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류 (2)
날이 환해지기 전 어스름을 틈타, 유미가 정찰했던 지역을 통과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습격에 대비해 바짝 긴장했지만, 습격은 없었다.
습격대신 우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버려진 자동차들이었다. 1m가량 눈이 쌓인 자동차들이 도로를 가로막고 있어, 그 구간을 통과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정찰나간 슬레이브들은?”
“괜찮아요. 별다른 위험은 없는 것 같아요.”
깊게 심호흡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맑고 청명한 겨울 하늘이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반짝임에도 꼭 어두컴컴한 지하실을 걷는 것 같았다. 내가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인아가 슬레이브들을 동원해 주변을 다시 정찰했다.
스노모빌을 끌고 가던 유미가 페니에게 끈을 넘기곤 스스슥 달려왔다. 스키는 처음 타본다고 했는데 이틀 만에 제법 익숙해진 유미였다.
“스노모빌은요? 계속 저렇게 끌고 가야 해요? 저렇게 끌고 갈 거면 버리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스노모빌은 가져가야 해.”
“알겠어요.”
유미가 포니테일을 흔들면서 주변을 살폈다.
“다들 지쳐 보여요.”
그러고 보니 아까 잠깐 쉬고는 계속 이동하고 있었다.
“20분간 휴식.”
잠시 쉰다는 말에 사람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얗게 입김을 뿜어내며 숨을 고른 사람들이 통조림을 까서 허겁지겁 먹어댔다.
인아가 남은 물자를 계산했다. 작은 노트에 적혀있는 물자를 확인한 인아가 사람들이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식량 소모가 많아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움직이니 그만큼 칼로리 소모가 컸다. 급하게 움직이는 만큼 식량 소모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많이 부족해?”
“이 정도 속도로 식량을 소모하면 태백산맥을 넘어가기 힘들어요.”
“춘천은 관광도시였으니까 아직 먹을 만한 게 남았을 거야. 거기서 보급하면 되니까 아끼지 말고 먹여.”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식량을 아끼는 것보다 불안감을 떨칠 정도로 빨리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랬군요. 춘천까지 가는 건 충분하죠. 알겠어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니까 다른 무엇보다 이동 속도에 초점을 뒀으면 해.”
“흐음...”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불안한 감각을 떨치기 위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한꺼번에 하다 보니 복잡했다. 인아가 조심스럽게 내 손을 붙잡았다.
“저도 있고 유미도 있잖아요. 너무 다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그랬지. 이제 가자.”
내가 출발하자고 말하자 유미가 화들짝 놀랐다.
“예엣? 벌써요? 방금 급하게 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어요? 무슨 일 있나요?”
“......”
이게 위기감응처럼 뚜렷한 감각이 아니었기 때문에 뭐라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불길하니까 움직이자고 하기도 그랬다. 뻔히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으면서 하룻밤도 지나지 않아 말을 바꾼 것 같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유미가 내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하는 표정이었다. 여기저기 뜯어본 유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충분히 쉬었다가 가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렇다고 여유 있게 쉬엄쉬엄 가기엔 뭔가 불길했다.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느낌. 위기감응이 생긴 뒤로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내 고민을 모르는 유미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요? 20분 휴식이라고 하시더니 이제 10분밖에 지나지 않았어요. 아까는 30분 쉬자고 하고는 15분밖에 쉬지 않았는데. 지금은 20분 쉰다고 하고 이렇게 빨리 움직이면 금방 한계가 올 걸요.”
유미와 인아가 눈빛으로 의견을 교환하더니, 인아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슬레이브들이 주변 정찰을 했지만 아무 일 없었어요. 이곳 주변에는 위험요소가 없으니 조금 더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만 우리도 지금처럼 쉬지 않고 움직이면 칼로리 소모가 만만치 않잖아요. 유현 씨도 좀 드셔야죠?”
“하아- 아니다.”
내 과거까지 거들먹거리며 불안하다는 걸 설명하기엔 주변에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허겁지겁 먹고 있던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조금 더 멀리까지 정찰을 보내.”
“알겠어요. 일단 이것부터 좀 드세요.”
인아와 유미가 즉석식품을 꺼내 들었다. 언제 품에 넣고 있었는지 그녀들의 체온으로 데워진 캔이 따졌다.
*
20분의 휴식시간이 지나고 바로 움직였다. 불안감을 지우려는 것처럼 다그쳤지만, 습격도 없었고 추격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시지 않는 불길한 느낌.
“혹시 약에 부작용이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억제제에 부작용이 있다고?”
