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 (1)
1톤 트럭에 한가득 보급품과 무기 폭발물을 싣고 가자, 인아와 유미가 날 반겼다. 도도독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유미의 발걸음 소리에 전신을 긴장시켰다. 포탄처럼 날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유미가 몇 걸음 앞에서 딱 멈춰 섰다.
“응? 왜?”
갑자기 멈춰선 유미를 보곤 뭔가 문제가 있나 싶었다. 유미가 날 보고 빙긋 웃었다.
“히힛. 지금 막 안기길 기대하셨던 거죠? 그쵸?”
“응? 아니. 딱히 꼭 그렇다고 하기...”
우물쭈물하는 순간 퍽-소리가 나게 달려든 유미였다. 달려들 때의 충격도 충격이지만, 허리를 감싼 가녀린 두 팔이 압착 프레스 같았다.
“가. 갈비.”
“그렇게 또 혼자 갈 거예요? 네?”
“아니. 이유는 설명했잖아. 정신공격에 면역이...”
우두둑- 프레스가 조여졌다.
“허. 허리! 허리!”
“정신공격에 면역이 있다는 사람이 왜 표정이 그런데요?”
“얼굴? 내 얼굴이 어때서? 이건 허.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 때문에...”
내가 버둥거리자 옆에 있던 인아가 손거울을 보여줬다.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은 기괴한 가면을 쓴 것처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괴이한 표정. 이 표정 때문에 유미가 달려오다 멈췄던 것이다.
억지로 웃어보려고 했지만, 안면이 푸들푸들 떨릴 따름이었다. 인아가 억지로 표정을 바꿔보려는 내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건 처리하셨나요?”
“아마도. 주변을 전부 불태웠으니까.”
“그렇군요. 일단 우선 쉬세요.”
“그래.”
옆구리에 유미를 매단 채로 전원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하룻밤 푹 쉬고 나면 괜찮으리라 생각했었는데 그대로였다. 꼭 남의 얼굴을 뒤집어 쓴 것 같았다. 이질적인 감각. 잘 변하지 않는 표정. 억지로 표정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셨나요?”
인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마당에 정신적인 충격을 무슨.”
픽-웃으며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표정이 따로 놀았다.
“우- 그런 표정 지으니까 더 이상해요. 그냥 말해요.”
유미가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한소리 보탰다.
“정신적 문제는 자기 스스로는 모르는 법이니까요. 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하기도 힘들고요.”
인아가 못내 걱정스러운지 조심조심 이야기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그렇겠지.”
“어떻게 잡았어요? 정신공격인데 그냥 무시할 수 있었어요? 아니지 무시했다면 지금 이럴 리가 없으니까...”
궁금한 표정으로 밝게 말하다, 내 얼굴을 힐끔 보고는 목소리가 작아지는 유미였다. 텁-유미 머리에 손을 얹고 상황을 설명했다. 지독한 환상에 빠졌고 그 환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차도로 뛰어들었다는 말을 하자. 옆에 가만히 있던 인아가 내 옆구리를 꼬집어 비틀었다.
“윽! 왜? 왜 꼬집는데?”
일반인이었으면 살점이 뚝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인아가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하는 건 처음이었다. 옆구리를 매만지며 멀뚱멀뚱하게 쳐다보자, 인아의 눈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몰라서 하는 말이에욧?”
“아니. 모르니까 하는 말이지.”
“정신이 병들면 몸도 병드는 데, 환각에서 깨겠다고 자살을 해요? 진짜로 정신이 죽어버렸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요? 그냥 앞뒤 없이 뛰어들었다고요? 그게 할 말이에욧?”
“아. 아니. 그게. 너무 리얼해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니까.”
“그럼 지금은요?”
인아의 표정이 무서웠다.
“지금이라니?”
“지금은 이게 현실이라고 어떻게 장담하죠?”
“그야...”
“의심스러운 일이 생기면 바로 자살하신 건가요?”
정신공격의 무서움. 환상의 무서움이었다. 지독하게 현실 같은 환상. 만약 과거로 돌아간 환상이 아니었다면? 과거로 돌아갔음에도 나중에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해 내가 미친 게 아닐까 싶었었다.
그년에게 학을 떼지 않았다면? 나경이 실험관찰자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그녀와 가장 행복했었던 순간으로 돌아갔다면? 나는 그 환상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회귀를 했다거나 꿈을 꿨다거나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인아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사실과 같은 환상. 너무나도 생생한 환상이라면 지금 이 현실이 환상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증명하겠느냐는 것이었다. 환상이라고 단정 짓고 자살을 선택했을 때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다. 미안.”
