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29화 (229/261)

합류 (3)

인아, 유미와 함께라면 도망치는 것도 가능했지만, 그래서야 수지가 맞지 않았다.

“이곳에서 도망치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저 어둠 속에 숨어있는 것들을 피해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나?”

“......”

막연했던 불안감이 어느덧 내리누르는 감각으로 변해있었다. 단순한 짐승이라면 위기감응이 발동될 리 없었다.

“누군가 시간을 끌어줄 때를 바라고 있나? 착각하지 마라. 어부지리는 없다. 누군가 희생한 틈을 타 도망칠 생각하지 마라. 등을 보이는 순간, 그저 먹이가 될 뿐이다.”

“......”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크게 외치자. 사람들도 지금 상황을 알아들었다. 이 상황에서 ‘자유를 찾을 기회’라며 뒤통수를 치거나 ‘어부지리를 노리겠다.’는 식으로 나오면 깔끔하게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강원도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에게 지금 이 사람들을 합류시킬 수 있을까? 이 사람들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날 사람들을 흡수할 수 있을까?

내 눈에 서린 단호함을 본 인아가 총기를 가지고 나왔다.

“총을 쏠 줄 아는 사람 나와.”

남자들이 후다닥 나왔다.

“기관총수? 없어? 일단 설치해. 쏠 줄은 알 거 아니야.”

k6기관총을 중앙에 설치했다.

“참호를 파고 방벽을 만들어!”

눈을 파내 참호를 만들고 쌓인 눈에 물을 뿌리자 얼어붙으면서 단단한 얼음벽이 만들어졌다.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사사사삭

눈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나무와 나무 사이를 스치고 그림자가 지나갔다.

“저기!”

“뒤에도 있어!”

“옆에도!”

“조용히 해! 총을 든 사람들은 앞에만 신경 써라! 다른 방향은 우리가 맡는다. 무슨 소리가 나든 신경 쓰지 말고 앞에만 신경 써!”

크르르르르

-■■■■■■■■■■

무슨 소리인지 뚜렷하게 구분하기 힘들었는데 여러 마리가 내는 소리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육식 동물 특유의 소리.

“포위됐어요.”

“슬레이브들은?”

“넷 가운데 셋은 포위되기 전에 돌아왔지만 하나는...”

슬레이브의 경계를 뚫고 역으로 포위할 줄이야. 일반적인 짐승으로 생각하기엔 너무 영악했다. 그래도 넷 가운데 셋이나 살아 돌아왔으니 다행이었다.

“어떻게 하실 거죠?”

“일단 포위망을 흔들어서 각개격파해야지.”

포위망을 흔드는데 내가 가면 좋았지만, 나는 이곳이 여차 할 경우 염화 능력을 써야 했다. 사람들은 내가 시킨 대로 여기저기 장작더미를 쌓았다. 동그란 이글루들 사이로 여기저기 쌓인 나무토막들이 탑처럼 쌓여있었다.

철컥! 격철을 잡아당기는 소리에 인아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어제 도망쳤던 자들이 슬레이브를 죽이고 도망쳤기 때문인지, 사람들을 믿지 못하는 인아였다.

“슬레이브로 스노모빌을 운전할 수 있나?”

“자동차나 오토바이는 힘들어도 스노모빌이라면 가능해요.”

“좋아. 스노모빌에 폭탄을 설치해뒀으니 놈들을 유인해 자폭하는 걸로 한다.”

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아의 슬레이브가 수류탄을 허리춤에 매달곤 스노모빌에 탔다.

쿠와아아앙!

전조등을 킨 스노모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더니 스노모빌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포위망이 풀린 것을 보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지금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닌가?”

“맞아요.”

“무. 무서워.”

“왜 가만히 있지?”

총을 든 사람들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쯧- 놈들이 무엇이든 어제부터 오늘까지 추격한 놈들이다. 놈들이 미끼를 물었다고 우릴 놔줄 것 같나? 여기서 결판을 내지 않으면 소용없다.”

