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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171화 (171/261)

실험자료 (1)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는 것을 보니, 동맹이 한 번 일을 벌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슬레이브들은 확실히 뛰어난 전투 병기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중무장한 다수의 병력에 백린, 네이팜 같은 무기까지 총동원해 싸운다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사실 정상적인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슬레이브나 변종, 빗치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군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힘들었지 군대만 제대로 있었어도 사태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묵직한 헬리콥터 소리와 함께 치누크 헬기가 등장했다. 헬기는 장갑차를 매달고 있었다. 그걸 본 유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장갑차죠? 그쵸?”

“장갑차 맞네.”

30mm 발칸이 달린 장갑차였다. 기갑부대가 서로 상잔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 전차나 장갑차는 거의 없었다. 육군이 광증으로 인해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로 공군도 마찬가지였다. 연방도 블랙호크 헬기를 비롯해 아파치 몇 대만 가지고 있는 판국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치누크 헬기가 시가전이 벌어지는 인근 진지까지 장갑차를 수송해 올 정도라면 동맹 측에게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는 게 분명했다. 전파교란 장치와 AWS기술 확보에 성공해 생산한 슬레이브로 연방을 효과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소규모 전투는 탐지능력이 있는 연방이 우세하지만, 큰 그림은 동맹이 가져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런 결과가 나온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연방의 모병촌이나 마찬가지였던 옐로우 플래그를 공격한 것이 컸다. 병력을 충원하는 모병촌인 옐로우 플래그를 끝장냈으니, 연방은 병력을 충원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처음부터 병력의 숫자는 동맹이 압도적이었는데 슬레이브까지 동맹에서 생산해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하자 연방은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전선이 길어지면 방어하기 힘들었다. 지배지역이 넓으면 그만큼 병력이 많아야 했다. 하지만 연방은 처음부터 소수정예를 추구하던 세력이었다. 소수의 지배계급을 위한 완벽한 이상향이 목적이었던 연방의 가치관과 일반적인 생존자들을 무시했던 연방의 방침이 위기의 순간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적이 아더스라는 레지스탕스 그룹이었다면 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이 동맹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의 세력으로 결집하는 순간, 연방은 숫자에서 밀렸다. 만회하기 위해 부와 장수, 젊음을 미끼로 동맹의 내분을 유도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세상은 이미 변해있었다. 누군가 위에서 명령을 내렸을 때 아랫사람이 따르는 이유는 뭘까? 기존의 세상에서는 돈이나 사회적 지위 같은 것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지금 세상에서도 유효할까? 망해버린 세상에서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얼마나 효과적일까?

귀족과 천민으로 나뉘는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 심지어 귀족을 위해 총을 잡아야 한다면 더욱 그랬다. 연방의 가장 큰 실수는 거기에 있었다. 과학 기술로 식량으로 사람들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생각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슷한 수준의 기술력을 갖춘 세력이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식량을 공급해주는 세력이 등장해 자유를 위해 싸우자고 하면 어떻게 될까? 자유를 위한다는 명분, 지배에 저항하겠다는 사람들의 의지는 동맹을 배신한 지휘부들이 간과한 것이었다.

연방의 제안에 넘어간 지휘부가 동맹을 배신했지만, 지휘부의 손발이 되는 사람들은 반기를 들었다. 그렇게 남부지역에서 벌어진 분열사태가 생각보다 빨리 정리되면서 동맹은 서울에 있는 연방의 거점 공략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내 설명에 유미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동맹은 어찌됐든 명분을 가지고 있어서 세력을 모았다는 소리죠?”

“연방도 명분은 있었지, 괴물을 죽인다는 명분이었지만 말이야.”

“방벽 안쪽과 바깥의 차별도 있었고 계급사회를 만들려고 했던 방침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 건가요?”

“독재자들과 계급사회를 만든 자들도 완벽하게 정권을 틀어잡기 전까지는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는데 연방은 자신들을 너무 과신했던 거지.”

“연방이 무너지면 동맹도 변할 것이라 생각하시나요?”

“역사를 보자면 대체로 그래 왔으니까 말이야.”

연방이 추구하는 이상 사회.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입각한 신분제 사회. 그에 비해 동맹은 자유를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단지 자유와 평등, 안전한 세상을 주장했다.

얼마나 달콤한 울림인가 안전한 세상, 자유와 평등이란 말은. 평화로운 세계에서는 진부하고 텁텁한 말이었지만 이렇게 망해버린 세상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말은 없었다. 살인과 약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정상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안전했던 8개월 전으로 회귀하기를 원했다.

