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오늘 (1)
푹푹 발이 눈 속에 파묻혔다. 깊게 새겨진 발자국이었지만, 금세 함박눈에 뒤덮였다. 야트막한 동산을 건너보니 멀리서 폭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세상에서 미래를 생각한다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일지도 몰랐다. 지금만 봐도 그랬다. 어렵게 읍내를 장악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뜻하지 않은 세력이 중간에 껴들었다. 그렇다고 짜증이 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삶과 삶이 부딪치고 오늘과 오늘이 충돌했다. 이기는 쪽이 내일을 논할 수 있었다. 그게 일반적인 세상이 됐다. 이런 세상에서는 읍내를 노리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게 당연했다.
“서둘러요.”
유미가 총총걸음으로 앞장섰다. 유미의 등 뒤로 목소리가 겹쳐졌다.
‘우리만 생각해요.’
그래. 그게 맞는 이야기다. 인아만 생각하고 유미만 생각하고 우리만 생각하는 게 맞았다. 둘만 생각하기도 벅찼다. 내밀 수 있는 팔은 둘 뿐이다. 그러니까 여의치 않으면 전부 처리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게 정답이었다.
읍내를 향해 가는 길은 무겁고 갑갑했다. 인아의 의식을 되찾기 위해 그저 몇 명을 납치하면 될 뿐이었다. 약을 만들겠다고 인아에게 사람을 잡아오라고 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직접 손을 쓸 뿐이었다.
손바닥을 펼치자 손바닥 위에 떨어진 함박눈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서늘한 느낌.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체온.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이제껏 걸어온 발자국이 검고 깊은 구멍처럼 보였다.
“이쪽이에요.”
“아. 그래.”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눈발을 뚫고 읍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뒷산에 도착했다. 읍내를 두른 바리케이드에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변이된 좀비들이 날뛰고 낮게 친 펜스는 반쯤 무너져 기능을 잃었다.
투두두두둑!
콰아아아앙!
총소리와 박격포 터지는 소리가 하얀 설원을 가득 채웠다.
“읏! 선수를 친 놈들이 있네요.”
유미가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보이는 광경에 주먹을 꽉 쥐었다.
상황을 살펴보니, 공격하는 쪽은 아무래도 연방이나 동맹 측은 아닌 것 같았다. 박격포를 동원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연방이나 동맹이 아닐까 싶었는데, 그쪽이라면 소리가 요란한 박격포를 동원하기보다 슬레이브를 동원해 소리 없이 처리했을 것이다.
“우리를 추격하는 놈들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생존자들이란 소린가요?”
“아마도.”
다른 계절보다 겨울은 혹독했다. 사태가 발생한 지 1년 가까이 지났다. 어지간히 처음부터 식량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굶어 죽을 시점이었다. 한 겨울을 버틴다고 하더라도 봄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 식량을 넉넉하게 구하지 못한 생존자들은 약탈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많은 지역에 식량이 있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만큼 위험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적당한 규모에 식량이 많이 있을 법한 곳을 공격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연스럽다.
언제부터 약탈, 살인, 방화 이런 것들이 자연스러워졌을까? 뺏기지 않기 위해 죽이고, 뺏기 위해 죽인다. 이 사태가 발생한 순간부터 이것은 예정된 상황이었다.
연방에서는 생존자들의 가치 유무에 따라 구하고 구하지 않고를 결정했다. 방벽 안에 있는 자들은 쾌적한 삶을 살았지만, 그만큼 방벽 밖에 있는 자들은 철저하게 외면됐다.
‘전국시대가 된다.’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있다.’
유미의 목소리와 시로의 목소리가 겹쳐서 들렸다.
불타오르고 비명이 뒤섞인 읍내가 도시로 변했다. 동맹이 장악한 도시. 그 허름한 뒷골목에서는 식권을 놓고 벌어지는 온갖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지만, 아무나 인간답게 살 수는 없었다. 자유를 위한다는 동맹에서 벌어진 자유로운 일들은 전혀 자유롭지 않았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게 가능할까?
대답처럼 박격포가 터지고 뒤따르는 비명이 허공을 찢었다.
쾅!
“끄아아악! 내 다리. 다리가.”
“눈! 눈이 안 보여!”
박격포에 다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이 버둥거렸다. 눈과 귀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은 허우적거리다 좀비들에게 산채로 뜯겼다.
상황을 치켜보던 유미가 물었다.
“어떻게 하실 건가요?”
‘우리만 생각해요.’
그래 변한 건 없었다. 내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됐으니 차라리 잘됐다. 부담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 몇 명 없어져도 모를 것이다. 굵게 내리는 눈발은 앞을 가렸다. 총성과 박격포 터지는 소리 때문에 숨어들어 가기 편했다.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납치하자. 이왕이면 식량도 챙기고.”
내 말에 유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
쾅!
박격포가 반쯤 기능을 상실한 펜스를 끝장냈다. 불이 붙은 펜스가 좀비들이 몰려드는 것을 막고 있었지만, 박격포의 포격으로 터져나가자 좀비들이 뚫린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박격포라는 장거리 타격 무기가 없었다면 좀비들은 훌륭한 방어벽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으아아악! 막아!”
