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류 (3)
머리통이 날아간 필립을 보곤, 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제가..”
무엇 때문에 놀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잡아.”
내 말에 인아는 혼란스러워했던 것을 지우고 작전대로 움직였다. 인아는 곧바로 피를 뒤집어 쓴 채, 붉게 피로 물든 종이 위에 뭔가 적고 있는 시로를 끌고 왔다. 바로 옆에서 시로가 끌려가고 필립의 머리통이 박살났음에도 레이나는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역시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욱신- 내리누르는 감각이 불확실했다.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확 젖혔다.
'뭐지?'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았다. 순간, 목이 있던 자리에 투명하게 흐르는 물의 궤적. 날카로운 물의 톱날이 뒤에 있는 대형 유리를 버터처럼 자르곤 물방으로 변해 사라졌다.
'이런 젠장할'
위기 감응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는 알렉스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쨍.
다시 유리창에 구멍이 뚫리며 붉은 머리 레이나를 향해 총탄이 날아갔다.
‘나이스!’
퍽!
솟아오른 물줄기가 벽을 만들어 레이나를 지켰다.
알렉스가 물로 방벽을 만들었다. 알렉스의 정신이 저격수의 총탄에 집중됐다. 그 틈을 타, 인아를 먼저 탈출시켰다.
[먼저 가!]
내 신호를 받고 인아가 시로를 끌어당겼다. 시로는 종이 위에 알아 볼 수 없는 무언가를 계속 적어대고 있었다.
“이리 내.”
“어. 어?”
종이를 뺏자 뭐라 감탄사를 내뱉은 시로가 이윽고 허공에다 뭔가를 끊임없이 적어대기 시작했다. 인아는 버둥거리며 허공에 뭔가를 적고 있는 시로를 자기와 묶은 뒤 바로 뛰어내렸다.
펄럭!
짙은 남색의 패러글라이더가 펼쳐지며, 인아와 시로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퍽! 퍽!
알렉스와 레이나를 향해 총탄이 쏟아졌다. 서로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있는 두 사람에게 동시에 총탄이 쏟아졌다. ‘어라?’ 인아의 슬레이브는 이제 간신히 저격총을 다룰 정도였다.
퍽! 퍽!
총탄은 자비 없이 계속 쏟아졌다. 알렉스가 묶여있는 동안 나도 탈출해야 했다. 지원사격에 힘입어, 로라가 두고 간 서류 상자를 집어 들고 유리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허공에서 기폭장치를 수류탄처럼 던졌다. 팅- 마지막 안전장치인 클립이 튕겨 나가며 기폭장치가 작동됐다.
콰아아아앙!
거대한 폭음과 불꽃이 확 뿜어졌다. 염화 능력을 사용해 불꽃을 막으려 했지만, 염화 능력이 발동되지 않았다.
“뭐? 뭣!”
화르르륵!
뜨거운 불꽃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불에 대한 내성과 재생력, 내구성이 강해졌기에 망정이지 그대로 통구이가 될 뻔했다. 가벼운 화상을 입었던 신체가 순식간에 재생됐지만, 문제는 등에 메고 있던 패러글라이더였다.
불길에 패러글라이더가 상했다면 그대로 투신자살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높이에서 추락한다면 끝장이었다. 지금도 추락하고 있는 상황,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빌어먹을!”
끈을 잡아당겼다. 불에 반쯤 타버린 끈을 끝까지 잡아당기자 패러글라이더가 펼쳐졌다. 덜컥! 공기로 된 손이 잡아채는 것처럼 추락하던 속도가 뚝 떨어졌다.
폭발음과 불꽃 때문인지 아래에 있던 경비병이 서치라이트를 켜고 하늘을 뒤지기 시작했다. 다행스럽게도 서치라이트는 주로 폭발이 일어난 호텔 고층주변을 중심으로 수색했다. 서치라이트의 수색을 피해, 조심스럽게 패러글라이더를 움직였다.
인아가 대기하고 있는 곳은 호텔 인근에 있는 임시 건물이었다. 박물관으로 사용했던 조립식 건물이 사태가 벌어진 뒤 그대로 방치된 곳이었다. 패러글라이더를 이용해 단숨에 거기까지 갔으면 좋았겠지만, 불꽃 때문에 바로 패러글라이더를 펼치지 못해 활공 거리가 짧았다.
공원을 끼고 있던 호텔이었기에 망정이지, 시내 한가운데 있던 호텔이었으면 벌써 발각됐을 것이다. 나무에 걸린 패러글라이더를 버리고 수풀을 이용해 인아가 대기하고 있는 폐건물로 향했다. 여기저기 손전등이 번쩍였다. 숫자가 많았다. 인근에 훈련장에서 훈련병까지 동원해 수색하는 것 같았다.
폐건물에 들어서자. 버려진 건물 특유의 냉기가 아니었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염화 능력을 다시 사용해봤다. 전혀 움직이지 않았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작게 파-륵-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나 했더니 꺼져버렸다. 반동인지 가벼운 두통이 생겼다.
‘영상과 전자파로 능력을 억제할 수 있다고?’
