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악 (2)
바짝 긴장했지만, 심장의 조임이나 위기감응은 없었다. 문 안쪽을 살폈다. 바닥에 깔린 카펫에 흥건한 피가 완전히 굳지는 않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건 아니었지만 방금 흐른 피는 아니라는 소리, 시간이 조금 흘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들어가자 침대 위에 토막 난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신체부위가 소실됐고 머리통과 몸통이 뜯긴 시체였다. 참혹한 현장이었다. 목뼈를 달고 있는 머리통을 보니 미용실 직원 옆에 있던 말총머리 여자였다.
매번 따지고 들었던 여자. 마지막에는 종구와 언성을 높이며 싸웠던 여자였다. 그녀는 옷이 벗겨진 채였고 여기저기 거친 폭력의 흔적과 정사의 흔적이 보였다.
타격조들 가운데 신입들이 혈기를 참지 못하고 사고를 쳤을까? 이렇게 했어도 공식적인 처벌은 없을 것이다. 방벽 세력들에게 있어 아우터들은 동물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들에게 있어 방벽 밖에 있는 존재들은 그저 적합하지 않은 유기체였기 때문이다.
‘옥상 문에 있는 탄피로 보면 헬기침투?’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기에는 너무나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다시 자세히 시체를 살폈다. 뜯긴 자국이 달랐다. 한 사람의 소행이 아니었다. 마치 여러 사람이 사방에서 여자의 사지를 잡아 뜯은 것처럼 보였다.
소실된 신체 부위가 있는 것으로 보면 식인종들이 있었는지 싶기도 했다. 방벽세력의 타격조가 아니라 식인종들이 옥상으로 침투했을 가능성도 열어놔야 했다.
제일 큰 특실에는 그 여자 시체 하나만 있었다. 종구도 그리고 그를 졸졸 따라다녔던 3명의 여자도 없었다. 맞은 편 특실로 들어갔다. 역시 이쪽도 문이 열려있었다. 피 냄새는 없었다. 인기척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빈방이고.’
리시버도 조용했다. 발견하면 신호를 주기로 했는데, 아직 생존자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4개의 특실을 확인했지만 없었다. 다음 층으로 내려갔다. 계단으로 내려가자 미약한 소리가 들렸다. 약간은 야릇하고 질척한 소리였다.
끼익-
문을 잠그지 않고 있었다. 안쪽에서 들리는 음란한 교성. 틈으로 살짝 보니, 단발머리의 뒷모습이 보였다. 구조신호를 보내던 단발머리 간호사의 머리모양이었다. 누군가의 위에 올라타 열정적으로 몸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분명히 저번에 봤을 때는 아찔한 몸매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나신을 뽐내며 흔드는 뒷모습은 뭐라고 형용하기 힘들 정도로 잘빠진 몸매였다.
‘귀염성 있게 생기기는 했지만 저런 몸매는 아니었는데... 빗치? 보균자?’
근처를 돌아다녔지만 전혀 감지를 하지 못할 정도였다고? 황씨 딸만 하더라도 미미하게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었다. 그런데 종구일행에게는 그렇게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었다.
이쪽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마다 불편하게 생각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냥 다른 사람들을 미끼로 삼았다는 것 때문에 싫어했던 것이 아니라, 생리적인 혐오감이었단 말인가? 보균자들의 느낌 때문이었을까?
“아~아아아”
“아~으-”
교성이 점점 커졌다. 여자들의 신음이 둘로 나뉘어 울리는 것 같았다.
‘하나가 아니라 둘? 난교인가?’
단발머리를 끌어안고 있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파마머리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파마를 한 머리카락이 살짝살짝 보이고 있었다. 미용실 직원의 헤어스타일이 파마머리였다.
‘단발과 미용실 둘이서 난교를 해?’
단발머리는 종구를 싫어했다. 미용실 직원은 종구를 벌레 보듯 싫어했다. 그럼 밑에 있는 남자는 종구가 아닐 것이다. 위에 말총머리 여자를 강간 살해한 놈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뭔가 이상했다. 단발머리든 파마머리든 강제로 당한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정말로 즐기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약? 모르핀이나 프로포폴에 장난을 쳤을까? 사람을 찢어 죽여 놓고 약을 썼다고? 일단 밑에 깔린 놈을 잡아야 했다.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두 여자는 서로 껴안고 밀려오는 쾌락을 탐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밑에서 두 여자를 공략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멍청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
“아? 왔나?”
한의사의 아들? 목소리는 젊어졌지만, 분명히 저 어투는 한의사였다. 외손자가 죽었다고 이마에 힘줄을 세웠던 바로 한의사가 회춘한 얼굴로 씩 웃었다.
“음... 그래 3주 만인가?”
“아아아아앗!”
나와 이야기를 하면서 허리를 튕겨 올리는 그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변종인가? 위기감응은? 발동되지 않고 있었다. 목숨이 위험하지는 않다는 소리였지만 정상이 아니었다. 그 식인종 두목과 대면했을 때도 위기감응은 발동되지 않았다.
