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195화 (195/261)

격류 (1)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사랑이 아니라 관찰이었고, 실험이었는데. 그러니 사랑이 없었듯, 운명도 없었다. 모든 것은 계획일 따름. 거미줄처럼 얽힌 인과의 그물 속에 있었을 뿐이었다. 의미 없이 나열된 요약문들이 하얀 백지위에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대상은 정신적 충격을 견디지 못해 능력을 상실한 것으로 추정.

과도한 스트레스가 능력의 개화나 상실의 원인이 될 수 있음.(별첨 12)

대상에 대한 추가적인 자극은 의미가 없는 것으로 보임.

굵게 지워진 부분이 계속됐다. 영어로 적힌 서류 마지막 장에 적힌 것은 최근 근황이었다.

.......

대상- 300m거리에서 행해진 저격을 회피, 예지능력이 잔존하고 있을 가능성 있음. 블랙울프 팀장이 직접 확인.

“블랙울프 팀장이란 거, 나상철을 말하는 거죠?”

인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노기를 참지 못해 고함지르는 것을 중간에 잘랐다.

“그 워...”

[도청에 주의해.]

[......]

막 화를 내려던 인아가 크게 쉼을 몰아쉬고 진정했다.

이 자료를 처음 받았을 때 느꼈던 위화감을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온전한 자료는 아니었다. 여기저기 굵은 펜으로 지워진 부분이 있었고, 실험과 관련된 내용이나. 관찰과 관련된 구체적은 내용은 전부 빠진 서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일종의 모르모트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충분한 서류였다. 로라가 가져온 상자에는 서류들이 빽빽하게 담겨있었다. 빽빽한 서류에 손을 댔다. 미약하지만 온기가 남아있는 서류들이 있었다. 미열이 남아있는 서류들은 막 복사기에서 뽑아낸 것이라는 소리였다.

처음 삐져나온 서류를 잡았을 때는 그런 미열을 느끼지 못했었다. 나와 관련된 서류는 예전에 뽑아놨던 것이라는 말이다. 서류의 상태도 그랬다. 새로 막 뽑은 서류와 뽑고 시간이 지난 서류는 미세하게나마 차이가 있었다. 예민해진 감각은 그 차이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빠져있고, 나와 관련된 기본사항이 적혀있는 서류임에도 누군가 미리 봤다는 소리였다.

‘나를 관심 있게 보고 있는 놈이 있다는 소리.’

평택 기지에서 가져온 자료는 아닐 것이다. 평택 기지에서 가져온 서류라면 알 수 없는 현상에 의해 종이가 삭아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곳 동맹의 연구원들이나 이 자료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는 가운데, 누군가가 나를 보고 있었단 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료에는 충분히 동맹을 증오하게 될지도 모르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관찰 실험계획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는 자료들을 내가 보게 만든 이유가 뭘까?

이 서류는 필립의 뜻일까? 목줄을 채우려고 하면서 반감을 살 자료를 넘겨줬다? 어째서? 반대로 필립의 뜻이 아니라면 로라 스튜어트가 이 자료를 개인적으로 넣었다는 소리였다. 왜? 언뜻 지나갔던 생각이 다시 구체화됐다.

동맹이 연방 내부에 스파이를 심어 뒀듯, 연방도 동맹 내부에 스파이를 심어놨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스파이가 로라 스튜어트라면? 내가 동맹에 붙지 않도록 하는 게 로라의 목적이라면?

“우선 다른 자료부터 읽어보자.”

“......”

인아는 억지로 참는 표정을 하곤 내가 갈라준 서류를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생각이 복잡했지만 복잡해지면 위험했다. 어떤 일을 할 때, 맨 처음보다 더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고 중간에 계획을 바꿔 버리기를 반복하면 나중에는 엉망이 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단순한 업무라면 계획의 수정과 조정을 통해, 비용적인 문제가 발생하는 정도로 그치겠지만, 지금은 목숨이 달려있고 미래가 달린 상황이었다. 처음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말아야 했다.

연구원을 납치하려고 이곳에 왔다.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독립적인 연구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고속 변이로 인해 생긴 위험을 없애고 싶어서였다. 이성을 잃고 단순한 변종이 되지는 않을까 싶은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연방의 스파이건, 동맹의 수작이건 일단 뒤로 제쳐놓는 게 맞았다. 분노로 달아올랐던 마음이 조금씩 진정됐다.

*

로라가 가져온 서류의 내용은 다양했다. 내가 요구했던 변종과 빗치의 변이에 대한 내용도 제법 많았다. 많았지만 그뿐이었다. 내 정보가 적힌 서류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내용이 굵은 펜으로 지워져있었고 전문적인 내용은 누락되어 있었다. 확인하고 읽을 수 있는 부분은 ‘어떤 실험을 했고 결과가 어땠는가?’ 정도였다.

“생각보다 오래전부터 실험하고 있었는데요?”

“음.”

“그럼 여기 연구원들은 전부 그쪽 사람들이었을까요?”

“아마도.”