인아가 약을 먹는 날 보고 혹시나 싶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능성이 있었다. 시로가 나중에 건네준 약은 버려버렸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먹고 있는 약은 맨 처음 만들었던 억제제였다. 그간 석 달이 넘도록 먹었지만 부작용이 없었다고 앞으로도 부작용이 없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너희는 어때? 뭔가 이상하다든지 그런 건 없고?”
“저는 괜찮아요.”
“저도요.”
인아와 유미는 다른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만 문제라는 소린데. 억제제의 효과는 무작위적인 변이를 억제하는 효과. 장기 복용할 시 변이로 인한 세포, 장기 손상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었다. 인육 욕구도 제어할 수 있게 됐고, 일반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
“혹시 모르니까 약을 끊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유미가 초초해 하는 날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 혹시라도 약에 내성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려고.”
인아가 내성이 생길지도 모른다며 유미의 의견에 반대했다.
“불안. 초조 말고 다른 증상은 없고요?”
“이게 부작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어쩐지 신경이 조금 예민해진 것 같아.”
‘신경쇠약인가? 음. 흔한 부작용이긴 한데.’ 인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면 불안. 초조. 신경과민 같은 부작용은 흔했다.
“신경이 예민해 진 건, 언제부터 그랬는데요?”
“시로를 잡았을 즈음부터.”
“그럼 바로 이야기했었어야죠.”
“그때는 억제제를 먹기 전이기도 했고, 억제제를 먹고 난 뒤에는 시로가 딴 짓을 하지 않나 감시하느라 예민했었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예민했었다.
“그놈이 약에 뭔 짓을 한 거 아니에요? 일단 그거 저랑 바꿔 먹어요.”
유미가 인상을 팍 쓰곤 내 약병을 뺏어가고 자기 약병을 건네줬다. 인아는 유미의 행동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4시가 다 됐는데 계속 가실 건가요?”
“벌써 4시라고?”
“네.”
정신없이 다그치며 걷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다.
“후- 어디까지 왔지?”
“가평 인근이에요. 오늘처럼 강행군하려면 지금부터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인아의 말에 유미도 동의했다.
“오늘 새벽부터 강행군해서 사람들도 한계에요.”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 가기로 하자.”
어제처럼 오후 4시부터 이글루를 만들고 야영준비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첫날보다 익숙하게 이글루를 만들었다. 일찍 이글루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직 환했지만, 오늘은 일찍 쉬기로 했다. 새벽부터 강행군했기 때문인지 순식간에 잠드는 사람들이었다.
*
빨갛게 달아오른 숯불과 양초의 불빛 때문인지 얼음과 눈으로 만들어진 이글루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주황색 불빛과 그림자가 흔들리며 나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유현 씨가 먹는 약을 먹어보니 어땠어? 부작용은? 뭔가 이상했어?”
“아니. 별로 이상하지 않았어. 괜찮던데?”
유미와 인아는 약과 부작용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체질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시로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니라, 내 체질 때문에 나만 겪는 증상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부작용이나 체질 문제면 좋겠는데.’
불안. 초조. 신경과민이 약의 부작용이라면 상관없지만, 그게 아닐 경우가 문제였다. 불안. 초조 현상은 옛날에 겪었던 현상이었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하루 종일 걸으면서 찬찬히 살펴보니 확실히 비슷한 감각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에서 빠졌을 때 느꼈던 기분과 유사했다.
‘핵 때문일까?’
소형 전술핵을 이용해 EMP를 썼으니 전략핵을 써서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리려고 할지 몰랐다. 만약 전술핵이 아니라 전략핵이 터질 징조를 감지한 것이라면 암울했다. 전략핵이 터지면 핵겨울이 온다고 봐야했다.
핵폭탄이 터지면 강력한 폭발로 인해 발생한 미세먼지가 성층권까지 올라간다. 그렇게 올라간 미세먼지는 성층권에 머물게 된다. 성층권에 올라간 미세먼지가 햇빛을 차단하기 시작하면 핵겨울의 시작이었다. 미세먼지로 인해 햇빛이 차단되면 평균기온이 하강할 뿐만 아니라 식물에는 최악인 환경이 된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방사능도 문제였다. 방사능으로 인해 변이가 가속될 테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이 불안감의 원인이 핵전쟁이 일어날 전조 때문이라면 끔찍할 따름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가진 힘은 고작 눈앞의 상황을 간신히 모면할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조직을 만들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핵이 아니라고 해도 문제였다. 핵이 아니라면 새벽에 들었던 그 괴물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시체 타는 냄새를 맡고 소리를 지른 놈이라면 초식동물은 아닐 것이다. 펀치력으로는 유미가 강했지만, 종합적인 전투력을 생각해보면 내가 제일 강했다.
