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176화 (176/261)

레드 존 (1)

조종사를 잃은 아파치 헬기가 앵앵거리며 휘청거렸다. 투두두두둑- 기관포가 무작위로 불을 뿜었다. 부조종사가 재빨리 균형을 잡으려고 했지만, 프로펠러가 인근 빌딩을 스치면서 버티지 못하고 추락했다.

폐허가 된 옥상. 사지가 멀쩡하게 붙어있는 슬레이브는 둘뿐이었다. 나머지는 살아있어도 사지가 어느 한 곳 떨어져 나가 있었다. 앞을 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슬레이브의 목을 꺾었다. 목뼈가 부러지자 사지를 축 늘어뜨리는 슬레이브였다.

사지가 멀쩡한 슬레이브 둘의 목을 꺾어 무력화시켰다. 사지가 절단 된 채 살아남아 낙치처럼 꿈틀거리는 슬레이브들이 눈에 들어왔다. 전투력을 상실했지만, 슬레이브가 가진 특유의 재생력을 생각한다면 언제고 다시 전선에 투입될 것이 분명했다.

으직-

우득-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려 퍼졌다.

문득문득 피와 살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가 이성을 흔들었다. ‘이미 넘어버린 선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미희도 잡아먹었으면서 어차피 죽은 고깃덩어리 아닌가?’ ‘부모를 위해 자기 허벅지살 떼어 먹인 고사도 있잖아.’ 점점 더 집요해지는 자기 합리화. 변명만 떠올랐다. 효율적으로 판단해도 먹는 게 좋다는 생각까지. 어떻게든 참고 넘어갔던 억눌렀던 식육에의 욕구. 그 욕구가 불꽃처럼 피어났다.

하아- 낮게 한숨을 토했다. 피어오르는 불꽃을 억지로 꺼트렸다. 쥐를 실험에서 먹으면 먹을수록 더 많이 먹게 된다고 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변이가 가속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내가 변해버리면 내 피를 먹는 유미도 변할 것이다. 그러니 참아야 했다. 슬레이브들 가운데 짐을 지고 있던 것들이 있었다. 동맹의 슬레이브용 전투식량 같았다.

연방의 전투식량은 변이를 촉진하는, 변이와 관련된 대규모 실험과 연관된 전투식량이었다. 급하면 먹겠지만 어지간하면 먹고 싶지 않았다. 동맹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연방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었다.

슬레이브들이 가지고 있던 것들을 대충 챙기고 목이 부러져 사지가 마비된 두 슬레이브를 어깨에 걸쳤다. 슬레이브들은 내 양 어깨에 매달려서도 공격 명령을 따르기 위해 입을 딱딱거렸다. 내 귀와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러고 보니 슬레이브들이 링커에게 눈으로 본 정보를 전달할 가능성이 있었다. 숨구멍을 뚫은 검은 비닐봉지로 머리를 덮어 눈을 가렸다.

반대쪽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이윽고 폭발음이 터졌다. 인아와 유미가 코브라 헬기를 격추한 것 같았다. 인아의 슬레이브만 8명이었다. 거기에 유미까지 있으니 화력은 충분했다.

아파치 헬기가 추락하고, 코브라 헬기까지 떨어진 뒤로 옥상으로 올라오는 병력은 없었다. 동맹의 지휘부는 병력을 올리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항공지원이 없고, 슬레이브들이 어떻게 당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슬레이브만 올려 보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저쪽이 할 방법은...’

저쪽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없었다. 그 가운데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면 높은 위치를 선점해 저격하는 것이었다.

‘저격이겠지?’

저격수가 자리를 잡기 전 탈출해야 했다. 옆 건물로 뛰어내리는 방법은 기각. 혼자라면 가능했겠지만, 슬레이브 둘에 이런저런 짐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30m 넘게 점프하는 건 무리였다.

바로 아래층에는 병사들과 슬레이브들이 바글바글 몰려있는 게 느껴졌다. 이리저리 도망치다 깨진 무전기에서 끊임없이 잡음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명령이 떨어진 것 같았다. 시간이 없었다.

콰직- 소방호스를 뽑아내 허리에 묶고 내달렸다. 15m 가량 앞으로 날아갔던 몸이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허리에 묶은 소방호스가 팽팽해지며, 빌딩에 충돌했다. 두꺼운 강화유리를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가자. 위층에서 허겁지겁 계단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널브러진 슬레이브들을 다시 어깨에 들쳐 메고 빌딩을 빠져나갔다. 밖에는 일반병사들이 몇 명 남아있었지만, 발화 능력으로 탄창과 수류탄을 폭발시켜 길을 뚫었다.

팡! 콰아아아앙!

“으아악”

“씨발!”

“저걸 어떻게 막으라고.”

“총기가 폭발합니다.”

“수류탄 버려.”

우왕좌왕하는 동맹군 병사들을 뒤로하고 좀비들이 흘러넘치는 거리로 뛰어들었다.