서류의 태반이 영어로 된 문서였다. 어차피 중요한 부분이나 전공수준의 단어가 필요할 부분이 지워졌기 때문에, 인아와 내가 읽는 부분은 연구 결과와 가설 부분이었다. 미군 기지에서 흘러나온 연구진 가운데 절반은 동맹에 가담하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럼 생체실험을 한 사람들인데 믿어도 될까요?”

인아가 알아서 분위기를 잡아줬다. 자료를 넘겨줬으니,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게 분명했다.

“자료만 가지고는 이쪽 사람들이 주도했다고 보기 힘드니까 말이야. 연방 쪽으로 넘어간 사람들이 주도했을 가능성도 있고.”

일부러 감시하는 놈들이 듣기 좋게 말하면서 인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일반적인 변종이나 빗치 자료들은 제외해.]

비슷한 실함과 관찰이 반복되고 있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이 억제나 치료와 관계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과감히 치웠다.

[그리고 특이한 자료가 있다면 따로 분류해 둬.]

[알겠어요.]

고요한 가운데 서류 넘기는 소리만 났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아아앗- 가만히 앉아서 읽고 있으니 답답해 죽겠네.”

인아가 서류를 읽다 말고 스트레칭을 하며 크게 말하며, 슬쩍 나에게 신호를 보내는 인아였다.

[찾았어요. 변이 억제 자료가 있어요.]

나도 스트레칭을 하면서 대답했다.

“나도 힘드네. 이거야 원 제대로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전부 영어라. 미치겠네.”

[결과는?]

[절반 이상 성공했다는 내용이에요. 근데 추가 자료와 구체적인 도식은 의도적으로 뺀 것 같아요.]

역시 중화제를 만들 기술력을 보유한 동맹이 변이 억제제를 실험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실험했고 어느 정도 자료가 누적됐음에도 간만 보여줬다는 건.

[우릴 안달 나게 할 생각인가?]

[그리고 거대 개미 자료도 있어요.]

[그 이끼 같은 식물은?]

[그것도요.]

인아가 자기가 읽던 서류를 내밀었다. 동맹은 곤충과 식물이 급속도로 변이되고 있는 것을 연구하고 있었다. 거대화된 개미나 지렁이 같은 것들이 몇 개월 전부터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는 내용과 해부학적 소견, 유전자 분석에 결과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읽으면서도 뭔가 신경을 긁었다. 분명히 그랬다. 변종과 빗치의 변이 자료를 요구했었다. 그런데 요구하지도 않은 곤충의 변이나, 식물의 변이 파트가 끼워져 있었다. 필요한 자료기는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마치 단숨에 필요한 정보를 줄 테니, 제 갈 길로 가라고 누군가 등을 떠미는 느낌이라고 할까?

정신없이 자료들을 읽고 요약할 부분은 요약해 수첩에 따로 정리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창밖에 어둠이 깔렸다. 전력을 어떻게 충당하고 있는지, 도시 이곳저곳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삑. 필립 섀튼 씨가 함께 차를 마시자고 하십니다.

인터폰에서 로라의 목소리가 나왔다. 티타임이라, 어느 정도 자료를 줬으니 떠보겠다는 건가?

“그러지.”

=네. 그렇게 전해드리겠습니다.

내가 서류를 쳐다보자, 인아가 거의 반사적으로 널려있는 서류 가운데 두툼한 놈을 집어 들곤 말했다.

“저는 여기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을게요.”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인아가 오해했다. 도청을 피해 신호를 보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함께 가자.]

“혼자 가기 싫은데.”

내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인아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역시 척하면 착 알아듣고 대응해주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럼 이건 어떡하죠?”

“대충 정리해야지.”

“도와주세요.”

“자료가 많으니까 본 것과 보지 않은 게 섞이지 않도록 해. 뒤섞이면 그거 정리하다 말고 미쳐버릴지도 몰라. 너는 그쪽을 치워. 나는 이쪽을 정리할 게.”

[우리가 본 것과 보지 않은 것을 뒤섞어 놔.]

“저도 안다고요.”

[네.]

몇 시간 동안 자료를 던져주더니 갑자기 차를 마시자? 차를 마시러 자리를 비운 사이 자료를 회수할지도 몰랐다. 자료를 통째로 치워버릴까? 아니면 우리가 읽은 게 뭔지 찾으려고 할까?

서류를 한데 뒤섞어 모아 담은 뒤, 밖으로 나갔다. 로라는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와 인아가 배낭을 들고 있자, 로라가 배낭을 보고 말했다.

“짐을 가져가실 생각이십니까?”

“예. 짐을 가져가면 안 되나요?”

“아니요. 그럼.”

잠시 배낭을 쳐다보던 로라가 앞장서서 인도했다. 한국말을 참 잘하는 로라였다. 억양이 약간 이상했지만, 거북하지 않게 들리는 게 신기했다.

넓은 응접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자 필립과 레이나, 그리고 시로가 앉아있었다. 응접실 건너편 바에는 알렉스와 보안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나와 인아가 배낭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곤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흘흘. 짐은 두고 오지, 번거롭게 가져왔네. 흘흘.”

