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183화 (183/261)

레드 존 (8)

맨홀을 열자는 내 말에 유미가 깜짝 놀랐다. 방독면으로 가려졌음에도 경악하고 있는 유미의 표정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바퀴가 나오는데요?”

“그래.”

“바퀴가 퍼지면 어떻게 하려고요?”

“퍼지지 않아.”

우리가 하수구에 있을 때 불을 지른 것으로 보아, 정기적으로 불을 질러 바퀴벌레들을 죽이고 있었을 것이다. 맨홀 뚜껑을 열고 바퀴벌레들이 밖으로 나오면 놈들은 어떻게 할까? 우리를 추적할까 아니면 바퀴벌레가 퍼지는 것을 막을까?

“그. 그래도 그건 너무 위험해요.”

“바퀴벌레에 대한 걸 알고 있었어. 그렇다는 건 우리보다 그년이 바퀴벌레의 위험성이든 퇴치 방법이든 알고 있다는 소리야.”

“만약 여길 버리고 우릴 추적하면요?”

“그럴 가능성은 없어.”

유미에게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유미도 빗치 특유의 영역 집착이 있었다. 인아도 마찬가지였고 이제까지 내가 만난 빗치들은 전부 다 그랬다. 이곳에 자리 잡은 그년도 그럴 것이다. 빗치가 바퀴벌레 때문에 자기 영역을 버리고 우릴 추격한다는 건 생각하기 힘들었다.

만약, 영역을 버리고 우릴 추격할 정도라면 맨홀을 열든지 열지 않든지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모 아니면 도였다. 그년이 추격할 것은 자명한 사실, 싸울 화력과 인력은 부족했고 설상가상으로 인아는 아직도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더 전력을 잃는다면 동맹의 연구소를 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도박을 해야 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바퀴벌레는 확실한 약점을 둘이나 가지고 있으니까.”

“뭔데요?”

“불에 약해. 그리고 재생력도 없고.”

바퀴벌레들은 유독 불에 상당히 약했다. 질긴 생명력을 보여줬지만 재생력은 없었다. 약점이 명확한 이상, 최악의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연막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백린 연막의 무서움을 체험했기 때문인지 연막이 걷힐 때까지 기다리는 놈들이었다.

“일반 연막탄 터뜨려. 수류탄은 뒤쪽으로.”

연막탄과 수류탄을 뒤쪽으로 터뜨리곤 철길 양옆을 막은 벽을 박살냈다. 철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맨홀 뚜껑이 있었다. 맨홀 뚜껑이 열리는 것을 막기 위함인지 트럭으로 맨홀 뚜껑을 눌러놓은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미가 5톤 트럭을 밀어 버리고 맨홀 뚜껑을 뽕- 땄다.

바퀴벌레들에게 이쪽이 열렸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수류탄을 하나 까 넣고, 다음 맨홀 뚜껑을 열었다. 쾅!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함께 하수가 튀어 올랐다. 하수구를 울리며 퍼지는 소리가 다음 맨홀에서도 생생하게 들렸다. 그렇게 5개의 맨홀을 열었다.

연막이 흩어지기 시작했는지, 우리가 도망쳐 온 방향에서 서서히 추격이 시작됐다. 단순한 추격이 아니라 그물처럼 조이는 추격. 쌍끌이 저인망을 돌리는 것처럼 변종들과 빗치들이 멀리서 모습을 보였다.

건물 옥상에서 골목에서 하나둘씩 모습을 보였다. 예상대로 한 군데로 뭉치지 않고 넓게 퍼져서 압박하고 있었다. 연막탄이든 화염병이든 피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심산이었다.

“생각보다 숫자가 많아요. 더 는 것 같은데요?”

유미가 방독면을 벗으며 말했다.

“다시 써. 쓰고 있어야 놈들이 함부로 덤비지 못해.”

“예? 아-”

허겁지겁 다시 방독면을 쓰는 유미였다. 바퀴벌레들은 생각보다 빨리 나오지 않고 있었다. 설마 바퀴벌레들도 이성이 있어 간을 보고 있는 건가? 맨홀 뚜껑을 열어줬더니 함정이라고 생각하고 올라오지 않는 거라면 낭패였다. 그렇다고 다시 하수구로 들어가는 건 아니었다. 하수구에 들어가는 순간 얼씨구나 불을 질러버릴 게 분명했다.

연막탄이 많이 흩어졌지만 아직까지는 허리 아래로 흐릿하게 연막이 남아 맨홀 뚜껑이 열렸는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도 금방이었다. 바퀴벌레들이 나오기 전에 놈들이 맨홀이 열린 것을 알아채면 즉시 대응할 것이다. 맨홀을 다섯 개나 열었지만, 이럴 줄 알았다면 더 열었어야 했다.

바퀴벌레들을 자극할 게 필요했다. 방법이 없을까? 인아가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인아의 슬레이브들에게 강제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 힘들었다. 미끼로 삼으려고 위해를 가하면, 적대할 가능성도 있었다.

[페니, 피를 떨어뜨려.]

