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3)
나중에 측량하고 어쩌고 그렇게 시간을 끄는 것보다, 바로 작업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게 좋았다. 그러려면 현장을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처리하자.”
그렇게 집 밖으로 나왔다. 유미는 나오자마자 내 상태를 묻고 또 물었다.
“두통은요? 괜찮은 거죠?”
“예~ 괜찮습니다.”
‘예이 마님~’하는 어투로 대답하자 유미가 웃었다.
“쟤들은요? 괜찮아요?”
밖으로 나왔으니 링크가 흔들리는 건 아닌지 여러모로 걱정하는 유미였다.
“이제 적당히 움직여도 크게 헝클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
유미와 세 여자를 데리고 현장조사에 들어갔다. 지도로 보는 것과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달랐다. 계획을 잡은 뒤 일사천리로 추진하는 게 좋았다.
“알아서 잘 따라오네요.”
세 여자가 잘 따라오고 있었다. 하긴, 로봇 조종하듯이 하나씩 따로 조종하는 거라면 미쳤을 거다. 링크가 어느 정도 단단해지고 나자 셋은 알아서 할 일을 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청소나 빨래 같은 일이었는데, 나중에는 알아서 침대보도 갈고 설거지도 하고 따로 시키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척척 잘했다.
“여기에서 자리를 잡으려고 하시는 거, 혹시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건 아니죠?”
유미는 영역에 애착이 강했다. 펜트하우스도 그렇지만 영역이라고 표시해둔 곳은 정말 자기 땅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강원도로 갈 준비를 하자고 했을 때도 싫다는 뜻을 내비친 유미였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아.”
현실적으로 수백 명의 생존자를 데리고 이동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존자들을 포기하거나 방치하는 것은 방벽 세력에게 넘겨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떠나고 나면? 이곳에 남은 사람들에게 뒤를 봐주겠다며 접근하면? 방벽 세력들이 생각하는 세상을 만드는데 간접적으로 도와주는 꼴이었다. 그건 사양이었다.
“너만 사나이 그런 프로그램에서 보면 군부대도 많이 있었는데. 거기서 무기를 왕창 가져오면 괜찮지 않을까요?”
“서울 근처에도 군부대가 없는 건 아닌데...”
인근 군부대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건 위험했다.
“현실적으로 보면 도박에 가까워.”
“왜요?”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문제지만, 그걸 떠나서 군부대에는 좋은 게 너무 많거든.”
“?”
“당장 후진 권총이 있는 경찰서만 하더라도 털렸잖아. 권총에 수렵용 총을 서로 갖겠다고 총질에 칼질에 난리가 아니었는데, 두메산골에 있는 군부대도 아니고 수도권 인근 군부대가 온전할지 모르겠네? 방벽 놈들은 헬기도 있고 말이야.”
“그럴까요?”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유미였다.
군부대로 이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털 수만 있다면 대박이긴 했다. 수도권 인근 군부대라고 하더라도 군부대는 군부대였다. 탄약고가 있을 것이고 전투식량 같은 비축식량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다. 사태가 발생한 지 반년이 넘게 지났는데, 수도권 인근 군부대가 온전히 남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괜찮은 부대가 하나라도 남았으면 좋겠네요.”
냉정하게 따져보자면 인근의 군부대는 방벽이든 아더스든 둘 가운데 하나가 장악했을 가능성이 컸다. 방벽 측은 헬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인근 군부대라면 방벽 쪽에서 그냥 뒀을 리가 없었다. 아니면 방벽 측이 먹지 못하게 아더스가 장악하고 있거나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래도 나중에 가보기는 해야 했다. 혹시라도 남아있는 곳이 있다면 대박이었기 때문이다.
*
벽을 세울 자리를 최소화하면서 막는다고 하더라도 작업분량이 제법 많이 됐다. 건설 장비를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거의 인력으로 일을 해야 할 판이었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겠는데요?”
“어쩔 수 없어. 막지 않으면 계속해서 문제가 생길 테니까 말이야.”
“공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요?”
“알아듣게 설명을 해봐야지.”
방벽을 만들 자리와 지도를 비교하며 확인하던 유미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즘 거친 사람들이 좀 많이 들어온 것 같더라고요.”
“말이 안통하면 통하는 걸로 해줘야지.”
내가 주먹을 불끈 쥐었더니 유미가 폭-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래도 되는 게 아니라, 그래야 하는 거야.”
사람들이 늘어나자 식량 수색처럼 힘든 일에서 빠지려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은 많지 않지만 모인 숫자가 800명을 넘어가다 보니, 별의별 사람들이 다 있었다.
