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격 (1)
후두둑!
얼기설기 엮여 간신히 지탱하고 있던 천장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삐죽삐죽 튀어나온 철근콘크리트 잔해가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멀리서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박격포와 유탄발사기 대부분을 가져갔지만 남아있는 화력이 작지는 않았다. 중기관총도 있었고 신궁과 토우도 있었다.
금방 뚫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공간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롭게 보였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심호흡을 했다. 위기감응은 아직 발동되지 않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있다. 그러니까 둘 다. 아니, 셋 모두 살려서 나갈 수 있었다.
“......”
“인아야. 나가자.”
내려친 메이스를 다시 고쳐 잡은 그녀가 말했다.
“나가자고? 같이?”
뭔가 멍한 목소리. 인아가 살짝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후후후- 같이 말이지?”
툭-툭- 메이스로 바닥을 치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인아였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여기서 인아가 발작이라도 한다면 확실히 몰살이었다. 유미의 상태도 나빠 보였다. 하반신이 깔린 채 시간이 지났으니 체력소모가 클 것이다. 아무리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깔린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유미와 인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유미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인아를 끌고 나가는 게 맞았다. 내 눈앞에서 유미를 죽이지 않았다는 건 희망적이었다.
내가 단순한 복수의 대상이었거나 원망의 대상이었다면, 눈앞에서 유미를 죽였을 것이다. 유미를 반드시 죽여야겠다는 일념만 있었다면 대화가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
“더 늦기 전에 나가자. 여기 무너지겠어.”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총소리는 점점 더 요란해지고 있었다. 1300명 가운데 최필도를 비롯한 온건파 122명을 지원군으로 보냈고, 김경태를 비롯한 350명을 별동대로 보냈다. 합쳐서 470명가량 나갔다고 하더라도 아직 800명이나 남아있었다.
신경이 곤두섰다. 이대로 시간만 보낼 수 없었다.
“덤프트럭이 벽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2차 방어선으로 피해야 합니다!”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덤프트럭이라고? 옐로우 플래그인가? 유미와 편의점을 털 때 만났던 트럭이 떠올랐다. 그들이라면 연방 측에서 옐로우 플래그를 끌어들여 이곳을 공격하게 한 것이 분명했다. 옐로우 플래그만 왔을까? 아닐 것이다.
“2차 방어선으로 가라! 뒤따라가겠다.”
“알겠습니다. 여기에 두고 가겠습니다.”
가방을 던져놓고 떠나는 목소리였다. 단백질 보충제를 섞은 것을 담은 것이었다.
쾅!
다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저쪽에서도 81mm 박격포를 쓰는 것 같았다. 묵직한 굉음과 함께 후두둑-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철근이 휘어지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빨리 나가!”
“......”
인아는 나를 한 번 보고, 다시 유미를 보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역시 생존을 최우선으로 했던 그녀다운 행동이었다. 언제든 공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일단 유미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의사라고 보였으니 유미를 구조해야 했다.
유미의 하반신을 깔아뭉개고 있는 잔해를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스펙은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었다. 스펙과 중화제를 번갈아가며 쓰자, 인아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나와 주사기를 번갈아가며 봤다.
“도와 줄 것 아니면 먼저 나가있어.”
“......”
내 말에 대답 없이 가만히 있다 픽-웃는 인아였다.
“내가 먼저 나가서 무너뜨리면 어떻게 하려고?”
“무너뜨릴 생각이라면 그렇게 묻지 않았겠지. 먼저 나가지 않을 거라면 도와줘.”
예전에는 아저씨라고 하면서 존칭을 쓰더니 이제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마냥 말을 놓고 있는 인아였다. 반쯤은 털털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인아였다. 뭘 원하는 걸까? 유미는 내가 바로 옆에 왔음에도 눈을 감고 있었다.
“유미야. 눈떠봐.”
“......”
깔리지 않은 다리로 발버둥 치면서 들어오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더니, 내가 들어오고 난 뒤부터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당장 밖으로 나가야 하는데 유미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으니 답답했다.
“얘 왜이래?”
“......”
내가 인아를 보고 유미의 상태가 왜 이런지 묻자. 인아가 나와 유미를 보곤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살짝 피어나는 살기. 미약하게 느껴지는 살기에 위기감응이 반응했다. 인아와 눈이 마주치자 살기가 스르륵 사라졌다. 유미를 죽이고 싶은 건가? 날 죽이고자 했으면 잔해를 들어 올리느라 두 팔이 봉쇄된 지금 공격했을 것이다.
“미안하다. 지금은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하- 도와달라고?”
“그래. 도와줘.”
