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파 (1)
새로 감염시킨 여덟에 이 전에 감염시킨 다섯을 더하면 열셋이나 되는 슬레이브였다. 이렇게 많은 숫자를 통제하면서 인아는 크게 무리가 없어 보였다. 정말 아무런 부담이 없을까?
“괜찮아?”
“괜찮아.”
짧게 끊어지는 대화.
“스펙을 맞은 남자들 가운데 장악한 사람은 없어?”
끊어진 대화를 이어본다.
“변종이 되는 사람이 없네.”
하지만 다시 끊어질 따름.
조직이 붕괴되어 녹아내리는 경우도 있었고, 좀비와 비슷한 뭔가로 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대로 된 변이되는 남자는 없었다.
“통제 가능한 변종이 생긴다면 좋았을 텐데.”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바로 적진으로 갈 생각?”
“흩어진 슬레이브 셋으로 타격조를 공격하게 하고 나머지와 함께 놈들의 본진을 치자.”
슬레이브 셋이 여기저기 흩어진 타격조를 공격했고, 나와 인아 그리고 열 명의 슬레이브들이 연방의 방벽을 향해 움직였다.
*
믿음은 상대적인 것이다.
내가 그녀를 믿는 것과 그녀가 나를 믿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인아에 대한 내 믿음은 순수한 믿음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어쩌면 회한과 속죄를 포함한 것일지도 몰랐다.
유미를 죽이지 않았고, 내 손을 잡은 것에서부터 나는 그녀를 믿겠다고 생각했다. 믿겠다고. 믿을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지금 열 셋이나 되는 슬레이브를 장악한 인아를 보면 마지막 순간, 나를 죽이려고 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었는데, 그녀가 하나둘 슬레이브를 감염시켜 무력이 생기고 난 뒤에는 뭔가 불안했다. 불안함의 이유가 부작용 때문일지 아니면 그녀와 내가 겪었던 그 마지막 경험 때문일지 구분되지 않았다.
인아가 그때처럼 나를 배신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내가 인아를 믿는 것이 지금의 인아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했을 따름이었다. 아마도 그건 인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아야.”
“......”
“아니다.”
“.......”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상상은 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솔직하게 말해야 할지 어려웠다.
“인아야.”
“말 해.”
“아까부터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는데.”
“......”
“열 셋이나 장악했는데 어딘가 아프거나 부작용 같은 게 있지는 않아?”
“별로.”
아프다는 건가? 아픈데 참고 있다는 건가? 화법을 따라가기 힘들었다. 하아- 작게 한숨을 쉬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떼었다.
“인경에 대한 부분은.”
내가 인경을 언급하자 분위기가 차갑게 내려앉았다. 내가 아는 인아라면, 생존에 최우선 가치를 뒀던 인아라면 믿고 맡기는 게 맞았다. 만약 인경을 풀어준다면? 인경과 인아가 한통속이 된다면 차라리 빨리 그렇게 되는 게 나았다.
“너에게 맡길게.”
“하고 싶은 말이 그거였어?”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아니.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말라고.”
“뭘?”
“힘든데 억지로 슬레이브를 늘리려고 하지...”
“괜찮아.”
뭔가. 내가 잘못한 게 있을까? 위기감응이든 아니면 감지능력이든 대화를 하는데도 작동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 굳은 인아의 옆모습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 너무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그냥 이대로 거리를 둬도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그때와 마찬가지 반복일 따름이었다. 이 거리를 좁히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까?
“왜 그렇게 쳐다봐?”
“걱정돼서.”
“무슨 상관인데? 걱정하지 마.”
인아의 말꼬리에는 비틀린, 어쩌면 씁쓸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달려가던 걸음을 멈췄다. 인아가 멈추자 함께 달리던 열 명의 슬레이브들도 멈췄다. 군무를 추는 것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나와 인아를 둘러싼 슬레이브들이었다. 점점 갑갑해지는 느낌.
잠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이런 상태로 연방의 거점으로 들어간다는 건 폭탄을 지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상관이냐?’ 뭔가 꼬인 것 같았다. 어디서 꼬였지? 뭐가 문제였지?
인아가 나에게 집착하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 그렇게 따지면 유미가 나에게 집착하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집착했기 때문에 나는 편하게 행동한 것일 수도 있었다. 물어서 감염시키라고 했던 것이 기분 나빴을까?
당시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부작용이 있는지 물어봤지만 괜찮다고 했다. 그래서 인아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계획을 짰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을까? 불안감. 위기감응과는 다른 정서적인 불안함이 날 옭아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아- 우리는 서로 상관없는 관계인가?”
“......”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무 상관없는 사이라고?”
“......”
“걱정하지 말라고? 정말 내가 널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
인아의 표정이 복잡 미묘하게 변했다. 뭐라고 말하려던 인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뭐가 문제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문제일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지금 말하는 게 좋을까?
