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도시 (6)
“왕?”
“그래 왕. 네가 원하는 게 자유라고 했지? 그래. 이 세계에 살면 너에게. 아니, 너희에게 자유가 있을 것 같아? 정점에 서지 않는 이상 자유는 없어. 지배하거나 지배당하거나, 실험하거나 실험체가 되거나, 그게 진실이지.”
“......”
“너는 우리에게 발각됐어.”
시로는 눈꼬리를 휘며 말했다. 동맹에 발각됐으니, 동맹은 날 그냥 두지 않을 거란 소리였다.
“우리는 너를 포기하지 않아. 설령 내가 죽더라도 말이지. 조금 씁쓸하지만 그게 사실이지. 네가 가지고 있는 가능성은 그런 것이거든. 저울을 단숨에 한쪽으로 기울게 할 가능성. 그래 가능성 그 자체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의미 있는 존재야. 그런 존재를 우리가 포기할 것 같은가?”
“......”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아. 그런 추적자를 뒤에 두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끝없는 추격과 싸움이 있을 뿐이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너에게 자유란 없다. 그럼 어떻게 할 건가? 너는 동맹에 속한 모든 사람을 전부 죽일 건가? 네 자유를 위해? 수백, 수천, 수만이 넘는 사람들을 전부 죽여서라도 네 자유를 추구하겠다는 건가? 아니면 얌전히 잡힐 건가?”
“......”
“연방에 우리 스파이가 있듯, 우리 안에도 연방의 스파이가 있겠지. 우리가 아는 것은 곧 연방도 알게 된다는 소리다. 너는 우리에게 추격당할 뿐만 아니라 연방에도 노려진다는 소리야. 네 곁에 붙어있는 그 여자처럼 말이지.”
“그게 무슨 소리지?”
“우리도 알고 있단 말이지. 연방은 네 곁에 붙어있던 여자. 그래 유미라고 했던가? 그 여자는 분명 슬레이브를 개량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뿐. 진정한 가치는 너에게 있다는 걸 연방 놈들도 알아챌 거다. 결국, 연방도 너를 노리겠지. 애초에 너와 여자가 함께 있으니 추격하는 병력은 두 배가 되겠군. 크흐흐.”
“그래서?”
“?”
“그래서 어쩌라고?”
내 비꼼을 시로는 다르게 생각했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결단을 내리라는 거다!”
“결단?”
“결단이다.”
“왕이 되라고?”
내 질문에 시로가 미소 지었다.
“왕이 되는 거다. 네가 원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 파편을 분석할 수 있다면. 광역 정신지배를 할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것을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추격자들을 네 노예로 만드는 것도 모든 것을 잊고 돌아가게 하는 것도 네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
“너? 미쳤냐?”
“통제할 수 있다는 건, 지배를 의미하는 거다. 지배하는 자가 왕이고 신이지. 권력이 왕이었고 자본이 왕이었다면 이 변한 세상에서는 힘이 왕이자 신이다. 나와 함께라면 넌 왕이 될 수 있다.”
시로의 장엄한 웅변에 대답 대신 스펙을 넣었다. 치익- 기습적으로 주사를 놓자, 시로의 표정이 황당하다는 표정에서 점점 구겨진 표정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어째서? 왜?’라는 표정이었지만, 나중에는 분노만 남은 얼굴이었다.
“이. 미친- 고노야로. 이. 이게 무슨 짓이냐. 네놈 제정신이냐!”
“개소린 됐고.”
치익- 중화제를 연이어서 주사했다. 시로가 분노를 참지 못했다.
“하아- 이래서 조센징들을 글렀다니까. 징징거리기만 하고 할 줄 아는 게 없어. 왕이 되는 것도 두려워서 질질 짜는 새끼들. 종족 특성인가? 지배할 용기도 없고 싸울 용기도 없으면서 자유만 찾는 병신 새끼들. 노예근성에 찌들어서는...”
칙-다시 스펙을 놨다. 시로의 얼굴에 경련이 일어났다.
