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220화 (220/261)

인간 (1)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인 전국시대라고 말하지만, 기실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 부자들이 원하는 것이 더 큰 부자가 되는 것처럼, 먹어서 더 강해질 수 있다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게 강자였다.

한 번 힘에 빠지면 뒤로 돌아가기 힘들었다. 지금처럼 먹고 먹히는 세계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더 큰 힘을 가지려고 사람을 먹고, 자기보다 더 강한 자들을 사냥하려고 할 것이다. 힘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변이를 일으킨 사람은 일반음식보다 인육에 끌리기 마련이었다.

변이가 일어나면서 생기는 현상인 식육에의 욕구는 집요했다. 그 식육에의 욕구를 이긴다고 하더라도 그 뒤에 기다리는 것은 죽음에의 공포.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견뎌야 했다. 나도 절박함을 이기지 못해 맨홀 변종을 먹었다.

맨홀 변종은 인간이 아니라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렇게 힘을 얻기 위해 인간이었던 것을, 인간의 모양을 한 것을 먹었다. 그래서 얻은 능력 염화 능력. 염화 능력이 없었다면 아파치 헬기와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을 것이다.

먹었기에 살아남았다. 먹어서 힘을 얻은 대가로 가늘게 붙잡고 있던 인간적인 과거를 잃었고, 염화 능력을 얻었기에 인간처럼 살 미래를 잃었다.

인간답게 살 미래를 잃고 나니, 남은 것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오늘밖에 없었다. 살아남아야 희망이 생기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나 신념이 생존 그 자체라는 건 역시 미래가 없었다.

“강해지면 되잖아요.”

유미가 주먹을 쥐어 오독 소리를 내며 말했다.

“먹고 먹히는 세상이 된다면 강자도 의미 없어.”

“예? 어째서요?”

“변종이나 빗치를 먹고 능력이 생긴 사람들은 섭식을 통해 변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고 봐야 해.”

“그런데요?”

“더 강한 변종과 빗치를 먹으면 더 강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겠지.”

“아- 그렇겠네요.”

유미가 작게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강해지면 더 많이 달려들 거라는 소리군요. 그럼 덤빌 생각도 하지 못하게 절대적으로 강해지면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지. 아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절대적인 강함을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을까?”

절대적인 강자를 먹어 자신이 절대적인 강자가 되기 위해, 더 치열한 약육강식이 시작될 것이다. 교통과 통신이 마비된 세상에서 절대적 강자가 됐다고 전 세계를 지배하기란 불가능했다. 당장 도시 하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개인의 강함만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파괴나 학살은 개인의 강함으로 충분히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키는 것을 생각한다면, 혼자가 아닌 우리를 생각한다면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내 말에 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군요.”

“개인이 강하다면 사냥의 대상이 되겠지만, 우리가 강하다면 우리를 건드리는 건 사냥이 아닌, 전쟁일 테니까 말이야.”

유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말했다.

“어쨌든 강해져야 한다는 소리죠?”

“그래.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지. 몸도 마음도.”

생존이 전부인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조국을 팔아먹을 수도 있었고, 살기 위해서라며 사기를 칠 수 있었다. 내가 살기 위해 친구를 버리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 이런 시대 번영과 생존은 모순이었다.

생존에 매몰된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번영을 만드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둘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바로 가족이고 미래였다. 목숨이 가치를 잃어버린 세상에 다시 목숨의 가치를 만들어야 했다. 우리가 사라진 미래에 우리를 새겨 넣어야 했다.

인아가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유미는 해맑게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

지도를 살폈다. 최대한 빨리 강원도에 있는 사람들과 합류하는 게 좋았다. 그리고 이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봄이 되면 우리가 가는 쪽으로 오라는 언질을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요? 우리 힘을 알면 붙잡아 두려고 하든지, 섭식 진화를 알면 우리를 잡아먹자고 들 걸요?”

