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22화 (222/261)

인간 (3)

생각을 잘못했을까? 사회를 재건하고 안전한 곳을 만든다는 생각이 이들에게는 그저 개소리로 들렸을 따름일까? 며칠 동안 아무도 없는 눈밭에서 고해하듯 외쳤던 그 시간은 헛된 것이었을까? 미래를 생각하는 마음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이렇게 죽고 죽이는 세상이 좋단 말인가!”

“그럼 좋고말고. 좋지 좋아! 만족스럽다고! 너 같은 놈이 없었던 것 같아? 힘을 합해?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힘을 합하자고 해놓고 명령만 내렸으면서? 앙? 죽을 자리에는 몸뚱이밖에 없는 사람들을 내몰았으면서?”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파르르륵!

하얗게 타오르는 염화력이 놈의 염력과 충돌했다.

일그러지는 공간.

타오르는 열기.

놈의 이유 없는 분노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놈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듯 놈도 내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그래도 계속 이야기를 해보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난 너를 처음 보는데?”

“닥쳐! 똑같다. 너도 똑같아! 옛날에는 안 그랬나? 적자생존 약육강식 아니었어? 그때는 유전무죄였지만 지금은 어떤가? 지금은 힘 있는 놈이 장땡인 세상 아니야? 한 칸짜리 집 한 채 사기 힘들었던 옛날과는 달리 강해질 기회가 있는 세상 아니야? 공평한 세상. 강해질 기회가 있는 세상이 아니냔 말이다!”

사방으로 송곳 같은 염력이 찔러왔다.

염화력을 반구형으로 접어 방어막처럼 펼쳤다.

파파파팍!

동그랗게 말린 불꽃의 방어막을 고대로 들어 놈에게 덮어버렸다.

“미친놈 이게 네놈이 생각하는 공평한 세상이냐?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야! 이렇게 싸우다 죽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

“의미? 좆까라 씨발 새끼야! 살고 죽는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살면 사는 거고 뒤지면 죽는 거다! 세상? 구질구질하게 사는 세상보다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는 세상! 이기면 강해질 수 있는 세상! 죽고 죽이는 이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일개미처럼 살다 뒤지는 옛날보다 100배는 더 낫다!”

위기 감응인지 아니면 대화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기대가 깨졌기 때문인지 가슴이 무거웠다. 잊었던 감각이 가슴을 채웠다. 답답한 심정. 어째서 사람을 잡아먹는 지금이 더 좋다고 생각할까? 너무 늦었나? 너무 늦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건가?

염화 능력으로 생긴 불의 장벽과 염력으로 만들어진 투명한 방어벽이 힘겨루기 시작했다. 투명한 불꽃이 이글거리는 벽 건너 올백 머리 사내와 내 눈이 마주쳤다.

“앙? 그 눈깔은 뭐야? 앙? 그 불쌍하다는 것처럼 내려다보는 그 눈깔은 뭐지? 그래서 너 같은 놈들이 구역질 난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그 눈깔이 짜증 난다고!”

“빌어먹을. 어디까지 삐뚤어진 거냐?”

이성적으로 대화할 수 없다면 힘으로라도 눌러서 놈을 진정시켜야 했다.

놈을 감싼 염화력을 조금씩 압축했다.

끄드드득!

투명한 공간에서 쇳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불꽃과 염력이 서로 충돌하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놈은 내리누르는 불꽃의 압력을 받아쳤다. 아틀라스 거인이 지구의 무게를 담당하는 것처럼 자신을 짓이기는 불꽃을 고스란히 버텼다.

콰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놈의 두 발이 바닥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

내리누르는 압력을 부정하겠다는 것처럼 놈이 고함을 질렀다.

카드드드득!

“이제야 간신히 여기까지 힘을 길렀는데 억제제? 네놈보다 약할 때 억제제를 먹으라고? 그래서 영원히 약하라고? 그렇게 네놈 밑에 들어가서 뺑이를 치라고? 네놈의 그 알량한 좆같은 세상을 함께 만들자고?”

“지금 무슨 소리를...”

내가 한 말이 그렇게 들릴 수 있단 말인가? 차가워지는 느낌. 그랬던 건가? 내가 생각하는 이상향은 나만의 이상향이었던 건가? 저 사람에게는 지금처럼 죽고 죽이고 약탈하는 세상이 이상향이었던 건가? 인간은 누구나 안전한 곳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다.

보편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썩어 빠진 세상이라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가치가 존중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말 보편적인 가치가 있었다면 이런 세계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연방이든 동맹이든 변이를 촉진하고 생체병기를 만들 생각만 했지, 억제제를 생산해 배포하려고 하지 않은 것이 증거였다. 모든 것이 먼지처럼 흩어져버린 세상에서 그들만의 이상향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던 것이다.