“지원은 어디 있어!”
“박격포 잡기로 한 놈들은 뭐 하고 있어!”
“좀비들부터 막아!”
읍내를 방어하는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어디로 가죠?”
“사람들이 숨어있는 곳으로 가자.”
나도 그렇고 유미도 감각이 좋았다. 그래서 빨리 사람들이 숨어있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일반인들은 이곳저곳에 분산되어있었다. 마지막 저지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능력을 각성한 사람들 한 명에 무장한 사람 셋이 출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고작 넷으로 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보네요. 무슨 생각인지.”
유미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찼다. 혹시라도 침투해 오는 적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넷이라는 숫자는 너무 적었다. 몰래 침투할 정도로 능력 있는 적이라면 고작 4명으로 막을 수 있는 적은 아닐 것이다.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생존자들을 20~30명씩 분산시킨 것도 마찬가지였다.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아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응애. 응애.”
“씨발 애새끼 좀 조용히 시켜!”
“네. 네. 착하지.”
“으아아아앙! 엄마. 아빠.”
“뚝. 울면 좀비가 온다. 좀비가 잡아가! 뚝.”
애기가 폭음과 총소리에 놀랐는지 자지러지게 울었다. 어미는 그런 아이를 달래려고 애썼다. 갓난아이가 울자 3~4살 되는 어린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방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들은 합창단처럼 목소리를 높여 울어대기 시작했다. 폭음과 총성 속에 아이들이 우는 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쿵! 쿵!
덩치가 큰 사내가 벽을 망치로 때리며 걸걸한 목소리로 고함질렀다.
“거기 애들 좀 닥치게 해!”
“시끄러워서 밖에 소리가 들리지 않잖아! 전부 다 뒈지고 싶어!”
아이들은 남자의 고함에 놀라 더 서럽게 울어댔다. 여자들과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더 어린아이들을 다급하게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유미는 벽을 두들겨댄 사내를 보곤 먹이를 찾은 맹수처럼 눈을 빛냈다.
“저기 큰 망치를 들고 있는 사람이 그건가 본데요? 지금 잡을까요?”
“3을 세고 들어간다.”
“셋. 둘. 하나!”
유미가 바리케이드를 향해 내달렸다. 총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유미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탄창이 폭발했다.
“타올라라!”
쾅! 파파팍!
탄창이 폭발하며 약실에 들어있던 총알이 터져나갔다.
“끄악!”
“아악!”
총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무력화 됐다.
유미가 싱긋 웃는 얼굴로 기합을 내지르며 조잡하게 쌓인 바리케이드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으얏차아!”
콰직!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막은 바리케이드가 유미의 주먹질 한 방에 포탄에 직격한 것처럼 박살났다. 폭탄이 터진 것처럼 사방으로 비산하는 물건들. 그 물건들 사이를 뚫고 덩치 큰 사내가 유미를 향해 망치를 휘둘렀다.
“타버려!”
화륵!
유미를 향해 망치를 휘두르던 사내의 두 눈에 불꽃이 피었다. 유미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진 망치가 흔들렸다. 살짝 망치를 피한 유미가 남자의 무릎에 로우킥을 먹였다. 무릎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풀썩 주저앉았다.
“크윽!”
무릎이 꺾인 남자의 입에서 탄식처럼 신음이 새어나왔다. 사내는 두 눈이 안 보이고 다리가 무력화됐어도 손에서 망치를 놓지 않고 허공을 향해 붕붕 휘둘렀다. 유미는 그 헛된 저항을 가볍게 무시하고 사내의 두 팔을 성냥개비 부러뜨리듯 박살 냈다.
“끄아아악! 사. 살려줘!”
사내가 비명을 질렀다.
“시끄럽다. 입 막고 가자.”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가죽 허리띠로 사내의 입을 틀어막는 유미였다. 그런 유미와 사내를 바라보는 눈빛들. 안에 숨어있던 여자들과 아이들이 오들오들 떨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한 눈으로 보기에도 무기를 들고 있던 사내들과 살집이 차이 났다. 그나마 여자들은 괜찮았지만 아이들의 상태는 말 그대로 피죽도 제대로 못 먹은 것처럼 앙상하게 말라있었다. 사내를 잡았지만, 여자도 하나 있어야 했다. 여기에 있는 여자들 가운데 육체 능력을 각성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내 눈빛을 피해 아이들과 여자들이 고개를 숙였다.
“가자.”
“여기 이 사람들 우릴 봤는데 그냥 가요?”
유미가 이대로 목격자들을 두고 가도 괜찮겠냐고 말했다. 탄창이 폭발해 손과 몸통에 화상을 입은 자들이 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이곳으로 쳐들어온 자들이 이 사람들을 그냥 둘 리 없었다. 먹을 게 부족해서 싸우는 마당에 할 일 없는 입을 그냥 둘 리 없었다. 내가 포탄이 터지고 총성이 울리는 밖을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이자. 유미도 알아챘는지 꽁꽁 묶인 사내를 봇짐 지듯 지고 몸을 일으켰다.