“너도 알겠지만. 아니, 기억하겠지만 난 사람을 잘 믿지 못해.”
“......”
“거리를 두려고 하고, 의심하고. 경계했지.”
지금도 경계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최소한 인아는 더 이상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거리를 뒀기 때문에 인아가 날 배신했다면 거리를 두지 않고 싶었다.
“아마도 그건 습관이나 본성 같은 걸지도 몰라. 그로 인해 오해도 생겼고 문제도 있었지만 완전히 고치지는 못할 거야. 조심성 때문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
“그래도. 너를 의심하거나 경계하고 싶지는 않아.”
“거짓말.”
인아가 주먹을 꽉 쥐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래. 하지만 너도 알 거야. 내가 거짓말을 하려고 했다면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거짓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
“나도 모르겠어. 죽었다가 살아난 너를 보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 처음에는 네가 아니라 그저 괴물일 뿐이다. 빗치일 따름이라고 생각했다. 기억은 있지만, 그뿐인. 내가 죽여야 할 그런 존재는 아닐까 했었지.”
“그래서? 쓸모가 있으니까 괴물이라도 상관없다는 거야? 싫어도 옆에 두겠다는 거야?”
꾹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인아였다. 대체 어떻게 이렇게 꼬였는지 알 수 없었다.
한 걸음 다가섰다.
인아는 한 걸음 물러섰다. 명백한 거부표시. 하지만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와락.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었다.
“떨어져!”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필사적인 내 말에, 나를 떼어내려고 힘을 주던 인아의 팔이 잠깐 멈췄다. 왜 오해를 했을까? 오해일까? 나도 모르게 계산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나도 나를 모르겠다. 하지만 널 괴물로만 보거나 도구로만 생각하지는 않았어.”
“......”
인아의 심장 소리와 내 심장 소리가 서로 뒤엉켰다.
“알았으니까 비켜. 떨어지라고.”
인아의 표정이 처음보다는 풀렸지만,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어쩌면 문제는 인아가 아니라 내가 문제일지도 몰랐다.
“연방이라고 했지? 자세히 말해줘.”
“그래. 연방은...”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방벽 세력이라고 생각했던 자들이 연방으로 변한 이야기, 방사능 오염 축적으로 멸종될 인류를 구하기 위해 강제 진화를 시키려고 했던 것. 강제진화의 방법으로 바이러스 감염을 선택했다는 것. 통제 불능인 변이가 일어났고 지금은 동맹이라는 세력으로 변한 아더스와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인아가 중간을 잘랐다.
“그 애는?”
“그 애라니?”
“네 옆에 달라 붙어있는 여자 말이야.”
유미를 말하는 건가?
“사귀는 애야.”
“알아.”
내 즉답에 뭔가 불만인 표정을 짓는 인아였다. 그걸 묻고 싶은 게 아닌 것 같았다. 뭘 묻고 싶었던 거지? 내가 인아를 보자, 나와 눈을 마주치고는 한숨을 쉬는 인아였다.
“됐어. 그러니까 우리가 연방을 공격하는 이유는 자유를 위해서란 말이지?”
“그래. 연방에서 다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야. 연구시설을 파괴하고 자료를 박살 내야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해.”
“동맹에서 빗치로 이뤄진 부대를 침투시켰다며?”
“그렇지. 하지만 시설이 시설이니만큼. 성공확률은 희박해.”
“우리가 들쑤시자는 거야?”
“그래.”
대화하면서 인아가 무엇 때문에 오해하고 있는지 알게 됐다.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기보다 내가 이렇게 저렇게 시키기만 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안하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 됐네요. 이 아저씨야.”
“아저씨? 요즘 동안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오빠 소리 듣고 싶은 거야?”
그래도 조금은 오해를 푼 것 같았다.
대화를 별로 하지 않았을 때는 미노처럼 약간 특이한 빗치류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너무나 인간적인 인아였다. 하긴 그래서 시체를 훔쳐 먹고 살았을 것이다. 유미가 추격을 하지 않았다면 숨어서 몰래 살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궁금한 점이 있었다. 왜 펜트하우스 인근에 숨어있었을까? 멀리 떠났다면 됐을 텐데. 빗치들 사이에는 영역에 대한 부분이 민감했기 때문에 유미도 자기 영역이라는 본능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유미라는 신경 거슬리는 존재가 있는 곳에서 숨어있었을까?
“영역 때문에 신경 쓰이지는 않았었고?”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
인아도 펜트하우스를 기점으로 자신의 영역이라고 표시하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이 드러나면 나와 유미가 자길 노릴 것 같아서 참았다고 했다.
그 말을 하면서 어쩐지 뾰족한 눈으로 나를 흘겨보는 인아였다.
