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178화 (178/261)

레드 존 (3)

슬레이브 시체를 처리하느라 소모한 열량을 채우기 위해 흡혈을 하지 않았었는데, 적을 앞에 둔 유미는 내 피를 갈구했다.

“빨리요.”

“자. 잠깐 유미야.”

“급해요.”

“제대로 말해줘야지. 아---.”

진정을 시키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유미는 격정적으로 피를 빨았다.

유미가 피를 빠는 동안, 나는 물과 육포를 집어삼켰다. 순간순간 골수에서 새로 피를 생성하는 것보다 유미가 빨아먹는 게 많아져서 어질해질 지경이었다. 순식간에 500ml 넘게 뽑아 먹은 유미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떨어져 나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가에 묻은 피를 혀로 핥아 먹는 유미였다.

그 모습을 본 인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머. 눈 돌아간 것 좀 봐. 적당히 먹어야지. 유현씨 괜찮아요?”

“어? 하아...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인아는 유미를 노려봤다. 인아의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듣고도 기분이 좋아 무시하는지 모르겠지만, 유미는 내 손을 꼭 잡고는 만족스럽게 늘어졌다.

인아의 말이 아니더라도, 걱정스러웠다. 그전에는 내 피만 먹는 유미였지만, 변이된 피를 마신 뒤로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유미가 내 피 말고 다른 사람의 피도 먹을 수 있게 변했다면? 내가 없어도 된다면...... 순간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의식 저편으로 묻어뒀다.

“유미야 좀 진정됐어? 누구인데?”

내 질문에 만족스러웠던 유미의 표정이 서늘하게 변했다.

“빌딩이요.”

“빌딩?”

아- 그 빌딩. 너저분하게 찢긴 유미의 모습. 나를 아는 것만 같았던 빗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게 여기 있다고?”

“여러 흔적이 섞여 있지만... 분명히 있어요.”

유미의 몸에서 핏빛 수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진정하고. 어디 있는지 추적할 수 있겠어?”

“흔적이 뒤섞여서 힘들어요. 하지만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면 그년이 나올 게 분명해요.”

“위험하지 않을까요? 슬레이브를 뺏겨서 기분이 나쁘지만, 싸우지 않고 지나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인아가 제동을 걸었다. 적대감을 완화해주는 약을 먹었기 때문인지, 인아는 비교적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했다. 나도 인아의 생각에 동의했다.

“지금 싸우는 건 좋지 않아. 우리 목표는 지금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동맹의 연구소를 습격하는 거야. 복수는 나중에 할 수 있지만, 작전은 시간을 놓치면 힘들어져.”

“.......”

유미는 분함을 참지 못하고 주먹을 꼭 쥐었다. 꼭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유미의 어깨를 잡고 토닥여줬다.

“조금만 참아.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올 수 있잖아. 우리가 계획했던 일을 끝내고 돌아오자. 응?”

“알았어요.”

유미가 식식거리는 호흡을 진정했다. 인아가 잠시 잊고 있던 이야기를 다시 짚어줬다.

“뺏긴 슬레이브는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여기에 있는 게 그거라면, 연방이든 동맹이든 함부로 공격하지는 못할 거야. 계획대로 연구소를 공격한 뒤, 찾으러 오자.”

빌딩에서 만난 빗치가 이곳에 있다면, 쉽지 않았다. 빗치 하나만 있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지만, 유미는 이곳에 여러 흔적이 뒤섞여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빗치 하나가 아니라 집단과 싸워야 할지도 몰랐다. 당시 그 빗치는 유미를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려고 했었다. 서열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 뒤로 몇 개월이 지났으니 세력을 만들었다고 봐야 했다.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결정을 내린 뒤 포기하는 것은 빨랐다. 회수하지 못한 동맹 측 슬레이브도 포기하고 레드 존을 돌아서 가기로 했다. 좀비들을 피해서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동 속도는 빨랐다.

싸움을 피하기로 했지만,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생겼다.

