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135화 (135/261)

연쇄 (3)

치누크 헬기가 보급물자를 가져왔다. 요구했던 것의 절반이 되지 않는 분량이었다. 35%는 넘고 40%에는 모자라는 애매한 분량이었다.

절반에서 빠지는 애매한 분량을 가져와 놓고, 챙겨가려는 속셈이 보였다. AWS의 슬레이브 시체 둘 가운데 절반 정도 가져왔으니, 하나를 달라고 할 것이 뻔했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처음엔 구순하게 요구대로 가져왔었는데, 그 때가 좋았던 시절이라는 소리였다. 방벽이 연방으로 이름을 갈아타면서 지역에 있는 지배계층에게 손을 흔들자 엄청 떨어져 나갔다는 소리였다.

지배 비율로 따지자면 방벽에 콕 박혀있을 때는 10% 정도를 장악하고 있었다면, 연방으로 이름을 바꿔달고 군벌과 지역유지들을 흡수해 최소한 40% 이상 장악했다고 봐야 했다.

나상철이 대전지역으로 내려갈 정도라면 사태가 정말 심각하다는 소리였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쪽이 적었다면 주변에서 압살을 했겠지. 금방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은 후방이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이라는 의미였다.

후방이 흔들릴수록 전방지역에서 연방의 주력을 묶어둘 고기방패가 필요한 상황이 됐다.

고기방패.

작전권이 있었다면 진작 우리를 이용해 먹었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게 한이겠지.

톡-톡- 저절로 손가락이 움직여 탁자를 두들겼다. 그럼 아더스-아니 이제는 자유 동맹이라고 간판을 바꿔 달은 놈들은 어떻게 나올까? 배불렀을 때 맺은 동맹을 최대한 아낄 것인가? 아니면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려고 할 것인가?

써먹을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내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나상철이 오해하고 있었다.

‘사이코 메트리.’

나상철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자유 동맹의 윗대가리들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본다면 사이코 메트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래서 아더스 쪽에서는 나를 포섭하기 위해 선행을 했었던 것이고. AWS를 이용한 습격을 막아내고 그 뒤에 이어진 공습을 분쇄한 것을 통해 심증을 굳혔을 것이다.

AWS를 이용한 공격을 막은 것도 놀라운데, 아파치 헬기를 포함해 헬기 3대의 공격을 분쇄했다는 것은 저쪽에서는 놀랄 따름이었다. 특히 신궁은 지대공 미사일이었다. 그걸 강력하게 보급해달라고 주장했으니. 인상에 깊게 박혔을 것이다.

그럼 아더스-동맹 측은 어떻게 나와 이곳을 써먹으려고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

톡-톡- 손가락이 기계적으로 테이블을 두들겼다.

연방은 당분간 몸을 사릴 것이다.

군부대가 붕괴되면서 제대로 된 무기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탱크고 장갑차고 자주포고 제대로 굴러가는 걸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견인포가 있는 지역도 군부대가 자멸하면서 날아가긴 마찬가지.

어떻게든 구한다고 하면 한 두 문 정도 구할 수야 있겠지만, 연방과 동맹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마당에 한가하게 견인포를 실어 나르고 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방이 그냥 두지 않을 테니 말이다.

톡-톡-

벽 뒤에 웅크리고 있는 이곳을 공격하려면 앞에 모여든 좀비를 처리하거나 벽을 무너뜨려야 했다. 하지만 이쪽에 신궁 미사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아파치 헬기를 이용한 공격은 하지 않을 것이다. 헬파이어가 신궁보다 사거리가 멀다고 하지만, 아파치 헬기를 잃을 각오를 하고 급하게 작전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연방은 유미를 납치하려고 하고 있었다. 유미가 이곳에 있기만 한다면 시간은 연방의 편이었다. 후방 물자와 병기창이 있는 곳을 조금씩 장악해 숫자상으로 어느 정도 균형을 잡은 뒤 이곳을 공략해도 충분했다.

그렇게 연방은 서울에 있는 거점을 수비하려고 마음먹었을 것이다. 전투는 기존 아더스 영역-후방지역에서 벌이고 이곳은 전선을 유지하려고 할 것이다. 동맹측은 상황이 반대였다. 숫자적으로 우위였을 때도 질적인 측면에서는 연방에 밀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양까지 비슷해질 상황.

어떻게든 연방의 주력을 붕괴시켜야 할 판이었다. 그래야 후방에서 잃어버린 손해를 보충할 수 있었다. 어떻게 연방의 주력을 공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동맹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거느리고 있는 세력이 와해되면서, 연방의 주력이 무너지는 것이 제일 좋은 시나리오였다. 연방의 주력과 함께 내 세력이 없어지면 내가 있을 곳은 동맹밖에 없게 될 것이다. 자연스럽게 나를 포섭하려고 들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나오겠지...”

