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33화 (233/261)

거점 (1)

걱정과는 달리, 망루에서 경비를 서던 사람들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리더다.”

“한겨울에 산맥을 넘어왔단 말인가?”

“능력자니까 그렇겠지.”

“뒤에 있는 사람들은? 못해도 서른다섯 명은 넘어 보이는데.”

“이러고 있을 건가? 빨리 사다리를 내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줄사다리가 내려왔다. 고작 3m정도의 어설픈 방벽이라 점프로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안쪽이 훤하게 보였다. 거의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곳곳에 흩어져 눈을 치우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 오느라 서두르긴 했지.”

“음. 저 뒤에 있는 분들은 리더께서 구해주신 사람들입니까?”

뭔가 조심스럽게 말하는 경비병이었다.

“그런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

“그게 아니라. 일단 김경태 무력부장에게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경비병은 말을 아꼈다.

“그러지.”

아직도 내가 줬던 직함인 무력부장을 사용하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심지가 굳은 사람인 것 같았다.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안면이 익었지만, 눈을 치우고 있는 사람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아마도 여기 도착해서 흡수한 사람들 같았다.

“김경태 씨가 이쪽에서 세력을 키운 것 같네요.”

유미가 입술을 삐죽였다. 우리도 처음부터 강원도로 넘어왔으면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유미의 머리에 손을 얹어 거칠게 헝클었다.

“그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있다가 된통 당했을걸.”

“치잇- 알아요. 안다고요.”

인아는 말없이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너무도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모습이 이상했다.

“왜? 뭔가 이상해?”

“조금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인아였다.

“뭐가 이상한데?”

목소리를 낮춰 묻자, 인아가 눈을 치우는 사람들과 경계를 서고 있던 사람들의 팔뚝에 매인 완장 비슷한 것을 지목했다.

눈을 치우고 있는 사람들의 팔에 매달린 완장은 노란색. 방벽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사람들의 팔뚝에 있는 완장은 붉은색이었다. 하는 일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보기엔 조금 어색했다.

“리더 오셨습니까? 언제 오시나 기다렸습니다.”

디지털 무늬 군복을 입은 김경태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

김경태는 반갑게 맞아줬다. 이곳에 온 사람들은 양양에 자리를 잡고 처음 이야기했던 대로 세력을 확장했다. 도착한 시기도 자리도 절묘했다. 양양읍은 인근의 속초시나 강릉시보다 인구 밀도가 낮았고 양양에서 생존한 생존자들은 인근 강릉시로 대부분 도망쳤다고 했다.

사람들이 남쪽으로 도망치자 좀비들도 도망치는 사람들을 따라 한 번 빠진 상황이었다고 했다. 숨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에 남아있는 좀비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매우 적었다고 했다.

“하하핫. 서울에 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합니다.”

허허허 웃으며 이야기를 하는 김경태였다. 넓은 공간에 드문드문 도망치지 못한 생존자들이 있는 곳에 200~300백씩 뭉쳐있는 좀비들을 지우는 건 쉬운 일이었다고 했다. 문제는 이곳에 있는 변종과 빗치였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에게 딸려 보낸 인아의 슬레이브들이 활약해 줘서 변종 둘과 빗치 하나를 처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읍내를 장악한 뒤 자재를 끌어모아 방벽을 세우고 방어를 시작했다.

좀비들이 없었기 때문에 방벽 대신 감시만 하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김경태는 계획대로 요새화를 진행했다. 이곳에 온 사람들 1천에 인근에서 구한 생존자 9백을 합해 순식간에 2천에 육박하는 세력이 된 것이다.

새로 합류한 사람들 가운데 속초에 친인척들이 있다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있어 상황을 살펴보려 정찰대를 보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뒤부터 주요 방어선은 북부 속초지역과 남부 강릉 지역이라고 했다.

“속초 쪽으로 정찰을 보낸 팀에는 슬레이브 여자를 둘이나 함께 보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입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김경태가 다시 담배를 뻑뻑 피웠다.

속초로 보낸 정찰대 12명이 실종됐음에도 새로 합류한 사람들은 자기들 가족을 찾는데 미온적이라며 김경태와 수뇌부를 압박했고, 김경태는 과감하게 그 사람들을 추방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문제를 일으켰다. 추방된 자들이 인근 지역을 떠돌아다니다 식육을 통해 변이를 추구하는 자들과 만나게 됐고, 이곳에 생존자들과 슬레이브가 있다는 정보가 그들에게 흘러들어 가게 된 것이다.