“큼. 큼. 그렇다면 이 앞에 읍내에 들어가서 방어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한 남자가 손을 들고 말했다.

“이제까지 사람들이 있을 법한 곳을 피해 움직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시내에 변종이나 빗치가 있으면 앞뒤로 공격받을 텐데 그러고 싶나?”

“......”

내분을 극복하려면 내분을 각오해야 했다.

힘으로 억누르면 계속해서 더 강한 힘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무너진 세상에서 힘을 사용해 통제한다는 것은 또 다른 힘의 갈망을 낳을 뿐이었다.

변이만 일으킬 수 있다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강해질 가능성이 널려 있는 세상. 사람들은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했다. 그것이 같은 동료를 잡아먹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강해질 수 있다면 친구까지 죽이는 게 일상적인 세상에서 사회는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이 사람들은 아이를 잡아먹고서라도 능력을 얻길 원했던 사람들이었다. 근본적인 생각을 바꿔야 했다. ‘개인의 강함’이 아닌, ‘우리의 강함’을 경험하게 할 수 있다면. 혼자는 힘들지만 뭉치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준다면 조금은 달라질지도 몰랐다.

“그럼 염화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실 생각인가요? k2 소총 몇 자루와 기관총 하나로 막을 수 있는 놈들은 아니잖아요.”

“내 능력을 사용하기는 할 거야. 하지만 우리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싸우지는 말아야 해. 중요한 것은 저들이 뭉쳐서 싸운 경험이니까.”

인아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서 앞만 막으라고 하신 거군요. 한 방향이라도 막았다는 자신감과 소속감을 심어주기 위해.”

사실 노리는 게 더 있었지만, 전부 설명하기엔 때가 좋지 않았다. 멀리서 스노모빌이 움직이는 소리가 멎었다. 눈 위에서라면 시속 100km 내외까지 낼 수 있는 스노모빌이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따라잡혔다는 소리였다. 예상했던 범위였다.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저 멀리 어두운 벌판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크워어어어어어!

-■■■■■■■■■

폭발한 스노모빌 주변이 환해졌다. 불이 붙은 검은 그림자들이 고통과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몸부림쳤다. c4와 기름통을 넉넉하게 넣었기 때문에 사방이 불바다였다.

“저게 뭐야?”

“괴. 괴물...”

“뭐 하고 있어 쏴! 기관총! 쏘라고!”

투두두두둑!

중기관총이 불이 붙은 놈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스노모빌이 폭발해 정신을 차리지 못한 놈들이 중기관총에 두들겨 맞고서야 이쪽을 향해 내달렸다. 12.7mm짜리 기관총탄에 맞고도 내달리는 놈들을 보곤 사람들의 눈에서 원망의 빛이 아른거렸다.

“소총은 뭐해 쏴.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쏘라고!”

200~300m 떨어진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놈들의 수는 모두 여섯. 전신에 불이 붙어 발버둥 치고 있는 두 놈을 제외하면 이곳으로 달려드는 놈은 넷이었다. 놈들의 모습이 내 눈에는 똑똑히 보였다.

크르르르르르!

크워어어어어!

앞다리가 셋인 개도 있었고 머리가 둘인 것도 있었다. 이미 개라는 카테고리를 벗어난 모습. 털이 없었다. 파충류의 비늘처럼 번들거리는 살갗은 화염에 그슬려 있었다.

투두두두둑!

타다당! 탕탕!

요란한 총소리와 짐승의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교차했다.

“뭐. 뭐야?”

“어디로 갔어?”

“안 보여!”

“어느 쪽이야!”

놈들의 모습이 눈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없어졌다. 과녁을 잃은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정신 차려! 탄창 갈아!”

“섬광탄 터진다. 모두 눈 감아!”

-□□□□□□□□□□!

섬광탄이 터지자 카멜레온처럼 위장하고 달려들던 괴물들이 고개를 흔들며 발버둥 쳤다.

“타올라라!”

사람들이 쌓아놓은 나뭇더미에 불을 붙였다. 탑처럼 쌓은 장작더미에 여러 곳에 한꺼번에 불이 붙자 주변이 대낮처럼 환해졌다.

