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190화 (190/261)

자유 동맹 (2)

어쩌면 이게 정상일지 몰랐다. 좀비가 창궐하고 변종과 빗치가 사람들을 습격하는 세상에서 고고하게 있는 연방의 시민들은 선택받은 자들만의 공간에서 그들만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곳 동맹의 도시는 달랐다. 여러 지역에서 쏟아져 들어온 난민과 본디 이 근방에서 살고 있던 시민들이 뒤섞여 갈등하고 있었다. 부족한 물자에 비해, 사람들은 많았다. 욕망은 행동의 원동력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무엇이든 할 기세였다.

다양한 욕망이 그대로 넘쳐흐르는 이곳이 인간적일지 몰랐다. 허나, 그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뚝배기가 마냥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인아가 자연스럽게 내 팔짱을 꼈다. 슬레이브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렸는지 내 한쪽 팔을 인아의 슬레이브가 껴왔다. 내 모습은 순식간에 방금 지나간 남자와 똑같아졌다.

양팔에 여자 둘을 끼고 걷는 모습에 여기저기 낡은 옷을 입은 남자는 침을 찍 뱉었고, 웃음을 파는 여자들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어린아이들만 종종걸음으로 우리 뒤를 따라오며 식권 하나만 달라고 애원했다.

달라붙는 애들을 떼어내고 발걸음을 옮겼다.

“식권이라.”

“배급이라면 애들 먹을 게 있을 텐데요.”

인아가 내 팔에 바짝 달라붙어 말했다. 식권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먹을 것만 구하는 건 아닐 것이다. 일종의 화폐 비슷하게 사용되고 있을 것이다. 예상보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니 식권이 화폐를 대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구걸하는 아이들은 끈질겼다.

몇 명은 달라붙는 아이들을 발로 걷어찼다. 차인 아이가 병아리처럼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 틈을 타서 한 녀석이 지갑을 소매치기해 도망치는 게 보였다.

“치안 유지를 포기하지 않고서야, 이렇게 방치하는 건 아니지 않나요?”

“방치를 한 것치고는 효과적인 관리 방법인데, 대놓고 죽이고 죽고 그러지는 않고 있잖아.”

“그러게요.”

혹시나 기대했던 건가?

“치안 유지를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소비하는 걸 비효율적이라고 보는 것 같아.”

“치안보다 병력을 중요시한다는 건가요?”

“아마도.”

동맹은 여러 세력이 뭉쳐 만들어진 집단이었다. 한 도시에서도 다양한 세력이 파벌을 형성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다양한 파벌이 얽힌 상황에서 기존의 중앙정부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으려면 누군가 군권을 장악해야 했다.

한 세력이 군권을 장악하는 걸 다른 파벌이 두고 보고 있을까? 기존의 질서가 무너진 세상에서 자신의 병력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수 있을까? 힘들었다. 애초에 무장해제를 시켜 포섭하는 게 가능했다면 동맹의 형태로 세력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절차를 거쳐 한 사람이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면, 지금 같은 방치 상황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자유 시민 여러분들께서는 공공질서를 지켜주시고...

=우리는 자유 시민입니다. 서로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잘도 저런 말을 하네요.”

“뭐. 소매치기는 있어도 대놓고 총질하는 녀석들은 없잖아.”

“다들 무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지.”

이미 한 번 좀비들이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에 너도나도 칼이나 권총 따위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칼질이나 총질하지 않았다. 마치 개척시대 초기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사고를 크게 친다면 무장 병력이 동원될 것이다. 병력이 동원될 정도로 큰 사고가 아니라면 대충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이런 방치는 의도적으로 보였다. 치안이 완벽하게 유지가 됐다면, 누가 자발적으로 군대에 들어가겠다고 할까? 피를 흘리는 전장을 향해 자발적으로 들어갈 사람들은 없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야 모병이 됐다.

=5년간 복부를 마치면 12구역에 거주지 우선권을 받을 수 있습니다.

=특수부대에 지원할 경우......

불안한 치안을 그냥 두는 것은 자발적인 모병을 종용하는 방식이라고 봐야 했다.

“뭐 진부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은 방식이란 말이지.”

“그래도 저런 모습을 구경하고 있는 걸 보면 좀.”

골목에서 누군가를 두들겨 패는 모습을 보곤 인아가 살짝 찡그렸다. 분명히 불쾌하다는 것처럼 살짝 찡그린 인아의 표정임에도, 지나가던 남자들과 거리에서 행인들을 유혹하던 여자들이 인아를 힐끗힐끗 쳐다봤다.

“인상 쓰지 마라. 인상을 쓰니까 더 눈에 띈다.”

“......”

인아와 유미도 객관적으로 따져 보자면 빗치였다. 심지어 일반 빗치보다도 월등한 능력을 가진 빗치. 외모만 따지자면 인아는 거의 정점에 가까웠다. 나야 유미도 있고 인아도 눈에 익었으니 별 감흥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끈적끈적한 시선이 서서히 우리를 향해 모이기 시작했다.

