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 (3)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 대의를 위해 소의가 희생될 수 있다. 전체를 살리기 위해 부분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이기기 위해 사석이 필요하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분명히 그럴 때가 있다. 지금이 그 상황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최필도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작전이 실패하게 된다면 연방을 막을 수 없게 됩니다. 막는다고 하더라도 더 큰 희생이 따를 겁니다. 1300명 이상의 희생이 필요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한반도가 연방의 손에 떨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과연, 그런 건가?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까칠한 나를 대신해 2인자들을 포섭하려고 했다는 소리? 인명을 중히 생각하는 최필도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는 건, 그에게 바람을 넣은 자들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서요?”
“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구조대원들도 아니고 군인들도 아닙니다. 자기를 희생해서 대의를 지키거나, 자신을 희생해서 이 상황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최필도의 표정이 안타까움에서 실망으로 변했다. 실망이라... 먹고 살만해지니까 직업병이 도진 건가? 그의 행정능력도 좋았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재주도 좋았다. 하지만 이렇게 나온다면 그냥 두고 보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동맹의 대의, 희생정신을 주장한다면 좋지 않았다. 무력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은 나와는 달리, 생산이나 행정적 문제를 처리한 최필도는 사람들에게 인망을 쌓았다. 그런 최필도였기 때문에 그의 생각은 상당한 파급력이 있었다.
“먹고 살만해지셨습니까? 살아남겠다고 벽을 세운 게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았습니다.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죽을 장소로 등 떠미는 게 대의라고 생각합니까?”
“이런 세상이 계속된다면 미래가 있습니까? 이대로 연방이 사람들을 지배하면 계급사회가 될 겁니다. 좀비에서 벗어나 살아남았더니 기다리는 것이 계급사회라면, 그런 세상에 미래가 있습니까?”
“계급사회라. 그럼 이렇게 변하기 전에는 계급사회가 아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이나 예전이나 근본적으로 계급사회였습니다. 자본에 의한 계급사회가, 무력에 의한 계급사회로 변했을 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음이 병들었군요. 그래서 싸우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이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작전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소립니까? 계급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최필도가 약간 흥분했다.
“계급사회를 만들든 아니든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라는 입장입니다. 애초에 대의라는 틀에 공감하기도 했고, 현실적으로 연방을 견제해야 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에 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 동맹을 맺었으니 무조건 작전에 참여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연방의 주요시설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십니까?”
“최필도씨. 다시 말하지만 이 그룹의 지도자는 접니다. 그룹의 목표는 생존과 번영입니다. 인류의 생존과 모두의 번영으로 범위가 넓어지기 전까지는 우리 그룹의 생존과 번영이 최우선 과제가 되는 겁니다.”
“하하하- 어차피 생존과 번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 세력을 유지하는 게 목적 아닙니까? 대표. 대표가 원하는 세계는 어떤 세상입니까? 어떤 세상을 원하시든 희생 없이 그런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희생이 필요하겠지요. 허나 그 희생을 지금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최필도는 스파이가 아니었다. 스파이라면 이렇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필도에게 바람을 넣은 자. 그 사람이 스파이 역할을 할 것이 분명했다. 동맹 측만 사람을 심었을까? 벽을 세웠던 시점부터 인원이 1400명이 넘었던 순간부터 동맹과 연방에서 주시했을 것이다.
‘내부에서 갉아먹으려고 하겠군.’
두 사람만 모여도 생각하는 방향이 다른 법이었다. 1300명이 넘는 인원이 모였으니, 당연히 다양한 생각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미끼를 물겠지.’
내가 직접 연락하지 않고 최필도를 통해 작전 거부 의사를 밝힌 이유가 있었다. 최필도를 통해 거부 의사를 밝혔으니 동맹 측에서는 2인자 자리에 있는 최필도를 포섭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렇게 내가 동맹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 퍼진다면, 연방에서 나에게 손을 뻗을 것이다. 동맹의 요청을 거절했으니 자신들과 대화가 통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겠지. 누가 연방의 메시지를 가져올 지 기대가 됐다.
*
저녁부터 밤늦게까지 수송헬기가 오르내렸다. 내가 거절한다고 하자. 동맹에서는 600명이 넘는 병력을 데려왔다. 대대병력이었다. 완전무장한 600명의 병력은 사람들을 압박하는데 충분한 숫자였다.
1300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군복을 입은 600명을 앞에 두니, 민간인들처럼 순박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연방 쪽에서 접근이 없었다. 최필도를 통해 동맹과 삐걱거리는 부분이 있다는 걸 보였는데도 접근하지 않는다?
