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2)
키가 4~5m는 훌쩍 넘는 거대한 해바라기였다. 저렇게 큰 해바라기가 고작 지름 5~6cm 정도인 줄기로 뻗어있었다. 심지어 대형 트럭 타이어만큼이나 큰 꽃이 매달려 있는데도 휘어지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았다.
저 무거워 보이는 꽃을 달고도 꺾이지 않는다? 저렇게 크게 자란 것에 비하면 줄기는 비정상적으로 가늘었다. 단순히 크게 자랐다는 게 아니란 소리였다. 모양은 해바라기지만, 기존에 알고 있던 해바라기와는 조직 자체가 다르다는 소리였다.
익숙했던 자연이 낯설게 변했다. 밟고 있던 잡초, 스치고 지나갔던 잡목들이 전부. 낯선 식물이었다. 파종했던 작물들이 어느 순간 급속도로 자랐던 것이 떠올랐다. 공기 중에 남아있는 바이러스인지 아니면 변이 인자인지 그 무엇이 식물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소리였다.
“뭐가 있나요?”
시시각각 심각해지는 내 표정을 보곤 유미가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확인했다. 또르륵 굴러가는 눈동자에는 불안이 아닌, 내 얼굴이 담겨있었다.
“하아- 아니.”
정부청사에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건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건물 밖이 위험하기 때문이리라. 아니면 변종이나 빗치가 생존자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거나.
식육빌딩에서 미도와 미노가 생존자들을 사육한 것처럼 정부청사에 있는 생존자들이 전부 변종이나 빗치의 통제하에 있다면 인기척이 없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장갑차나 전차, 헬기 같은 것을 써보지도 못하고 당했다고 봐야 했다.
여기서 변종은 아웃. 맨홀 변종의 사례 하나뿐이지만 통제되지 않는 변종들은 나중을 위해 남긴다는 발상이 없었다. 당장 원하는 욕구를 풀려고만 하는 놈들이었다. 그년과 그년의 휘하에 있던 변종들처럼 뭔가가 통제하고 있다고 본다면, 이곳은 이미 빗치에게 넘어갔는데 동맹 측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예측할 수 있었다.
“상황이 묘하게 됐어. 뭔가 위험한 게 밖에 돌아다니고 있어서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저 건물에 있는 사람들이 빗치에게 장악됐을 수 있거든.”
“식육빌딩처럼 말이죠?”
“그래.”
일단, 둘 가운에 어느 경우든 동맹의 연구소를 공격하는데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장점은 있었다.
“그럼 좀 이상해요. 뭔가 위험한 게 있는데 동맹이 연방과 전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쪽은 이 근처가 중요하잖아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면전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해바라기가 변한 것처럼 변이를 일으킨 동식물이 압박하고 있었다면, 녹지대가 많은 지방보다는 서울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 됐다. 안전한 공간을 얻기 위해 전면전을 시도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내 설명에 유미는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함정을 파고 있을 수도 있잖아요.”
“함정?”
“네. 눈에 띄는 사람이 없으니까 변종이나 빗치, 이상한 벌레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오면 그 때 공격하려고 숨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음. 그래. 일리 있는 말이야.”
장갑차에 전차, 헬기까지 있으니 그럴 가능성도 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유미가 살짝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저한테 그러셨죠? 역지사지해야 한다고.”
“......”
“어째서 다급해하는 건지. 왜 꼭 쫓기는 것처럼 그러시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오기 전까지 잘하고 있었잖아요.”
“......”
“그러니까...”
“알았다.”
내 불안함을 유미는 알까?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불안감 때문에 맨홀 변종을 먹었다. 그래서 힘을 얻었지만, 더 큰 불안감이 나를 잠식했다. 힘이 없다는 불안에서 나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으로 불안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몸집을 불렸다.
디딜 곳 없는 절벽으로 몰리는 것처럼. 몰리고 있었다. 뭔가 해야 한다는 강박. 시간이 없다는 생각. 그렇게 염화 능력을 쓴 뒤, 슬레이브들이 먹는 육포와 전투식량을 먹으면서 느끼는 자괴감.
현실을 타파할 힘의 대가가, 불안한 미래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현실을 타파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눈앞에 있는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을까? 그걸 말할 수 있을까?
*
우르르릉!
번개가 번쩍하더니 이윽고 천둥이 쳤다. 가을을 재촉하는 빗줄기가 굵게 떨어졌다. 이번 여름엔 장마가 짧았고 스콜처럼 순간적으로 굵게 내리는 비만 오락가락했다. 비를 맞으며 용인 인근으로 움직였다.
주로 국도를 타고 내려올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가기로 했다. 평택과 오산에 있는 미군 기지를 확인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평택에 있는 미군 기지는 미군과 군무원 그 가족을 포함하면 무려 4만 넘어가는 인구가 추정됐다.
“4~5만 명이요? 미국인이 그렇게 많아요?”
“그래.”
“전부 군인들이요?”
“아니, 군인만 따지면 4~5천 명 정도지 않을까? 글쎄 잘 모르겠는걸.”