“하아- 정말 좀.”
인아와 유미를 끌어안았다. 유미의 입이 삐죽하게 나왔지만, 그것도 귀엽게 보였다. 이럴 때 웃어줬으면 좋았는데. 내 양 볼을 인아와 유미가 각각 쓰다듬어왔다.
*
유미가 팔뚝을 걷어붙이고 1톤 트럭에 있는 짐을 내리려고 했다.
“유미야 내리지 말고 그냥 둬.”
“왜요? 정리해야죠?”
대충 쓸어 담았기 때문에 이것저것 대중없이 엉망이기는 했다.
“바로 떠나려고.”
“여기서 며칠 쉬지 않고요? 아직 얼굴도 그대로잖아요? 쉬는 동안 정리해두는 게 낫지 않겠어요?”
동맹의 추격대가 세종시에서 괴멸됐으니, 상황을 파악하고 새로 추격대를 편성해 추격을 시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곳에서 오래 있기는 힘들었다. 내가 1톤 트럭을 몰고 올 정도로 도로 사정이 좋았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트럭을 타고 쫓아 올라오면 금방이라서, 겸사겸사 해야 할 것도 있고 움직이자..”
유미가 막 꺼내려던 짐을 그대로 내려놨다.
인아는 내가 잡아온 슬레이브를 장악하고 있었다. 정신공격에 당한 슬레이브라 조금 꺼림 직했지만,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방에서 나오는 인아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인아는 ‘조금 반응이 달라서요.’라며 말을 아꼈다.
“뭔가 이상하면 바로 말해.”
“알겠어요. 그럼 지금 바로 출발하실 건가요?”
“네가 슬레이브들을 정리하는 대로 가려고.”
“한 20분 쯤 걸려요. 안에 있는 짐부터 챙길게요.”
“그래.”
인아는 트럭 짐칸에 걸터앉아있는 유미를 살짝 보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있을 때는 괜찮았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솔직히 조금 불편하다고 했다. 그래도 예전처럼 살기를 뿜어내거나 대놓고 적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유미도 인아를 인정한 것 같았고 인아도 마찬가지였다.
“슬레이브 말고 빗치는 없었어요?”
안으로 들어가는 인아의 뒷모습을 보고 유미가 말했다.
“알잖아. 동맹에서는 변종이든 빗치든 전부 숙청한 거.”
“그럼 레드 존에 있는 그것들은 어디서 온 거죠?”
동맹에서 빠져나간 걸까? 숙청당할 것을 알고 미리 빠져나간 것일까? 동맹과 함께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처음 식육 빌딩에서 미도와 미노를 만났을 때도 레드 존이 있었다. 거의 사태 발생 초기부터 레드 존에 있었다고 봐야 했다.
“음. 확실히는 모르겠어.”
“그리고 그 식물이요. 조각이라도 챙겨오지 그러셨어요.”
“전부 태워버려서 말이지. 그럴 정신도 아니었고.”
유미가 내가 빼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이것저것 자기 생각을 말했다. 처음에 벌벌 떨던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나도 그렇고 유미도 그렇고 우리는 이 세상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신발에서 자란 이끼와 넝쿨을 조금씩 담았던 것처럼, 괴식물의 넝쿨 부분이나 탄 조각을 챙겨볼까 하는 생각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신공격을 받고 난 뒤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저 빨리 없애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따져보면 표본을 채취하기 위해 접촉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괴식물이 사람의 몸에 파고들어 갔던 것이 떠올랐다. 준비 없이 표본을 채취하겠다고 하다, 감염되는 경우도 생각해야 했다. 무엇보다 위험한 것은 정신공격이었다. 정신간섭이나 정신장악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현실과 구분할 수 없는 환영이라니, 그것도 현실과 구별할 수 없는 환영이었다. 그런 환영능력을 가진 괴식물의 샘플이라니 폭탄도 그런 폭탄이 없었다.
“괴식물도 지능이 있어 보였다고 하셨죠?”
“처음에는 몰랐는데 나중에는 그게 유조차까지 치우려고 하더라고.”
“그럼 도망쳤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도망쳐?”
“네. 음 식물이라 머리가 좋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영화가 생각나서요.”
“어떤 영화?”
“괴물 나오는 영화요. 괴물이 사람들 대피하는 대피소에 숨어서 위험을 피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래?”