“칙쇼. 빠가.”
“그따위 도발은 해봐야 소용없다.”
중화제도 추가로 주사했다. 칙-소리와 함께 중화제가 시로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싸구려 도발.’이라는 말에 시로가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스펙 주사기를 눈앞에서 흔들어주자 입을 다물었다.
“네가 말하는 왕이란 고작 이런 거다.”
“......”
정신지배로 지배하는 거나, 공포로 지배하는 것. 약물로 지배하는 것의 본질은 같다.
“인정할 수 없다고? 아니라고?”
“......”
시로도 그걸 아는지 입을 다물고 눈을 감아버렸다.
“뭐. 됐다.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말이지.”
“......”
절반으로 줄인 양이기는 했지만, 제법 많은 양을 주사했다. 슬슬 적당히 조절하지 않으면 시로의 세포가 견디지 못하고 괴사할 가능성이 있었다.
“너를 뭘 믿고? 너 같은 새끼가... 날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걸 액면 그대로 믿으라고? 짖지 마라. 간 보지 말란 말이야.”
“......”
시로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면, 내가 네놈의 말에 혹할 거로 생각했나? 추격이 붙을 거다? 그러니까 자유로우려면 지배해라? 미래를 위해서는 너를 동료로 삼아라? 왕을 시켜준다?”
“......”
현실은 소년만화가 아니다. 어제의 적에게 ‘동료가 되자.’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 않다. 원수같이 생각했던 적을 알고 봤더니 적에게도 암울했던 과거사가 있었다. 그러니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고 건설적인 미래를 위해서 원수를 용서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 지금 상황에서 그런 교훈적인 이야기가 통할까? 눈을 번들거리며 기회만 노리고 있는 놈을 믿으라고?
증오는 증오를 낳을 뿐이고, 피를 씻을 수 있는 것은 피밖에 없었다. 마루타라고 지껄인 그 순간부터 놈은 억제제나 백신을 만들면 그대로 처분할 처분 대상이었다. 놈도 그걸 알고 ‘왕이 되라며.’ 자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했겠지만, 과연 그것뿐일까?
“그럼 네놈은 과거 때문에 현재의 기회를 버리겠다는 건가? 감정 때문에 이 기회를 발로 차버리겠다는 건가?”
시로가 이를 갈며 말했다.
“기회가 어떤 기회냐에 따라 다르겠지. 내가 보기에 지금은 기회가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저열한 함정에 굳이 걸릴 필요가 있을까?”
“네가 원하는 게 자유라면! 설령 함정이라도 가야 하는 게 아니야! 함정 속에 길이 있다면 함정을 이용하면 되는 일 아닌가?”
혓바닥이 미끄러운 놈이었다.
“개소리라고 했더니 이젠 대놓고 짖네?”
시로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안대를 채웠다.
“으읍-흡-으으읍.”
“닥쳐!”
일정 범위 안에 있는 불특정 다수에게 정신파를 쏘아내는 그것의 능력은, 광역 정신지배나 정신간섭의 단초가 될 수 있었다. 연구한다면, 누가 연구할까? 연방이 그토록 확보하고 싶었던 광역 정신지배 가능성이 바로 곁에 있었다. 그 파편을 확보해서 누가 연구할까? 내가? 아니면 시로가?
그걸 제일 처음 다루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로가 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을 만들어내고 확인하는 사람은 그 기술을 연구하도록 명령한 권력자들이 아니라, 실험실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이었다. 그렇다. 어떤 기술이든 그 기술을 처음 손에 접하는 자들은 연구자. 과학자들이었다.
그래서 연방에서 동맹이 갈라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맨 처음 시로가 나에게 시도했던 정신간섭. 약한 수준의 정신지배능력 같은 힘으로 연방의 보안을 무력화시키고, 바이러스를 유출할 수 있었다. 시로만 그런 능력이 있을까? 과학자들은 연방의 족쇄를 풀기 위해 이런저런 짓을 했을 것이다.
