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동맹 (6)
필립이든 이곳에 있는 과학자들의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시도는 좋았다. 내 마음이 많이 흔들렸으니까. 어찌 됐든 연방의 주축 세력인 다국적기업과 군산복합체가 2차 대전 일본의 유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됐다.
의도적으로 원념을 확산시켰다는 부분에서 어이가 없었지만, 따지고 보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람이 잘 죽는 자리에서는 또 사람이 죽는다. 과학적인 근거를 찾을 수는 없지만, 통계적으로 보면 이상한 지역이 있기는 있었다.
이런 방송을 봤었다. 토마토에 노래를 틀어줬더니 토마토가 잘 자랐다는 것이었다. 노래와 토마토와의 관계는 과학적으로 봤을 때 상관관계가 없어 보였다. 처음 발표됐을 때는 논란이 심했다.
토마토는 식물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귀가 없었다. 식물에 클래식을 틀어준다고 맛있어진다? 말도 안 돼는 소리라고 했었다. 논란이 생긴 이유는 결과 때문이었다. 미묘하지만 더 잘 자랐고 맛도 좋아진 토마토를 보고 뭐라고 했을까?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하더라도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악의적이고 악질적인 생체실험 방법과 의미 없는 실험을 한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 단순히 미쳤다고 보기에는 그 정도가 심했다.
미신과 같은 이유, 바로 일본 특유의 원념-악신-개념과 과학을 결합하려는 시도 때문이었다. 실제로 자국민을 이용해 실험할 수 없으니 얼씨구나 비과학적(오컬트)인 실험을 진행한 것이었다.
731부대의 해부는 해부라기보다는 해체에 가까웠고 해체 장소도 다른 희생자들이 볼 수 있는(최소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열린 공간에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에 대한 대답이 영상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빌어먹을 상황도 그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피해를 줄일 수 있음에도, 충분히 그럴 기술력이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확산이 되길 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이없군.”
731부대의 자료가 엉망이라서 쓸모가 없었다고 말했던 2차 대전 직후 미군의 발표가 떠올랐다. 그건 반사적인 생각이었다. 미국이 선하지는 않지만 악하지도 않다는 생각. 어쩌면 교육의 힘일지도 몰랐고 그간 가지고 있던 관성일지도 몰랐다.
그 철옹성 같은 관점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벌어진 균열이 의문으로 변했다. 한 번 생긴 의구심은 터진 둑처럼 의심을 쏟아냈다.
정말 쓸모가 없었다면, 731부대 관련 전범자들을 무죄로 풀어준 이유는 뭘까? 이시이 시로를 비롯한 일련의 미친놈들은 미국과의 거래를 통해 사법거래를 하지 않을 경우, 소련에게 자료를 넘기겠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그럼 미국은 그 협박에 ‘어머나 무서워.’이러면서 당했다는 건가? 미국이란 나라가 이시이 시로가 가진 자료가 어떤 자료인지 쓸모 있는 자료인지 없는 자료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사법거래에 응한 희대의 병신 국가라는 소린가?
‘자료 대부분이 쓸모없는 쓰레기였다.’고 발표했지만, 1950년대부터 급속도로 발전한 미국에 본사가 있는 제약회사, 항생제 처방 방식과 발전된 외과수술 방식, 면역 관련 논문들은 어떻게 나왔을까? 영국을 중심으로 생물학과 유전학이 발달했었는데 2차 대전이후 미국이 생물학과 유전학의 강국으로 떠오른 이유는 뭘까?
심지어, 전범인 이시이 시로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까지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머리에 든 게 없는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업적이 없는데 기념관을 세웠을까? 이시이에게 근대일본 의학의 선구자라는 이름을 줬을까?
‘지금 사태만 놓고 보면 전형적인 일본식이다.’
2차 대전 말기 인체실험을 하면서 일본이 만들려고 했던 생화학무기는 그 살상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 ‘세균 변이를 촉진하는 것을 고려한, 생화학전’을 고안했다는 데, 그 위험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 방식은 지금 벌어진 통제 불능 변이사태 확산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그랬다. ‘아군에게 피해가 없는 세균을 만드는 것.’, ‘세균전을 할 때는 치료방법이나 예방법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 세균전을 하려면 아군 병사들을 치료할 수 있는 체계를 먼저 갖춰야 한다는 것.
하지만 일본의 경우, 소수의 희생을 통한 다수의 승리를 염두에 뒀기 때문에 치료제나 백신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은 단 하나에만 매진했다. 강력한 독성, 전염력을 가진 세균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그래서 오컬트적인 방식까지 손을 댄 것이다.
‘우리가 쉽게 치료한다면 적들도 쉽게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라면 적들도 치료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럼 질병의 확산은 어떻게 막을 것인가?
‘격리한다. 또는 유행 방식을 통제한다. 오염된 지역 전체를 소거한다.’