“그렇겠지만, 우리에게는 이게 있잖아. 사람이 사람을 쉽게 죽이게 된 이유는 인간답게 살 희망이 없기 때문에 그러는 거다. 희망이 있다면 분명히 우리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생길 거야.”

시로가 만든 억제제가 담긴 통을 손에 들었다. 효과는 불안정한 변이를 억제해 세포가 붕괴하는 것을 막고, 이성을 잃고 날뛰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약이었다. 부가적인 효과로는 더 이상 슬레이브들이 먹는 전투식량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동맹 측 슬레이브들이 먹는 전투식량에는 인육이 들어있고 타격조가 먹는 전투식량에는 빗치나 연구용으로 사용했던 실험체들이 갈려 있었다. 그걸 먹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사람들과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억제제를 먹으면 변이가 일어나지 않도록 변이를 차단하는 거잖아요. 그럼 섭식 진화를 통해 강해질 수 없지 않나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걸 사람들이 원할까요?”

“강함의 대가가 미래인데도 그럴까? 섭식 진화를 통해 단숨에 강해지는 방법은 신체 붕괴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어. 시간의 문제지 이성을 잃고 날뛰는 괴물이 되거나 변이 한계를 넘은 세포가 괴사할 거다. 그걸 설명하면 충분히 따라와 줄 거야.”

“쉽지 않겠네요. 상대방을 먹이나 노예로 보기 시작한 사람들이 억제제를 준다고 해서 좋게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부딪쳐 봐야지.”

“섭식 진화를 한 사람들이 변이를 억제하는 약을 먹으려고 할까요?”

“사람을 먹어서라도 강해지겠다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

“싸우게 된다는 거잖아요.”

“그럼 싸워야지.”

내 대답에 유미가 그게 뭐냐는 것처럼 웃었다.

“그냥 힘 빼지 말고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이동하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면 만나는 게 좋아. 우리의 생각을 널리 알릴수록 사람들이 다시 선택할 기회가 생기니까.”

“고생하겠네요. 미끼도 아니고.”

“미끼지.”

“으엑! 미끼라니요? 그게 무슨 소리죠?”

우리를 잡아먹어 봐야 섭식 진화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을 주변에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우리 그룹에 오는 사람들은 변이 억제제를 먹었다. 우리를 먹어봐야 강해질 수 없다. 변이가 억제될 것이라고 알리고 다니면 우리가 공격받는 것을 줄일 수 있었다.

또 지금처럼 사람을 잡아먹고 사는 삶에 회의를 느낀 자들을 포섭할 수 있었다. 동시에 미래를 생각하는 자들, 가족이 살아남은 자들도 우리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것이 분명했다.

“미끼고 도박이네요. 정반대의 상황이 닥칠지도...”

인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인아의 말이 맞았다. 양날의 칼이었다.

“뭐 지금 당장 사람들이 있는 곳을 찾아다니겠다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가는 길에 사람들이 있다면 억지로 피하지 않겠다는 거다. 사람들을 만나면 변이의 문제점과 억제제를 이야기해서 조금씩 소문을 낸다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해.”

유미와 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

하얗게 쌓인 눈밭 위로 귀여운 소리가 톡 튀어 올랐다.

“으앗!”

앞장서서 가던 유미의 몸이 눈 아래로 쑥 빠졌다. 길을 따라간다고 갔지만, 길에서 벗어나 버린 곳으로 간 것이다. 아래로 쭉 미끄러진 유미가 끙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일반인의 몸이었으면 지금 미끄러진 것만으로도 발목이나 허리가 다쳤을 것이다.

“우. 투시능력이라도 있었으면.”

일반인을 아득하게 벗어난 신체 능력이 있었어도 눈이 쌓인 산맥을 타고 넘기란 쉽지 않았다.

“설피를 만들었어야 했나?”

빨리 움직인다고 나온 게 실수였다. 강한 육체 능력이 있으니 움직이는데 별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설피를 만들 재료도 없었거니와 어설프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었다. 설피를 신어본 적 없으니, 그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줄은 몰랐죠.”