그래놓고 나를 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개소리도 그 정도면 아름다울 정도다. 지금 저기에 있는 저것의 광역 정신지배능력을 연구해서 규명하게 된다면, 시로 자신이 그 능력을 손에 넣으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
하루가 지나자 힘들어했던 인아와 유미는 점차 안정을 되찾았다.
“괜찮아?”
“예. 이제 괜찮아요.”
“슬레이브들의 소리는?”
“그래도 어제처럼 머리를 울릴 정도는 아니에요.”
괜찮다고 하는 인아였지만, 얼굴엔 아직도 피로가 남아있었다. 인아가 슬레이브에게 직접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통신가능 거리는 그렇게 길지 않았다. 이 정도까지 거리를 벌렸는데도 인아에게 영향을 준다는 건, 확실히 위험했다.
“동맹 측에서 추격을 시작할 것 같아.”
“그럴 여유가 있을까요?”
탈출할 때 숲을 태워 곤충들을 몰아넣었으니, 괜찮지 않으냐는 소리였다.
“곤충은 불에 약하니까. 오늘이나 늦어도 내일이면 진압될 거다. 진압된 뒤에는 추격을 시작하겠지.”
인아와 유미에게 시로가 한 말을 해줬다. 시로는 사람의 욕망을 건드리려고 했다. 감정을 건드려 이성을 흔들고 달콤한 말로 유혹했다. 왕이 되라고. 왕이 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것은 그 누구보다 먼저 그것을 차지하려는 속셈이었다.
나는 여러 가지 능력을 동시에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시로는 나를 필요로 했다.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서는 내 능력이 필요했으니까. 그러니 시로가 말한 그 모든 말은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말이었다.
“왕이 될 수 있으면 왕이 되는 것도 괜찮잖아요. 이용할 수 있으면 이용해서 왕이 되면요?”
유미의 말에 인아도 동의했다.
“유미 말이 맞아요. 그리고 그 왕이란 게 정신지배라면 곤충들이나 다른 식물에 먹힐지도 모르잖아요. 만약 곤충이나 식물에 통한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인아는 다른 쪽까지 생각했다. 바로 인근 지역에 거대 곤충들이 돌아다녔는데 세종시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건 곤충들이 세종시 쪽으로 접근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왜 접근하지 않았을까? 시내에 있는 무엇인가를 경계한다는 소리였다. 아니면 시내에 있는 무엇인가가 곤충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 곤충들을 막았다면, 그건 일종의 정신파 일 것이다.
식물도 마찬가지였다. 평택이나 오산에서 봤던 식물들에 세종시가 잠식되지도 않았다. 시로의 말대로라면 세종시에 남아있던 공무원들은 평택에서 뭔가를 가져왔다는 소린데, 평택에 갔다면 나와 유미의 신발에 달라붙었던 넝쿨 식물이라든지 이끼 식물이 번식했어야 했다. 번식해서 식물에 매몰된 도시가 돼야 했었다. 하지만 세종시는 단지 유령 도시가 됐을 뿐이었다.
“부식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사람과 좀비, 변종이나 빗치들 같이 움직이는 동물들이 씨가 말랐어. 무너진 정부청사 안에 있는 건 일반적인 식물이라고 보기엔 좀 이상한 놈이었고.”
내장처럼 꿈틀거리던 연녹색 넝쿨들이 떠올랐다. 건물 안에 있으면서 바깥에 있는 먹이를 유인해 잡아먹었다는 소리였다. 불을 질렀지만 소탕했을지는 미지수였다.
“시로의 말대로라면 그걸 그대로 두는 건 위험해.”
“네?”
“그럼요?”
“동맹이 우릴 추격하다 그것과 만나면 그걸 확보하려고 할 거야.”
“그럼 좋잖아요. 중간에 그것과 싸우면 우리만 좋은 거 아닌가요?”
유미가 말했다. 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라도 동맹 측에서 그것의 샘플을 채취하게 됐을 때를 말하는 거다.”
만에 하나라도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인아가 말렸다.