놀랍도록 유사한 결과였다. 적이 강하고 고통 받을수록(면역이나 치료체계가 잡혀있을수록) 더 강한 변이를 일으킨다. 그리고 종국에는 병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 (변종이나 빗치는 인간이 없으면 자멸한다.)
“다수의 희생을 통해 소수가 군림하려면 이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겠지.”
“대체 뭘 원하는 걸까요?”
“영원한 군림. 정점에 선 귀족.”
“연방은 미쳤네요. 휠체어 탄 노인을 믿을 수 있을까요?”
“100% 믿지는 못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이런 자료도 보여줬고. 지금 우리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니까.”
나는 대답과는 달리 인아의 손바닥을 꾹꾹 눌러 신호를 보냈다.
[아니.]
[나갈 건가요?]
[최대한 정보를 얻고.]
“그렇군요. 그럼 이것저것 물어봐서 진의를 파악해야겠네요.”
“그래. 우릴 속이려는 생각이라면 가짜 자료를 주겠지.”
인아와 내가 목소리 연기를 시작했다.
“흐음. 그럼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정보를 요구해야겠네요. 변종이나 빗치와 관련된 내용이라든가. 그런 거요.”
인아는 내가 필요한 내용을 알아서 잘 던졌다.
변종이나 빗치에 대한 자료를 열람하다 보면 변이 억제와 관련된 연구가 어느 정도 진행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나와 인아를 회유하기 위해 연구 결과의 상당 부분을 공개할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목줄을 채워놓고자 시도할 가능성이 있었다. 금발 놈, 알렉스도 혼잣말로 욕을 하면서도 노인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힘이 절대적인 세상에서 어떤 이능을 가진 놈이 영감에게 반항하지 못했다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줄이 채워졌다는 거지.’
연방에서는 스펙 중독과 전투식량이라는 방식으로 타격조의 목줄을 채웠다면, 동맹에서는 변이를 억제하는 약품인 중화제와 전투식량으로 빗치들의 목줄을 죄고 있었다. 알렉스에게 채워진 목줄을 나에게도 채울 기회만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필립은 알렉스처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말의 의미는 뭘까? 간단했다. 알렉스처럼 목줄을 채워 길들이고 싶다는 소리였다.
“그래. 일단 변이와 관련된 내용은 우리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전에 왔던 연구원에게 얻은 정보도 있고.”
저번에 왔다 죽은 연구원을 살짝 언급했다. 이걸로 위장 자료를 함부로 건네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목줄을 채우려고 할까?
인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 무렵에 난장을 쳤는데, 어느덧 창밖에 해가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했다.
-똑. 똑.
“식사는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 당분간 괜찮아요. 우리 먹을 건 있으니까 말이죠. 이건 잘 봤습니다.”
로라에게 낮에 받은 USB를 돌려줬다.
“다 본 뒤에는 원하는 자료를 요구할 수 있다고 했지요?”
내가 건네준 USB를 한 손에 꼭 쥐고 로라가 날 쳐다봤다.
“네.”
“변종과 빗치의 변이에 대한 자료를 보고 싶군요.”
“너무 두서없는...”
뭐라고 말하려는 로라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한국말 잘하시네요. 변종과 빗치에게 중화제를 사용했을 때 발생하는 현상. 중화제를 사용하지 않고 지속해서 자극을 줬을 때 벌어지는 부작용. 그와 관련된 연구 자료를 봤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저녁 식사는...”
“아까도 말했지만, 괜찮습니다. 내일 아침도 됐습니다. 필요하면 이야기하죠.”
로라가 아주 살짝 고개를 까딱하고 복도 밖으로 나갔다.
인아가 내 손을 붙잡았다.
[괜찮을까요?]
[일단은.]
과도하게 경계하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밖을 내다봤다. 불길은 잡혔지만, 아직도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
로라가 가져온 자료에는 내가 요구했던 내용뿐 아니라 요구하지 않은 것들도 들어있었다. 변종이나 빗치가 가진 근원적인 한계는 예상했던 대로였다. 거기에 더해 개체별로 달랐지만 점차 변이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언어능력이 없는 변종의 경우, 이능을 발현할 수 있게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신체 조직이 괴사했다. 빗치도 마찬가지였다. 변종보다 강해진 괴력을 가진 빗치는 점차 근육질로 변하더니 며칠 버티지 못하고 녹아버렸다.
인아가 죽어가는 변종과 빗치가 등장하는 영상을 보고 적잖이 긴장했다. 우리의 미래가 덧없이 녹아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가 인아를 잠식한 것처럼 보였다. 나와는 달리, 인아는 생물학적 죽음을 겪었었다.