페니가 가까이 있는 맨홀 구멍으로 다가가 손톱으로 팔뚝을 잡아 뜯었다. 후두두둑- 핏방울이 맨홀 아래로 떨어졌다. 피 냄새가 맨홀 구멍을 타고 하수구로 퍼지기 시작했다. 핏물을 흘리는 것으로도 유인되지 않는다면 페니를 미끼로 삼아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피 냄새에 반응했는지, 사사삭-스스스슥-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올라오나? 소리만 내고 왜 올라오지 않지?’

예상과는 달리 바퀴벌레들은 맨홀 구멍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어째서? 연막이 맨홀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듯 내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연막 때문이군.’

연막탄에서 나오는 연기를 감지할 수 있다면, 불길이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낮고 높은 웃음소리가 인근 건물 옥상 위에서 들렸다.

“흐응- 술래잡기도 이제 끝?”

“......”

유미가 주먹을 꾹 쥐었다. 레드 존이 넓어졌다고 하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의 변종과 빗치가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스물 정도였는데, 어느새 서른이 넘었고 지금은 쉰이 넘는 숫자였다. 변종 하나가 일주일에 사람 하나를 먹는다고 가정해도. 하루에 7~8명씩 죽어 나가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런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면, 사육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는 소리였다.

“우릴 놔줄 생각은 없나?”

“이렇게 하면 어떨까? 당신이 순순히 잡히면 그 뒤에 있는 년들은 놔줄게. 어때?”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유미가 그년을 향해 고함질렀다.

“웃기지 마!”

유미를 본 그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명백히 비웃는 모습이었다.

“어라? 아? 그때 너구나? 안 죽고 살아있었네?”

“비겁하게 위에 있지 말고 내려와!”

유미의 고함에 대답이라도 하듯, 휘잉! 뾰족한 철근이 유미를 향해 쏘아졌다. 유미는 날아오는 철근의 옆을 후려쳤다. 굵직한 철근이 꺾이며 옆으로 튕겼다. 유미는 제대로 시간을 끌어주고 있었다.

유미가 잠시 시간을 끌어준 덕인지, 맨홀 구멍에서 더듬이 한 쌍이 올라왔다. 삐져나온 더듬이가 조심스럽게 사방을 훑었다. 연기는 있지만 열기는 없다는 것을 감지한 것처럼 한 쌍 올라왔던 더듬이들이 두 쌍, 세 쌍으로 갈대처럼 빼곡하게 돋아 오르기 시작했다.

“무섭냐? 젓가락 던지지 말고 내려와.”

유미가 맨홀을 슬쩍 보고는 방독면을 거칠게 벗었다. 유미의 거친 도발을 바라보던 그년이 손가락을 까딱하자, 뒤에 있던 괴물이 들통에 소화액을 토해냈다. 변종들이 들고 있던 철근에 소화액을 찍어 발랐다. 이제 어떻게 할래? 하는 표정으로 유미를 쳐다보는 그년이 다시 손가락을 까딱하려는 순간.

스스슥-

끼리릭-

작은 소리가 뚜렷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막 유미를 공격하려던 그년이 주변을 살폈다. 사방을 살피던 그년의 눈동자가 한곳을 노려봤다. 도로위에 생겨난 갈대들. 바퀴벌레 더듬이가 송송 올라와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 당신. 설마.”

그년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설마 하는 얼굴이 경악하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년의 감정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더듬이들이 흔들렸다. 연이어 다른 구멍에서도 더듬이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송송 솟아난 더듬이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한쪽으로 쏠렸다. 그년이 있는 방향이었다.

끼리리리리-

사사사사사-

강한 마찰음과 함께 다갈색 물결이 분수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불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놈들은 휘발유와 같은 인화성 물질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러니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바퀴벌레들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아아아앗!”

그년이 비명을 질렀다. 바퀴벌레들은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바퀴벌레로 만들어진 송곳이 땅을 타고 솟아오르는 것처럼 일직선으로 내달렸다. 그년이 있는 곳으로 전진하는 바퀴벌레들.

“다 죽겠다는 거얏! 빨리 불! 불을 질러. 불을 쓸 수 있잖아!”

그년이 당황해 발을 동동 구르며 고함을 질렀다. 우릴 포위했던 변종들과 빗치들이 전부 빠졌다. 바퀴벌레에게 공격 받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크아아아아!

새까맣게 달라붙는 바퀴벌레를 떼어내려고 변종이 발버둥 쳤다. 철근으로 만든 창은 몇 마리를 꿰뚫자. 소화액이 다됐는지 바퀴의 딱딱한 등껍질을 뚫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결국 변종은 비명을 지르며 해체됐다. 우리를 노렸던 철근들이 바퀴벌레를 향해 쏟아졌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철근에 꿰이면서도 바퀴벌레들은 그년을 향해 전진을 계속했다.

“불을 질러! 빨리!”

그년이 고함을 빽 지르자. 빗치들이 도로에 주차된 자동차 연료통에 구멍을 냈다. 휘발유가 꼴꼴 소리를 내며 아스팔트 도로를 적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라이터를 가지고 있는 놈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년이 나를 보고 간절한 표정을 지었다. 불을 붙여달라는 표정이었다.