필립 수십 년은 한국에서 산 노인네 같았다. 그에 비해 레이나와 시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흘흘거리는 소리를 내며 필립이 분위기를 전환했다. 노인이고 책임자라 근엄하게 무게를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처음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생김새나 분위기와는 말을 잘하는 양반이었다.

“차는 뭐로 할 텐가? 커피? 홍차? 녹차?”

“커피로 하죠.”

“아가씨는?”

“저도요.”

필립이 손짓하자 뒤에 기립해 있던 여자가 커피를 내려놨다. 슬레이브. 그것도 상당히 상급의 슬레이브로 보였다.

“그래 자료는 어떤가? 괜찮던가?”

“어휘가 부족해 읽기 힘들었습니다.”

“하긴, 읽는데 힘들었겠어. 요즘에는 스마트 폰으로 단어를 찾고 번역기를 돌려서 번역하고 그러니까. 그래서 지식은 여기에 차곡차곡 넣어둬야 하는 게야.”

필립이 자기 머리를 검지로 톡톡 두들기며 흘-하고 웃었다.

“그래서, 왜 부르셨습니까?”

흘-하고 웃던 필립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처음 봤던 그 차가운 광기가 담긴 눈빛에 불이 들어왔다. 삑-소리와 함께 필립이 앉아있는 휠체어에 달린 터치스크린에 뭔가 메시지가 떠올랐다. 필립은 그걸 살짝 보고는 입을 열었다.

“자료를 봤으니 알겠지만, 우리에게는 변이를 억제하는 기술이 있네.”

“......”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불안 때문이 아닌가?”

필립은 늙은 생강이 맵다는 걸 보여주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는 연륜 때문인지, 내가 가진 불안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모르는 척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 원두커피의 씁쓸한 맛이 미각을 자극했다.

쓴맛이 혀를 찌르고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당황스러웠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틀. 그래 이틀 뒤에 검사하자고 했다. 자료를 읽은 시간을 준다고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런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뭘까? 3~4시간 만에 자기 말을 번복해야 할 상황이 됐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무슨 일 때문에 필립이 움직였을까?

결코, 단순한 일은 아닐 것이다. 자료를 던져주고 읽게 시간을 준다고 했던 필립이 나를 다시 보자고 할 정도로 큰일은 뭘까? 필립은 그걸 감추고 내 불안을 자극하고 있었다.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확실히 긴장이 풀렸다.

자연스럽게 잔을 내려놓으며 허리춤에 매달린 기폭장치에 손을 얹었다. 내가 허리춤에 달린 기폭장치에 손을 얹는 것을 보곤 알렉스가 금발을 뒤로 쓸어 넘기며 이를 드러냈다. 삽시간에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하지만 내 자폭 협박에도 변하는 건 없었다. 놀라는 사람도 없었고 두려워하는 사람도 없었다. 정상인 놈들은 없었다. 웃고 싶었다. 웃음을 참고 있는 나를 보곤 필립이 말했다.

“불꽃놀이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떻겠나? 왜 그렇게 쉽게 자폭을 생각하지? 불안하기 때문 아닌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니,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그러는 것 아닌가?”

“......”

“만약에 말일 세, 그 불안을 없앨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나? 근본적인 불안을 하루라도 빨리 없애고 싶지 않나?”

달콤한 유혹이었다. 필립은 그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웃고 있는 얼굴과 차가운 눈동자를 보니, 견디지 못하고 웃음이 새나왔다.

“큽- 대가는?”

“흘흘- 이유 없는 호의는 없지. 요즘 젊은 것들은 말로는 이유 없는 호의가 없다고 말하면서 정작 대가보다는 자기가 받을 것만 생각한단 말이야.”

필립이 서류를 하나 내밀었다. 나상철이 나에 대해 보고한 보고서였다. 나와 협상하면서 겪었던 일들이 적혀있었다. 내가 마치 자신의 계획을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어떤 내용으로 협상했었는지, 빗치를 사용해 날 공격했다 실패했던 내용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동맹과 나는 협력관계가 깨졌다.

“이게 사실인가?”

“예지 능력이 있다는 거?”

“그래.”

“노코멘트.”

“흘-흘- 그렇겠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선택지의 다양성을 실시간으로... 흘. 이런 내가 흥분했군. 아마도 자네가 능력이 있다면 단순하게 예언자처럼 예언하는 능력은 아닐 것이야.”

“......”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예지에 대한 부분은 이미 통과한 것 아니었나? 15층 철문이 있는 방에 들어가지 않고 대응한 것으로 알아보지 않았나?

“이야기를 길게 하는 것도 우습군. 내가 워낙 호기심이 많기도 하고 말이야. 믿음이 없어서 직접 보지 않으면 믿지를 못해. 자네가 정말 예지에 가까운 능력이 있다면 앞으로...”

필립의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것과 동시에 위기 감응이 발동됐다. 욱신- 심장이 내리눌렸다. 섬뜩한 감각. 인아를 옆으로 밀치며 옆으로 데굴 굴렀다.

싸아아아악-

투명한 액체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물?’

맑은 물로 만들어진 원형 톱날이 우리가 앉아있던 소파를 깨끗하게 절단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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