이 상황을 그냥 날려 버릴 연방 놈들이 아니었다. 동맹도 연방도 각기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리바리 당할 생각은 없었다.
“김경태 무력부장.”
“네.”
“동맹 쪽에서 연대병력을 보냈습니다. 분위기를 보니, 사람들도 우왕좌왕하는 것 같고요.”
“그렇습니다.”
“저쪽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 박격포와 중기관총, 고속 유탄 발사기를 준비해서 대응사격을 할 수 있게 하세요.”
“동맹군에게 말입니까?”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여차하면 선제공격을 해야 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으니, 준비 단단히 시키도록 하세요. 하지만 오발에 주의하십쇼. 오발사고가 터지면 돌이킬 수 없게 됩니다. 무조건 첫 3발은 공포탄을 넣도록 하고 발포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쏘는 사람은 즉결 처분하세요.”
“즉결 처분입니까?”
“네. 그게 누가 됐든 무조건 죽이세요.”
“알겠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연방 측에서는 접근하지 않고 있다는 소리는 다른 걸 생각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접근하지 않는다면? 다른 쪽으로 흔들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동맹군과 이쪽이 서로 싸워 자멸하길 바라겠지.’
오발사고를 빌미로 서로 싸우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많아야 중대규모를 보낼 줄 알았는데 600명이면 대대 병력이었다.
“하- 한 방 먹었군.”
[작전은 내일 새벽 4시 30분이다.]
나상철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절한다고 했지. 쪽박 깨고 싶지 않다면 허튼 수작 부리지 마.”
[역시- 그런 건가?]
“뭘 생각하는지 자유지만, 여기서 600명이나 되는 병력을 잃으면 피해가 막심할 텐데 말이야. 강제로 어떻게 하려고 했다면 착각이라고 해주고 싶군.”
[끝까지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올 건가?]
“왜 내가 비협조적이라고 생각하지? 그쪽에서 제대로 도와줬다면 협조적이 됐을 텐데 말이야.”
[......]
“경고하는데, 움직이면 600명이 방벽을 구경하기도 전에 통구이가 될 거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연대병력이 제대로 싸워보지 못하고 전멸하면 연방 좋은 일만 시켜주겠군. 그러니 대기하고 있던 애들 뒤로 물려.”
물론 대기하고 있는 애들이 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나상철이나 동맹 측이 최필도를 비롯해 친동맹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나를 생포해 후방으로 돌려버리고 이곳을 장악하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블러핑(bluffing)을 했다. 반대쪽에서 침묵이 길어졌다. 침묵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자기들끼리 다시 의견을 주고받기에 시간이 걸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원하는 게 뭔가?]
“했던 말 반복하지 않게 했으면 좋겠군. 말했지? 구조작업을 끝내야 한다고.”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겠군. 이대로 시간을 끈다면 연방 놈들의 수비가 더욱 단단해질 거다. 그럼 희생만 더 커져.]
“미안해? 장난쳐? 아니면 내 말을 귓구멍으로 씹어 먹었나?”
[후- 더 이상 자네에게 끌려다닐 수 없어. 이번 작전에 투입된 인원을 생각하면,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내 개인적으로 자네가 아까워서 하는 말이니, 부디 신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군. 이게 마지막 기회일세.]
“협박인가? 협박으로 내가 생각을 바꾸지 않을 건 알고 있을 텐데. 마지막 기회라니 이걸로 동맹과는 끝났다고 생각하면 되나? 김경태씨 들었죠? 준비하세요.”
치누크 헬기로 병력을 실어 나를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최필도의 온건파에 대항했던 강경파에게 주력화기를 몰아줬었다. 총 무력을 100이라고 했을 때, 온건파가 30~40라면 강경파가 60~70이 되도록 화기를 몰아줬었다.
김경태에게는 갑자기 늘어난 동맹측 병력을 견제할 준비를 하라고 미리 말해뒀었다.
[무의미한 희생을 만들 생각인가?]
“말이 많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들지 말게.]
“마지막 기회라며?”
[정말 미쳤군. 설마 했더니 정말 이럴 줄이야.]
“뭘 이럴 줄이긴. 내가 이렇게 나올지 몰라서 대대병력 보낸 거 아니었나?”
[......]