따로따로 다니는 변종이나, 세력이 없는 빗치는 눈에 띄는 존재였다. 겉으로 보이는 생김새 자체가 일반인들과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알아채기도 쉬웠다. 하지만 식인종화 된 자들은 달랐다. 생존자들로 위장해 들어온 그들은 내부에서 좀먹어 들어갔다.

실종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다시 분열되기 시작했다.

“비싼 교훈을 얻었죠.”

“그놈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후환을 남기지 말았어야 했는데.”

“전부 잡아 죽이고 싶었는데, 몇 놈을 놓쳤습니다. 산맥을 넘어 춘천으로 도망을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갈등이 많았다고 했다. 서울과는 달리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한 다리 건너면 전부 아는 사람들이었다. 구해준 생존자들은 처음에는 고마워했지만, 나중에는 아는 사람들끼리 뭉쳐 세력을 형성했다고 했다.

김경태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바로 완장을 통한 계급 구분이었다. 무장을 하고 경비를 서는 사람들은 서울에서부터 이곳까지 함께 온 사람들로 채웠다. 그들에게는 붉은색 완장을. 이곳에 살던 토박이들 중간에 새로 합류한 사람들에게는 노란색 완장을 주고 하는 일을 아예 둘을 나눠버린 것이다. 거주지역도 나눠버리고 하는 일도 나눠버렸다.

“제가 주변이 없어서 말입니다.”

김경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가에 잡힌 주름이 그간 마음고생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저쪽에서 세력을 형성하기에 대놓고 노란색으로 계급을 나눠버리자, 오히려 갈등이 줄어들었다고 했다.

강경하게 대응하고 나서야 불만이 줄었다며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는 김경태였다.

“단순한 식인종이 아니라 변이에 취한 자들입니다.”

김경태에게 이곳으로 오면서 콘도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했다. 능력이 발현된 자들을 잡아먹고 자신도 능력이 발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김경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렇군요. 식인종들과 같은 놈들이었군요.”

서울에서 나와 함께 식인종과 그 추종자들을 소탕했었던 김경태였기 때문에 내 이야기를 금방 알아들었다.

“놈들은 암처럼 여기저기 퍼질 겁니다. 문제군요. 구해주셨다는 사람들은 괜찮은 겁니까? 그런 더러운 생각을 접한 자들이라면 언제든 문제를 일으킬 위험이 있지 않을까요?”

김경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사람을 잡아먹고 변이를 촉진하는 것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위급상황에서 달리 행동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 노란색 쪽으로 넣어 시간을 두고 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음. 우선은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데려온 자들에 대한 처우는 그렇게 결정이 났다.

“그럼 울릉도는 어떻게 됐습니까?”

“울릉도 말입니까?”

여차할 상황이면 울릉도로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10월쯤에 울릉도로 사람들을 보냈습니다만, 그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추가로 사람들을 보내기엔 여러모로 여건이 좋지 않아서요.”

“여건이 좋지 않아요?”

양양을 장악했으니 충분히 울릉도까지 진출할 여력은 있었을 것이다. 이곳을 기반으로 울릉도를 차지한다면 최악의 상황에서도 비빌 곳이 생겼다. 김경태에게도 충분히 설명했던 일이었다. 김경태는 내 얼굴을 보곤 다시 담배를 빨았다.

“뱃길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뱃길이요?”

“예.”

뱃길이라니 조금 이상했다.

“배에는 GPS장비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배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없을 텐데요?”

“그렇지 않습니다. 언젠가부터 전자장치가 한순간에 고장이 나버려서요. GPS나 항법장치 없이 바다로 나가는 건 매우 위험했습니다.”

전자장비가 일순간에 고장 났다는 말에 EMP가 떠올랐다. 김경태가 진지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 그의 얼굴엔 후회가 섞여 있었다.

“단순한 경험에 의지해 바다로 나가는 건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일기예보가 간절할 줄이야.”

애초에 강원도 동해안 근방으로 온 것도 장기적인 식량 수급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 김경태는 겨울을 날 준비를 시작했다. 부족한 식량을 물고기를 잡아 해결하고자 했다.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다못해 잡어라도 꾸준히 잡으면 살을 발라 어묵으로 만들 수도 있었고, 내장이나 껍데기에서는 어유를 모을 수도 있었다. 여러모로 괜찮지 않을까 싶어 생존자들 가운데 배를 몰아본 경험이 있는 자들을 추려 낚시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계획대로 됐다. 생존자들 가운데 선장도 있었고 낚시꾼도 있었다. 이들을 주축으로 십여 척의 배가 출어를 나갔다. 이틀에 걸친 출어는 성공적이었다. 십여 척 모두 만선으로 돌아왔다. 그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바다는 풍족해져 있었다.

