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존 (6)
욱신- 묵직한 압박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나와 유미를 갈라놓으려는 것처럼 쏘아지는 것들. 철근과 뽑힌 가로등 따위들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인아를 들고 가던 슬레이브가 굵은 철근에 꿰였다. 가슴과 허리를 관통한 철근 때문에 몸이 굳은 슬레이브.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가로등이 슬레이브의 머리통을 박살냈다. 슬레이브들은 결사적으로 인아를 지켰다. 팔다리가 꺾이고 철근에 꿰여 고슴도치가 되면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는 슬레이브들.
위기 감응에 따라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유미는 나에게 그녀의 몸을 맡기고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날아오는 것들을 피해 몸을 굴려 멈춘 열차 아래로 숨었다. 따라오던 공격이 열차 아래로 숨는 것과 동시에 뚝 끊겼다.
인아를 지키는 슬레이브들은 다섯이 죽었고 둘은 심하게 부상을 당했다. 나머지 셋은 팔다리에 하나씩 상처를 입었지만, 움직임에는 이상이 없었다. 부상을 심하게 입은 슬레이브가 몸으로 공격을 막는 동안, 셋이 인아를 끌고 열차 아래로 피했다.
유미가 눈빛으로 육교 위를 가리켰다. 육교 위에서 오연한 자세로 웃고 있는 빗치 옆에 늘어선 변종들이 보였다. 철길 좌우도 포위된 상황. 변종들 사이사이에 빗치들이 보이는 것을 보니 변종과 빗치들이 섞여 있었다.
‘빌어먹을.’
기습에 당했다. 바퀴벌레 다음에는 변종과 빗치들이 떼거리로 몰려있다니, 변종의 숫자는 스물둘에 빗치도 무려 다섯이나 됐다.
‘함정에 빠질 때까지 몰랐다고?’
이상했다. 일반적인 함정이라면 진작 알아챘을 것이다. 위기 감응이 되지 않았다는 건, 이 상황이 나에게 위험하지 않고 느꼈다는 소리였다. 맨홀 변종을 먹은 뒤부터 위기 감응이 무뎌지기는 했다. 일반적인 총알은 위기 감응이 작동되지 않았다. 내 몸에 위험한 것만 감응의 대상이 됐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함정이라면 살의가 있다면 반응했어야 했는데, 이렇게 함정 깊숙이 들어올 때까지 반응하지 않았다니, 약했을 때 민감했고 강해지자 둔감해졌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이 상황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야.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단순하게 위기 감응이 둔화됐다고 생각하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5.56mm 탄환을 무시할 정도로 단단해진 육체가 굵직한 철근으로 만든 창에 치명상을 입을 리 없었다. 이건 슬레이브들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슬레이브들을 살폈다. 철근으로 만든 투창에 몸이 꿰인 슬레이브들. 본래대로라면 칼로리를 소모하기 전까지는 막아냈어야 했는데 막지 못했다. 어째서? 부상을 입고 열차 밑으로 들어간 슬레이브들이 몸에 박힌 철근을 힘겹게 뽑아내는 모습이 보였다.
‘혹시 뭔가 처리를 한 창일까?’
단순한 철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년이에요.”
깔깔깔깔 웃고 있는 빗치. 육교 위에서 여왕님처럼 멋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있는 빗치를 보곤 유미가 이를 갈았다. 유미의 눈은 웃고 있는 빗치를 봤지만, 나는 그 뒤에 있는 기묘한 변종에게 눈길이 갔다.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기괴하게 생긴 그것. 멀리서 봤어도 겹눈처럼 보였다. 곤충의 다리가 아닌, 기형적인 사람의 팔이 넷이나 달린 괴물. 그건 괴물이라고 밖에 달리 설명할 것이 없었다.
언젠가 봤던 공포영화가 떠올랐다. 그 괴물이 암녹색 액체를 철근에 토했다. 변종들은 괴물이 토한 토사물이 묻은 투창을 던졌다. 정체불명의 토사물이 위험했다. 저것을 묻힌 창에 찔리면 관통됐다. 육교 위로 뛰쳐나가려는 유미를 붙잡았다.
“저길 봐. 저 뒤에 괴물 보이지?”
“네.”
“저 괴물이 뱉은 것에 닿으면 위험해.”
“뭔가요? 산 같은 건가요?”
“모르겠다. 일단 내가 저 괴물을 잡을 테니, 그 뒤에 나오도록 해.”
“위험해요.”
100% 확신하기는 힘들었지만, 위기 감응은 저 창이 날아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저건 위험했다. 최소한 12.7mm 중기관총 이상으로 위험한 무기였다.
“피하는 건 자신 있어. 봤잖아. 내가 제일 먼저 반응한 것. 내가 놈들의 시선을 끄는 동안, 크게 한 방을 노려.”
“어떻게요?”
“저기 슬레이브들이 가지고 있던 가방에 백린 연막탄과 화염병이 있을 거야. 그걸 우선 챙겨.”