더럽고 치사하고 불의했다고 하더라도 8개월 전에는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됐다. 죽이지 않아도 살 수 있었다. 누군가 강제적으로 명령하지 않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뉘지 않았고 약탈자와 피해자로 나뉘지도 않았었다.

벌어 먹고살기에 힘들었던 일상이지만 지금과 비교해 보면 소중한 일상이었다. 그렇기에 동맹의 단순한 주장은 대다수 일반 생존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연방이 짐짝이라고 생각했던 일반 생존자들이 동맹군 병력이 됐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맞았다. 동맹은 다수를 이용해 연방을 공격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 병력을 뽑아낼 수 있는 동맹이 유리했다. 이렇게 동맹의 승리로 끝날지 아니면 연방이 숨겨놓은 또 다른 패가 있을지는 두고 봐야 했다.

연방이 쉽게 당할 놈들은 아니었다. 원전을 장악하고 있었고 주요 항구도시도 장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연방은 세계적인 조직이었다. 한국에서 연방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세계적으로 연방을 축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

펜트하우스로 돌아가는 길목에는 좀비들로 가득했다. 막아놨던 벽이 뚫리면서 이제까지 모여 있던 좀비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이다.

“정말 많네요. 탈출한 사람들은 잘 가고 있겠죠?”

“소아의 발화 능력이 있으니 여차하면 뚫고 갈 수 있을 거다.”

무장한 사람들과 만난다고 하더라도 소아의 발화 능력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에너지가 떨어지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아이스박스에 넉넉하게 챙겨가기는 했지만, 삼일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그나저나 서열이란 건 어때? 텔레파시 같은 걸 보낼 수도 있니?”

“아니요. 링크와는 달라요. 제 명령에 복종하기는 하지만 슬레이브와 링커처럼 기계적인 사이는 아니에요.”

유미와 나는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좀비들이 가득한 거리를 달려갔다. 발걸음 소리를 듣고 모였던 좀비들은 언제 모였느냐는 것처럼 제 갈 길로 갔다. 멀리 떨어진 좀비들은 소리를 듣고 다가왔지만, 어느 정도 가까이 온 좀비들은 나와 유미가 내는 소리를 무시하고 움직였다.

좀비들이 나와 유미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갔기 때문에 펜트하우스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동맹의 진지를 살펴보는데 시간을 오래 썼기 때문인지 펜트하우스에는 인아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어머? 늦었네요.”

“동맹군 진지에서 좀 늦어졌거든.”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중요한 일은 아닌데, 좋은 정보를 얻었지. 싸움이 격해질 거야. 동맹 놈들 단단히 벼르고 왔더군.”

“그랬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게릴라전을 이대로 하기란 위험했다. 연방과 동맹에서 백린연막탄과 네이팜을 쓰기 시작하는 이상 치고 빠지는 전략을 쓰는 건 쉽지 않았다. 거기에 동맹에서는 대대적으로 병력을 충원한 상황. 잘못하면 치고 빠지지 못하고 포위될 위험이 있었다.

“우선 탐지능력이 있는 슬레이브는 어떻게 됐어?”

“아쉽지만 장악하는 데 실패했어요.”

인아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였다는 소리였다.

“그럼 슬레이브에게 먹여봐. 혹시라도 섭식 진화가 가능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유미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연방에서 뭔가 대비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면서요?”

“뭔가를 하기는 했을 거야.”

인아의 감염 장악이 실패한 것으로 보면 확실했다. 섭식 진화에 대해 연방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인류 강제진화에 유전자조작 식품을 사용했던 놈들이 연방이었다. 탐지 슬레이브를 먹어 탐지 기능을 얻으려는 시도가 있을 것을 예측했을 것이다. 동맹의 슬레이브라면 섭식 변이를 일으키기 어렵더라도 연방의 슬레이브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다고?”

내 반문에 인아가 살짝 흘기는 눈빛으로 대답했다.

“맨홀 변종도 먹지 못하게 하고 유현씨 피도 위험하다고 안 줬잖아요.”

“......”

그랬었다.

“설마 슬레이브라고 일단 먹여볼 생각은 아니었죠?”

“......”

먹여볼 생각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좀 많이 건조해진 느낌이었다. 슬레이브라고 하더라도 위험성을 따져보지도 않고 일단 먹여볼 생각을 했다니, 작게 한숨이 나왔다.

탐지 슬레이브는 어린 여자아이로 만들었다. 비상시에 전투력을 생각해 본다면 어린 여자아이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같은 상황이라면 성인이 아이보다 월등한 전투력을 가지는 게 당연했다. 섭식 진화가 가능했다면 탐지 슬레이브를 갈아서 배급했을 것이다. 연방은 그런 놈들이었으니까.

