않으면.”

오른쪽 다리에 불꽃을 집중시켰다. 재생력을 초과한 불꽃이 여자의 오른쪽 다리를 숯으로 만들었다. 숯덩이가 된 오른쪽 다리가 여자의 몸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파삭 소리를 내며 박살났다. 전신이 타들어가는 고통에 버둥거리던 여자가 엎어졌다. 중심을 잃은 여자는 일어서지 못하고 데굴데굴 굴렀다. 바닥에 기름과 불똥이 튀기 시작했다.

염화 능력으로 불길을 제어해 불이 번지지 않게 꺼뜨렸다. 치이이익! 불꽃이 사그라지자 하얀 연기와 함께 고기 탄내가 피어올랐다. 부들부들 떠는 여자의 몸이 다시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빗치라고 하기엔 회복 속도가 너무 느렸다.

‘능력을 얻은 사람인가?’

변종과 빗치가 아님에도 상당히 강했던 올백이 떠올랐다. 화상을 입은 부분을 어느 정도 회복시켰지만, 완전히 숯덩이가 된 오른쪽 다리는 재생하지 못하고 있었다. 빗치나 변종이라면 도마뱀 꼬리가 다시 돋아나는 것처럼 생겼을 텐데, 그렇게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니 확실히 그쪽은 아니었다.

“흐으으으.”

“무슨 짓을 한 거지?”

눈썹과 머리카락이 완전히 타버려 비구니처럼 된 여자가 눈을 굴렸다. 화륵! 눈앞에 불꽃을 들이대자 파르르 눈꺼풀을 떨어대는 여자였다. 재생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불에 타는 고통은 그대로였다.

“다시 묻지 않겠다. 무슨 짓을 한 거지?”

화르르륵!

“기... 기억을...”

여자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건드렸나?”

불꽃으로 왼쪽 다리를 지지기 시작하자 여자가 미명을 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끼아아앗. 그랬어요. 맞아요.”

변이한 자들이 생존자들로 위장해 침투해 들어왔다고 했었다. 변이한 사람들을 죽이겠다고 했던 김경태가 죽이지 않고 가둬뒀다고 해서 혹시나 했더니, 김경태의 기억을 조작한 것이었다.

여자의 능력은 정신지배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능력이었다. 기억 속의 사건을 재구성해 예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처럼 대하게 만드는 능력이었다. 애인의 기억에 자신을 덮어씌우거나 동생의 기억에 자신을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기억을 조작했다.

그리고 본래 그 사람의 애인이나 동생을 죽이면,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이란 상당히 애매했기 때문에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그곳에서부터 위화감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그런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존에 있던 인물의 기억을 덮어쓰는 방식으로 사람들 속에 숨어들었지만 나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애인이라고 하면 김나경이었다. 레드 존에 있는 그녀의 얼굴에 자신을 대체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사생결단을 낼 상황이었다. 유미를 대체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유미를 대체하면 유미의 육체능력을 흉내 내야 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인아도 마찬가지였다. 인아의 자리를 대체하려면 감염 장악을 해야 했다. 그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대안으로 내 기억 속에 새로운 기억을 삽입하려고 했다. 사태 초기부터 같이 있던 동료의 포지션에 자신을 넣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있는 여자의 얼굴들이 전부 달걀귀신처럼 얼굴이 모호했던 것이다. 가장 괜찮은 여자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뒤집어씌울 준비를 하고 있던 것이었다.

“감시하고 있던 슬레이브들은? 같이 있던 여자들은 어떻게 했지? 죽였나?”

“아직. 아직. 괜찮아요.”

여자의 동료 가운데 마취 가스를 내뿜는 놈이 기절시켜놨다고 했다. 여자가 비명을 질렀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싶었는데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놈들은 모두 3명 여자 둘에 남자 하나였다.

마취 가스를 내뱉는 능력을 가진 사내와 수분 조작 능력인 여자가 남아있었다. 수분 조작을 능력인 여자와 마취 가스를 만드는 남자가 힘을 합해 마취 안개를 만들어 뿌리면 넓은 지역에 있는 사람들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필요한 사람은 기억 조작을 통해 동료로 만들고, 기억 조작과정에서 상대방의 기억을 확인할 수 있으니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파악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게 여러 생존자 그룹을 전전하면서 능력을 키우고 세력을 확장하던 찰라 김경태가 이끄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내 기억을 조작하려고 했건만 실패한 것이다.

정신 장악이나 정신 지배는 아니지만, 기억 조작도 충분히 무서운 능력이었다. 피부를 통해 신경에 물리적으로 접촉해 강제로 기억을 건드리는 방식인데, 이걸 빠져나온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너희는 어디서 왔지?”

“가. 강릉에서 왔어요.”

“강릉에서? 강릉이 더 큰 도시인데 말이야.”

양양읍의 인구는 고작 1만 1천 가량이었다. 강릉시는 21만이 넘었다. 20배 가까운 차이인데 이 위로 올라올 이유가 없었다.

변이를 일으킨 사람들은 식육에의 욕구, 더 강한 힘에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 번 빠지기 시작하면 그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렇게 변이가 시작된 사람들끼리 뭉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면서 세력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력을 가운데 변이를 일으킨 자들만 사냥하는 세력이 강릉에 생겼다고 한다. 그들을 피해 위로 올라오는 와중에 제법 큰 생존자 그룹이 있어 당분간 이곳에 뿌리를 내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들어오고 보니 생각보다 체계가 잘 잡혀있고, 언젠가 온다는 리더와 그 일행의 능력은 상당히 탐나는 능력이었다. 마취를 시켜놓고 살점이라도 떼먹을 수 있으면 좋고, 아니더라도 기억조작을 통해 동료가 된다면 앞으로 살아가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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