“미군 부대가 여러 곳에 있다면서요?”
“많이 있지, 큰 데는 오산이나 평택, 대구라고 하니까. 음 일단 평택에 들렀다가 오산에도 들러보자. 오산에는 미군이 쓰는 공항도 있으니까.”
주한 미군 이전 전에는 129개의 기지가 한반도 전역에 산재해 있었으니,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동두천이나 용산에 있던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한다고 했었다. 아마도 평택이 규모 면에서는 가장 크지 않을까 싶었다.
“우리나라에 미군은 얼마나 있는 거예요?”
“병력만 대략 2만 6천에서 2만 8천이라고 했나? 아마 그럴 걸.”
“생각보다 많네요.”
유미는 생각보다 많이 있다며 놀란 표정이었다.
“그럼 미군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가봐야 알겠지.”
연방에 침투했을 때 얻은 정보와 동맹의 나상철이 했던 말에 따르면 미군도 감염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감염으로 인해 자멸했고, 생존한 미군은 아파치 헬기 몇 대와 블랙호크 몇 대 정도를 가지고 연방에 합류했다고 했었다. 남은 무기는 어떻게 됐을까? 상잔했다고 하더라도 쓸 만한 무기가 남았을 가능성이 컸다.
동맹의 세력권에 있는 곳이니 만큼 동맹 측이 알뜰하게 털어갔을 확률도 있지만, 변해버린 동식물들의 생태와 좀비, 빗치나 변종을 생각하면 동맹 측이 손을 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직접 가서 눈으로 봐야 했다.
“미군이 있으면요.”
“그렇지는 않을 거야. 있다고 하더라도 소수 생존자가 있겠지. 하지만 생존자가 있기 보다는 변종이나 빗치로 변한 자들이 기지를 장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그래요?”
“그래. 뭐, 변종이나 빗치가 장악하고 있다면 놈들을 치고 우리가 뺏으면 그만이야.”
“동맹이 장악하고 있다면요?”
“일단 연구원을 확보해야지. 연방에서 가져온 자료만 해석해도 되니까.”
“욕심부리지 않기로 약속해요.”
“알았다. 알았어.”
유미와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은 여유를 되찾았다. 동맹이 미군 기지를 장악하고 있고 무장까지 월등하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연방의 자료 사본을 던져줄 생각도 했다. 동맹에서 연방의 자료를 입수해 연구하고 나중에 그 결과만 훔쳐오는 것도 방법이었다.
“연방과는 달리 동맹은 중화제도 만들었으니까. 연방의 자료가 있다면 본격적으로 변이억제제나 슬레이브들의 한계를 조절할 수 있는 약을 만들 가능성이 커.”
“그럴까요?”
“아마도...”
연방의 전투식량은 생체실험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그 안에는 가공된 인육이 함유되어 있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상철은 연방의 전투식량을 가져갔었다. 당시에는 빗치로 구성된 특수부대의 전투식량으로 쓰려고 했다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어쩌면 그때부터 동맹도 AWS를 실험하고 있었을지 몰랐다.
동맹 측 슬레이브도 기본 바탕이 빗치인 만큼, 인육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인구는 1/100이하로 감소한 상황이었다. 1년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실 굉장히 심각했다.
연방이든 동맹이든 육류에 모종의 처리를 해 전투식량을 만들었다. 하지만 인구 자체가 줄어들어 버린다면? 슬레이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연방이든 동맹이든 생존자들을 다수 확보해야 했다.
생존자들을 다수 확보하는 순간, 빗치와 변종들과 싸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처럼 변종이든 빗치든 각자의 영역에서 혼자 있거나 짝을 이루고 있는 경우라면 인간이 유리했겠지만, 레드 존에 있는 그년을 생각하면 상황이 달라졌다.
레드 존에 있는 그년의 세력은 상당히 컸다. 빗치와 변종의 왕국이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변종만 쉰이 넘었는데 그들이 전부일까? 중간에 있는 빗치들만 하더라도 열이 넘었다. 둘을 합해 육십 최소한 육십이었다.
이들이 작심하고 공격한다면 어떻게 될까? 기갑 사단이든 헬기든 중무장하지 않은 이상 레드 존의 변종과 빗치를 막기는 불가능했다. 세력을 이룬 변종과 빗치를 막으려면, 적대 세력과 싸우려면 슬레이브의 꾸준한 충원이 필요했다.
이 말은 슬레이브와 링커를 만들면 만들수록 먹이가 될 희생자의 숫자가 급증한다는 말이었다. 감소하는 인구, 줄어드는 생존자를 생각해 보면, 인육만 먹을 수 있다는 단점을 어떻게든 보완할 필요성이 있었다.
곡물이든 아니면 곤충 분말이든 다른 것을 먹을 수 있는 슬레이브를 만들어야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음... 조금 모순 아니에요?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셨잖아요?”
“?”
“인간이 줄어들면 자연적으로 멸종하게 하려고 변종과 빗치에게 식육인자를 넣었을 거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 그건 맞을 거야.”