*

좀비들의 숫자는 점차 늘고 있었다. 연방의 방벽에서도 느꼈었지만, 연방은 좀비들을 끌어들이는 무엇인가를 만든 것 같았다. 옐로우 플래그가 무너진 연방은 병력 충원에 문제가 있었다. 병력이 부족하니 좀비들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동맹의 진격로를 차단한 것이다.

이에 대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동맹은 좀비들을 분산시키는 무엇인가를 작동한 것 같았다. 좀비들은 한곳으로 모이지 못하고 3~4갈래로 나뉘었다 뭉치기를 반복하면서 우왕좌왕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방과 동맹 모두 좀비들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우왕좌왕하는 좀비들이지만 눈앞에 있는 인간들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동맹군은 나를 추적하지 못했다. 치누크 2대에 블랙호크 1대, 아파치와 코브라 헬기까지 더하면 5대가 격추됐다. 이런 상황에서 헬기를 동원할 정도의 배짱은 없었다.

저번에는 연방의 공군력을 갉아먹고 이번에는 동맹의 공군력을 갉아먹었으니 서로 사이좋게 땅에서 구르게 만든 것이다.

아우어어어어

좀비들이 내 발걸음 소리에 반응했다. 근처까지 다가왔던 좀비들은 급격히 흥미를 잃고 다시 제 갈 길로 몸을 돌렸다. 페니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이 조금은 익숙해졌기 때문에 유미와 인아가 먼저 도착했는지 확인했다.

[인아와 유미는?]

[아.직.]

멀리, 미노와 미도가 살았던 병원 빌딩 그러니까 식육 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빌딩의 남부지역은 레드 존이었다. 동맹의 전신(前身)인 아더스와 접했을 때도 지도에 붉게 표시된 지역을 피해서 움직였었다.

빌딩에 들어서자 페니가 나를 반겼다. 반긴다는 느낌이 텔레파시로 직접 느껴졌다. 꼭 집에 돌아온 주인을 따르는 강아지가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페니를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큼. 큼.”

“괜찮습니다.”

링크를 통해 내 감정을 느꼈는지, 페니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텔레파시로 의사표시를 할 때는 단어만 사용하더니 의사표시를 제대로 했다. 그만큼 자율성이 커졌다고 봐야 하나?

“목소리가 예쁘네.”

“감사합니다.”

미묘한 느낌.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었는데, 링크로 연결된 페니와 나는 어쩐지 정신적인 교감 같은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적 교감이라니.

내가 끌고 온 슬레이브들은 검은 비닐봉지로 눈을 가렸지만, 귀는 그대로였다. 이곳의 상황이나 정보를 링커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아와 유미가 올라왔다. 깔끔한 인아에 비해 유미의 옷은 넝마였다. 청바지는 찢어져 간신히 골반에 걸쳐져 있었고 상의는 탈의 직전이었다. 유미는 날 보자마자 도도도독 달려왔다.

“다녀왔습니다.”

“꼬리는 없었고?”

유미가 날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는 동안 인아에게 물었다. 인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뒤를 보니 8명이었던 슬레이브의 숫자가 하나 줄어있었다. 긴 말 하지 않고 비닐봉지로 얼굴을 가린 슬레이브 둘을 보여줬다.

인아는 내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챘는지 두 말하지 않고 슬레이브를 물었다. 인아에게 감염되어 강제로 링크가 끊어졌기 때문인지 슬레이브들이 발버둥 쳤다. 한참 발광하던 슬레이브들이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장악은?”

“성공했어요.”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는 링커가 죽어 없는 빈 통을 감염시켰었다. 내가 데려온 슬레이브들은 링커가 살아있는 상황이었다. 링크가 연결된 것도 강제로 뺏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동맹이든 연방이든 슬레이브에게 일종의 보안장치를 해놓은 것 같았다. 네이팜으로 자폭한 동맹군 지휘관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거의 확실한 이야기였다. 상대방의 슬레이브를 장악하지 못하게 일종의 처리를 했음에도 인아가 감염 장악을 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이야기였다.

‘아니,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냐.’

단순하게 생각하면 분명히 좋은 결과였다. 링크로 연결된 슬레이브도 강탈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링커가 있는데도 슬레이브를 강탈당한 동맹이 가만히 있을까? 이건 동맹의 처지에서 보자면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인 공격기의 통제권을 뺏긴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책을 마련할 것이 분명했다.

“인아야. 슬레이브 숫자가 줄었는데. 꼬리를 자르는 데 썼어?”

“네.”

“그거 시체는?”

“시체요?”

“폐기하지 않고 그냥 둔 거야?”

“예?”

인아는 내가 다그치듯 말하자 기분이 상한 목소리였다.

“우리가 강제로 링크를 끊고 슬레이브를 장악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저쪽에서는 뭔가 힌트를 찾으려고 할 거야. 네 감염 장악의 흔적이 남아있는 슬레이브 시체가 저쪽에 넘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그런 거야.”