무리 가운데 제일 강한 내가 육식동물 때문에 불안감을 느낀다는 소리라면 심각했다. 놈이 우리를 추적하고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핵도 아니고, 육식동물 때문도 아니라면 천재지변과 약의 부작용이 남았다. 지진이나 화산폭발 같은 천재지변이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약의 부작용도 마찬가지였다. 시로가 없으니 부작용을 치료하는 약을 만들기란 요원했다. 내 약을 먹은 유미는 멀쩡한데, 나만 불안해하는 것도 문제였다.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졌다.
“잠깐.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유미가 인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인아는 ‘무슨 소리?’라고 되물었지만, 유미는 심각한 표정으로 얼음벽 밖을 노려봤다.
“지금 저 소리!”
유미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 소리에 나도 상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무슨 소린데?”
귀를 쫑긋 세우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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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공기를 꿰뚫고 다시 나지막한 짐승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요.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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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로를 마주 본 유미와 인아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이글루 밖으로 나갔다.
불침번을 서고 있던 사람들은 한군데 뭉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분명히 기괴한 울음소리였다.
“슬레이브는?”
슬레이브에게 텔레파시를 보내 상황을 확인한 인아가 재빨리 대답했다.
“육안으로는 확인되지 않고 있어요.”
“쯧- 먹구름 때문인가?”
나와 인아, 유미라면 어둠 속에서도 제법 멀리까지 볼 수 있었지만, 슬레이브는 아니었다. 이렇게 어두우면 가시거리가 짧았다.
“전부 깨워!”
“어떻게 하시게요?”
멀리서 들렸던 소리가 갑자기 거리를 확 줄였다.
쿠워어어어어!
“이런 미친!”
몇 분 사이에 슬레이브를 죽이고 왔다고? 아니, 슬레이브를 죽였으면 인아가 반응했을 것이다. 반응할 사이도 없이 죽인다고 하더라도 죽었다는 것 자체는 숨길 수 없었다. 그렇다는 소리는 슬레이브의 눈을 피해 근처까지 왔다는 소리였다.
“슬레이브는 아무 이상 없어요.”
유미는 사람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나무를 잘라! 야영지 외곽에 나무를 쌓고 기름을 뿌려! 빨리!”
사람들이 와들와들 떨면서 나무를 자르기 시작했다. 스펙을 중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벌목은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나무를 자르는데 바로 앞에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사라졌다.
“흐이이익!”
“흐꺅!”
“뭐야?”
“몰라. 뭔가가 지나갔어!”
고무줄처럼 늘어났다 줄어든 그림자. 그걸 본 유미와 인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저 거대한 그림자가 고무줄처럼 늘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
“보셨어요?”
“그게 소릴 낸 거죠?”
쿠워어어어어어!
더욱 가까워진 소리. 음파 공격이라도 당한 것처럼 주저앉아 오줌을 지리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겼다.
“유미야. 스노모빌에 시동 걸어!”
“예!”
유미가 스노모빌에 시동을 거는 동안 작은 가방에 C4와 수류탄, 휘발유병을 쓸어 넣었다.
부르르르르릉!
괴물의 울부짖음에 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스노모빌의 엔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내 명령대로 여기저기 장작을 쌓고 기름을 뿌렸다.
“신호를 보내면 동시에 불을 붙인다. 동시에 불을 붙여야 해. 명령하기 전까지는 불을 붙이지 마.”
섬광탄을 주머니에 넣으며 유미가 시동을 걸어놓은 스노모빌로 갔다. 폭발물을 담은 가방을 스노모빌에 묶고 지퍼를 열었다.
크르르르르르!
스노모빌의 엔진소리에 자극을 받았는지 놈이 스노모빌이 있는 근처에서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냈다. 고양잇과 동물은 아니었다. 고양잇과 동물이라면 소리를 내지 않고 살금살금 다가와 기습했을 것이다.
확연하게 가까워진 짐승 소리에 사람들이 공포에 떨었다.
“사람들에게 무기를 나눠줘.”
“예? 총을 나눠주라고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는 인아였다.
“고양잇과 동물이 아니라면, 여러 놈일 가능성이 있어! 정찰 나간 슬레이브들을 복귀시키고 총을 나눠줘.”
“하지만. 이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소리를 입 모양으로 하는 인아였다.
“상관없어. 한 번은 겪어야 할 상황이야.
데리고 가느냐 아니면 깨끗하게 포기하느냐. 믿음이 문제였다면 믿어준다. 믿어줬음에도 허튼 짓을 한다면? 데리고 갈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