콰드드득!

화륵!

타오르던 불꽃이 조각나며 벚꽃처럼 흩날렸다.

내리누르는 불꽃을 염력으로 찢어발긴 놈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됐다. 흘려 내리는 땀을 소매로 닦아낸 놈이 목이 마른다는 것처럼 침을 삼키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없는 놈만 뺑이 치는 썩어 빠진 세상보다는 지금이 더 낫다. 사랑? 미래? 좆같은 세상에서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억제제? 뭘 억제한다는 거지?”

“변이가 계속되면... 세포가.”

“새끼야! 내 세포가 붕괴하는 걸 네놈이 왜 신경 쓰는데? 누가 신경 써달라고 했나? 앙?”

그럼 죽어도 좋단 말인가? 놈은 대화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쳤군. 그래. 네놈은 미친 거였어.”

글러 먹은 놈이다. 이놈들은 미친놈들이라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인아도 유미도 내 생각을 이해해줬다. 나를 따른다고 했다.

먹고 먹히는 세상이 아니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 언제 죽을지 언제 변이를 일으킬지 전전긍긍하는 삶에서 벗어나는 것에 찬성했다. 가족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동의했다. 그래 유미나 인아가 정상이고 이놈은... 이놈들은 비정상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걸 이해 못 한다니. 이놈들은 미친놈들이 분명했다. 그래도 한 번만 더...

쾅! 쾅!

투명한 송곳이 타오르는 불꽃을 헤집었다. 염력과 불꽃이 충돌하며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충격파로 인해 올백 머리가 흐트러졌다. 사내의 머리카락이 미역 줄기처럼 너풀거렸다. 미쳤다는 내 말에 사내가 입에 침을 튀며 광분했다.

“누가 미쳐? 그럼 돈에 미치고 성공에 미치는 건 미친 게 아닌가? 예전부터 미친 세상이었다. 항상 밟히는 놈만 밟히는 세상이었다고!”

“그래서? 밟히지 않으려고 밟겠다는 소린가? 먹히지 않기 위해 먹겠다는 건가?”

“언제나 그랬다. 세상은 언제나 그랬어.”

그에게 있어 세상은 마찬가지였다. 밟지 않으면 밟히고.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밟히지 않기 위해 밟는 일들이 당연시됐다. 내가 평화롭다고 생각했던 세상은 그에게 있어 지금이나 마찬가지 세상 먹고 먹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 옛날 먹히는 입장이었던 그는 이렇게 변한 세상에서 포식자가 됐다.

포식자가 된 그에게 있어 내가 만들겠다는 세상은 어떻게 들렸을까? 그가 목숨을 걸고 싸워 얻은 포식자의 위치를 포기하라는 소리였다. 더 강해지지 말라는 소리였다. 내 밑으로 들어오라는 소리였다. 옛날 뜯어 먹혔던 피식자의 입장으로 돌아가라는 소리였다. 그뿐이었다.

“계속 잡아먹고 죽고 죽이고 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힘이 좋아? 그래서 나도 먹고 싶어? 짐승처럼 먹고 먹히는 게 좋냐? 좋아!”

‘먹고 싶냐?’는 말에 스위치가 켜지기라도 한 것처럼 놈의 눈동자가 식탐으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내 강한 의념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작열하는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화륵!

화륵!

화르르르륵!

여기저기 솟아난 불기둥이 대나무 숲을 이룬 것처럼 빼곡하고 빳빳하게 솟아올랐다.

하얗게 타오르는 불기둥을 본 놈이 입술을 혀로 핥았다. 나를 잡아먹고 내 힘을 뺏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흥분됐는지, 놈은 연신 몸을 움찔거렸다.

“크흐흐흐흣! 좋아. 좋아. 위선을 벗어버리라고. 너도 똑같잖아.”

놈이 땀에 불린 미역 같이 늘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 올백을 했다. 탐욕, 탐식이 흘러넘치는 놈의 눈빛이 말했다. ‘네가 틀렸고, 내가 옳았다.’

인간답게 살겠다는 희망? 안전한 미래? 함께 이루는 세상? 그딴 세상을 만들자고? 꿈 깨라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놈이 말했다.

“위에 있는 년들도 맛있어 보이는군. 간만에 몸보신 좀 하겠어.”

하얗게 타오르는 불기둥 숲에 대항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놈의 전신에서 투명한 염력의 기운이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공간을 갉아먹기라도 하는 것처럼 탐욕스러운 힘이었다.

유형화될 정도로 강력한 염력에 닿자, 대나무 숲에 바람이 불어 대숲이 흔들리는 것처럼 불기둥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그그그!

촤창! 와장창! 쨍그랑!