염화 능력은 당분간 쓸 수 없다고 봐야 했다. 혹시 텔레파시도 끊긴 걸까?
[페니. 곧 이동하려고 한다. 대기해.]
찡-한 두통만 생겼지 반응이 없었다. 텔레파시가 페니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어?’
내가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없다면, 인아도 자신의 슬레이브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격을 했지? 슬레이브에게 발각되기 전 저격을 하라고 미리 명령을 내려놨지만, 그렇게 타이밍 좋게 저격하는 게 가능할까? 우연히 그랬다고?
‘누군가 끼어들었다.’
인아와 빨리 합류해야 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염화 능력이 발동되지 않고 있었고, 페니에게 텔레파시도 보낼 수 없었다. 만약 위기 감응에도 문제가 생겼다면? 갑자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전시장이었던 폐건물 여기저기에는 난민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잘린 드럼통 속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이 언뜻언뜻 사람들의 얼굴을 밝혔다.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던 감자를 꺼내 먹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저 먹는 기계와 같았다.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 생각 없이 움직이는 몸짓. 자동차에 주유하듯 그들은 감자 껍질을 벗겨 입에 넣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씹고 기계적으로 다시 밀어 넣기를 반복하는 모습이었다.
“여기요.”
아주 작은 목소리. 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사람들의 눈을 피해 거적 대기로 가려놓은 한쪽 구석에 인아의 얼굴이 반쯤 보였다. 얼굴을 살짝 보이고는 다시 쏙 안쪽으로 들어가는 인아였다.
불길한 느낌. 뭔가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인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인아는 나를 제대로 보지 않고 들어갔다. 일반적이었다면 인아는 나를 보자마자 뛰어 나왔을 것이다. 얼굴도 제대로 보여주지 않고 살짝 보이고 들어가다니, 이상했다.
인아는 분명히 ‘여기요.’라고 위치만 알려줬다. 들어오라고 하지도 않았고 다른 소리도 하지 않았다. 오직 위치만 알려준 것이다. 위기 감응이 발현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내 집중력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게 맞았다. 나는 염화 능력이나 텔레파시를 쓸 수 없었다. 당연히 인아도 슬레이브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고 봐야 했다. 인아가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저격을 한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었다. 빗발치듯 쏟아진 총탄으로 보아, 일급 저격수가 최소 둘이라고 봐야 했다.
동맹의 주요 시설에 테러를 가할 수 있는 세력은 연방밖에 없었다. 로라가 떠올랐다. 우리에게 줬던 서류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로라가 연방의 스파이라면? 그래서 연방의 특수부대가 밖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면? 가능성 있었다.
인아가 사로잡혔다고 봐야 했다. 남은 무장을 확인했다. 백린 연막탄 1발, 수류탄 2발, 섬광탄 1발, 일반 연막탄 1발 이렇게 5발이 남아있었다. 백린 연막탄은 위험했다. 염화 능력이 먹통이 된 지금 백린이 튀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수류탄은 아웃. 터지고 나면 수색대가 벌떼처럼 몰려올 것이다.
연막탄도 아니었다. 인아가 사로잡혔다고 가정하면 섬광탄이 나았다. 섬광탄을 터뜨릴 준비를 한 뒤, 거적으로 막아 놓은 곳을 돌아 반대편 벽을 뚫고 들어갔다. 콰직! 전시 부스였기 때문에 벽은 석고보드로 만들어진 가벽이었다. 가볍게 안으로 뚫고 들어가 섬광탄을 던졌다.
섬광탄이 터지기 직전, 인아와 시로의 위치를 확인했다. 인아, 시로 외에 여자 셋이 있었다. 바이크 슈트처럼 전신에 달라붙는 무광 슈트를 입은 여자들은 고글을 쓰고 있었다. 여자들이 벽을 뚫고 들어온 나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순간, 섬광탄이 터졌다.
번쩍하고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안구를 태울 정도로 강력한 빛이었다. 섬광탄이 터지면서 시신경이 손상됐을 텐데도 여자들은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으어어어어.”
시로가 눈이 먼 것처럼 허우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인아는 두 팔이 뒤로 묶인 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인아와 시로를 둘러메고 밖으로 내달렸다.
퓩!
소음기를 단 총이 아니라 마취총 같았다. 5.56mm총탄도 뚫지 못하는 피부인데 마취총이라니. 단순한 마취총은 아니겠지만, 나를 생포하려는 것 같았다.
“으어어어어!”
퓩!
어깨에 걸친 시로가 마취총에 맞았는지, 버둥거리며 소리 지르던 것이 잠잠해졌다.
밖으로 나가자 무표정인 난민들이 좀비처럼 다가왔다. 좀비는 아니었다. 이들은 분명히 좀비가 아니었다. 마치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움직이는 사람들. 입 안 가득 베어 문 뜨거운 감자도 씹지 않은 채, 달려들었다.
퍽!
앞을 가로막는 사람을 걷어차자 풍선 터지는 소리를 내며 꼬꾸라지는 사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으랴아아앗!”
