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1)
중화제는 확실히 효과 있었다. 스펙으로 인한 부작용을 억제하는 중화제는 변이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마치 대증요법처럼 중화제로 인해 변이 인자가 어느 정도 억제되자, 인아의 면역력이 힘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퉁퉁 부었던 얼굴이 정상으로 돌아왔고 여기저기 파랗게 괴사하는 것처럼 보였던 몸도 혈색을 되찾았다.
“내일까지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요?”
“아마도.”
유미의 말에 뭐라고 대답하기 힘들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 중화제를 놨어야 했을까? 아니, 그 상황에서는 상태를 지켜보는 게 맞았다. 인아의 능력인 감염 장악이 약해지거나 사라질 위험이 있는데 중화제를 떡하니 놓는 건 위험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열다섯의 슬레이브 가운데 이제 남은 숫자는 고작 셋. 나와 유미, 인아, 페니를 합하면 일곱이었다. 열아홉 명이 일곱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래서는 동맹의 연구소에서 연구원을 납치하거나 연구 자료를 빼 오는 건 쉽지 않았다.
“인원이 부족해. 무기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미군 기지라도 가봐야 하나?”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유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그냥 강원도로 가요. 확실하지 않잖아요. 그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을 납치한다고 해서 따로 약을 만들 수 있을 지도 모르고, 그 연구원이 뭔가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렇잖아요.”
그 말이 돌덩이처럼 무겁게 마음을 짓눌렀다. 그냥 가면? 지금까지 이 고생을 했는데 그냥 가면? 내 일그러진 표정을 읽었는지 유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어색한 분위기가 답답했다.
말없이 창끝에 묻어있는 점액질을 작은 유리병에 옮겨 넣었다. 철근으로 만든 창끝에 묻은 암녹색 소화액이 길게 늘어지며 투명한 유리병으로 들어갔다. 이 용액이 가진 특성을 알기 위해서도 연구원이 필요했다. 이 용액의 특성만 안다면 변종이든 빗치든 무력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도망치며 살 필요 없었다.
식육하는 인자를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날뛰는 변이인자를 억제하기 위해서라도 연구원이 필요했다. 그래 방법은 하나였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연구원을 잡아야 했다. 동맹의 연구소를 공격해야 했다. 미래를 찾을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맞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유미의 시선을 피해 눈을 감았다.
“후- 나 좀 쉴게.”
“... 네...”
눈을 감자, 환청이 들렸다. 내 이름을 저주하듯 부르짖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빗치. 김나경을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처음 그녀를 만났던 것은 학창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마치 운명처럼 내 곁에 다가왔다.
군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인 나는 정신적으로 극한에 몰려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수많은 사고 속에서 유독 나만 살아남았었다. 그것은 예지와 같은 감각이었지만 반대로 천형의 저주와도 같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카산드라의 이야기처럼 예언은 근거가 없기에, 무시당하기 마련이었다.
그 때 그녀는 나에게 다가왔다. 사람을 거부하고 믿지 못하고 외면하고 싶었던 그 순간 내게 다가온 온기를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에 깃든 호기심을 알면서도 나는 외면했다. 그것은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을지 몰랐다.
‘흐응- 그러니까 미래를 안다는 거야?’
‘그건 아니고.’
내 어눌한 대답에 화답하듯 그녀는 웃었다.
‘그럼 그냥 운이 좋은 사람일 뿐이잖아.’
‘그런가?’
그녀는 간단하게 말했다. 눌려있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었다. 미쳤다고 하지도 않았고,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랬다. 그래. 그랬다.
‘운명이라는 거 믿어?’
어느 날 그녀가 물었다.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렇구나. 운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난 운명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
그녀를 만난 것이 운명이라고 생각했기에, 나는 운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제까지 내가 살아남은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어두운 20대를 그녀를 생각하며 달릴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거야?’
‘응-교환학생으로 온 거니까.’
‘그럼... 이제 이렇게 끝?’
언젠가부터 나는 앓고 있었다.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터졌다.
‘호호호- 이 세상에 우연은 없어요. 운명도 없고. 남자가 왜 그렇게 패기가 없어. 시시한데 그런 남잔.’
그녀는 이민 3세였다.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명문대에 다니고 있으면서, 부모의 나라를 알고 싶다는 이유로 한국 대학에 교환학생으로 온 것이었다. 교환학생만 아니었다면 메이퀸에 뽑혔어도 이상할 게 없는 그녀는 학교의 명물이 됐다.
그런 그녀가 복학 후 음침한 모습으로 도서관 죽돌이를 하고 있던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기에, 나와 그녀는 캠퍼스에서도 유명했다. 거지와 공주, 혹은 온달과 평강. 그렇게 그녀가 떠난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내가 3년 동안 학점을 따고 취업을 위해 몸부림치는 동안, 그녀는 석사까지 마치고 다국적기업 한국지부로 왔다. 교환학생으로 있었던 경력이 먹혔다며 그녀는 예쁘게 웃었다. 그랬던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변했다.