뻔히 속셈이 보인다고 하더라도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어디까지나 미래의 변수를 생각해야 했다. 연방의 주력을 줄이면서 내 세력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럼 언제 연방과 충돌하게 될까? 내가 움직이지 않을 것을 나상철이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연방이 움직일 수밖에 없는 떡밥을 뿌릴 것이다.

그렇다면 언제 연방과 충돌하게 될까?

‘일주일이라고? 연방 놈들 걸레가 되고 싶지 않다면 사흘 안에 움직여야 해.’

앞으로 사흘 안에 대규모 공격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였다.

“후- 환장하네...”

사흘 안에 연방과 충돌할 확률이 높았다. 내부 불안 요소를 해결하기 위해 AWS의 시체를 훔쳐간 스케빈져를 처리하려고 했건만, 그게 인아가 변한 것이었다니, 꼬여도 단단히 꼬인 상황이었다.

인아가 변한 그것에게 기억이나 감정이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나와 유미를 바라보던 그 눈빛은... 먹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감정이 담긴 눈빛.

“젠장...”

복잡해진 생각을 끊듯이 밖에서 소리가 났다.

똑. 똑.

“보급물자를 전부 내렸습니다. 저쪽에서 확인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

치누크를 타고 온 여자가 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보급품 목록이었다. 처음 육안으로 대충 확인했던 것이 맞았다. 그리고 내가 따로 말하지 않았던 물품들도 제법 많은 수량이 준비되어있었다.

‘KM-16지뢰, M-14발목지뢰에 클레이모어, 수류탄이라.’

요구했던 신궁 미사일은 4발밖에 없다는 것, 그리고 다른 것보다 81mm 박격포탄과 장약과 다연발 유탄발사기 8문 그리고 12.7mm 중기관총 8문을 싣고 온 것을 본다면, 내 예상대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좀비들에게 유탄은 효과적이지 않았다. 유탄의 위력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라, 좀비들은 인간보다 강했다. 일반 좀비만 하더라도 강한 힘과 내구력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이 없었다.

출혈 과다로 죽을 리가 없으니 유탄 발사기의 파편으로 좀비를 막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무기를 먼저 챙겨줬다는 것은 주적이 좀비가 아니라 연방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물품 목록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젊은 남자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수령 확인됐다면, 실어갈 것을 주셨으면 합니다.”

“실어갈 것이라니, 요구했던 물품 절반도 오지 않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사무적인 사내의 얼굴이 굳었다.

“이야기가 됐다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이 남자. 전직 군인은 아니었다. 군인처럼 짧은 말투를 쓰고 있었지만 군인은 아니었다. 그럼 뭐하는 남자일까? 내가 물끄러미 바라봤음에도 남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AWS슬레이브 시체를 요구했다.

“이야기는 됐지. 그런데 이야기에서는 요청한 보급의 분량에 따라 넘겨주기로 했거든.”

“그 말은...”

“그렇다는 소리다. 본래 이쪽에서 넘겨줘야 할 사체는 두 구(具). 보급의 절반이 오면 한 구를 넘겨주기로 했었지. 그리고 지금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분량이 왔으니, 다음에 넘기면 되겠군. 이야기가 끝났으니 이만 가보도록.”

“잠시만.”

사내가 발걸음을 돌리려는 나를 붙잡아 세웠다.

“그러니까 비율대로 넘기기로 했습니까? 만약 우리가 요청했던 보급품의 7할을 가져왔다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습니까?”

“한구는 가져가게 했겠지.”

다급했는지 민감하게 반응하는 남자였다. 역시 이 사내는 군인이 아니었다. 군인이 아니라면 뭘 하던 남자일까?

“그렇다면 시체에서 일부라도 가져가겠습니다.”

“시체를 ‘잘라’ 가겠다고?”

“네.”

내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음에도 사내는 시체를 잘라가겠다고 대답했다.

다급하다는 소리였는데, 전에 가져간 한의사의 시체에서 뭔가를 발견했을까? 슬레이브의 시체가 있다면 연구가 진전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렇게 잘라서라도 가져가겠다고 나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시체를 토막 내서라도 가져가겠다니.

“뭐 머리와 척추를 제외한 팔다리라면 가져가도 좋아.”

“예?”

“팔다리를 뜯어가는 건 괜찮다는 말이지. 단, 말했지만 척추와 머리. 그러니까 중추신경계는 가져갈 수 없어. 해체는 이쪽에서 해주지. 아니, 내가 직접 해주지.”

“......”

내가 바보로 보였나? AWS 슬레이브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은 뇌와 중추신경계였다. 뇌의 변이와 중추신경계의 구조변화 혹은 기능변화를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체 전부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을 터. 내가 선수를 쳤다.