*
빌딩과 빌딩 사이를 넘어가며 아래 깔려있는 좀비들을 봤다. 연방의 방벽을 공격하면서 박격포가 터졌고 사방에서 총소리가 났기 때문인지 좀비들이 미쳐서 발광하고 있었다.
그저 ‘우워어어어’ 거리며 비척비척 발걸음을 옮겼어야 할 좀비들은 메뚜기마냥 팔딱팔딱 튀고 있었다.
변했다.
높은 방벽은 여기저기 무너져 있었다. 좀비들을 막기 위해 만들었던 방벽은 81mm박격포탄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일부 뚫린 곳은 컨테이너를 사용해 일부 막았고 미쳐 날뛰는 좀비들을 잡기 위해 불을 지르고 있었다.
방벽과 불꽃. 검은 연기와 그 속에서 꿈틀거리는 수십만의 좀비들. 그곳은 이미 훌륭한 지옥이었다.
“지옥이네.”
“......”
인아도 내 말에 동의하는지 여기저기 치솟아 오르는 불길을 봤다.
“저길 어떻게 들어가려고?”
“한강을 타고.”
조금 더 가면 한강이었다.
“수영할 줄 알아?”
“아니.”
말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됐다.
“쟤들은? 한강을 통해 안쪽으로 침투시킬 수 있겠어?”
“확인해 보지 않아서 모르겠어.”
무전기에서 유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치직- 아저씨. 여기 정리 다 됐어요.]
“그래? 고생했어. 그럼 조금 더 수고해줘.”
[알겠어요. 거리를 두세요. 홀리지 마시고요.]
유미가 웅얼거렸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이 말하는 화법이었다.
“응? 뭐라고?”
[아니에요. 정말 저 없어도 괜찮으시겠어요?]
“인아가 슬레이브를 여럿 장악해서 많이 안전해졌어.”
[치직... 치지지직... 그.런.가.요? 삐이이익.]
“어. 무전기 감도가 좋지 않네.”
[치직. 기다릴게요.]
“그래. 너도 조심해. 동맹이 오더라도 경계태세를 풀지 말고.”
[알겠어요.]
무전을 끝내고 한강을 향해 이동했다. 어쩐지 다시 조금은 쌀쌀 맞아진 인아였다.
*
한강에는 배가 여러 척 떠 있었다. 어뢰정같이 생긴 배였다. 그 옆에는 일종의 바지선 비슷하게 생긴 것도 있었다.
“배가 많다고는 하지 않았잖아?”
“그래. 저렇게 많지 않았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만 다섯 척이었다. 인아가 뭔가 불만인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한강을 타고 들어가면 된다며?”
“저렇게 순찰하고 다녀서야. 낮에는 어렵겠어.”
“그럼 밤까지 여기서 기다리겠다고?
“일단은 근방에서 좀 쉬자.”
예전에 한강을 타고 침투했었을 때는 배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순간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방벽. 아니 연방과 동맹을 서로 견제하고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연방에서는 내부에 동맹(아더스)의 스파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근태로 있었을 때, 나를 이용해 아더스의 거점을 찾으려고 했었다. 그런 연방이라면? 주력끼리 충돌하고 있는 지금 침투 공격을 할지 모른다고 예측하고 있을지 몰랐다. 만약 그때부터 한강으로 침투할 수 있는 루트가 함정이었다면?
한강을 통해 침투하기 쉽게 구멍을 열어둔 것이라면? 연방에서 AWS와 스펙을 사용한 특수부대가 칼날이듯 아더스(동맹)측에서는 자발적으로 참여한 빗치들이 칼날이었다. 서로 누가 상대방의 칼날을 꺾는지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떠 있는 배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그물?”
배와 배 사이에 살짝 보였던 것은 그물이었다. 그리고 그물에 걸려있는 사람의 모습. 엉킨 그물을 끊지 못하고 매달린 시체에는 온 전신에 굵직한 작살이 빼곡하게 박혀있었다.
“함정이었구나.”
멀리서 박격포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방과 동맹의 주력이 교전하는 소리였다. 새벽부터 싸우기 시작해서 정오가 되도록 쉬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가까웠다.
연방의 연구시설을 파괴하는 데 실패한 동맹은 내가 김경태를 통해 후방을 휘저은 것을 알고 주력을 전진시킨 것이었다.
“이런 미친.”
하지만 동맹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애초에 전면전에 가까운 교전을 벌인 이유는 침투조가 제대로 침투하도록 시선을 끌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한강으로 침투한 침투조가 전멸이라면 어떻게 할까?
작전 실패라고 생각하고 후퇴를 할까? 연방에게 시간을 주면 AWS가 쏟아져 나올 가능성도 있었다. 그럼 끝장이었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나와 연합해 연방을 직접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