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23화 (223/261)

인간 (4)

놈이 죽자 유미와 인아를 공격하던 놈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미와 인아는 추수하는 농사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도망치는 놈들의 머리통을 수확했다. 사방에서 터지고 부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릿한 혈향이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퍼졌다.

나는 도망치는 놈을 추격하지도 않았고, 살려달라고 비는 놈을 살려주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제자리에 선 얼음 동상마냥 우두커니 흩날리는 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뭐가 문제였을까? 진심을 담았다. 노력도 했다. 며칠을 기다렸고 참을 만큼 참았다. 그런데 결과는 죽고 죽이는 걸로 끝났다.

신뢰나 믿음이 없었기 때문일까? 신뢰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간을 들인다고 생각이 변했을까? 억제제를 주고 먹는 것을 감시하면 억제제는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약이 아니라, 억제의 상징. 억압의 상징이 될 뿐이었다.

강한 사람을 먹고 강해진다. 그 대가가 인육을 먹게 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강해질 수 있다면 더 강해진다면 상관없다. 부자가 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다면 사기를 칠 수 있다. 도둑질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성공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악마에게 팔겠다는 것과 얼마나 다를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옛날보다 차라리 지금이 더 낫다!’

나는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다. 인육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인간다운 세상이 아니었다. 인육을 먹지 않는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충분히 인간답지 않은 세상도 있었다.

하나의 세상이 깨져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도덕이 무너져야 도덕을 이야기할 수 있다. 경제를 죽여야 경제를 살릴 수 있다. 그 끝에 남은 것은 지배와 통제. 수월하게 지배하고 통제하려면 무너져야 했다.

결국, 무엇이 무너져야 할까? 무엇이 무너져야 사람들을 쉽게 지배할 수 있을까?

인간이... 인간성이 무너져야 했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됐다. 인간이 인간을 먹이로 보게 됐다. 능력이 없고 약한 자들은 도시락처럼 까먹어도 되는 자들로 전락했다. 이런 세상에선 힘이 곧 권력이 됐다. 그리고 누군가 권력을 잡는 순간, 권력은 그 자체로 강제력, 지배력, 통솔력을 발휘했다.

승리자는 먹고 패배자는 먹힌다. 무리를 이뤄 혼자서는 이길 수 없는 강자를 잡는다. 부족한 인육을 공급하기 위해 다른 그룹을 공격한다. 그뿐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정말 인간답게 산다는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나는 정말 좋은 세상이란 게 어떤 세상인지 알고 있었을까?

“제길!”

“제기랄!”

인간성을 회복하자고 말하는 나도 인성이 망가진 사람이었다.

억제제의 효과 때문이었을까?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싶었을 뿐일까?

유미와 인아를 보면서 이제는 행복해지고 싶었던 걸까?

죽이고 죽는 삶에서 그저 벗어나고 싶었던 걸까?

“아니야.”

‘네놈이 만들려는 세상은 네놈이 지배하는 세상일 뿐이다!’

“아니야.”

‘뭘 억제하겠다는 거냐? 뭘 통제하겠다는 거냐? 약으로 고삐를 채우겠다고? 네 말을 들으면 약을 주고 네 말을 듣지 않으면 약을 안주겠다는 소린가? 앙? 괴물로 변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네놈 말을 따르라고?’

“아니라고!”

‘아니긴. 네놈도 똑같아. 네놈도 그럴 것이다.’

화르르륵!

치이이익!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너풀거리는 재가 하얀 연기를 타고 무너진 건물 틈으로 올라갔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붉게 물든 피와 검게 타버린 폐허가 흰 눈에 덮였다. 그렇게 세상은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었다.

*

유미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반파된 건물 안으로 쏙 들어왔다. 포니테일로 질끈 묶은 머리카락이 강아지 꼬리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얼굴에 묻은 핏방울을 털털하게 슥 닦아내고는 아직도 열기가 식지 않아 하얗게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현장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아- 화끈하게 하셨네요.”

유미의 밝은 목소리에 씁쓸한 미소로 화답했다. 유미는 내 어두운 표정을 보고 부상이라도 당했나 싶었는지 호들갑을 떨었다.

“다치셨어요? 많이 다친 건 아니죠? 어디에요? 어디가 다쳤어요?”

“아니. 괜찮아.”

손에 묻은 피를 옷에 대충 닦고 내 몸 여기저기를 만지며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하는 유미를 보니 저절로 입술을 깨물게 됐다.