“그걸 굳이 풀 이유가 없잖아요. 어디론가 꽁꽁 숨은 다음 빗치든 변종이든 전부 죽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요?”
“빗치는 이성이 있잖아. 식육빌딩을 만들었던 것처럼 생존자들을 잡아, 사육하면 어떻게 될까? 생존자들 가운데 기술자들이나 연구원들이 살아보겠다고 빗치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한다면?”
“음... 제 생각인데요. 정말 그렇게 되면 죽이기 힘든 변종이나 빗치를 죽이기보다는 생존자들을 죽여 버리지 않을까요? 인간만 없어지면 변종이든 빗치든 결국 굶어 죽을 거 아니에요. 사람이 없다면 자기들끼리 잡아먹다 자멸할 테니 말이에요.”
유미는 예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것에 살을 붙여 말했다. 불가능한 추리는 아니었다. 정상적인 놈들이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이미 슬레이브를 만들어대는 놈들이니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
*
세종시 정부청사에서 평택 기지로 가는 길은 뭔가 이상했다. 용산에서 국도를 타고 내려왔을 때와는 다른 분위기였다. 평택으로 가면 할수록 울창해지는 수풀. 도를 타고 넘은 담쟁이넝쿨에 달린 잎사귀가 아마존 밀림에서나 보이는 커다란 잎사귀처럼 컸다.
“저기 풀이요. 큰 거 맞죠?”
유미가 도로 옆에 난 풀을 보고 눈을 비볐다. 거대한 해바라기가 우연히 생긴 게 아니라는 것처럼 넝쿨이고 잡초고 거대했다. 서울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고속도로를 타고 가 봐야겠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지방에서 사방으로 퍼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나상철은 어디서 원인 바이러스가 유출됐다고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다.
평택을 향해 갈수록 풍경은 급격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세종시에서 평택을 향해 고작 20km도 가지 않았는데, 아스팔트와 시멘트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끼처럼 생긴 것들이 도로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끼처럼 생긴 것들을 밟을 때마다 푹신했다. 약간 단단한 스펀지를 밟는 느낌.
“이건 이낀가요?”
유미가 파릇파릇하게 돋아난 것을 만져보려고 했다.
“손대지 마.”
“네?”
“이끼가 아니야.”
“이끼처럼 생겼는데요?”
“여긴 도로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도로.”
생긴 건 이끼처럼 생겼고, 밟을 때마다 푹신한 느낌은 확실히 이끼 같았다. 게다가 방금 내렸던 빗물을 많이 머금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해.’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식물이 자라고 있는 곳은 배수가 잘되는 도로였다. 기이했다.
도로 밖은 완전히 정글 같았다. 세종시에서 평택으로 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세계가 변한 것 같았다.
“저기 보세요. 작은 나무가 죽고 있어요.”
넝쿨과 이름 모를 풀들이 어린나무보다 더 크게 자라, 작은 나무들은 햇빛을 받지 못해 고사하고 있었다. 레드 존에서 빠져나와 용인 방면으로 내려오는 동안에는 그래도 간간이 좀비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 청사 인근부터 평택으로 오는 길에는 단 한 마리의 좀비도 보이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평택입니다.’ 도로 옆에 붙어있는 거대한 광고판은 넝쿨로 싸여 있었다. 이대로 평택 미군 기지가 있다는 곳까지 가야 할지 잠시 망설여졌다. ‘수풀 때문에 어지간한 생존자들은 평택 미군기지로 갈 생각 못 했을 거야.’
멀리 평택시에 있는 건물들이 보였다. 대부분의 건물이 녹색 수풀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가 빠진 진동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배터리 잔량이 걱정스러웠지만, 어차피 가려고 마음먹었다면 써야 했다.
고속도로에서 평택 시내로 가는 도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이끼처럼 생긴 것들이 점점 사라지고 긴 풀들로 변했다. 이윽고 아스팔트 도로 위에도 거대한 잡초들이 무성해졌다. 처음에는 발목 정도 오던 풀들이 어느새 종아리까지 오더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허리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평택 시내에 들어가기 전, 풀들은 나보다 더 큰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위이이이이-
진동 나이프가 떨렸다. 단단한 슬레이브의 뼈를 절단할 정도로 강력한 진동 나이프로 앞을 가로막은 잡초를 벴다. 나이프가 밀리며 씹히는 것 같았다. 마치 빗치나 슬레이브를 베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이게...”
내가 잡초가 잘린 자리를 보고 미간을 찌푸리고 있을 때, 유미는 코를 큼큼 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뭔가 매운 냄새가 나요.”
“매운 냄새?”
“네. 약간 매운 냄새요. 잘린 자리. 진액에서 나는 것 같아요.”
식물을 자른 것이 아니라, 꼭 질긴 뭔가를 벤 것 같은 느낌도 이상한데 매운 냄새라니. 잘린 자리에서 걸쭉한 진액이 주르륵 흘러나오며 매콤한 냄새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