“이쪽도 레드 존에 있는 흔적과 같은 흔적이 있어요.”

“확실해?”

“확실해요.”

지도상에서 표시된 레드 존이 더 확장된 것이다. 길게 도로를 따라 확장된 영역. 레드 존을 피해 돌아가려고 했건만, 길을 따라 영역이 확장됐다면 우회하기 힘들었다.

“이 도로를 따라서 계속 흔적이 남아있다고?”

“네. 여기도 흔적이 남아 있어요.”

인아는 슬레이브들에게 전투식량을 먹게 하고는 지도를 보며 말했다. 도로를 따라 영역이 확장됐다면 한강까지 계속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더 위로 돌아가면 한강까지 갈지도 몰라요.”

“하- 어쩔 수 없지. 하수구로 가자.”

싫어하는 유미와 인아를 끌고 하수구로 내려갔지만 문제가 생겼다. 하수구가 잡동사니로 막혀있었다.

“막혔어요.”

“완전히 막힌 거야?”

“네.”

“대충 뚫고 갈 수 없겠어?”

“완전히 막혔어요.”

“어디 봐.”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구겨 넣은 것처럼 하수구가 틀어 막혀있었다. 그 틈새로 뭔가가 빠르게 움직였다.

“저기 뭐가 있어요.”

인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미와 함께 고개를 돌려봤지만, 인아가 가리킨 곳은 텅 빈 곳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채우는 소리.

끼릭-끼리릭

스스스슥-

“이게 무슨 소리죠?”

유미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문득 팔뚝만 한 바퀴벌레가 떠올랐다.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퀴벌레겠지.”

유미는 바퀴라는 말에 인상을 썼다.

“아이 진짜 이래서 하수구로 가는 건 싫다고 했잖아요.”

인아도 팔뚝크기의 바퀴벌레라는 말에 창백하게 질렸다.

“진짜 그렇게 커요?”

“그래. 진짜 컸지.”

“아우- 빨리 가자니까요. 전신이 가려운 것 같아요. 바퀴벌레 이야긴 그만하고 가요. 빨리 가자고요.”

유미가 앞장서서 발걸음을 떼는 순간, 반질거리는 등껍질을 가진 뭔가가 천장을 휙 지나갔다.

스스스슥-

“으꺅!”

냉정한 인아답지 않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인아의 비명에 반응이라도 한 것처럼 바퀴벌레가 인아를 향해 점프했다. 아니, 날았다. 순식간에 인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바퀴벌레. 날개를 펼치자 농구공보다 더 큰 바퀴벌레였다.

부우우웅.

인아는 하얗게 질린 채 석상처럼 굳어 피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바퀴 따위는 발로 밟아 죽일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인아였다. 하이킥으로 날아오는 바퀴벌레를 걷어찼다.

팍!

생각보다 묵직한 충격. 바퀴벌레 껍질이 이렇게 딱딱했나? 하이킥 두들겨 맞은 바퀴벌레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찰박 소리를 내며 하수 속으로 빠진 바퀴벌레는 빨빨거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유미가 인아를 보고 고작 바퀴 때문에 꺅꺅 거렸냐는 표정을 지었다. 인아는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표정을 바꿨지만, 창백한 얼굴이었다.

“바. 바퀴가 날아?”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는 인아였다. 인아는 사방을 도리도리 흔들며 경계했다. 앞장서서 가는 유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근데 저번보다 더 커진 것 같은데요?”

유미의 말대로 저번보다 좀 커진 것처럼 보였다.

“불. 불로 태워버리지요.”

인아는 좀 정신을 차린 듯 왜 불로 태우지 않았냐고 했다.

“여긴 하수구야. 냄새도 냄새지만 메탄가스가 있을 수도 있어서 말이지. 불을 잘못 붙였다가 메탄가스에 불이 붙으면 어떻게 하라고. 그리고 이 하수구 냄새에 섞여서 긴가민가했는데. 여기 기름도 있는 것 같아.”