“저번에 내가 가져다 놓으라는 건 가져다 놨고?”
“핸드폰이요? 네. 녹음으로 해놓고 환풍기 안에 넣어두라고 하셨죠? 외장 배터리까지 챙겨서 가져갔어요.”
“그럼 됐다.”
기존에 있던 사람들은 잘 따랐다. 문제는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몇 명은 질이 나쁜 사람으로 보인다고 했다. 실질적으로 무리를 통솔하고 있는 최필도가 그런 사람들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건 좀 의외였다.
“필도 그 양반이 그 사람들을 그냥 뒀고?”
“그게 참 애매하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을 단숨에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안현철이 지배하고 있었을 때는 일종의 대표 정치처럼 가족의 가장들이 협의해서 결정했었다. 그래도 문제가 없었던 것이 무기의 숫자도 적었지만, 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가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기 마련이었다. 무기를 가진 사람들이 대표로 안현철을 비롯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고 수십 명 수준이라면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수백이 넘어 천에 육박할 정도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무기가 문제로군.”
“네. 그렇다고 강제로 뺏겠다고 하면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꼭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비슷한 느낌이었다. 2월 말 사태가 발생하고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8월도 마지막 자락 내일모레면 9월이었다. 그간 총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죽였겠는가?
무기가 없는 사람들은 노예처럼 부림을 당하다 미끼로 던져지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새로 합류한 사람들은 무장해제를 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뭘 믿고 무장해제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왜 우리만 무장해제를 해야 해?’
‘무장해제? 너희도 무장해제 해라.’
‘그럼 너희는 너희대로 살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겠다.’
그렇게 헤어지면 상관이 없었는데 식량이 문제였다. 마트를 놓고 대립하는 경우에는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없었다. 이쪽은 사람이 늘어 식량이 절실했고,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이 마트는 누구 거?’
‘싸워서 이기는 놈 거.’
‘그러지 말고 대화와 타협으로 하자.’
‘쪽수로 밀어붙이려고? 반반으로 나누지 않을 거면 거절한다.’
이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 부딪치면 싸워야 할 판이었다. 이쪽 숫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총화기로 무장한 사람들끼리 싸우기 시작하면 총소리가 나기 마련이었다.
총격전이 벌어지면 살판나는 건 좀비들이었다. 그나마 영역 중간에서 싸운다면 다른 변종이나 빗치의 관심을 끌지 않겠지만, 경계지역에서 총격전을 벌인다면 거의 100% 확률로 관심을 받을 게 뻔했다.
그러니 숫자에서 압도한다고 하더라도 쉽게 총격전을 펼치긴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식인종과 추종자들을 잡겠다고 총질을 했다. 그 결과 사방에서 좀비들이 모여드는 상황인데, 여기에 또 총질을 하면 여러모로 복잡해질 게 뻔했다.
싸우는 것보다 협력하는 게 생존에 유리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무장해제하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하면 하겠는가? 무장을 해제하는 건 별도의 문제였다. 그렇다 보니, 싸우기도 뭐하고 완전히 통제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곪기 전에 처리해야겠네.”
“반발이 심할 텐데요?”
“지금 상황에서 내부 분란까지 생기면 감당하기 힘들어.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강력하게 통제를 하지 않으면 위험해.”
일단 벽을 세우고 자급자족이 가능해 질 때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
벽을 세울 곳을 찾아 표시하고 확인하는 작업은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다. 좀비들의 밀도가 낮은 곳을 찾아다녔기 때문에 돌아다니는데 별문제 없었다.
“이쪽도 막을 수 있겠어요.”
“그래. 거기서부터 여기까지면 승용차 30대 정도면 충분히 막겠지?”
“네. 충분해요. 온 김에 표시 좀 하고요.”
돌아다니는 김에 유미는 영역표시를 했다. 영역표시가 효과가 있었는지 영역 안쪽에 빗치나 변종이 들어온 조짐은 없었다.
유미는 빌딩 바깥벽을 쓰다듬고 몸을 비비고 그랬다. 누가 보면 꼭 빌딩성애자 같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보는 사람이 나였으니까 망정이지 다른 사람이 봤으면 조금 민망했을 법한 자세였다. 빌딩과 부비부비?
“꼭 그렇게 해야 해?”
“우- 곰이 영역표시 하듯 하는 거라면서요.”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그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다. 툴툴거리는 유미와 함께 차단할 지역을 지도상에 꼼꼼히 표시했다.
“영역 전체를 차단할 생각인 거죠?”
“그래. 차단할 때 최대한 넓은 지역을 차단하려고.”
“여기까지면 끝이에요.”