“알겠어요. 연막탄과 화염병을 던지면 되는 건가요?”
“아니, 먼저 육교를 무너뜨려.”
“네?”
“네 힘이라면 할 수 있어. 저기 기둥 보이지? 저걸 박살을 내면 육교가 무너질 거야. 놈들이 우왕좌왕할 때 백린 연막탄을 먼저 던져. 그 뒤 화염병이다. 불을 붙이는 건 내가 하지.”
연방의 타격조가 썼던 백린 연막탄을 하나 유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유미는 연막탄을 받고 좌우를 살폈다.
“양쪽 옆에 있는 놈들은요?”
“우리가 육교를 공격하면 우리를 잡으려고 안으로 들어올 거야. 내가 오른쪽을 막을 테니, 너는 왼쪽을 맡아.”
“알겠어요. 이게 저년에게 통할까요?”
유미가 백린 연막탄을 고쳐 잡고 물었다.
“통해. 백린이 묻으면 살을 도려내야 하니까. 가능해.”
재생력만 믿고 백린이 묻은 곳을 그냥 두면 끝없이 타들어 갈 것이다. 여기에 연막으로 놈들의 시야를 차단하면, 함부로 창을 던지지 못했다. 유사 네이팜이라고 하더라도 화염병까지 있으니 해볼 만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가 거칠었나?”
깔깔깔 웃던 것을 멈추곤 빗치가 말을 걸었다.
“흐응~ 너무 그러지 말라고. 저번처럼 바람맞고 싶지 않았거든.”
“......”
“우리 서로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는 게 어때? 오랜만이잖아.”
유미와 시선을 교환했다.
‘셋.’
‘둘.’
‘하나!’
열차 밑에서 달려 나왔다. 날 공격할 거로 생각했는데, 놈들은 가만히 있었다. 예상 밖이었다. 유미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튀어나가려던 유미가 내 신호를 받고 멈췄다. 놈들이 날 공격하는 동안 유미가 육교를 향해 가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유미가 고스란히 노출됐다.
내가 조심스럽게 열차 옆으로 나오는 동안, 철길 옆을 포위하고 있는 놈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서 있었다. ‘무슨 꿍꿍이지?’ 내가 올려다보자, 육교 위에 있던 빗치가 미소를 지었다.
“나왔어?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면 무섭겠지? 당신은 유독 간이 작았으니까.”
“......”
저년 본래 나를 알고 있었나? 내가 알고 있는 여자들 가운데 저렇게 생긴 년은 없었다. 빗치로 변하면서 성형한 것처럼 변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하면 나도 마찬가지였다. 삼십 대의 몸에서 이십 대 초반의 몸으로 변했다. 키도 조금 컸고 얼굴도 많이 변했다. 나도 거울을 보면 이게 나라고 믿기 힘든 판에, 남이 날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근데 나를 아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당신 누구야? 날 알아?”
“어마? 정말 잊은 거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처럼 그러더니, 역시 사내들은 다 그렇다니까.”
깔깔깔 유쾌하게 웃는 빗치였다.
“그러지 말고 좀 가까이 와서 자세히 봐. 그럼 기억날지 모르잖아. 안 그래?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이야기하긴 그렇잖아?”
“......”
빗치가 가까이 오라고 말했다. 어차피 육교와의 거리는 대략 30m 최소한 20m 안쪽으로 접근해야 효과적으로 염화 능력을 쓸 수 있었다. 내가 육교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철길 양쪽에서 거리를 두고 포위하고 있던 놈들이 유미와 인아가 숨어있는 열차를 향해 다가섰다.
마치 나와 유미, 인아와 떼어 놓으려는 것 같았다. 내가 육교로 가까이 간다면 놈들은 유미와 인아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가까이 가는 건 위험했다. 여차했을 때 내가 유미를 도울 수 없었다. 다가서던 발걸음을 멈추자 빗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왜? 저년들이 신경 쓰여? 그런 거야? 정말?”
“......”
“호호호홋. 대놓고 다른 년들을 신경 쓰다니, 너무한데 당신.”
“...... 누구야? 너.”
“아이 참. 아직도 모르겠어? 진짜 실망인데?”
“뭘 원하는 거지?”
빗치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바꿨다. 약간은 심각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신이 그랬지. 사랑은 변하지 않는 거라고.”
“......”
“근데 지금 당신을 보라고 변했잖아. 날 사랑한다고 해놓곤, 딴 년들을 더 신경 쓰고 있잖아.”
“뭐?”
변하지 않는 사랑? 내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사람. 내가 사랑한다고 속삭였던 여자가 떠올랐다. 김나경. 긴 머리카락을 곱게 길렀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커리어우먼이었다.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고 후회를 모르는 여자였다.
나는 그녀와 사귀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했었다. 어두웠던 과거를 잊고 그녀와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그렇게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말했다. ‘결혼은 사랑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함께 극복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고난 따위를 함께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게 살지 않게 행복하게 해주는 게 사랑이 아니냐?’며 웃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놓아 주는 게 맞지 않느냐며 되물었다.