경험이 쌓인 사람들은 너도나도 배에 탔다. 처음 십여 척에서 시작한 어업은 나중에는 이십 여 척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일기예보도 없고 항법장치와 무전기도 먹통인 상황에서 어업을 한다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다가 성냈다. 단지 성을 냈을 뿐이었다. 잔잔했던 파도는 어느새 2m가 넘는 파도로 변했고 삽시간에 3~4m를 넘나드는 파도가 됐다. 그렇게 출어를 나갔던 이십 여 척의 배 가운데 돌아온 것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표류했는지 침몰했는지 알 수 없었다.

“울릉도로 출발했던 사람들도 그때 전부 실종됐기 때문에 울릉도는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내 안타까운 표정을 봤는지 김경태가 다른 소리를 했다.

“울릉도에 물건을 납품하던 사람이 있어 이것저것 확인해 봤는데 말입니다. 울릉도는 자급자족하기 힘든 섬이라고 하더군요.”

울릉도는 논농사를 짓기엔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았다. 그럼 밭작물과 어획을 통해 식량을 수급해야 한다는 소린데, 그것만으로 자급자족하기엔 위험했다.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독립적으로 생활하기엔 힘든 점이 많다는 설명이었다.

그간 있었던 일을 대충 정리하는데도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오후 3시쯤 시작한 이야기는 5시가 넘도록 계속됐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이야기하는 것을 마무리 지었다. 혹시나 김경태가 다른 마음을 먹지 않았을까 주의 깊게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저녁 식사를 귀환을 축하하는 축하연을 겸해서 하게 됐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우리의 귀환을 환영했다. 김경태가 나를 리더로 소개하자, 노란색 완장을 찬 사람들 이곳에 살던 토박이들과 나중에 합류한 사람들은 경계의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숙소로 갔다. 간만에 욕조에 몸을 담갔다. 제법 오랜 시간 목욕을 즐기고 나오자 인아와 유미는 언제 씻고 나왔는지 이것저것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인아는 슬레이브들을 통해 따로 자료를 모은 것 같았다. 유미가 이런저런 자료를 요약한 것을 나한테 내밀었다.

“김경태가 우릴 속인 건 없었어요. 다만 말하지 않은 게 있네요.”

“음. 숨기고 있는 게 있었다고?”

“숨겼다고 보기엔 조금 그렇고요. 여기로 침투했다던 식인종들 있잖아요. 처음에 일을 벌인 놈들은 전부 죽이고 도망친 게 맞는데. 그게 한 번이 아니었어요.”

“한 번이 아니야?”

“네. 나중에 들어온 생존자들 가운데 식육하는 자들이 숨어들어 들어왔었어요.”

“흠. 그런데?”

“노란색 지역과 붉은색 지역으로 지역 구분을 해뒀기 때문에 한 명이 실종되는 순간, 새로 들어온 자들을 격리해 식인종들을 바로 잡아냈더라고요.”

“문제가 있나?”

“네. 죽인 자들도 있지만, 생포한 자들도 있네요.”

“생포해? 죽이지 않고?”

“네.”

“다른 건?”

내 질문에 이번에는 인아가 서류를 내밀었다. 물고기를 낚은 자료였다. 몇 마리를 잡았는지 마릿수와 무게였다.

“이건 왜?”

“물고기 무게를 보세요.”

“무게?”

마릿수와 비교해 보면 상대적으로 무게가 무거웠다.

“큰 물고기가 잡혔나?”

“그렇다기보다는 물고기들도 변이를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아요.”

“뭐 좋아. 당장 의심할 정도는 아니네. 이런 이야기라면 내일 이야기하면서 나올지도 모르는 내용이니까. 수고했어.”

내일 이야기할 때 나오는지 기다려 보면 될 일이었다. 수고했다는 말에 유미가 침대에 위로 폴짝 뛰어들었다.

“후우우우우- 침대 정말 오랜만이네요. 따뜻한 방도. 이거 보름만인가요?”

“보름만인가?”

내가 멋쩍게 웃자 인아도 살며시 침대로 가서 누웠다.

“더 된 것 같은데요.”

그렇게 돌아온 첫날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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