‘빌어먹을 핑계 대지 말자.’

도망치고 있었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 고작 이런 것이었나? 내 각오는 고작 핑계를 대는 것이었나? 약 때문이 아니었다. 약 핑계로 도망치면 안 됐다. 어디까지나 이건 내 문제였다.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강해졌다고 나는 교만했다. 진심이 전해진다고 내 멋대로 생각한 것이다. 인아의 부하가 된 둘이 죽었어도 복수하지 않고 대화를 요구하면 저쪽에서 내 말을 새겨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옛날 역사서에 나온 이야기처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패배한 적장을 회유하는 것처럼. 아군을 죽인 적군이라도 회유할 수 있다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읍내에서 잡아온 자들이라고, 약자를 잡아먹은 사람들이라고 소모품처럼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런 내가 인간성을 논할 수 있을까?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언급할 수 있을까? 나는 내 기준대로 소모품과 소모품이 아닌 자를 구별하고 있었다.

그게 진실이었다. 그랬으면서 나는 관대한 사람인 양 저들을 교화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저들이 미쳤고 내가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딜 봐서 내가 정상이었을까?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유미의 등장으로 잠시 녹았던 표정이 다시 자괴감으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5~6명 정도 놓친 것 같아요. 페니가 추격하고 있지만, 몇이나 더 잡을지 모르겠네요.”

인아가 피로 물든 겉옷을 벗으며 다가왔다. 여기저기 내 몸을 만지는 유미를 보곤 눈을 가늘게 뜨는 인아였다.

“어디 다치셨어요?”

“아니.”

“그럼. 그만 더듬지. ‘유현’ 씨가 곤란해 하시잖아.”

인아가 조금씩 손놀림이 과감해지는 유미를 향해 톡 쏘았다. 유미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하는 눈빛을 하곤 내 가슴에 얼굴을 찰싹 붙였다.

“헤에? 그게 무슨 소리람~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

“너무 달라붙는 여자는 매력이 떨어져.”

“후훗-”

둘이 투닥이는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씁쓸했던 표정이 무너졌다. 피식-하는 웃음이 나왔다. 내 작은 웃음을 보고 환하게 웃는 유미와 인아를 보곤, 알 수 있었다. 이 둘은 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보곤 내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장난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나라도

이렇게 모자란 나를

이들은 믿어주고 있었다.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알고

내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이렇게......

와락-

두 사람을 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 정말로. 고맙다. 너희가 있어줘서. 다행이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단어가 차갑게 흩어졌다.

페니의 추적으로 셋을 더 잡을 수 있었다. 포로는 없었다. 리더로 보이는 놈을 내가 죽인 순간부터 남은 것은 죽거나 혹은 죽이거나 둘 가운데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정리하자.”

“네.”

내 품에서 활기차게 대답하는 유미였다. 인아는 예의 그 냉정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새로 부하로 삼은 애들이 전부 죽어서...”

“그랬지.”

“......”

인아는 슬레이브나 부하가 없으면 약간 불안해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투력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인아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스키와 스노모빌부터 찾아보자.”

놈들이 장악하고 있던 콘도를 뒤지다 보면 뭐가 나와도 나올 게 분명했다.

내가 원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했다. 희생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그건 다른 놈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걸 인정해야 했다.

“일반인들은 감염 장악을 해도 좀비처럼 변하거나 그래서 약간이라도 변이된 사람들을 장악해야 해요.”

인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나도 모르게 인아의 머리에 손이 올라갔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의 감촉이 손끝에서 맴돌았다. 날카롭게 친 커트 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알고 있어.”

“......네.”

혹시라도 내가 부담스러워 할 것 같아 그 부담을 자연스럽게 나눠서 지려고 한 인아였다. 그 마음 씀이 느껴졌다. 역시 인아는 좋은 여자였다.

“이젠 괜찮으니까. 걱정시켜서 미안.”

“아니에요. 저야말로...”

훈훈하지만 살짝 내려앉은 분위기를 깨기라도 하는 것처럼 뱃속에서 소리가 났다.

꼬르르르륵!

꼬르륵!

쿠루루루룩!

나와 인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 꼬륵 소리가 소심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유미의 뱃속에서 우렁찬 포효가 울려 퍼졌다.

“풉!”

“하하하!”

“히히힛!”

서로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애정과 신뢰가 새겨져 있었다. 그래.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이 순간. 이거면 됐다. 이것이라면 충분했다. 자괴감에 빠졌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우선 배부터 채우자.”