아. 그랬다. 고작 3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었는데 20년은 지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랬었다. 결혼이란 혼을 하나로 엮는 것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결혼이란 변하지 않는 사랑의 맹세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결혼은 현실이다.’ 당신 같은 남자 싫지 않지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능력 없는 사람이 맹세를 운운하면 추해진다고 웃었었다.
그랬었다. 그녀를 위해서 그 비싼 집을 전세로 얻었었다. 그녀 말대로 그건 집착이었을지 몰랐다. 결혼을 해보겠다고 뱁새가 황새 쫓아가듯 몸부림쳤었다. 야근에 특근까지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이 그녀에게는 비루하게 보였었나 보다.
능력이란 결국 현실적인 경제력과 관련된 문제, 사랑하는 마음이란 그녀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가치는 아니었다. 그랬던 여자가 빗치가 되어, 내 앞에서 과거를 거들먹거리고 있었다. 욱신거리는 통증은 위기 감응이 아니었다. 그저 첫사랑이 남기고 간 상처가 벌어지는 감각이었다.
나는 그녀를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그녀에게 나는 많은 선택지 가운데 하나였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변하지 않는 사랑을 운운하다니, 저절로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그래 너였구나.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더니.”
“여자를 너무 비참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당신은 말이야.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너무 눈치가 없어.”
그녀가 고개를 까딱하자. 양옆을 포위하고 있던 변종과 빗치들이 유미와 인아를 향해 조금씩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인질인가?”
“호호호호. 인질? 그 정도로 가치 있는 년들이었어?”
“씨발. 원하는 게 뭐야?”
“그건 당신이 알고 있잖아. 자- 내가 원하는 게 뭘까요? 응? 이러니까 옛날 생각나지 않아?”
그녀는 날 보고 웃었다. 그래 저 눈이었다. 그녀는 저 눈을 하고 바람을 피웠다. 마치 절대적인 사랑은 없다는 걸 증명하려는 것처럼 대놓고 상처를 줬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 당시 나는 사랑이라는 이름에 얽매여있었다.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다고 했었다. ‘용서라니, 내가 잘못을 했어야 용서를 하고 말고 하지 않겠어?’ 그녀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남자들 다 그렇지 않냐? 되물었다. 들키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숨겼다면 그렇게 비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는 그녀와 헤어졌다. 그녀는 마지막 날 이렇게 말했다. ‘조건 없는 사랑은 없어,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것도 없다고!’ 아- 그랬다. 내 20대 후반은 혹독한 수업을 받았었다.
“......”
“흐응. 저년들과는 이런 관계?”
그녀가 새끼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웃었다.
“그래도 너무 많잖아. 남자 하나에 전부 여자라니, 그리고 저기 저건 여자도 아니고 인형? 당신 그런 취미도 있었어?”
시체가 된 슬레이브를 보곤 고개를 도리도리 흔드는 그녀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신경을 긁었다. 하아- 끓어오르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래 저년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년이었다. 과거 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진심은 통한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혹독한 수업 끝에 깨달았다. 세상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있고, 내 진심도 의미 없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취미는 바뀌기 마련이니까. 그래서 날 죽일 생각이라면 진작 죽였을 텐데. 할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하지, 아니면 그저 장난인가?”
“어라. 정말 많이 변했네. 조금 쿨-해.”
백린연막탄을 가만히 쥐었다. ‘터뜨릴까?’ 육교를 무너뜨리지 않고 백린연막탄을 쓰는 건 효과가 좋지 않았다. 기각. 양옆에 있는 놈들을 뚫고 도주하는 것도 기각. 이쪽은 저놈들의 영역이었다.
“당신이 온 줄 몰랐어. 근데, 당신이더라고. 그래서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어.”
“그래? 용건이 끝났으면 보내줬으면 하는데?”
“호호호홋.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해.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
저년이 떠들어대는 대도 변종들과 다른 빗치들이 복종하는 것을 보면, 저년이 대가리였다. 그러니 저년을 어떻게 하지 않고 이곳을 벗어나긴 힘들었다. 뭘 원하는 거지? 내 능력에 대해서 알고 있나? 실없는 소리를 그녀와 주고받는 동안 조심스럽게 포위망을 좁히는 변종과 빗치들을 보니, 날 잡으려는 것 같았다.
“하수구에서 죽을 뻔했거든.”
“아- 바퀴벌레들.”
“그래. 다른 곳에서도 봤는데, 다른 곳에서 본 바퀴들은 그렇게 호전적이지 않았거든. 거기 뒤에 있는 놈이 바퀴들을 조종하는 놈인가?”
입에서 암녹색 소화액을 토하던 괴물이 내 말에 반응했다. 낮게 크르릉 거리는 소리를 내자, 그녀가 귀여운 아이를 쓰다듬는 것처럼 괴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호호홋- 아니. 이 아이는 민감하니까. 조심해줬으면 좋겠어. 음. 바퀴벌레들이 궁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