“사. 살려주세요.”
우리가 몸을 일으키자.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여자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안 죽이니까 조용히 해.”
“우리 그냥 갈 거니까 울지 마요.”
유미가 내 말을 부연 설명했지만, 그 소리에 여자가 더 달라붙었다. 그 여자를 시작으로 여자들과 아이들이 각자 소리를 높였다.
“데려가 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사람들이 갑자기 흐느끼며 애원했다. 뭐지 이건? 여길 지키는 사람들을 공격했는데 우리보고 데려가 달라고? 혹시 이 사람들은 전리품처럼 취급됐던 사람들인가? 모를 일이었다. 울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떼버리듯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사지가 부러지고 꺾인 남자를 한쪽 구석에 던져놓고 미리 찍어둔 건물을 살폈다. 읍내 중심가에 있는 농협 마트 건물이었다. 이쪽에는 무장한 사람들이 조금 더 있었다. 육안으로 확인되는 인원은 6명이었다.
“능력자로 보이는 여자들이 있어요.”
“보인다. 확인했어.”
능력자로 보이는 사람이 둘이나 됐다. 소방용 도끼를 한 손에 하나씩 양손에 들고 있는 여자와 철근과 쇠파이프로 만든 창을 들고 있는 여자였다. 여기에 중기관총 하나에 소총수 둘까지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은 뭔가 중요한 곳 같았다.
“창고인데. 식량 창고일까요?”
“그런 것 같다. 내가 화기를 정리하고 엄호할 테니까 알았지?”
“네.”
유미가 눈을 번뜩이며 목표를 노렸다. 염화 능력의 최대 거리는 25m 안정적으로 쓰려면 20m가까이 접근해야 했다. 유미가 옆으로 돌아 돌입할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셋을 센 뒤 돌입하라고 수신호를 보냈다.
[하나]
[둘]
[셋]
유미가 몸을 숨긴 건물에서 뛰쳐나와 그대로 무장한 여자들을 향해 내달렸다. 중기관총의 총구가 유미를 향해 겨눠졌다. 반대편에서 내가 점프를 해 몸을 허공에 띄우며 중기관총의 탄약상자를 불을 붙였다.
화륵!
막 총구에서 불을 뿜으려던 중기관총이 폭발하며 안에 있던 탄약 상자들이 연속적으로 폭발했다. 하나가 터지자 곁에 있던 수류탄과 탄약 상자들이 연쇄 폭발했다.
무기를 쥐고 있던 여자들이 폭발에 휘말려 뒤로 튕겨나갔다. 튕겨 나온 여자를 향해 제비처럼 날아간 유미가 한 명을 순식간에 제압했다. 꼼꼼하게 쓰러진 여자의 팔과 다리를 밟아 부러뜨려 무력화시키는 유미였다.
“이야아아앗!”
고함소리와 함께 연기와 화염을 뚫고 창을 든 여자가 나왔다. 몸에 불이 붙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유미를 향해 창을 찔렀다. 빨랫줄처럼 팽팽하게 찔러오는 찌르기. 온몸이 불타오르면서 달려드는 모습은 마치 불꽃 그 자체가 공격하는 것 같았다.
“흥!”
유미는 그 처절한 일격을 보고 낮게 콧소리를 냈다. 유미는 바닥에 떨어진 소방용 도끼를 집어 찔러오는 창의 방향을 살짝 바꾼 뒤, 반대편 손으로 창을 휙 낚아챘다.
끼이이익-
유미의 왼손 하나로 엿가락처럼 휘어지는 창대. 창을 잃은 여자가 관성을 이용해 그대로 유미를 향해 주먹을 날렸지만, 소용없었다. 퍽!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잃은 몸통이 불꽃에 휩싸여 꿈틀거렸다.
유미가 여자들을 처리하는 동안, 창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농협 마트 건물에는 은행시설과 마트, 우체국이 한꺼번에 붙어있었다. 전기가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은 발전기를 돌려 전력을 생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식료품이 있어야 할 선반이 텅텅 비어있었다. 식료품이 없다면 이곳을 왜 지키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기름으로 발전기를 돌릴 이유가 없었다. 유미가 생포한 여자와 남자를 짐짝처럼 둘러메고 안으로 쏙 들어왔다.
“방어선이 뚫린 것 같아요. 좀비들이 길 저편에서 보였어요.”
“그래? 알았어.”
“어라? 여기 텅 비었네요.”
“안쪽 창고에 쌓아뒀을까?”
식량이 있다면 챙겨가는 게 좋았다. 우리도 식량이 간당간당했다. 창고를 열었다. 기대와는 달리 꽝이었다. 별달리 식량으로 쓸 만한 게 없었다. 통조림 몇 개가 있었지만, 읍내에 있는 생존자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없이 적은 분량이었다. 이걸 지키려고 중기관총까지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