미식축구를 하는 것처럼 내달렸다. 달려가는 앞길을 가로막는 사람들에게서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부상을 당하고도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이게... 대체...”
아주 잠깐 발을 멈추는 순간, 등 뒤에서 총소리가 났다. 둔탁한 충격과 함께 인아의 몸이 작살에 맞은 물고기 마냥 펄떡였다. 위기 감응이 발동하지 않았다. 인아를 들쳐 매고 달렸기 때문에 인아를 겨눈 것은 나를 겨눈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위기 감응이 발동했어야 했는데, 발동되지 않고 있었다. 알렉스가 쏘았을 때는 불확실 했어도 감이 왔었는데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능력과 마찬가지로 위기 감응이 막힌 것이다. 예상했었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욕만 나왔다.
“빌어먹을!”
몸을 던져 가벽 뒤로 숨었다.
“젠장. 괜찮아.”
뜨거운 피가 등판을 타고 흘렀다.
“괘.. 괜찮아요. 빨리.”
“조용히 해. 상처부터 보고.”
특수탄인지, 총을 맞은 자리가 재생되지 않고 있었다. 레드 존에서 봤던 곤충형 변종이 떠올랐다. 그놈이 뱉어낸 소화액과 비슷한 효과였다. ‘연방인가?’ 놈들은 이걸 알고 있었단 말인가?
탕!
가벽을 뚫고 내 머리통 바로 옆에 총구멍이 생겼다. 가벽 건너편에 있는 내 위치를 파악하고 있단 소리였다. 벽 건너편에 있는 날 어떻게 봤는지 모르겠지만, 놈들은 내 위치를 알고 있었다.
‘적외선 감지기? 적외선 감지기가 벽 건너편에 있는 날 감지할 정도라고?’
몸을 일으켜 살짝 뒤를 보려고 하자 즉시 총성이 들렸다.
탕!
이어진 경고사격. 움직이면 쏜다는 소리였다. 총소리가 났으니 수색대가 총성을 듣고 이쪽으로 몰릴 것이다. 수색대와 놈들이 싸우는 틈을 타서 도주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수색대가 마구잡이로 총을 쏘는 것 같았다.
‘설마.’
로봇처럼 움직이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인근에 있는 난민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 그들을 이용해 수색대를 막았을 것이다. 놈들은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는 것 같았다. 냉정해야 했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자, 저쪽에서도 더 쏘지 않고 있었다.
멀리서 총소리와 아우성 소리가 들리고 비상사이렌이 도시의 밤하늘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곤 어떻게 탈출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으...읏...”
인아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나왔다. 지혈되지 않고 있었다. 인아의 상처부터 해결해야 했다. 총알에 무슨 처리가 됐는지 모르겠지만, 주먹 크기로 뚫린 상처가 재생되지 않고 있었다.
“참아.”
네이팜도 환부를 긁어내지 않으면 계속 화상을 입혔다. 레드 존에서 만났던 곤충형 변종의 소화액도 비슷했다. 그렇다면 이것도 그와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나이프로 인아의 상처를 도려냈다. 환부를 도려내자 다시 매워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도망치긴 힘들었다.
“어때 움직일 수 있겠어.”
“으... 네.”
인아의 팔을 묶은 케이블 타이도 특이한 재질이었다. 인아는 빗치의 카테고리에 속했다. 그러니까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과 내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인아가 케이블타이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프로 케이블 타이를 절단하려고 했지만, 칼날이 박히지 않았다.
“이게 뭐야?”
“그냥 가요.”
인아가 팔이 묶인 채 일어서며 말했다.
“숙여!”
놈들은 인아를 그냥 쏴버릴지도 몰랐다. 위기 감응이 반응하지 않는 지금은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슬레이브는? 연결되지 않아?”
“네. 명령을 내릴 수 없어요.”
“나도 능력이 먹통이야.”
“어떻게 하시게요.”
“놈들에 대한 정보는 없어? 놈들끼리 말 한 내용이라든지.”
“입이 무거운 자들이었어요.”
“무장은?”
“처음 보는 복장이었어요.”
“실루엣을 보니 여자 같았는데?”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힘이 굉장히 셌어요.”
“너보다?”
“그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굉장히 셌어요.”
“슬레이브?”
“일반적인 슬레이브와는 달랐어요. 움직이는 것도 훈련이 잘된 사람들 같았고.”
“무장은?”
“각자 처음 보는 총을 들고 있었어요.”
“바렛은 아니고?”
“네. 탄창을 꽂는 곳이 개머리판인가? 어깨에 대는 부분이요. 거기에 탄창을 꽂는 부분이 있었어요.”
허리춤에서 연막탄을 꺼냈다. 연막탄에 적외선 감지에 대해 교란 효과가 있다고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있었다. 얼마나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인아는 팔이 묶였기 때문에 버둥거리는 시로는 내가 챙겨야 했다. 시로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팔다리를 꽁꽁 묶었다. 시로를 옆구리에 끼고 연막탄을 들자, 인아가 달릴 준비를 했다.
“간다.”
"네."
툭- 연막탄에서 폭죽처럼 불꽃이 튀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