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 (1)
벽을 세운 곳에는 경비를 세웠다. 기껏 막아놓은 곳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거나 변종, 빗치들이 넘어오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사는 날이 갈수록 탄력을 받았다. 차량을 벽돌 삼아 쌓았기 때문에, 길을 막고 있던 차들이 없어지면서 도로가 뚫렸다. 도로를 다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뚫린 도로를 이용해, 견인차가(wrecker) 자동차들을 끌어오게 되면서부터는 공사 속도가 배는 빨라졌다.
뚝-뚝-
손목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하얀 통에 쏟아졌다. 내가 피를 용기에 담는 것을 보곤 유미가 물었다.
“어디 가세요?”
“아더스에 가보려고.”
“오래 걸리나요?”
“혹시라도 몰라서 말이지.”
용기에 담긴 피의 양을 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유미였다. 양이 제법 많아 보였나 보다. 유미는 막 자동차를 쌓아올리는 세 여자를 힐끗 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같이 가요. 네?”
“그러고 싶은데, 공사가 더 급하네...”
“......”
“걱정하지 말고 계획대로 최대한 빨리 막도록 힘 좀 써줘.”
유미는 ‘그러면 그렇지.’하는 표정으로 작게 대답했다.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자 토라진 표정을 조금 푼 유미였다. 유미와 함께 공사하고 있는 세 여자에게 갔다.
최근, 세 여자와의 링크는 안정적으로 변했다. 링크가 단단해졌기 때문인지 예전 같으면 조금만 떨어져도 문제가 생겼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몇 차례 실험해 본 결과, 내 뒤만 졸졸 따라다니지 않아도 링크가 흔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의사소통 능력도 조금이나마 회복됐기 때문에 단답형 대답이라도 곧잘 하곤 했다.
그 덕에 유미와 손발을 맞춰 움직이는 것도 가능해졌다. 나와 유미가 다가오자 자동차를 번쩍 들어 쌓다가 말고 옹기종기 모이는 세 여자였다.
“너희도 유미 말 잘 듣고 잘하고 있어. 금방 다녀올 테니까.”
“......”
“......”
최근에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표정도 지었다.
“들었지 너희들. 지금부터 내 말대로 해. 알았지?”
“.....”
“.....”
대답 없는 세 여자였다. 그래도 내가 말했으니 유미의 명령에 따라 적당히 맞춰줄 것이다. 그 정도는 됐다.
*
13구역 밖이기 때문에 방벽 세력들이 이곳까지 신경 쓰지는 않겠지만, 혹시 몰랐다. 도로를 막고 자기들이 하는 것처럼 일부 지역을 안전구역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발견하면, 그냥 지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흡수해서 옐로우 플래그처럼 휘하에 두려하거나, 공격하거나.’
그러기 전에 헬기를 견제할 수 있는 대공 화기가 필요했다. 일반 수송용 헬기로 방벽을 박살내기는 쉽지 않겠지만, 헬기를 이용한 침투의 가능성도 있었다. 강습도 문제지만 공격헬기라도 끌고 나온다면 답이 없었다.
한국에 생체실험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성그룹뿐만이 아니었다. 주한미군도 최소한 3곳에 생체실험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한미군은 이성그룹과 연결되어있다고 보는 게 맞았다.
강제진화 프로젝트에 참가한 회사 6할이 미국을 거점으로 하고 있었고, 미국의 방위산업체의 연결된 기업들이었다. 그러니 주한미군과 방벽세력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지금까지는 방벽 세력과 상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주한미군까지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한국군이 무너진 것처럼 주한미군이 와해됐다고 하더라도 위험은 변함없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가 어디로 넘어갔느냐 하는 문제가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아파치 헬기만 뜬다고 하더라도 어설픈 지상 병력은 말 그대로 학살당했다. 아직까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앞으로도 생기지 않는다고 단언하기 힘들었다. 막말로 토우 미사일이라도 끌고 다니기 시작하면 상황은 급변했다.
아파치 헬기나 토우 미사일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군부대나 무기고를 장악한 세력이 아더스 측일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였다. 역으로 생각하면 군부대와 그 많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아더스가 방벽세력을 밀어붙이지 못하고 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방벽 세력과 아더스가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AWS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면 전황은 순식간에 변할 가능성이 높았다.
*
아더스와 협상할 만한 물건이 최소한 셋 있었다.
하나는, 스펙. 저번에 가지고 왔던 스펙에 여유가 있으니, 그걸 건네주면서 중화제와 교환하면서 운을 뗄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맨홀 변종의 사체. 미노를 먹은 맨홀 변종은 발화능력까지 발현된 시체였다. 흔하지 않은 시체였다. 놈은 미노 말고도 다른 변종도 잡아먹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둘이나 잡아먹은 놈이었다. 그런 시체를 넘겨준다면 아더스에서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종구와 한의사의 시체였다. AWS 실험의 흔적을 담고 있는 시체다 보니, 이것 또한 아더스가 고대하던 시체일 것이다. 분석할 능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AWS에 대한 정보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됐다.