“네~”

“예.”

*

짧은 시간 동안 치열한 싸움을 했기 때문인지 순식간에 일반인 5~6인분에 해당하는 음식이 사라졌다. 나와 인아가 먹는 동안, 유미도 짧은 입으로 이것저것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억제제를 먹고 난 뒤, 유미도 내 피 말고 일반음식을 조금이나마 먹을 수 있게 변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내 피 이외에는 극렬한 거부감이 생겼다는데 억제제를 먹으면서 다른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약간 낮아졌다고 했다.

“조금만 참지?”

인아가 우아하게 생라면을 씹으며 유미를 지긋하게 노려봤다. 입 모양으로 유미에게 한소리 하는 인아였다. 유미는 필요한 에너지를 대부분 내 피에서 충당했다.

“쳇!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콰득!

유미가 한입 커다랗게 베어 물곤 우걱우걱 씹었다. 내 피 이외의 것에서도 맛을 느낄 수 있고 먹을 수 있게 됐다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씹어 넘기면서도 유미의 인상이 점점 어두워졌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넘기고 나면 속이 불편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이상 없다는 것처럼 와구와구 먹으면서 시시각각 얼굴이 노랗게 뜨는 유미였다.

“그만 먹고 이리와.”

내가 오라고 하자 들고 있던 비스킷 조각을 내팽개치고 착 달라붙는 유미였다. 유미가 피를 빠는 동안 인아가 유미가 뜯어놓은 과자류를 먹으며 말했다.

“오늘 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어. 그럴 생각이야.”

스키장이라 스키용품점도 있었다. 한쪽에 눈썰매장도 있으니 필요한 것을 챙길 수 있었다. 유미는 제법 많이 먹었다. 역시 전투를 하면 칼로리 소모가 많았다. 피를 제법 많이 빨렸기 때문에 한 번 더 밥을 먹어야 했다. 육포와 단백질 보충제를 굳혀 만든 스틱을 대충 입에 밀어 넣고 수색에 나섰다.

“와 여기. 보드도 있어요.”

“오길 잘했네요.”

유미와 인아가 용품점에서 새 스키복을 만지작거리며 좋아했다. 스노모빌도 다섯 대나 있었다. 놈들이 사용했었는지 기름도 제대로 들어있었다. 눈썰매를 스노모빌 뒤에 묶어, 짐을 끌 수 있게 만들었다.

“혹시 모르니까 스키복이든 보드복이든 좀 챙겨.”

“네~”

“예~”

두 여자는 간만에 쇼핑하는 기분을 내는 것처럼 이것저것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속옷도 그렇고 이것저것 챙겨야 할 것이 많았다. 제약회사에 있으면서 그런 쪽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쇼핑에 빠진 두 사람에게 페니를 붙여두고 콘도를 수색했다. 프런트에는 키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카드식 키를 보니 잠금장치를 전부 해제했는지도 몰랐다. 혹시나 싶어 대충 흩어진 키를 집어 들고 객실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잠금장치는 전부 해제된 상태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엉망인 객실이 보였다. 질펀하게 정사를 벌였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객실이었다. 치우지 않은 지저분한 객실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위층으로 올라가던 중 밖에서 자물쇠를 채운 객실이 눈에 들어왔다. 최상층에 있는 객실이었다.

으득!

제법 강해진 완력으로도 뜯기지 않는 쇠사슬이었다.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쯧- 타올라라!”

작열하는 불꽃이 쇠사슬을 순식간에 빨갛게 달궜다. 달궈진 쇠사슬을 잡아당기자. 찍-하는 소리와 함께 사슬이 끊겼다.

처르르륵!

끊어진 사슬을 풀고 문을 열었다. 훅-하고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 인분 냄새와 형용하기 힘든 냄새들이 뒤섞여 있었다. 저절로 미간에 주름 잡혔다. 전기 매트에 전기라도 들어왔는지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의외라는 생각으로 주변을 돌아본 순간 저절로 욕이 나왔다.

“하- 씨-”

발가벗겨진 채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사람들이 대소변 속에서 뒹굴고 있었다.

*

사람들은 남녀 아이 합해서 34명이었다. 묶인 것을 풀어주고 몸을 씻게 해줬지만, 사람들의 눈동자는 감사보다는 공포로 물들었다. 잡아먹기 위해 몸을 씻으라고 하는지 착각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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