두 손가락을 눈썹에 대고 인사를 한 뒤, 내달렸다. 부우우웅-하는 바퀴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휘발유를 피하려는 것처럼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르기 시작하는 바퀴벌레들. 그년이 서 있는 옥상을 향해 검은 안개가 뭉실뭉실 피어올랐다. 그 안개 뒤로 뾰족한 고함이 새어나왔다.

“하하하하한유우우우우혀어어어어언!”

*

우리를 추적하는 변종과 빗치는 없었다. 잠시 뒤 폭발음과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바퀴벌레들을 정리하려면 제법 시간이 오래 걸릴 것처럼 보였다.

“잡을 기회였는데, 이번에 처리하는 게 낫지 않았나요?”

유미는 결착을 내지 못한 게 불만이었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생각이야 좋지만, 우리가 접근하면 변종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중에는 쉰이 넘는 변종들이 있었다. 바퀴벌레보다 숫자가 적지만 위험한 우리를 먼저 처리할 것은 자명한 사실. 한둘도 아니고 쉰이 넘는 숫자가 이상한 소화액을 찍어 바른 창을 던진다고 생각하면 그년을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억지로 상황을 만든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면 내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어떻게든 그년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면 그 뒤가 문제였다.

“뭐가 문제인데요?”

“바퀴벌레들 봤지? 그년에게만 달려드는 것.”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퀴벌레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그걸 막기 위해서 개싸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 외였다. 바퀴벌레들은 그년을 향해 달려들었다. 꼭 그년이 원수라도 되는 것처럼 죽자고 그년을 향해 달려드는 바퀴벌레들 덕에 쉽게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그년을 건드리는 건 위험했다. 그년을 우리가 죽인다면 바퀴벌레들은 어떻게 움직일까? 바퀴벌레들이 죽이려고 한 목표가 사라지면 다음 목표는 누가 될까?

바퀴벌레들이 사방으로 확산한다면 우리도 위험했다. 당장 살겠다고 멸망의 상자를 열어버리는 짓은 멍청한 행동이었다. 그년이 우리보다 바퀴벌레를 잡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맨홀을 열었다. 그런데 그년을 죽여 버리면 뭐가 될까?

백번 양보해서 죽였다고 가정하면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 그년이 죽고 나면 변종이나 빗치들은 어떻게 될까? AWS처럼 링커가 죽고 난 뒤 슬레이브처럼 굳어버릴까? 아니면 유미가 서열로 찍어 누른 빗치처럼 유미가 죽으면 그대로 자유를 얻을까?

동작정지가 되지 않고 자유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았다. 자유를 얻은 변종과 빗치들이 하나로 뭉쳐 바퀴벌레들을 제거할까 아니면 각자 살아보겠다고 뿔뿔이 흩어질까? 후자가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최선은 지금 발을 빼는 게 맞았다. 그년이야 우리를 죽이겠다고 분노를 터트리겠지만, 앞으로 볼 일 없으면 그만이었다.

“우릴 그냥 둘까요?”

“그래도 그년이 직접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왜요?”

“그년에게만 바퀴가 몰렸던 것을 생각해봐. 바퀴벌레들이 나오지 못하게 틀어 막아둔 영역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방에서 바퀴들이 달려들지도 모르는데 나오겠어?”

놈들의 영역에서 벗어나면 추격 걱정은 접어도 됐다. 하지만 유미는 못내 불만이었다.

“부하들을 시킬 수도 있잖아요.”

“뭐 그럴지도 모르지.”

변종이나 빗치들을 시켜 추격을 계속한다면 그건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뭐로 추격할까? 시간이 지나가면 냄새는 옅어지기 마련, 유미의 페로몬이나 내 체향으로 추격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중간에 연막탄을 터뜨리든 아니면 하수를 퍼 올려 한 번 끼얹고 가면 그만이었다.

어느덧 지도상에 표시된 레드 존을 벗어났다. 선로에는 생각보다 좀비들이 적었다. 감염 사태가 발생한 뒤 계엄이 발효되면서 열차들이 통제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변이를 일으킨 뒤로는 좀비들이 달라붙지 않으니, 그대로 뛰어가면 그만이었다.

성남인근을 지나쳐 수원에 가까워졌다.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유미가 추격이 따라붙었는지 확인하러 갔다 왔다.

“뒤따라오는 것들은 없어요. 수원으로 들어가실 건가요?”

“아니, 수원은 복잡해.”

그년이 자기의 영역을 만들고 부하들을 부리고 있었다. 수원정도 되는 대도시면 그녀와 비슷하게 부하들을 부리는 존재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빗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수원정도 되는 대도시라면 동맹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엮이면 인근의 경비도 삼엄해 질 것이 분명했다. 동맹의 연구소를 털 생각인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수원에 들어가기 전 철로를 벗어나 용인 방향으로 틀었다. 적당한 쉼터를 찾아, 하루 정도 인아의 상태를 지켜본 뒤 움직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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