“기름이요?”

“어 식용유인지 아니면 등유일지 모르겠지만. 기름이야.”

하숫물 위에 동동 떠 있는 것은 분명히 기름이었다. 여기에 불을 붙이면 난리가 날 것이다.

기름은 기름이고, 기분이 묘했다. 공중에 떠 있는 놈이라서 제대로 충격이 전달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발차기에 맞고 도망쳤다. 고작 바퀴벌레가.

지금 주먹이라면 슬레이브 정도는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근데 주먹도 아니고 발차기를 맞고 도망쳐? 바퀴벌레가?

“어? 이쪽도 막혔어요.”

앞장서서 가던 유미의 목소리가 바퀴벌레를 생각하던 내 생각을 흔들었다.

하나만 막힌 것이 아니었다. 남부 지방으로 내려갈 수 있는 하수구는 전부 막혀 있었다. 레드 존을 지하로 통과할 수 있는 하수구가 모조리 막힌 것이다. 건축 폐기물에서 나온 철근과 자동차를 구겨 넣어 막은 하수구를 보니, 인위적으로 막은 게 분명했다.

“이거 일부러 막은 것 같은데.”

“그래 보이네요.”

“크윽- 이젠 어떻게 하실 거죠? 네?”

인아가 담담한 표정을 짓는 데 반해, 유미는 분개했다. 시궁창 냄새를 참아가며 들어왔는데, 여기저기 막힌 하수구를 헤매고 보니 꼭지가 돈 것 같았다.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이래서는 방법이 없었다.

하수구가 막혔다는 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빗치들은 이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이성이라고 해봐야 변이되기 전, 인간의 경험에 근거한 이성이었다.

여자들 가운데 하수구를 기어 다닐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많지 않을 것이다. 서울시 지하에 있는 하수구가 사람이 돌아다닐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런데 하수구를 막았다는 건, 그만큼 길목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럼 밖으로 나가, 최단거리로 뚫고 가야겠네요.”

인아가 지도를 손가락으로 죽-내리그었다.

“소용없다니까요. 빌딩에서 봤잖아요. 지금도 보세요. 하수구까지 틀어막았잖아요. 우리가 빨리 지나간다고 그냥 가게 둘 것 같아요? 피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요.”

시궁창 냄새를 풀풀 날리며 유미가 으르렁거렸다. 유미에게 물수건을 던져주고 지도를 살폈다. 하수구를 막을 정도라면 중요한 지점을 전부 차단했을 것이다.

“도로를 따라가는 건 힘들어. 아마 그쪽으로는 대비를 해뒀을 거야.”

“그럼요?”

“철로를 따라 이동한다.”

“철로요?”

“그래. 철로. 철로도 감시하고 있겠지만, 놈들이 숨어서 공격할 수 있는 곳은 상대적으로 적으니까.”

“흐음. 그렇겠네요.”

인아와 내가 계획을 짜는 동안 물수건으로 시궁창 물을 닦아낸 유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철로든 뭐든 놈들이 추격하면 어떻게 하려고요.”

“슬레이브를 쓴다.”

“네?”

“어차피 잃어버린 슬레이브들을 되찾기 위해 돌아와야 하니까. 슬레이브를 미끼로 삼자는 소리야. 철로를 따라 놈들이 추격해 오면 슬레이브로 시간을 끌게 하고 빠져나가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력을 보존하는 거야. 일단 밖으로 나가자.”

지하에서는 위치가 어딘지 모르니 일단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밖으로 나간 뒤, 가장 가까운 철로로 이동해 철길을 타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자고 하자, 제일 먼저 유미가 움직였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맨홀 뚜껑을 열려고 한 유미가 이상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여기 맨홀 뚜껑이 이상한데요? 안 열려요!”

“힘줘봐.”

유미가 힘을 줘 맨홀 뚜껑을 밀어내려고 하자, 유미가 올라간 사다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끼기기긱! 콰작!