“......”
무슨 개소리냐는 표정을 짓는 인아였다. 잔해를 살짝 들어 올리며 소리 질렀다.
“나중에 죽이든 죽든 하고 지금은 같이 나가자고. 잡아 당겨.”
“......”
인상을 확 구긴 인가가 못 이기는 척 유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유미의 몸뚱이가 빠져나오자 짓눌렸던 반신이 급속도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한 명 또 있었잖아? 못 봤어?”
“몰라. 어딘가 깔렸겠지.”
인아는 이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녀가 날 죽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페니가 보이지 않았다. 링크는 아직 연결된 상태였다. 어딘가에서 살아있다는 소리였는데 여기서는 알 수 없었다.
쾅!
인근에 포탄이 떨어졌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욱신- 심장이 내리눌렀다. 삐죽 삐져나온 철근이 도미노 쓰러지듯 훅 쓰러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는 순간, 인아와 유미가 보였다. 이대로 피하면 둘이 꿰뚫릴 것이다.
피하라고 말할 틈도 없었다. 생존본능과 이대로 피하면 둘 다 잃을 것이다. 인아의 머리통을 향해 떨어지는 잔해. 길게 늘어지는 시간 속에서 욕만 나왔다.
‘젠장.’ 반사적으로 튕긴 몸을 다시 박차 유미를 걷어찼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유미가 걷어차여 옆으로 휙 날아갔다. 동시에 인아를 밀쳤다. 갑자기 내가 달려들자 본능적으로 메이스를 치켜들었던 인아가 옆으로 튕겨졌다. 인아의 머리 옆을 스치는 삐져나온 철근이 딸린 잔해.
그러거나 말거나 온 정신을 집중했다. 욱신-내리누르는 감각에 몸을 맡겨, 급소를 피하기 위해 몸을 뒤틀었다. 후끈한 감각과 함께 옆구리와 허벅지가 얼얼했다. 녹슨 철근이 내 옆구리와 허벅지를 뚫고 들어왔다.
“크윽!-돌아버리겠네.”
위기감응 덕에 심장이나 주요 장기는 피했다. 인아는 철근에 꿰인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피가 녹슨 철근을 타고 흘러내렸다.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내 피 냄새를 맡았는지 유미의 눈꺼풀이 들썩들썩 흔들렸다.
쾅!
다시 바로 앞에 포탄이 떨어졌다. 2차 저지선으로 가라고 했더니, 전부 다 가지 않았나 보다. 내가 빠져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을 지키겠다고 저지선을 만든 것 같았다.
“으으악!”
우직- 콘크리트 잔해에 박힌 철근을 뽑아낼 수 없으니 생살을 찢어 옆으로 빼냈다. 허벅지가 길게 찢어졌다가 서서히 아물었다. 스펙의 효과 때문인지 확연히 빨리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였다. 옆구리에 박힌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뭘 보고 있어! 얘 데리고 나가. 깔려 죽을 셈이야.”
내가 인아를 보고 고함을 지르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고 있던 인아가 정신을 차렸는지 눈을 뾰족하게 떴다. 인아는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내 상처를 보곤 뭐라고 입술을 달싹거리던 인아가 구석에 쓰러진 유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질질 밖으로 끌고 나갔다.
허리춤에서 스펙1을 꺼냈다. 스펙1은 치유력을 강화해주는 약제였다. 잘못하면 그대로 달라붙을 수 있기 때문에 있는 힘껏 옆으로 몸을 빼냈다. 철근에 꿰인 옆구리가 빠져나오면서 내장이 딸려 나왔다.
“씨이이이발.”
쏟아진 내장을 대충 쑤셔 넣고 스펙1을 꽂아 넣었다. 상처가 꾸물거리며 달라붙고 내장이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스펙을 연속으로 2번 맞자 식욕, 성욕, 살의와 파괴욕구가 전신에 퍼졌다.
쾅!
다시 인근에 포탄이 떨어졌다. 일단 밖으로 나가야 했다. 입구 쪽에 굴러다니는 배낭에서 보충제를 꺼내 입에 물고 밖으로 나왔다. 여기저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총성이 사방에서 들렸다.
한쪽 구석에서 인아가 유미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이제 어쩔 거냐?’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인아였다. 일단 유미가 정신을 차려야 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쿠크리 나이프를 꺼내 팔뚝에 상처를 냈다.
붉은 피가 유미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스펙을 두 방이나 맞은 피가 유미의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창백했던 유미의 얼굴에 순식간에 혈색이 돌아왔다. 꼴깍!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인아가 홱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얘한테 뭐했어?”
“뭐... 뭘...”