“아... 그럼 어쩌죠?”

좋지 않았다. 동맹이든 연방이든 연구원과 연구시설이 있었다. 인간의 힘은 이성에서 나왔다. 내 피로 강화된 흔적이 남아있는 슬레이브가 넘어가든 인아의 감염 장악의 흔적이 남아있는 슬레이브가 넘어가든 저쪽에게 넘어간다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위험했다.

“그 슬레이브 죽었어?”

내 말에 인아가 정신을 집중했다. 인아가 슬레이브를 통제하는 방식은 일반적인 링커와는 많이 달랐다. 텔레파시를 써서 통제하는 건지 아니면 일종의 호르몬 같은 것으로 통제하는 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원거리 명령이 가능하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아직. 살아있어요.”

“추격 받고 있나?”

“예.”

“뭐가 추격하는 것 같아?”

“잠시만... 슬레이브 같아요.”

“무장은? 단순한 슬레이브야?”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숫자는? 많아?”

“네. 최소 20이에요. 장갑차까지 움직이고 있어요.”

이런, 그건 예상외였다. 슬레이브만 최소 스물에 장갑차까지 동원되서 추격하고 있다? 인아의 슬레이브가 아직까지 살아남은 게 용했다. 슬레이브 하나만 던져주고 몸을 뺀 인아와 유미도 다시 보였다. 그건 그거고 슬레이브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탈출로를 지정할 수 있어?”

“구체적인 건 힘들지만, 대략적으로는 가능해요.”

인아에게 지도를 보여줬다. 미도가 가지고 있던 지도였다. 내가 손가락으로 표시한 곳은 붉은색으로 경고 표시된 지역이었다.

“여기로 도망치라고 해. 가능할까?”

인아가 눈을 감고 집중을 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인아가 눈을 떴다.

“가능... 할 것 같아요.”

“그럼 됐어. 짐은 전부 챙겨놨고?”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던 유미가 냉큼 대답했다.

“네.”

“우리도 출발하자.”

인아가 붉게 표시된 지도를 보고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레드 존으로 갈 건가요?”

“일단은 가까이서 살펴보게. 레드 존으로 도망치면, 놈들의 추격을 뿌리 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레드 존에 뭔가가 있기 때문에 미도가 그렇게 표시했을 것이다. 레드 존 인근에서 처음 만났던 나상철도 그쪽은 꺼리는 표정이었다. 뭐가 있든 우르르 몰려오는 놈들이라면 레드 존에서 떼어 버릴 수 있을지 몰랐다.

‘빗치나 변종의 영역일까?’

포식을 하는 놈의 영역이라서 표시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

챙겨놓은 짐을 들고 레드 존 인근으로 이동했다. 인아는 도주하는 슬레이브가 가까이 왔다는 신호를 보내왔다. 8차선 도로 건너편이 지도에서 표시된 레드 존이었다. 하수구를 통해 이동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으엑. 도저히 못 참아요.”

유미는 내가 하수구로 끌고 다녔던 기억이 떠올랐는지 결사반대했다. 감각이 예민해졌다는 건 장점만큼 단점도 있었다. 인아가 유미를 보고 어리다는 듯 피식-웃었다. 그걸 보곤 유미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좀 친해진 거야?”

“......”

“......”

인아와 유미 둘 다 대답이 없었다. 내가 옆에 있어서 참는 건가? 본능이라 참지 못할 줄 알았는데, 유미가 내 피를 먹고 변이를 일으켜 어느 정도 본능을 제어할 수 있게 됐을 수도 있고, 인아도 일반적인 빗치는 아니니 적당한 수준에서 억누르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제 같이 지낸 지 제법 시간이 됐잖아. 어지간하면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

“......”

“......”

내가 식육의 욕구를 억누르고 있는 것처럼 인아와 유미도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억제하고 있었다. 이런 조작된 본능에서 벗어나야 했다. 연구원을 잡아서 어떻게든. 벗어날 것이다. 두 사람의 손을 꼭 잡아주곤 도로를 살폈다.

두두두두둑!

20mm 발칸포 소리가 들렸다. 장갑차에 20mm 발칸을 단 것 같았다. 장갑차는 여기저기 버려진 차들을 밀어내며 슬레이브를 추격했다. 그 뒤를 따라 좀비들이 바글바글 모여들고 있었다.

“슬레이브들이 스물 넘게 추격하고 있다며?”

“네.”

장갑차 안에는 링커들이 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저기에요. 슬레이브들이 옆쪽으로 가고 있어요.”

유미가 가리킨 곳을 보니 동맹의 슬레이브들이 인아의 슬레이브를 포위하기 위해 옆으로 돌고 있었다. 좀비들이 달려드는 것을 무시하고 발칸포까지 쏘며 추격하는 것을 보니, 저쪽에서도 레드 존으로 도망치기 전에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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