내가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짓자 유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니까. 머리가 똑똑한 괴물이라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대피시설을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이에요.”
“흐음. 그런 시설을 괴물이 어떻게 알고? 식물이잖아.”
“정부청사 건물 지하에 재난대비 시설이 있다고 했잖아요. 괴식물이 안에서 사람들을 공격했다면 생존자들은 지하대피소로 숨었을 거고. 그놈은 사람들을 쫓아 지하대피소로 갔을 테니까 그것도 지하대피소를 알 거 아니에요.”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내 말에 유미의 표정이 환해졌다.
“만약 괴식물이 지하대피소로 숨었으면 그걸로 당분간은 안전해.”
“예? 어째서요?”
“건물이 무너졌거든.”
지하에 대피시설이 있다고 하더라도 건물이 붕괴하다시피 했으니, 안쪽에서 밖으로 나오기는 힘들었다. 문제가 된다면 동맹에서 현장 조사를 하겠다고 무너지고 불탄 건물 잔해를 전부 들쑤시는 건데, 동맹에서 작심하고 현장 발굴을 할 거라고 생각하긴 힘들었다.
“그렇군요. 그. 저는 아니지만...”
“응? 뭔데? 내가 놓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편하게 말해 봐.”
“음. 이렇게 말하기는 그렇지만 아깝지 않으세요?”
“아깝다니?”
“그 정신능력이잖아요...”
유미가 머뭇머뭇 나를 보며 말을 줄였다. 섭식 진화 가능성을 말하고 싶었나 보다. 내가 맨홀 변종을 먹고 심적으로 많이 괴로워했던 것을 알고 있어서 대놓고 먹어보자고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섭식 진화도 위험해. 맨홀 변종을 흡수했을 때도 그렇지만, 한계 이상으로 변이되다가는 세포붕괴가 일어날 거야.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먹어야 할까?”
“샘플이라도 있으면 나중에 쓸모가 있지 않을까 해서요.”
‘샘플이라.’
샘플을 가지고 있기도 위험했다. 괴식물의 번식력이나 생존능력 어느 정도 크기에서 정신파를 발산하는지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위험한 샘플을 가지고 다니다가 병이 깨지기라도 한다면? 위험했다.
유미와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동안 인아는 슬레이브 셋을 장악했다. 방문을 열고 나온 슬레이브 셋은 두 손에 짐을 한가득 들고 있었다. 짐을 들고서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이전의 슬레이브들과는 조금 달랐다. 뭔가 어색한 느낌이었다. 인아가 뒤따라 나오며 말했다.
“짐은 차에 실어.”
슬레이브 셋이 쪼르르 병아리 마냥 일렬로 걸어갔다.
“다 됐어요.”
짐을 싣고 있는 슬레이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확실히 미묘하게 어색한 느낌이 확실했다. 인형 같은, 병기 같은 슬레이브라기보다는 뭔가 어설픈 군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다른데?”
“알아보셨네요. 저도 막 알았는데요. 다른 슬레이브들과는 좀 달라요. 한 2~3할 정도 기억이 있는 것 같아요.”
“기억이? 그럼 장악하지 못한 거야?”
“그렇지는 않고요. 제 명령에 따르는 것도 확실하고 연결된 것도 확실하기는 해요. 근데 뭐랄까. 다른 일반적인 슬레이브들보다는 조금 더 사람 같다고 할까요? 몸을 사리는 부분도 있고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도 하기도 하고. 그래요.”
“명령을 따르는 것처럼 속이는 건 아니고?”
“연결된 느낌은 속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명령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네.”
“그럼 바로 가자.”
트럭에 슬레이브들과 시로를 싣고 바로 출발했다. 중간중간 버려진 차들이 도로를 가로막았지만, 치우는 건 금방이었다. 추격을 피하기 위해, 비포장도로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면서 사방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강원도 방향으로 가는 도로를 타자 유미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먼저 강원도로 간 사람들과 합류하는 건가요?”
“바로 가지는 않고. 일단 제약회사나 연구소 먼저 들러보려고.”
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로를 데리고 강원도로 떠난 사람들과 합류하는 건 무리였다. 시로 녀석 약하기는 해도 정신계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데리고 가면 문제를 일으킬 게 뻔했다.
“약부터 만들게요?”
“어. 시간이 지날수록 만들기 힘들 테니까.”
“재료는 있을까요?”
“일단 중화제도 넉넉하게 있으니까, 다른 성분이야 필요하면 구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