그런 연방과 똑같은 행동을 하려고 했다니, 입맛이 썼다. 슬레이브로 생체실험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탐지 슬레이브의 시체를 먹이는 건 보류하는 게 맞았다.

“탐지 슬레이브의 시체는?”

“냉동실에 넣었어요.”

“오늘은 이만 쉬도록 해. 나는 자료를 좀 읽어봐야겠어.”

유미가 살짝 내 옆에 붙었지만 고개를 저었다.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내가 살짝 밀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미였다. 유미가 나가자 인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놓지 않겠다면서요.”

“그래.”

내 시선과 인아의 시선이 교차했다.

“근데. 왜 맨홀 변종을 먹었죠?”

“꼭 필요했으니까.”

인아는 내가 맨홀 변종을 먹은 것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내가 변이를 견디지 못하고 자아를 잃었다면 인아를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을 것이다. 인아는 그걸 말하고 있었다. 자신과의 약속이 중요했다면 도박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필요했기 때문에 먹었다는 말에 인아가 쓰게 웃었다.

“필요해서 먹었다고요?”

그 억양에는 필요했기 때문에 자기를 받아들였느냐는 뉘앙스가 숨겨져 있었다. 말없이 인아를 안았다. 인아는 작게 꿈틀거리다 잠잠해졌다.

“미안. 힘이 필요했어. 먹지 않았으면 위험했어.”

“......”

인아는 말없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 이어진 키스, 짧은 입맞춤이 그녀의 마음을 풀어준 것 같았다. 인아는 처음보다는 확연히 풀어진 표정으로 방문을 나섰다.

인아를 내보내고 연방의 서울 연구소를 폭파하면서 가져온 자료를 살폈다. 여러 내용이 있었다. 변이에 대한 위험성. 섭식 진화가 가진 문제점 등도 있었다. 연방은 확실히 섭식를 통해 변이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격조에게 지급하는 전투 식량에 들어간 인육이 그 증거였다.

이번에 가져온 자료에는 그 인육이 단순히 빗치나 변종의 사채를 갈아 넣은 것이 아니라 특수한 처리를 한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 타격조를 가지고 대규모 생체실험을 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 대규모 생체실험의 결과를 활용해 탐지 슬레이브를 실전 배치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서에는 다양한 변이실험이 실시간으로 이뤄진 경과가 적혀있었다. 탐지 능력을 비롯해 발화 능력과 염동력 텔레파시 등 다양한 이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다.

강제적으로 능력을 발현시키기 위해 포획한 변종과 빗치의 사체를 갈아 특수처리한 뒤 타격조와 사람들에게 먹이고 있었다. 부작용이 없을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부작용을 감수하고 타격조에게 먹이는 이유는 스펙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새끼들.”

권력을 가진 인간이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지 알려주는 자료들이었다. 연방이 양산하는 데 성공한 이능은 탐지 능력 하나였다. 발화 능력이나 광범위 텔레파시 염동력 같은 것은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자료들을 읽고 있는데 생뚱맞은 내용이 하나 껴 있었다. 생태계 변화에 대한 연구였다. 웃기는 놈들이었다. 사람을 생체 실험에 쓰는 놈들이 생태계를 걱정하다니 아이러니했다. 연구 자료는 좀비 사태가 발생한 뒤에 벌어진 여러 특이한 상황을 정리한 것이었다.

서울에 있는 길고양이나 애완동물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여기에 비둘기와 같은 새도 그렇고 하수구에 있는 쥐까지 생각한다면 집계가 불가능할 정도의 숫자였다. 사태가 발생한 뒤로 동물들이 자취를 감췄다. 그게 가능할까?

죽었다면 길바닥에서 흔히 보였어야 했다. 하지만 새가 죽은 것도 고양이나 개가 죽은 것도 보지 못했다. 말 그대로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을까? 나상철의 경고가 떠올랐다. 변이가 통제할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는 말이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연방의 연구 자료에는 동물들의 변화에 대해 적혀있었다. 실험용 쥐를 강제로 변이를 시킨 뒤 일반 쥐와 함께 두는 내용이었다. 내용으로 따진다면 현재 벌어진 사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뒤에 나온 내용은 의미심장했다. 변이한 쥐는 점차 강해졌고 강해진 만큼 더 많은 먹이를 필요로 했다. 좁다고 하지만 200평(661평방미터) 넓이의 실험장에 300마리의 일반 쥐와 단 한 마리의 변이 쥐를 풀어놓은 실험에서, 고작 10일 만에 일반 쥐들이 몰살됐다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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