“물었지?”
“......”
나를 물었던 것처럼 유미도 물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는 유미가 이렇게 무반응일 리 없었다. 인아는 고개를 획 돌리고 가만히 있었다.
물었다는 소리였다.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유미에게 계속 피를 흘려줬다. 스펙의 효과 때문에 금방 피가 멎었다. 다시 한 번 팔뚝에 상처를 내 피를 쏟아 먹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는 유미였다.
“아... 저씨?”
“그래.”
눈을 깜박이며 상황을 정리하려던 유미가 고개를 돌렸다.
“아흑! 저... 저년... 저게 날 물었어요.”
통 때문인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던 유미가 인아를 보자마자 으르렁거렸다.
“저년? 저게? 이게 정말.”
유미의 손가락질을 받은 인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둘 다 그만.”
“저게 캐리와 제티를 죽였다고요.”
“유미야. 그만. 지금 총소리 안 들려? 이곳이 공격받고 있다.”
총소리와 포탄 떨어지는 소리에 유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가요? 연방인가요?”
“그래. 둘이 싸우든 뭘 하든 그건 나중에 해.”
“알았어요.”
갑자기 날 폭 끌어안고는 슬쩍 인아를 쳐다보는 유미였다. 찌릿-한 느낌과 함께 인아의 살기가 콕콕 찌르기 시작했다. 내 품에 파고드는 유미를 떼어내며 말했다.
“몸은 어때? 움직일 수 있어?”
스펙이 섞인 피를 먹었기 때문인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미였다. 그나마 발정까지는 가지 않은 것 같지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좋아. 2차 방어선으로 가서 방어해.”
“유.현.씨는요.”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유미였다.
“여기 남아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갈 테니까. 2차 방어선을 지키고 있어.”
“알겠어요. 빨리 오세요.”
찌릿-인아를 노려보고는 잔해 뒤로 뛰어넘어가는 유미였다.
“유현씨이?”
인아가 내 이름을 곱씹는 것처럼 이죽거렸다. 그러고 보니 인아에게는 내 이름도 말해주지 않았었다.
“한. 한유현이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소개를 하자. 인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 당시의 나와 지금의 내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지 알아챘을 것이다.
“......”
“......”
잠시 침묵이 내려앉은 동안, 총소리와 포탄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충분했다. 배낭에 들어있는 무전기를 꺼내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2차 저지선으로 가라고 했잖아!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치직-나오셨습니까?]
무전기에서는 안도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미묘한 느낌이었다.
“그래.”
[나오실 때까지 엄호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와 유미의 생존을 위해서 조직을 키웠었는데, 자발적으로 나를 돕겠다고 남은 자들이 있다니... 뭔가 간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나왔다.
“적의 규모는?”
[검은색 특수부대 옷을 입은 자들이 30명가량, 무장한 자들이 120여명입니다.]
“적의 무장은?”
[박격포 3문과 유탄발사기 3~4문, 중기관총 2정입니다.]
“특수부대는 어느 방향에 있지?”
[9시, 11시, 1시 방향에서 신궁 발사대를 공격. 신궁 2기를 잃었습니다.]
타격조가 신궁 발사대를 공격했다면 막기 힘들었을 것이다. 신궁 발사대 하나당 10명씩 지키고 있었는데... 뺏길 바에야 어디든 쏴버리라고 했었다.
“뺏기지는 않았지?”
[네... 적의 덤프트럭과 버스를 박살냈지만, 벽이 무너진 틈으로 좀비들이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우선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잡을 테니, 그동안 2차 저지선으로 퇴각해.”
[치직- 엄호하겠습니다.]
말이라도 고마웠다.
“퇴각해. 박격포와 중기관총을 잡은 뒤 밀어낼 테니,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치직- 무운을...]
내가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인아였다. 예전의 나였다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획 돌리는 인아였다.
“인아는 어떻게 할 거야?”
“뭘?”
고개를 돌린 채로 톡 쏘는 인아였다. 안면몰수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도와줄 거지?”
“... 내가 왜?”
“같이 싸우지 않을래?”
“......”
슬쩍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인아였다.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이제는 놓지 않을게.”
“......”
내 손과 눈동자를 번갈아가며 바라보는 인아였다.
“걔는 어떻게 하고.”
“둘이서 해결해야지.”
“끼어들지 않을 거지?”
내 손을 보던 인아가 주어 목적어 없이 툭 내뱉었다.
“그래. 죽이고 죽지만 않으면.”
입을 꾹 다물었던 인아가 작게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내 손을 살짝 잡았다. 따뜻한 감촉이 맞잡은 손끝에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