인아도 일어나자마자 다시 눈 속으로 빠지는 유미를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쌓였다고 하더라도 도로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길을 따라 걸으면 길어야 이틀 길어야 사흘 정도면 태백산맥을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하지만 한나절 걸어보니 사흘로는 산맥을 넘기 힘들었다.

“스키장으로 가자. 스키라도 신고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어설프게 설피를 만든다고 하는 것보다 스키를 구해 신는 게 더 나았다. 잘하면 스노모빌이 있을지도 몰랐다. 스노모빌만 있으면 짐을 끌고 가기가 훨씬 쉬웠다.

*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나서야 스키장을 찾았다.

“사람이 있나 보네요.”

유미가 건물 한쪽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지목한 곳에 붉은빛이 아른거렸다. 모닥불을 피운 것 같았다.

“더 접근하지 말고 우선 주변을 살피자.”

“네.”

생존자가 있으면 좀비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아니면 변종이나 빗치가 근처에 있다고 봐야 했다. 어둠을 틈타 주변을 샅샅이 확인했다.

“정문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요. 좀비도 없고 드나든 흔적도 없어요.”

유미가 도도독 달려와 말했다.

“반대쪽에도 없어요. 건물 안에 없으면 없다고 봐야 해요.”

인아도 자신이 감염 장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나갔다 왔다.

읍내에서 붙잡아온 두 사람은 인아의 부하가 됐다. 일반적인 슬레이브와는 달리 인아가 감염 장악한 슬레이브들은 조금 더 강했고 자율성도 높았다. 슬레이브를 감염 장악했을 때도 그랬는데, 육체 능력이 강해진 사람들을 감염 장악하자 사내는 변종과 비슷한 상태가 됐고 여자는 빗치와 유사한 상태가 됐다. 처음 인아를 만났을 때 변종을 부하로 다루고 있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다루는 인아였다.

“오늘 하루는 쉬어야 하니까 안으로 들어가죠?”

“사람들하고 마주치면 우선 대화를 시도해 보자.”

“그게 될까요?”

“쉴 만한 건물이 저곳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조금 떨어졌어도 인기척이 없는 건물로 가자. 우리가 이렇게 피했는데도 저쪽에서 공격적으로 나온다면 어쩔 수 없지.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고 도망치지 않아. 대화가 되면 대화를 해보고 아니면 싸운다.”

모닥불을 피운 큰 건물을 피해 조금 떨어진 작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인기척이 없는 건물은 냉장고처럼 냉기가 가득했다. 바로 불부터 피웠다. 가구를 부수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붙이자 매캐한 연기와 함께 불이 붙었다. 가구에서 섞여 있는 접착제 성분 때문인지 눈이 매웠다.

“불을 피웠는데 연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야 한다니.”

신체 능력이 강해졌다고 해도 지속적인 냉기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재생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동상을 피했지만, 그만큼 열량 소모가 컸다. 인아의 부하들에게 경계를 서게 하고 모닥불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다. 한참 밥을 먹고 있는 도중 인아가 수저를 내려놨다.

“저쪽 건물에서 사람이 접근하고 있어요.”

인아의 말에 유미가 그것 보라며 콧대를 높였다.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부터 해.”

“네.”

인아가 부하들에게 경고하라고 했다. 탕! 총소리가 하얀 설야를 흔들었다. 경고 사격을 하자 저쪽이 더 빨리 달려드는지 인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움직임이 빨라요. 일반인들이 아니에요.”

“전투준비. 유미는 정면.”

“네이.”

유미가 팩을 단번에 짜서 마신 뒤 벌떡 일어났다.

“인아는 부하들 뒤로 빼.”

“크읏.”

내 말과 동시에 인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포위당했어요.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 애초에 모닥불은 함정이었나? 대화는? 대화도 거부하고 있어?”

“네.”

길을 떠나고 처음 만난 자들부터 문제였다. 다시 인아의 얼굴이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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