유미가 지도를 내밀고는 앞에 보이는 빌딩에 표시했다.
“어디 보자. 이쪽부터 저쪽까지 연결하면 나중에 확장하기도 좋겠네. 잘했다.”
“히힛-”
아직 날이 밝았다. 나온 김에 생존자들도 만나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서 어쩔지 모르겠네요.”
내가 당장 보러 가자고 하자 유미가 약간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새로 합류한 사람들이 아직까지는 통제에 잘 따른다고는 했다. 하지만 힘든 방벽 공사가 시작되고 식량 사정이 나빠지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해결해야지. 통제도 해야 하고, 식량 관리도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유야무야 시간을 끌면 감당이 안 될 거야.”
“역시 그렇겠죠?”
유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방벽을 빨리 만들어서 안쪽에 있는 마트들과 창고들을 완벽하게 장악해야겠어.”
일단 벽을 만들고 통제 불가능한 사람을 추방하든 어떻게 하는 게 좋았다.
*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대학교로 가는 길은 역시 좀비들이 확연히 늘어나 있었다. 식인종들과 총격전을 벌인 여파 때문이었다.
“고생 많았구나.”
“아니에요.”
좀비들에게 공격받지 않는 유미가 식량이 있는 곳을 정찰하고 좀비들을 죽이고 했을 게 뻔했다.
여기에 온 것은 거의 보름 만이었다. 나를 보곤 최필도가 거수경례를 했다. 다른 사람들도 경계를 하거나 인사를 했다. 새로 합류한 사람들은 기존에 있던 사람들이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을 보곤 우물쭈물했다.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 ‘저놈이 여기 대가리야?’ ‘어린놈의 자식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유미와 세 여자를 보고 침을 흘리는 놈들도 있었다. 정리가 필요하긴 했다.
“오셨습니까? 미리 말씀해주셨으면...”
“그냥 오는 거죠 뭘...”
사실 조금 걱정을 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갈등이 도드라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습니다.”
식인종을 토벌하다 부상을 당한 것으로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걱정을 하는 최필도와 조장들이었다. 조장들을 모아 곧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현재 몇 명이죠?”
“989명입니다.”
최필도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정말 많이 늘었군요. 그냥 천 명이라고 봐야겠군요.”
“네.”
“식량 사정은 어떻습니까?”
“일주일 분량을 확보했지만. 좀비들이 워낙 많아서 가져오기 힘든 곳에 식량들이 있습니다.”
인원이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많이 늘었기 때문에 식량이 가장 큰 문제였다. 벌써 8월 말이었다. 곧 9월이고 조금 있으면 순식간에 겨울이 됐다.
“식량 수급도 곧 한계에 도달할 겁니다.”
다들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수십만 아니, 수백만이 넘는 좀비들과 그 사이사이에 있는 변종, 빗치를 피해 일반인들이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설령 나와 유미가 호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태반은 목숨을 잃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자급자족하기 위해서는 좀비들이나 괴물들을 막을 수 있는 벽을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네?”
“전체에게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요. 전부 강당에 모이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저녁을 먹고 대강당으로 사람들을 모이라고 했다.
“유미야. 내가 휴대폰들 환풍기 안에 넣어두라고 했던 것 있었지?”
“네.”
“그거 가져와 봐.”
그간 건물 곳곳에 넣어뒀던 휴대폰을 유미가 가져왔다. 몇 개는 그냥 잡담만 녹음되어있었지만 몇 개에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이 녹음되어있었다.
‘최필도가 대가리가 아닙니다.’
‘그 년은? 그 무식한 년 사람은 맞아?’
유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네. 괴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죽일 수 있다는 소리네. 그 년 잘 감시해.’
‘여기 대가리가 식인종 놈들처럼 힘이 제법 센가 봅니다.’
‘총알은 박힌데?’
‘소문으로는 식인종들과 싸우다가 다쳤다고 하는 걸 보니 박히는 놈인가 봅니다.’
‘됐고. 포섭하는 건 어떻게 됐어?’
그 핸드폰은 거기까지 녹음되고 배터리가 끝났다. 다른 것을 켰다. 한참 잡담이 나오는 부분을 빨리 감기로 스킵 했다.
‘뭐하는 놈인데 오라마라야?’
‘대가리랍니다.’
‘열흘 넘게 있다가 이제야 코빼기를 보는구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대가리를 쳐야지.’
‘강당에서요?’
‘그래. 대가리를 치고 접수한다.’
‘애들 준비시켜.’
핸드폰에 녹음된 내용을 듣는 최필도와 조장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들으셨죠? 우리도 준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