“그걸 없앤다고 하더라도 또 그런 게 생길 수도 있잖아요. 꼭 우리가 없애야 하나요?”
정신파에 학을 뗐는지 인아가 부정적으로 말했다.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나 혼자 가서 처리하고 올 테니까.”
“위험해요.”
“혼자 간다니요.”
유미와 인아가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어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정신계 공격에 면역이 있는 것 같아. 그게 내뿜는 정신파도 견딜 만했어. 그래서 가겠다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때로는 피해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위험을 그저 피하기만 해서는 더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었다. 시로의 반응으로 본다면 이번 일은 후자였다. 피하면 더 큰 위협이 될 일. 나는 정신계 면역이 있어 괜찮다고 하지만 인아와 유미는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이 정신지배에 걸려 나를 공격하게 된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는데 외면하고 그냥 가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리해도 후회니까.’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아야 했다.
*
홀로 세종시 정부청사 건물로 향하는 발걸음은 빨랐다. 그간 눈여겨 봐둔 주유소도 있었고 지나가면서 찾아야 할 건 탱크로리(유조차)만 있으면 됐다. 탱크로리와 LPG 가스통을 가득 실은 트럭을 동시에 폭파하면 안에 뭐가 있던지 태워죽일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빨리 탱크로리를 찾을 수 있었다. 약간 외곽에 있는 주유소에 주차된 탱크로리였다. 유류 탱크 안에는 등유가 절반가량 채워져 있었다. 나머지는 휘발유로 채워 넣고 유조차를 운전해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유류배달용 유조차를 2대 발견할 수 있었다. 2대 모두 난방용 백등유가 반쯤 채워진 소형 유조차였다. 전부 휘발유를 채워 넣은 뒤, C4로 시한폭탄을 만들어 붙였다. 대형 유조차를 운전해 정부청사 건물로 향했다. 가까이 접근할수록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 느낌이 났다. 뇌를 헤집는 느낌. 머리를 콕콕 쑤시는 감각이 점차 강해졌다.
어제보다 강해졌다.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지 확실히 어제보다 강해진 정신파였다. 검은 연기가 계속 올라오는 것을 보니, 하루가 지났지만 불길이 잡히지 않은 것 같았다.
끼이이이이익!
귀가 아니라 뇌로 직접 전달되는 강한 정신파가 점차 강해졌다. 처음에는 무작위적인 정신파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직관적이고 직접적으로 뇌를 장악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필립이 내 능력을 봉쇄하기 위해 보여준 동영상이 떠올랐다. 동영상과 가청영역 밖에 있는 음파를 이용해 뇌를 흔들었었다. 그와 유사하게 이놈은 생명체의 뇌를 직접 흔들고 있는 것이었다. 어제보다 강해졌다는 건 어제보다 익숙해졌다는 소리였다.
‘익숙해졌다? 불이 나서 괴로워하는 게 아니라?’
멀리 검은 연기가 나는 정사건물 근처에 세워진 군용트럭이 보였다. 동맹 측이 사용하는 군용트럭이었다. 시로를 납치한 우리를 잡겠다고 추격하던 병사들이 그대로 정신지배에 걸려 버린 것이었다. 저절로 욕이 나왔다. 슬레이브와 링커까지 대동해서 추격했겠지만, 정신파를 견디지 못한 것 같았다.
멀리 보이는 연녹색 넝쿨의 움직임. 어제는 그저 꿈틀거리는 정도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스륵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제법 빠른 움직임. 확실히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넝쿨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변이된 게 분명했다.
건물 밖으로 본체를 빼낸 식물은 괴이했다. 넝쿨이 서로 뒤엉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넝쿨들 아래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 넝쿨들은 사람의 몸속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산채로 사람의 몸에 뿌리를 내려 체액을 빨아먹고 있었다. 죽지 않을 정도로 체액을 빨아먹고 콧구멍과 입, 귀와 같은 구멍으로 넝쿨이 파고 들어가 있었다.
끼이이이이이!
강한 정신파가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