아니, 처음부터 변한 게 아니었을지 몰랐다. 내 감은 내 느낌은 그녀를 멀리하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난 그녀가 나를 위해, 나를 보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믿고 싶었다. 그 끝에 남은 것은 뭘까? 배신? 그걸 배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그녀는 나를 사랑하기는 했을까? 내가 한 것은 사랑이었을까? 그녀가 금발의 남자. 멋들어진 양복을 입은 사내와 호텔에 들어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보고서도, 나는 그녀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어,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것도 없어.’
그녀가 말했다.
‘어째서?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날 사랑하기는 했어?’
내 절규에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다. 뭐가 문제였을까? 황새가 뱁새를 따라가려고 했던 게 문제였을까? 다국적 기업에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는 그녀를 잡기엔 내 능력이 부족해서였을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고난 따위를 함께 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안 그래?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게 살지 않게 행복하게 해주는 게 사랑이 아니야? 당신은 날 사랑한다면서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무슨 고난? 우리가 사귀는 게 고난이라고? 내가 변변치 않은 직장이라서? 대기업이 아니라서?’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그녀를 태우러 온 자동차가 멈췄다. 유리창이 내려가고 금발의 미남이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날 보고 씩 웃었다. 그 패배감. 그 더러운 기분.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고 차에 앉았다.
그녀를 태우고 간 자동차. 감청색 바탕에 흰색으로 새겨진 번호판에는 외교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몽롱한 가운데 유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아가 눈을 떴어요.”
그년을 만났더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피로를 몰라야 할 육체가 무겁게 느껴졌다. 잠시 눈을 감았다고 생각했는데, 지독한 악몽을 꾼 기분이었다.
“인아가 눈을 떴다고? 의식은 있어?”
“네. 정신을 차린 것 같기는 한데...”
유미가 말을 아꼈다. 인아를 뉘어놓은 침대로 갔다. 인아의 슬레이브들은 인아의 곁에서 그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 치의 거짓 없는 맹목적인 충성. 자의적인 배신은 존재하지 않는 관계. 인간성이 말살된 인형 같은 슬레이브들을 보면서, 그년을 슬레이브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다니, 우스웠다.
“병신 새끼도 아니고.”
“네?”
“아니야.”
내 목소리를 듣고 인아가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제가 얼마나 의식을 잃었던 거죠?”
“몇 시간 정도니까 너무 걱정 마.”
인아의 머리 위에 물수건을 올려놨다. 인아는 이마에 얹어진 물수건의 서늘한 감촉을 느끼다 뭔가 멍하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창밖으로 붉은 노을이 저물었다. 경기도와 충청도의 인접지역이라 그런지 확실히 건물들이 낮았다.
“연구원들을 잡는다고 뭔가 달라질까요?”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인아가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
낮에 잠깐 눈을 붙였기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간이 변하고, 세상이 변하고, 빌어먹을 바퀴벌레까지 변하는 세상에서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기 힘들었다. 고개를 들자, 포도 알갱이 같은 별빛이 알알이 박혀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가을을 알리는 귀뚜라미 소리. 고요한 가운데 기분이 좋아야 할 귀뚜라미 소리가 서늘하게 들렸다. ‘벌레는 살아남았다는 건가?’ 서울에서는 듣지 못했던 귀뚜라미 소리가 반가워야 했지만, 바퀴벌레를 보고 난 뒤라 그런지 경계심만 커졌다. 귀뚜라미가 있다면 거미나 파리, 모기 따위도 있을지 몰랐다.
원전사고가 일어난 지역에서 보고된 기형 식물들과 곤충들이 떠올랐다. 그런 기형 식물들과 곤충들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렇지 않아도 바퀴벌레가 괴물이 된 판국에 식물과 다른 곤충, 어패류들까지 변해 버렸다면 동맹이니 연방이니 서로 편을 갈라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닐지 몰랐다.
“아니지, 똑똑한 놈들이 싸우고 있는 걸 보면 위험하지 않다는 걸까?”
바퀴벌레는 불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살충제도 있었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곤충들은 큰 위협이 아닐지 몰랐다. 그러니까 싸우겠지.
찌륵찌륵 찌르르르르
찌르르르르
귀뚜라미 소리가 높게 초가을 하늘을 가득 채웠다.
*
하룻밤이 지나자 인아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찮아?”
“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쉴 거니까 무리하지 마.”
인아의 능력인 감염 장악이 그대로인지, 슬레이브들을 통솔하는 능력은 이상 없는지 물어봐야 했다.
“혹시 이상한 점 없어?”
“네 괜찮아요.”