“쏴!”

투두두둑!

쿠워어어어어어어!

섬광탄에 시력을 잃고 중기관총에 멍청이처럼 두들겨 맞던 괴물들은 하얀 눈밭에 피만 뿌리고 도망쳤다. 사람들은 괴물이 꼬리를 말고 도망치자 서로 얼싸 안고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

총을 들고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은 소수였지만, 그 자리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 사이를 가깝게 만들었다. 놈들의 공격을 막았으니 이긴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이쪽은 슬레이브 둘을 잃은 데 반해, 저쪽은 고작 한 마리가 죽었다. 2:1의 교환비라면 이쪽이 손해였다.

유미가 막대기로 괴물의 시체 여기저기를 쿡쿡 찔렀다. 인아가 참치 통조림을 괴물의 주둥이에 밀어 넣었다. 점액질의 타액이 참치 통조림에 닿자 염산이라도 뿌린 것처럼 하얗게 거품을 내며 녹아드는 통조림이었다.

치이이익

“이놈들도 소화액이 있어요.”

철제 깡통이 순식간에 부식됐고 그 안에 들어있던 참치가 곤죽처럼 녹아내렸다. 이런 놈에게 물린다면 재생능력이고 뭐고 살점이 뭉텅이로 떨어져 나갈 것이 분명했다.

“근데 이게 뭐죠? 개도 아니고. 아닌데, 개는 개인가?”

유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개라면 털이 있어야 할 텐데. 꼭 사람 피부 같기도 하고 뱀 비늘 같기도 하고 이상해요 이거.”

막대기로 여기저기 찔러보던 유미가 신기하다는 것처럼 말했다. 인아는 녹아내린 참치 캔을 주둥이에서 빼낸 뒤, 놈을 잡은 치명상이 무엇인지 살폈다. 몸을 뚫고 들어간 총알 자국은 많지 않았다. 3m에 육박하는 덩치가 총알 때문에 죽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여기저기 칼로 쑤셔보고 찢어본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이 좋았네요. 이놈들도 약점은 눈인 것 같아요.”

변종, 빗치, 좀비, 슬레이브의 공통적인 약점은 눈이었다. 일반 좀비들도 총알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일반 좀비를 총으로 잡으려면 머리를 터뜨릴 정도로 위력이 강한 대구경 총을 사용하거나 아니면 계속 총알을 때려 박아 충격을 누적시켜야 했다.

즉각 피해를 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충격량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다. 총알에 두들겨 맞다 보면 충격을 흡수하기 위해 에너지를 소모하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충격을 흡수하고 파괴된 근육조직을 재생할 에너지가 떨어지는 순간부터는 보통 생명체처럼 총알이 먹혔다. 따라서 변종이나 빗치를 잡으려면 집중사격을 해서 재생력을 깎아먹어야 했다.

아무리 강한 변종이나 빗치라고 하더라도 단 한 곳, 안구는 강하지 않았다. 따라서 눈알을 총으로 쏘는 게 제일 효과가 좋았다. 아무리 강한 변종이나 빗치라도 눈을 공격해 뇌에 직접적인 충격을 주면 재생력이 약해졌다. 방어력의 바탕이 되는 재생력만 약화할 수 있다면 소총으로도 잡을 수 있었다.

근데 레드 존에서 처음 만났던 괴물의 소화액도 그렇고 지금 이 변종 개의 타액도 그렇고 이런 동물들이 많다면 위험했다.

“단순한 좀비화는 아닌 것 같고. 변이인가?”

“단순한 좀비화였다면 서울에도 이런 게 있었을 거야. 이렇게 외곽지역에 있다는 건 들개들이 사체를 먹고 변이를 일으켰다고 보는 게 제일 가능성 있어.”

인아의 말에 유미가 화들짝 놀랐다.

“이게 그냥 단순한 개라고? 3m가까이 되는데?”