“고개 숙이고 뒤로 붙어.”

인아와 슬레이브가 내 등을 방패 삼아 반쯤 얼굴을 가렸음에도 슬금슬금 뒤따르는 기색이 끊이지 않았다. 인아가 아니라 바비였다면, 존재만으로 광란의 도가니를 만들 수 있었을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어이없는 생각을 하다니, 쯧- 저절로 쓴웃음이 새나왔다. 분위기가 이렇게 엉망인 줄 알았다면 조금 더 조심했었어야 했는데, 연방에 침투했었던 경험에 너무 의지했다.

“따라 붙었어요. 그것도 여럿이에요.”

“알아. 모른척하고 계속 움직여.”

우리를 추격하는 놈들은 파벌에 속한 자들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대로 납치하겠다고 덤비는 놈들이 나올까? 윗선과 연결된 놈들이라면 공개적으로 일을 크게 만들어 납치하겠다고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피곤해졌군.’

일단 지금 따라붙은 놈들을 처리해야 했다.

“별수 없군.”

“죽일까요?”

인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을 살폈다. CCTV가 사방에 달려있었다.

“골목으로. CCTV가 없는 곳을 찾아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인아가 내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빌딩과 빌딩 사이에 있는 어두운 골목이었다.

골목 안으로 들어가자, 이곳으로 올 걸 예상하기로 했다는 것처럼 앞에서 쇠파이프와 권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다가왔다. 이쪽에도 성비가 반영됐는지 여자 넷에 남자 둘이 앞을 가로막았다.

뒤따라오던 놈들은 익숙하게 공사표시를 가져다 내려놓고 골목 인근을 통제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는 짓을 보니, 파벌에 속한 놈들이 맞았다. 아마도 우리가 움직이는 동선을 CCTV를 통해 확인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인아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날 붙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이렇게 나오면 피곤했다. CCTV를 사용하는 놈들이라. 이놈들을 여기서 건드리면 벌집을 쑤신 꼴이 될 가능성이 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어이- 형씨. 달고 다니는 게 너무 거창하지 않아?”

“......”

“위에 계신 분인가 했는데 경호원도 없고 말이지... 이렇게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오는 걸 보니, 믿는 구석이라도 있지 않나 했더니 그런 곳도 없고 말이야.”

앞을 가로막은 여자가 소음기를 돌돌 돌려 권총에 장착하며 이죽거렸다.

“우리도 함부로 죽이고 그러고 싶지 않다고, 이런 세상일수록 서로 돕고 살았으면 하는데 말이야.”

느릿하게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여자였다. 길게 세로로 흉터가 난 얼굴에 깃든 표정은 차가웠다.

“원하는 게 뭔가?”

“거기 언니들 얼굴 좀 보여주지? 우리 애들이 끝내주는 언니들이 나왔다고 호들갑을 떨어서. 궁금하네.”

[한 놈도 놓치면 안 돼.]

[알았어요.]

[내가 정면, 뒤를 맡아.]

[네.]

“귓구멍이...”

앞에 있는 놈들이 날 향해 총구를 겨누려는 순간, 염화 능력으로 탄창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피어오른 불꽃이 탄창을 터트렸다.

쾅! 팡! 쾅!

들고 있던 총이 터졌다.

“끄아아악!”

“뭐야 이년들!”

깜짝 놀라 총을 떨어뜨린 놈도 있었고, 권총을 쥐고 있던 손이 피투성이가 된 년도 있었다. 앞에서 폭발음과 비명이 터지자, 뒤에 있던 놈들이 총을 쏴댔다.

탕! 탕!

놈들을 향해 인아와 슬레이브가 달려들었다. 9mm 파라블럼 탄은 인아와 슬레이브에게 먹히지 않았다. 인아가 총알을 무시하고 달려들자 놈들이 우왕좌왕했다.

“씨발. 슬레이브다.”

“연방이닷!”

“비상때려!”

무전기로 연락하려는 놈의 얼굴에 불꽃을 일으켰다.

화르르륵!

무전기를 귀에 댄 놈의 얼굴과 무전기가 녹아 붙었다.

“끄아아아아악!”

“불. 불이야!”

“사... 살려줘.”

푸욱!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이 함몰된 여자가 풀썩 쓰러졌다. 인아가 고개를 저었다. 뒤에 있는 놈들 가운데 재빨리 도망친 놈이 있다는 신호였다. 시체를 뒤졌다. 지갑에는 네모난 쿠폰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지갑에 들어있는 쿠폰과 잡다한 것들을 전부 챙겨 넣고 무전기도 하나 챙겼다.

무전기에서는 치직-거리며 ‘뭐야? 비상 눌렀어?’ 그런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적당히 벗겨 입어. 빨리.”

인아와 슬레이브가 입고 있는 옷은 너무 눈에 띠었다. 옷을 갈아입자마자, 휘발유를 시체에 뿌리고 불을 질렀다.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골목을 뒤로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대충 얼굴 가릴 것이 필요했다. 마침 길 건너편에 한쪽 모자를 파는 행상인이 보였다.