“슬레이브들은? 소화액이 묻은 창에 찔렸었는데?”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좋아. 인아는 이곳에서 슬레이브들과 정비를 하고 있어. 나와 유미는 조금 아래로 내려가 먼저 정찰을 할 테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페니를 통해 연락하도록 해.”
인아는 잠시 나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럼 잘하고 있어.”
곧바로 대전으로 향했다. 철길을 따라 이동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확실히 서울 경기도만 넘어가자 도로에 자동차가 많이 줄어있었다. 계엄 이후 통행이 제한됐기도 했지만, 톨게이트에서 발생한 병목 현상을 뚫고 나온 차들이 워낙 적어 보였다.
40분 정도 달리자 세종시가 나왔다. 정부청사가 이전하고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군부대가 지키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동맹 세력의 대전 연구단지는 아마도 이쪽과 연결됐을 가능성이 컸다.
“찔러볼 필요는 없고 무장만 확인하고 나가자. 장갑차나, 헬기 같은 게 있다면 대비해야 하니까.”
서울이라면 도로가 막혀 장갑차가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인근의 도로상황을 볼 때, 대전까지는 뻥 뚫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연구소를 습격했다가 이쪽에 남아있는 부대가 응원을 온다고 하면 30분 안짝으로 도착할 가능성도 있었다.
헬기가 있다면 5분 안에 앞뒤로 포위될지도 몰랐다. 그러니 어느 정도 장비를 갖췄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유미와 나는 조심스럽게 세종시 인근으로 접근했다. 군부대가 남아있다면 고지대에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건물 안에 있을까요?”
“옥상에 있을 줄 알았는데.”
풀숲에 숨어 주변을 살폈지만, 인기척이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감염 사태로 인해 군부대가 서로 싸웠던 흔적과 좀비들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쳤던 흔적이었다.
좀비들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쳤던 것으로 보면 생존자들이 있다는 건 확실했지만, 정작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상했다. 서울과 경기에서 그렇게 많이 보였던 좀비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더 신기할 따름이었다. 좀비들이 없다면 생존자들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할 만도 한데, 돌아다니는 생존자들도 없었고 좀비도 없었다.
“뒤쪽에 장갑차가 있어요.”
“군인은?”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어요.”
“한 명도?”
“네.”
정부청사 안쪽에 장갑차와 전차 그리고 전경버스가 있었다. 옥상에 있는 헬기 착륙장에는 기종을 알 수 없지만, 헬기 프로펠러가 살짝 보였다.
사람이 없다면 연방과 전쟁 중인 동맹이 이곳에 그냥 뒀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건물 안에 있다는 말인데. 어째서 옥상 위라든지 밖에 사람들이 돌아다니지 않고 건물 안에만 있지? 좀비도 없는데?
사사사삭-
반대쪽 수풀이 흔들렸다. 사람인가? 수풀을 노려봤다. 사사사- 낮게 수풀이 흔들리며 뭔가가 서서히 멀어졌다.
“바퀴벌레일까요?”
“아니. 바퀴는 아니야.”
바퀴벌레가 떼로 움직였다면 모를까, 한두 마리가 움직였다고 수풀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바퀴는 어지간하면 장애물을 피해서 움직이지 힘으로 밀어가며 움직이는 벌레는 아니었다. 게다가 커봐야 50cm 정도 되는 크기니, 잡목 사이로 움직이지 잡목을 흔들며 지나갈 리 없었다.
잡목이 흔들릴 정도라면 몸길이가 1m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고라니나 멧돼지, 들개라면 잡목을 흔들며 움직일 가능성도 있었다. 벌레가 아닌 들짐승도 살아남았을까? 서울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이 아니니, 어쩌면 감염되지 않은 짐승들이 있을지 몰랐다.
혹시라도 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풀이 있는 곳을 따라 정부청사 인근을 살폈다. 8~9개월이 지났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잡초와 잡목이 우거졌다.
앞장서서 가던 유미가 발걸음을 멈추고 입을 벌렸다. 유미가 바라본 곳은 꽃밭이었다. 노랗게 타오르는 꽃들이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거 해바라기죠?”
“하아- 나도 저런 건 처음 본다.”
한 아름이나 됨직한 커다란 꽃을 피운 해바라기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강원도로 떠난 사람들이 떠올랐다. 떠나기 전 우리들은 도시 농장을 만들어 씨앗을 심고 작물을 길렀었다. 고작 30~40일가량 길렀는데 쑥쑥 자랐던 것이 생각났다.
보도블록 틈에서 자라난 잡초들도 마찬가지였다. 인적이 없어진 지 8~9개월 만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거칠게 자라난 잡초들, 20~30cm씩 자라난 잡초들이 떠올랐다. 그냥 스치고 지나갔었지만, 해바라기 밭을 보고 나니 뚜렷이 와 닿았다.
저절로 탄식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