“크기랑 상관없어. 여기 주둥이를 봐. 개처럼 앞으로 튀어나왔잖아. 곰은 아니고, 이렇게 생긴 건 늑대나 개인데 늑대는 멸종됐으니까 개라고 봐야지.”

유미가 인아의 말에 답답하다는 것처럼 자기 가슴을 팡팡 쳤다.

“누가 그걸 몰라. 내 말은 3m가 됐다고. 들개라고 하면 똥개들이 야생화 된 건데. 그런 개들이 몇 배나 커졌다는 소리잖아. 바퀴벌레... 그러니까 곤충만 커지는 게 아니라. 그래 동물도 커진다는 소리잖아.”

“이런 들개 같은 동물이 커졌다는 건.”

인아도 유미가 뭘 말하려는 건지 알아챘다.

*

변종 들개들의 공격은 없었다. 하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공포영화에서 주인공이 깜깜한 지하실을 홀로 걷는 것 같은 미약한 불안감이 신경을 날카롭게 했다.

“그나저나 들개 주제에 똑똑하네요.”

유미가 고개를 까닥까닥하며 말했다.

“그렇잖아요. 경계하는 슬레이브는 죽이지 않고 몰래 본대를 공격했잖아요. 정찰하는 슬레이브를 죽이면 우리가 알아챌지 모른다고 ‘생각’한 거 아니에요?”

“......”

유미는 지나가는 것처럼 말했지만, 단순히 지나갈 일은 아니었다.

“확실히 그랬을 가능성도 있겠어. 잘했어.”

“헤헤. 그렇죠?”

유미의 머리를 쓰다듬자 기다란 포니테일이 꼬리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늑대는 복수심이 강한 동물이었다. 동료가 당하면 복수를 하는 게 늑대였다. 또 사냥감을 집요하게 노리기로 유명한 동물도 늑대였다. 한 동물생태 연구가의 기록에 따르면 한 늑대 무리가 2주에 걸친 끈질긴 추격 끝에 기어코 사냥감을 사냥했다는 내용이 있을 만큼 집요한 사냥꾼이 늑대였다.

들개를 늑대와 비교하는 건 우습지만, 변이를 일으켜 괴물처럼 변한 들개들이 어떤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옅은 불안감이 계속되고 있는 게 문제였다.

“그럼 놈들이 우릴 추격하고 있다는 건가요?”

유미가 뒤를 돌아봤다.

“확실하진 않지만, 가능성 있어.”

변종 들개들이 우리 뒤를 밟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인아가 노트를 꺼내 들었다. 식량과 무기 현황을 정리한 노트였다.

“함정을 파실 건가요?”

“무기 현황은 어떻지?”

“여분이 많지 않아요. 기관총탄은 500발 가량 남았고, k2는 탄창으로 11개 남았어요. C4는 1kg정도 남았지만, 수류탄은 3발 밖에 남지 않았어요.”

“섬광탄과 연막탄은?”

“섬광탄은 한 발, 연막탄은 두 발 남았어요.”

놈들의 숫자를 팍 줄였어야 했다. 아쉬웠다. 스노모빌을 자폭용으로 쓰면서 기름도 상당량 날린 상황. 놈들을 잡을 정도로 대규모 함정을 파기엔 폭발물이 부족했다.

“식량은?”

“내일까지는 먹을 수 있지만, 내일 중으로 춘천에 도착하긴 힘들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지. 인근에 물자를 보충할 만한 동네가 있나?”

“가평읍이 제일 가까워요.”

인아가 지도를 보며 대답했다.

선택지는 둘이었다. 하나는 최대한 아껴 먹으며 춘천까지 내달리거나 아니면 읍내로 들어가 보급을 하고 함정을 파는 것이었다. 변종 들개들이 추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냥 춘천으로 가는 것은 위험했다.

읍내도 변종과 빗치, 생존자들을 걱정해야 하는 판국인데, 읍내보다 큰 도시에 들어가면서 변종 들개라는 꼬리를 달고 가는 건 무리였다. 읍내에서 놈들과 끝장을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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