“그건...”

“토막을 가져가겠다며? 그래도 동맹인데, 팔다리는 전부 주도록 하지.”

인간의 시체를 토막 내기는 기분이 나쁘지만, 다른 사람들을 시키면 이 사내가 은근슬쩍 끼어들 가능성이 있었다. 사체를 보관한 냉동 창고로 가면서 물어봤다.

“군인으로 보이지 않는데, 의사인가? 아니면 연구원?”

“그게 무슨 상관이지?”

뜻하지 않게 내가 걸고넘어진 것이 마음 상했는지, 아니면 연구를 하고 싶은데 그걸 내가 가로막았기 때문인지 까칠하게 대답하는 사내였다. 이제는 서로 아름답게 말을 놓게 됐다. 하긴 내 얼굴이 동안이다 보니 이제까지 말을 놓았던 것이 기분 나빴을 수도 있겠다.

“성격을 보아하니 연구원 같군. 유전공학? 생명공학?”

“의사.”

쯧- 의사라고 보기에는 젊어 보였는데, 잘 풀린다고 하더라도 전문의가 되려면 서른에 육박해야 했다. 그런데 보이기에는 20대 중반 가량으로 보였다. 대학원 석사나 아니면 박사과정에 있을 나이에 딱 걸려 보여서 찍었는데 아니었다.

“본과생?”

“뭐가 그렇게 궁금하지? 그리고 슬쩍 말 놓지 말지. 기분 나쁘니까.”

이거야 원. 자기도 말을 놨으면서 말을 놓지 말라고? 어지간히 내가 어려 보였나 보다. 내가 킬킬거리며 웃자 사내가 재촉했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여기서 멀었나?”

“아니. 거의 다 왔어.”

내가 끝까지 말을 놓자. 사내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할까? 의사라는데. 1300명이 넘는 인원 가운데 달랑 간호사 출신 양호선생 하나 있는 판국이었다. 의사가 여기까지 왔다는 소리는 뭘까? 호기심이 많다고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는 그랬다.

호기심이 많을 뿐만 아니라, 2구의 시체 가운데 하나를 고를 정도로 실험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이 사람을 잡으면 어떻게 될까? 동맹이 AWS에 대항하는 백신이나 그런 것을 만들 가능성도 있지만 반대로 동맹 측도 AWS를 복제해 병기로 삼을 가능성도 있었다.

“아-실력이 좋은가 봐.”

“무슨 소리지?”

“연구 관계잔가? 그래서 더 좋은 시체를 챙기려고 왔나 보네.”

“......”

대답 없는 사내였다. 뭐 그렇다면야. 이 사람이 없으면 연구가 망가질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면 지금쯤 연구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연구에 관여하고 있으면서 적당한 지식을 가졌으며 동시에 밖으로 내둘릴 정도로 막내라는 것.

이 정도라면 없어져도 동맹에서 난리를 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의사의 시체를 가져가서는 얼마나 연구가 됐는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는데. 이제까지 연구된 결과를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뭐가 그렇게 웃기지? 내가 우습나?”

내 얼굴에 미소가 걸린 것을 보고 사내가 톡 쐈다.

“아니,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일이 많았는데 하나는 해결된 것 같아서 말이지.”

무장한 경비들이 인근을 지키고 있었다. 척- 나를 보고 경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AWS의 습격을 막은 뒤로는 자연스럽게 이런 위계질서가 잡혔다.

나에게 경례를 하자, 사내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 내가 창고지기나 보급관인 줄 알았는데 경비들이 나에게 경례를 하는 것을 보고는 살짝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보였다.

“수고들 해.”

“넷.”

경비들이 따라오려는 것을 막았다.

“괜찮으니까 하던 일 계속 하도록, 무슨 소리가 나더라도 신경 쓰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안에는 나와 이 사람만 들어가면 되니까 말이지.”

“알겠습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추돌사고로 전면이 일그러진 냉동 탑차가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체를 노리는 스케빈져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경보기를 여기저기 달아뒀다. 화재경보기를 떼어 달아뒀기 때문에 덩그렇게 튀어나온 경보 버튼이 덜렁거리며 흔들렸다.

사내는 운전석이 반파된 냉동 탑차를 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냉동 창고인가?”

“걱정하지 말라고 보관은 확실히 되고 있으니까 말이지.”

냉동 창고라고 해서 거창한 것을 기대했었는지, 사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 있는 소방용 도끼를 빼 들었다.

“도끼로 자를 생각인가?”

“글쎄. 어디를 자를까? 난 입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야.”

내가 도끼를 들고 사내를 쳐다보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낀 사내였다.

“뭐... 뭐야... 뭐야 당신...”

“우리 좀 친하게 지내볼까?”

"....."

"우선 이야기를 좀 하자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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