이쪽에서 할 방법은 여럿 있었다. 최필도와 포섭한 인원을 바탕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나를 축출하도록 하는 것. 이건 김경태를 비롯한 강경파를 이용해 견제하고 있었다. 다음으로는 지금 보낸 병력을 이용해 압박하는 것. 이것도 미리 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내가 거부하면 저쪽에서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리 말하겠지만, 혹시라도 오발사고가 일어나면 연방의 끄나풀이 내분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생각하면 좋겠어. 그러니 혹시라도 총소리가 난다고 오버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이쪽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놈들을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
“그리고 작전 말이야. 동의해.”
[참가하겠다는 소린가?]
“그래. 하지만 많은 인원을 보낼 수는 없어. 그래도 서운하지 않도록 손을 거들어주지.”
600명 대대병력을 보냈다는 것은 이쪽이 빠지더라도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병력이었다. 중부지방에서 전투가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600명을 보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동맹의 사정이 급박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궁지에 몰린 동맹을 몰아붙이기는 했지만, 끝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 손을 거든다고 하면서 최필도를 비롯한 온건파의 세력을 일부 깎아낼 필요가 있었다. 동맹의 대의명분에 공감하는 자들을 보내주면 좋아할 것이다. 그럼 나도 그렇고 저쪽도 그렇고 서로 편했다.
[하-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고 말이야.”
그 순간 총소리가 어둠을 꿰뚫었다.
탕! 타탕!
공포탄과 예광탄이 몇 발 발사됐다. 기습적으로 몇 군데서 총성이 났지만, 서로 총질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 미리 대비했기 때문인지 동맹군에서 대응사격을 하지 않았고 이쪽에서도 추가로 발포하지 않았다.
[치직- 발포명령을 어긴 자들은 모두 3명입니다.]
김경태가 보고했다.
“즉결 처분했죠?”
[치지직- 예.]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온건파들을 따로 불러서 출동준비를 시키도록 하세요. 동맹군을 지원하는 건 온건파입니다. 최필도씨를 지원군 지휘관으로 삼을 겁니다. 준비시키세요.”
[치직- 알겠습니다.]
내가 김경태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나상철이 들을 수 있게 했다. 내가 이걸 들려주는 이유를 나상철도 알아먹었을 것이다.
“들었지? 최필도를 지휘관으로 120명을 보태지.”
[크크큭. 이 상황에서도.]
최필도를 지휘관으로 삼아, 온건파로 구성된 지원 병력으로 보내주면 동맹은 결정을 해야 했다. 주력을 내가 움켜쥐고 있는 상황에서 지원군을 고기방패로 삼으면 자신의 세력을 깎아 먹는 꼴이 됐다.
그러니 함부로 고기방패로 쓰지 못할 것이다. 이쪽의 주력이 전부 투입됐다면 고기방패로 써도 그만이지만, 이쪽 주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편인 자들을 고기방패로 써버리면, 나를 견제할 세력을 자기들 손으로 없애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흐하하하하! 좋군. 좋아.]
나상철의 웃음소리가 무전기에서 흘러나왔다.
*
최필도를 비롯한 온건파들은 동맹이 600명이나 되는 대병력을 보냈으니 우리도 전력을 다해 연방을 밀어붙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나와 강경파가 그 주장을 꺾었다. 김경태에게 미리 준비시킨 것처럼 일 처리가 됐다.
최필도를 비롯한 온건파를 묶어 지원군을 만든 것이다. 120명을 보낸다고 했지만 122명이 됐다. 최필도는 자신을 비롯한 온건파가 지원군이 된 것을 보곤 쓴웃음을 지었다.
“숙청입니까?”
“그렇게 생각합니까?”
최필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받아쳤다.
“이렇게 대놓고 보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고기방패 취급은 받지 않을 겁니다. 당신들을 살려서 돌려보내야 날 견제할 수 있다고 생각할 테니 말이죠.”
최필도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최필도의 말대로 우리 전부가 갔다면 고기방패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친동맹파만 보냈는데, 그들을 고기방패로 쓴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는가? 이쪽의 주력이 멀쩡하게 온존한 상황이니, 지원 병력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소모하기 힘들었다.
최필도도 멍청하지 않으니 내 말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아먹었다. 최소한 저쪽에서 이 사람들을 의미 없는 고기방패로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다.
최필도가 원했던 것처럼,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아름다운 결과를 얻었고. 동시에 주력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게 됐다. 동맹측은 이쪽의 전력을 깎아 먹고 싶었겠지만 결국 실패했고, 연방에서는 회유보다 동맹과 우리가 내분을 일으키길 원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동맹군과 온건파로 이뤄진 지원군이 연방과 싸우기 위해 전선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면서 김경태가 말했다.
“많이 변하셨군요.”
소리 없이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