처음에는 세 여자 가운데 하나를 넘겨주려고 했었는데, 생각을 바꿨다. 링크가 단단해지면서 일종의 소유욕 같은 게 생긴 모양이었다. 넘겨주기 싫다고 해야 할까? 뭐라고 형용하기 힘든 느낌이었다.
여하튼, 여자들을 제외하고도 아더스와 이야기할 거리는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
영역 남쪽으로 갈수록 좀비들의 밀도가 높아졌다. 미도의 지도에서 붉게 표시한 지역 근처로 갈수록 좀비들이 많아지는 느낌이었다.
우워어어어
“하수구로 가야 하나?”
생각 같아서는 옥상으로 이동하고 싶었지만, 이 일대는 방벽 쪽의 감시가 이뤄지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젠장.”
8월 말 하수구는 찜통에 엉망이었다. 예의 그 거대한 바퀴벌레들의 환영인사를 무시하며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아더스의 지배지역으로 향했다. 거의 2시간 넘게 움직여 아더스 사내를 만났던 빌딩으로 들어갔다.
‘감시하고 있겠지.’
내가 들어왔으니 감시하고 있던 사람이 뭔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예전에 그 남자와 이야기했던 빌딩 안, 비상계단에 박살 낸 형광등 조각을 뿌렸다. 넉넉하게 흩뿌린 뒤, 계단에 걸터앉아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까득
형광등 밟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소리가 아니라 일부러 크게 밟는 소리. 자기가 올라가고 있다고 표시하는 소리였다. 이윽고 낯익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또 깔아놨나?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하더니... 그래 생각은 해 봤고?”
사내가 빠삭-빠삭 형광등 가루를 밟고 올라왔다.
“얼굴보고 말합시다.”
“미리 말하지만 저번과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져서 말이야.”
“간 보는 겁니까? 그러지 맙시다.”
“저번에는 영입차원이었고 이번은 아니지 않나?”
“모르죠. 영입은 아니더라도 친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내 말에 약간 유쾌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네는 사내였다.
“그래. 그간 잘 지냈나?”
예전 사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내는 무던히도 날 영입하고자 했었다.
‘하나의 화살은 쉽게 부러진다는 걸 알면서도 말인가?’
‘대의도 없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열정도 없단 말인가?’
‘자네의 힘은 분명 더 좋은 곳에 쓰일 수 있네 그 힘은 축복이란 말일세.’
그럴지도 몰랐다. 하지만 사내의 말을 전부 믿을 수 없었다. 내 불신에 사내는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을 하면서 날 설득하려고 했다. 아더스는 생존자들을 규합해 방벽과는 다른 형식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고 했었다.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오르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보시다시피 이렇습니다. 하수구 냄새가 좀 심하지만 괜찮죠?”
“그깟 하수구 냄새야 상관없지만 일단 확인부터 할까?”
사내가 품에서 전파탐지기를 꺼내 들었다. 삐--- 작은 전파음과 함께 파란 불이 들어온 탐지가 내 몸을 검사했다. 사내가 으쓱 어깨를 올리고는 통신기에 ‘둘. 하나. 반복한다. 둘. 하나’라고 말했다. 어디선가 헤드샷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같아 기분이 미묘했다.
“다행이네요. 문답 무용으로 일단 헤드샷부터 때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더 안쪽으로 들어왔으면 그랬을 거야.”
사내가 탐지기를 다시 품에 넣고 계단에 앉았다.
“그래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지? 세렝기티 초원의 외로운 하이에나처럼 가더니 말이야.”
“인근 군부대. 그쪽에서 장악하고 있나요?”
픽- 웃는 사내였다. 30대 후반일까? 전에 봤을 때는 수염을 기르지 않았었는데 제법 고르게 난 수염이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이런, 기밀이라는 것쯤은 알 텐데?”
“아더스는 방벽 세력과 싸우는 게 목적입니까?”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놈들이 우리를 아더스라고 부르지, 우리는 스스로를 아너스라고 한다고.”
“그래서 정확하게 목적이 뭡니까?”
“말하지 않았나? ‘인류를 해방하는 것’, ‘자유를 지키는 것’ 그게 우리의 신념이다.”
“그렇군요.”
어쩐지 미묘한 구호 같은 느낌이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픽-웃음이 나왔다. 여유 있던 사내의 표정이 서서히 딱딱하게 굳었다. 내 웃음을 오해한 듯싶었다.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왔겠지만...”