이미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를 쉽게 이길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랐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지만, 말없이 자료를 살펴보는 인아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필립의 의도대로 속절없이 말릴 가능성이 있었다. 인아가 두려워하는 것을 놈들이 알아채면 그걸 집요하게 노릴 게 분명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로라가 가져다준, 한 무더기의 서류철 가운데 삐죽 삐져나온 파일을 대충 뽑아들었다. 겉표지를 열자, 살짝 숨이 막혔다. 이제는 놀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놈 말이야.”
“네?”
“물어봤잖아. 금발 놈을 아냐고 했었지?”
“예. 모른다고...”
“그래. 그놈이 뭐하는 놈인지 몰랐어. 이름도 몰랐고 어디 사는지도 몰랐지. 그래서 몰랐다고 대답했던 거야.”
내가 갑자기 알렉스의 이야기를 꺼내자, 인아는 넋이 빠지게 읽고 있던 자료에서 눈을 돌렸다.
“여기.”
나는 별다른 말없이 내가 읽던 자료를 인아에게 넘겼다. 내가 건네준 자료를 받아 정신없이 읽기 시작하던 인아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게 뭐죠?”
인아가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인아를 잠식하고 있던 죽음의 공포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당혹과 당황이 공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녀가 내 앞에 다시 내민 서류에 박혀있는 증명사진. 내가 군대에서 찍었던 사진이었다.
“악연이지. 어쩌면 운명. 아니, 운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는걸.”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야.”
“......”
내 담담한 대답에 인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로가가 인사했던 것이 떠올랐다.
‘로라 스튜어트입니다. 편하게 대해 주세요. 한... 장근태 씨.’
분명히 ‘한’이라고 말하다가 말고 장근태라는 이름으로 고쳐 불렀다. 수많은 단어 가운데 ‘한’이라고 말하려다가 말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필립이 개인적으로 붙여준 여자가 말실수를 했을까?
“그것도 실수가 아니겠지.”
연방에 동맹의 스파이가 들어있듯 동맹에는 연방의 스파이가 들어있다는 소리? 아니면 이마저도 스스로 목줄을 차게 만들려는 필립의 의도? 아니면 스스로 지쳐 포기하게 만들려는 수작? 로라가 연방의 스파이일까? 어찌 됐든 오늘 밤 잠은 다 잤다고 봐야 했다.
*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외부적 요인은 상당히 많았다. 방사능도 있고, 특수한 화학물질도 있다. 때로는 유전자 조작식품을 장기적으로 섭취했을 때에도 인간의 유전자는 변형된다. 그리고 세균과 바이러스에 의해서도 인간의 유전자는 변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유전자조작 식품을 별다른 제재 없이 유통시켰고, 켐트레일 현상이 생길 정도로 무차별적인 화학제재 살포를 했다. 그 결과 유전자적 변형이 일어나거나 특수한 능력이 생긴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관찰대상, 실험대상이 됐다.
학생기록부 전자관리 방침에 따라 학생의 특수한 성향은 통합네트워크 상에서 관리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죽음을 피한 소년이 있었다. 아니, 죽음을 피했다고 말하는 소년이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심지어 부친이 죽었을 때 소년은 자괴감에 방황했다.
학생 상담선생이 상담했던 내용은 고스란히 통합네트워크에 기록됐다. 고등학교 일본으로 수학여행 갔던 학생들이 다수 사망하는 사고에서도 그 소년은 살아남았다. 이어서 친구들에게 매도당하고 전학 가는 일들이 네트워크상에 기록됐다.
그렇게 소년은 나이를 먹어 청년이 됐다. 그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 군대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고. 그 끔찍한 사고에서 유일한 생존자가 된 청년은 ‘그들’의 관심을 받게 됐다. ‘그들’은 그 청년의 과거를 역추적하기 시작했고, 과거에 수차례 예지와 가까운 능력으로 위험을 피했다는 증거들이 나오자, 그 청년을 귀중한 ‘대상’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능력의 정체를 알기 위해, 밀착해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청년은 매우 방어적이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자들을 매수하는 것은 위험이 많았다. 그래서 연구 분야에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뛰어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여자를 청년에게 붙였다.
연인의 탈을 쓰고, 그녀는 그를 관찰했다. 그의 상처를 보듬는 것처럼 그의 내면 심리를 파악했다. 사랑을 속삭이는 그의 정을 채취했고 그렇게 데이터는 빠르게 쌓여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그에게서 얻을 수 있는 데이터가 없게 됐다. 더 이상 새로운 데이터를 뱉어내지 못하자. 마지막 실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리적으로 충격을 줘, 심리적인 압박이 능력 폭주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실험. 친모가 버리고 믿었던 연인이 배신한다면. 어떻게 될까?
‘운명이 있다고 믿어?’
그녀가 말했다.
그는 그녀를 보고 웃었다.
‘응. 너를 만난 건 운명이었어.’
그가 대답했다.
그렇게 그는 단순한 일반인이 됐다. -는 내용. 인아가 쥐고 있던 서류를 부르르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