“모자 가격이 어떻게 되지?”

“10개.”

허리춤에 권총을 끼고 있는 중늙은이가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지갑에 들어있던 쿠폰 같은 것이, 화폐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쿠폰을 꺼내보니 작게 글씨가 적혀있었다. 예상대로 일종의 배급권이었다. 쿠폰 하나당 대충 한 끼 식사 분량의 배급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 쿠폰 10개가 모자 하나라니, 끔찍하게 비쌌다. 내가 지갑에서 쿠폰을 꺼내자 그제야 반응하는 주인이었다.

“비싸군. 세 개에 20개.”

“25개.”

식권 25개를 넘겨주고 모자 셋을 챙겨 바로 인파들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뒤, 우수수 사람들이 우리가 나온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우리를 찾는 놈들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잘했다.

*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연구소가 있는 시내 외곽지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로가 마비된 건너편과는 달리, 이쪽은 자동차들이 운행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무장한 병사들이 2~4명씩 돌아다니며 거지로 보이는 자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행색이 엉망인 자들만 아니라면 출입을 강제로 막지는 않았다.

“여기는 치안이 좋은 것 같아요.”

병사들이 어느 정도 정리를 해서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행색이 깔끔했다. 직접 통제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관리하고 있는 블록 같았다.

“일단 저쪽으로 가자.”

관광호텔과 모텔이 밀집된 지역이었다. 연방에서는 호텔이나 모텔을 타격조와 경비대가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이쪽도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지나가는 김에 한 번 확인해 볼 필요는 있었다. 예상대로 군용으로 개조한 것 같은 트럭들이 주차되어 있었고 군복을 입은 사람들도 제법 많이 있었다.

주변에는 포스터가 빽빽하게 붙어있었다. 입대를 권하는 포스터였다. 자유를 수호하는 영웅이 되자며, 군에 자원하라는 현수막과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확실히 이쪽은 군과 연관된 장소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포스터 가운데는 갑옷을 입은 여자 천사의 모습이 보였다. 꼭 발키리 같은 모습이었다.

“저게 뭐죠?”

인아가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를 보곤 작게 소곤거렸다.

“아-슬레이브에 지원하라는 내용이 같은데.”

“저기에 지원하는 여자들은 슬레이브가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까요?”

“아마 모르겠지.”

이곳도 정상은 아니었다. 바로 앞에 검은색 세단이 천천히 지나갔다. 짙은 남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새겨진 번호판. ‘외’라는 식별번호를 가진 자동차가 느릿하게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그 자동차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고개가 틀어졌다. 그놈이 타고 있던 외교관 차량이 떠올랐다. 내가 검은색 세단을 노려보자, 인아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아- 미안.”

“뭔가요?”

“아니야 아무것도. 가자.”

군사 지역이라서 그런지 병사들이 많았다. 멀리 컨테이너로 도로를 차단한 곳이 보였다. 연구단지로 들어가는 도로를 통째로 막아 놓은 것이다. 인근 도로가 주차장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니, 안쪽으로 들어가면 따로 골프 카트 같은 것을 타고 가거나 아니면 도보를 이용하도록 하는 것 같았다.

높은 건물에 올라가 컨테이너 장벽 건너편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인근 지역이 전부 군사 관련 시설로 사용되고 있는지라 빈 빌딩이 없었다.

“정말 사람들이 많기는 많네요.”

“그러게 말이야.”

“그럼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리실 건가요?”

“일단 한 바퀴 돌면서 틈을 보자.”

대형버스에 가득 탄 사람들이 연구 단지로 향했다. 컨테이너 방벽을 앞에 두고 정차한 버스에서 내린 남녀들, 그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초조, 혹시나 하는 기대가 역력했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을 장교로 보이는 사람이 인솔해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연구 단지 안쪽에서는 블랙호크가 이륙하고 착륙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륙한 헬기가 떠나는 방향은 북쪽. 서울이 있는 방향이었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몇 시간 동안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만 해도 40명이 넘었다. 40명씩만 슬레이브와 링커들을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한 달이면 1200명이나 됐다. 군을 AWS로 대체할 생각 같았다.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한 곳이었다. 좁은 출입구를 통해 사람들이 나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과 함께 전동 휠체어를 탄 노인이 나왔다. 연구원들이 나와 허리를 푹 숙이는 것을 보니 뭔가 높은 자리에 있는 노인 같았다. 그리고 그 곁에 금발 사내가 보였다.

그놈이었다. ‘그놈이 왜 여기 있지?’ 노인은 중요 인물인지 철통 같은 경호를 받고 있었다. 노인이 휠체어 채로 승합차에 오르자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 가운데 몇 명이 같은 승합차에 올라탔다. 길게 늘어선 호위 차량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금발 놈도 호위 차량 뒤를 따라 서서히 움직였다.

“따라가자.”

“네?”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밖에 나온 사람을 잡는 게 더 가능성이 있어.”

인아가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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