“엇?”

맨홀 뚜껑이 열리지 않고 유미가 딛고 있던 사다리가 뜯어졌다. 유미는 재빨리 콘크리트 벽에 발을 박았다. 하지만 하수구에서 삭아버린 콘크리트라 힘을 받지 못하고 부서져 내렸다.

“우앗.”

첨벙 소리를 내며 하수도에 떨어진 유미였다. 하수도라고 해봐야 고작 무릎 아래까지 올 정도로 수위가 낮았다. 그래서 그런지 하수는 더욱 걸쭉했다. 끈끈하고 걸쭉한 하수를 뒤집어쓴 유미가 소리를 질렀다.

“아아아아아악! 싫어!”

깜깜한 하수구를 타고 유미의 싫다고 절규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유미의 힘으로 열리지 않을 정도라? 맨홀 뚜껑을 용접해서 붙였거나. 맨홀 뚜껑이 열리지 않도록 위에 무거운 것을 올려놨다는 소리였다. 이렇게까지 막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올라오는 놈들을 두더지 잡기처럼 잡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빗치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틀어막았다? 여기는 영역도 아닌 인근 지역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과잉대응이었다.

하수를 뒤집어쓴 유미의 절규는 캄캄한 하수구를 타고 멀리 울려 퍼졌다. 멀리 사라진 소리 뒤로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그 적막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처럼 작은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티디디딕

사각거리는 소리. 뭔가가 뒤엉키는 소리였다.

“유현씨.”

“아저씨! 저기 뭐가 있어요.”

인아와 유미가 동시에 소리를 질렀다.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리눌렸다. 묵직한 돌덩어리를 얹은 것처럼 무거워지는 느낌. 위기감응이 경종을 울렸다.

저 멀리, 검은 물결 같은 것이 어두운 하수구를 따라 조금씩 밀려 들어왔다. 반들거리는 물결. 약간 붉은 기운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진 바퀴벌레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엎드려!”

“네?”

“예엣?”

“터뜨린다! 물속으로 들어가!”

유미와 인아가 하수 속으로 몸을 던졌다.

“타올라라!”

화르르르륵!

퍼어어어엉!

붉은 불길이 하수구를 타고 폭발했다.

*

뜨거운 불꽃은 식용유인지 등유인지 모를 기름까지 연료로 삼아 하수구를 불구덩이로 만들었다. 2분 정도가 지나자, 불길이 잠잠해졌다. 산소가 없어서 불이 꺼진 것처럼 숨이 턱턱 막혔다.

“괜찮아? 일어나.”

유미와 인아를 챙겼다. 유미는 괜찮았지만, 인아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슬레이브들이. 슬레이브 셋이 사라졌어요.”

“폭발에 휘말린 건 아니고?”

“아니요.”

“일단 나가자.”

아직도 위기감응이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파랗게 질식할 지경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진작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

“여기 열렸어요.”

맨홀 뚜껑이 열린 곳으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고 있었다. 유미가 맨홀 뚜껑이 열린 곳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고 했다.

“잠깐.”

“네?”

“생각 좀 하게.”

사방에서 느껴지는 위기감. 사방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분명히 이쪽엔 열린 구멍이 없었다. 올 때는 열린 구멍이 없었다. 생각을 끊는 것처럼, 갑각질 스치는 소리가 다가왔다.

사각-

사각-사각-

“저. 저기 또 와요!”

인아가 소리 질렀다. 유미는 반사적으로 사다리를 붙잡고 올라갔다. 막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는 유미를 끌어내리고 인아에게 말했다.

“먼저 보내. 빨리.”

내 말뜻을 알아들은 인아가 슬레이브 하나를 올려 보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슬레이브, 막 맨홀 바깥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우직-소리와 함께 사지를 바르르 떠는 슬레이브였다.

사지를 축 늘어뜨린 슬레이브가 쑥하고 맨홀 뚜껑 바깥으로 끌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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