건물에 달린 창문에서 유리창이 한순간에 터졌다. 계단이 녹아내리고 뒤틀리며 시멘트 속에 들어있던 철근이 엿가락처럼 녹고 휘어지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건물 속에서 놈과 나는 서로를 바라봤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싸우고 난 뒤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전개는 없었다.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억제제를 먹고 변이의 부작용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내가 가진 힘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고 죽이고 먹고 먹히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이제까지 흘린 피에 면죄부를 줄 수 있었다. 오늘 피를 흘리더라도 괜찮았다. 오늘 흘린 피로 인해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희망적인 미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피는 흐를 뿐이고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안일했어.”

자책. 어쩌면 자괴 섞인 내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놈이 외쳤다.

“그럼 죽어!”

화르르륵!

쿠지지직!

불타오르는 대숲을 뚫고 무형의 기운이 쏘아졌다. 하나 둘 셋 넷. 쏘아진 자리에 계속해서 중첩되는 염력의 화살.

“죽어버려! 새끼야!”

부왁!

내 의지에 반응한 불꽃이 놈이 쏘아낸 무형의 기운을 잡아채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중첩된 염력을 막아냈지만, 기어코 하나가 불기둥을 뚫고 나갔다. 회전하는 투명한 기운이 기둥과 기둥의 틈새를 파고든 것이다.

불의 숲을 뚫은 놈의 기운이 나사처럼 회전하며 내 미간을 향했다. 놈의 얼굴에 승리의 미소가 어렸다.

욱신- 머리가 인식하기도 전에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뇌가 심장이라도 된 것처럼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내 미간을 노렸던 무형의 기운은 허무하게도 내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자르곤 철근 콘크리트 벽에 구멍을 내고 사라졌다.

놈의 얼굴에 어렸던 승리의 미소가 왈칵 무너졌다.

“거짓말!”

놈의 주변에 솟아오른 불기둥이 놈의 퇴로를 차단했다. 사방을 차단한 불기둥이 믹서기에 들어있는 톱날처럼 회전을 시작하자, 놈은 염력을 전개해 불기둥의 압력을 막아내려고 했다. 처음 내 방어막을 찢어냈던 것처럼 찢어낼 수 있다고 자신하는 표정이었다.

콰가가가각!

회전하는 불꽃이 투명한 방어막을 사과껍질처럼 깎아 내리기 시작했다. 염력으로 만든 방어막이 깎아지며 사방을 압박하는 불기둥이 서서히 공간을 좁히기 시작하자, 놈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으아아아악!”

전신의 힘을 모아 불기둥을 부수려고 했지만, 오히려 놈의 옷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놈이 다급하게 고함을 질렀다.

“약. 약 먹을게 그만. 네가 이겼다!”

몸에 불이 붙는 것을 간신히 염력으로 막고 있는 놈이었다.

“......”

가가가가각!

화르르르륵!

“네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네가 이겼어! 멈춰!”

내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였나?

내가 원하는 관계가 고작 이런 관계였나?

대화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을 찍어 눌러 만드는 세상이었나?

이래서는 놈이 말하는 대로 짓밟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대로 가면 놈이 말하는 세상이나 마찬가지였다.

시로의 말이 떠올랐다. ‘왕이 되십시오.’ 세종시 정부청사에 있던 괴식물의 능력인 정신계열 능력을 흡수해 세상을 바꾸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나지막하게 욕설이 새어나왔다. 내 감정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작열하는 불기둥이 더욱 뜨겁게 달아올랐다. 시멘트가 열기를 견디지 못해 가루가 됐고 속에 들어있던 철근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눈발이 날리는 겨울과 불기둥이 만나 하얀 수증기가 끓어올랐다.

치이이익!

타오르고 녹고 증발하는 지옥. 처절한 비명은 지옥에 걸맞게 끊이지 않았다.

“끄아아아악. 그만해! 살려줘!”

싸우다 죽겠다던 놈이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놈의 애원에 기분이 더러웠다.

억제제를 주면 놈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자신이 더 강해지지 못하게 족쇄를 채운 것이라고, 세포가 변형되기 직전까지 섭식 진화를 해서 강해질 수 있는데 지금 억제제를 먹여, 자기를 지배하려고 들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죽고 죽이고, 먹고 먹히는 이유는 원인을 몰라서라고 생각했다. 사태의 원인을 모르고 변이를 억제하는 약이 없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런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인을 알려주고 약을 준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세상은 변했다. 그냥 변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변했다. 잘못된 세상이나 타락한 세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단순한 변화가 아니었다.

내 감정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회전하는 불기둥이 하나로 합쳐졌다.

“끄아아악!”

소용돌이치는 불기둥 사이로 들리는 비명이 숯가루가 되어 허공을 날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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