“아- 오해하지 마십쇼. 긴장이 풀리면서 웃은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용건은 뭐지? 자네의 힘을 대의를 위해 사용할 준비가 된 건가?”
“대의를 위해 사용한다기보다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지요.”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해봤다. 내가 꺼낼 수 있는 패 가운데 뭘 꺼내는 게 제일 좋을까? 어떻게 이야기하는 게 제일 효과적일까?
“최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습니까?”
“흐음. 별로 좋은 화법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군.”
“좋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방벽에서 재밌는 것을 만들었더군요. AWS라고 압니까?”
AWS라는 말에 사내의 표정이 확 변했다. 사내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무전기로 뭔가를 지시했다. 무전기로 뭔가를 지시하면서 날 노려보는 남자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말했겠지?”
“아니까 여기서 묻고 있는 거 아닙니까?”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를 노려보던 사내가 묵직한 목소리로 한 단어를 내뱉었다.
“말해봐.”
*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반응과 대응방식에 사실 적지 않게 놀랐다. 상식적이고 신사적인 모습을 보이던 남자가 이렇게 거칠게 반응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아더스가 밀리고 있는 걸까?’
그건 아닐 것이다. 놈들에게 밀리고 있다면 날 만나러 오지 못했을 것이다. 당장 밀리고 있는데 어떻게 왔겠는가?
‘AWS에 대해 알고 있다?’
아직도 방벽 내부에 스파이가 남아있다는 소린가? 어찌 됐든 AWS에 대해 어느 정도 정보가 돌고 있다는 소리였다.
방벽은 아더스를 잡으려고 했고, 아더스는 그걸 이용해 다시 방벽측 타격조의 숫자를 줄이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서로 죽고 죽여 댔으니, 최신 정보에는 눈이 어두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피곤하게 됐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아더스가 알고 있는 게 같다면 협상하는데 다른 것을 꺼내 들어야 했다. 그렇더라도 AWS로 운을 뗐으니, AWS를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내는 종구와 한의사 그리고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입을 씰룩거렸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왔나?”
“그걸 보고 나니, 녀석들을 그냥 두면 큰일 나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
“사실, 놈들이 방벽 속에서 자기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든 자기들끼리 노예와 주인 놀이를 하면 상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게 아닙니다. 놈들이 안에서만 놀았으면 신경 끊으려고 했는데...”
종구가 특이한 케이스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종구는 잠시나마 유미를 장악했었다. 당장은 정신방벽을 쌓은 훈련과 지배권을 뺏는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대비를 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랐다.
놈들이 AWS를 계속 발전시키는 것은 막아야 했다. 그냥두면 사내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인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방법을 만드는 데 성공할지도 몰랐다.
“큭... 크하하핫. 그래? 그 아가씨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내 이야기를 듣던 사내가 갑자기 호쾌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내 기분이 나빠졌다.
“그게 무슨 소리죠?”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한 이유가 그 아가씨 때문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 아가씨와 합류할 생각인가?”
“그것보다는 동맹을 맺었으면 합니다만.”
“동맹?”
사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제 밑으로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어서 말입니다.”
“민간인 800명과 동맹이라?”
사내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인류 해방을 위해 싸운다고 하더니 동맹은 필요 없나 보죠? 그렇게 쉽게 생각할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입니다.”
“내가 결정할 일은 아니로군.”
사내가 선을 그었다.
“우리는 놈들의 영역 맨 끝 부분과 겹치는 부분에 위치했습니다. 놈들의 AWS 실험도 인근에서 있었고요. 앞으로도 놈들이 뭔가를 실험한다면 그쪽에서 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요? 놈들이 무슨 실험을 하는지 제일 먼저 실험에 대한 내용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라고 생각되는데 말입니다.”
“......”
아더스가 직접 진출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른 지역에서 힘겨루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쪽에서 손을 내밀지 않는다면 문제가 심각해 질 겁니다. 제가 빠지는 순간, 그 사람들은 방벽 놈들의 손을 붙잡게 될 겁니다.”
“.......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쪽은 여유가 없으니, 가부간의 결과를 지금 답해주셔야겠습니다.”
“요구사항은 뭔가?”
방벽 세력보다 이쪽이 더 많은 군부대와 탄약고를 장악한 것 같았다. 아니면 최소한 비슷하게 장악하고 있든지. 한국은 분단국가에 휴전국이었다. 탄약은 썩어 넘치도록 있는 나라였다.
“무기 지원. 중화기, 대공화기, 대전차 미사일이나 그에 준하는 것들.”
“그쪽에서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AWS 실험체의 시체, 최전선에서 생기는 정보. 그리고 동맹군이 생긴다는 전술, 전략적인 이점.”
그렇게 아더스와 동맹을 맺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