언제든 저게 마음을 바꿔 먹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소리였다. 변종이 아니더라도 눈은 약점. 머리는 약점이었다. 바짝 긴장하는 나를 보곤 피식-웃는 한의사였다.
“이런 좀 기다리라고. 중간에 끊기가 애매하니까 말이지. 할 이야기가 있으...”
망설이지 않고 소음기를 낀 베레타의 방아쇠를 당겼다.
투캉! 투캉! 투캉!
소음기에서 낮고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위에서 신나게 허리를 비틀던 단발머리가 살아있는 방패처럼 움직였다. 한의사의 양 눈과 미간을 향해 쏜 총알을 자신의 몸통으로 막는 단발머리 간호사였다.
팍! 팍! 퍽!
툭!
총알이 단발머리의 몸을 뚫지 못하고 납작 눌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스윽. 한의사의 상체에 걸터앉았던 미용실 직원이 몸을 일으키며 한의사를 보며 묘한 소리를 냈다.
“흐으으응?”
마치 ‘어떻게 할까요?’ 묻는 것만 같았다.
“제압해.”
훌떡 벗은 두 여자가 좌우로 퍼져 달려들었다. 캉! 방패로 단발머리를 튕겨내고 오른손에 쥔 권총으로 파마머리의 머리통을 쏘려는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 내 몸을 끌어안았다.
뭉클한 느낌 여자의 가슴이 등에 느껴졌다.
꽈악!
몸이 뒤로 쑥 딸려나갔다. 파마머리와 튕겨나갔던 단발머리가 더 달려들지 않고 딱 멈춰 섰다. 내 뒤에 있는 여자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누구지? 유미는 아니었다. 유미라면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전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는데. 언제 왔지?
“뭐야? 10층 위로 올라오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한의사가 근육질로 변한 몸을 느릿하게 일으켜 세우며 중얼거리자 그에 화답하듯 문밖에서 종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그랬지. 하지만 이 친구는 그걸 모르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해하라고.”
“이해? 후하하하하하- 어린놈의 새끼가.”
한의사가 이를 드러내며 웃자, 단발머리와 파마머리가 한의사의 감정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살기를 피워 올렸다.
“3:2인데... 영감 괜찮겠어?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고?”
“크크크큭... 그래서? 너는? 이놈을 위해 손해를 보겠다는 건가?”
종구와 한의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유미는? 피리를 불어야 할까? 아직은 아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유미까지 들이닥친다면 엉망이 됐다. 적아를 구분할 수도 없었고 이것들이 빗치나 변종이라면 아직까지 이 건물에서 가만히 있을 이유가 없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를 좀 했으면 좋겠는데. 슬슬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고 결정해야 할 것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래? 넌 어떻게 하기로 했지?”
“일단 이 친구가 알고 있는 것을 들어보고 난 뒤에 결정하려고 하는데... 댁도 정보가 필요하긴 마찬가지 아니야? 이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하면 어떨까? 한의사 양반.”
“크크큭- 좋아. 말해보라고.”
뒤에서 날 끌어당긴 여자는 종구가 심심하면 주물러대던 여자였다. 확실히 예뻐졌다. 힘도 제법 강했지만 유미 만큼은 아니었다. 유미나 빗치들에게서 느껴졌던 특이한 압박감은 없었다. 그렇기는 해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3조 조장. 얼음공주.’
반대편에서 언제든 달려들 것처럼 살기를 피워대고 있는 단발머리와 파마머리도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비슷한 느낌이었다. 조금 전까지 뜨거운 정사를 치르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냉랭한 표정.
뒤를 돌아보자. 속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종구가 서 있었다. 의사 가운을 목욕 가운 걸치듯 걸친 종구가 양쪽에 두 여자를 낀 손으로 유방을 주무르며 방긋 웃었다.
“어이- 유현. 잘 다녀왔고?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이라도 좀 하지.”
“이게 무슨 일이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직설적으로 묻는 내 질문을 무시하고 종구는 한의사를 똑바로 보며 이야기했다.
“킥- 이야기가 좀 길어지겠는데? 어이 한의사 양반 괜찮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하지만 개소리를 하면...”
“걱정하지 말라고 킥-”
종구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신경을 건드렸다. 식육빌딩에서 나온 뒤에 점점 없어진 버릇이었는데 다시 시작됐다는 건. 뭔가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빼빼 마른 체형이었던 종구의 몸도 근육질로 변해있었다.
내 탐색하는 시선을 즐기듯 종구가 비틀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두 여자와 이상한 놈들이 쳐들어왔어.”
“......”
“큭- 싸웠지. 저쪽도 총이 있지만, 총소리가 나면 좀비도 모일 거고 시간을 끌면 네가 올 거라 생각했거든. 그런데 놈들이 워낙 영악하더라고. 가까이 오는 좀비들을 몇 놈이 유인해 다른 곳으로 끌고 가는 방식으로 좀비들을 정리하더니 끈질기게 공격하는 거야.”
“.......”
“놈들의 힘은 일반인들보다 강했어. 아드레날린하고 안드로스텐디온을 섞어서 먹었는지 미친 듯이 달려드는 녀석들이었지. 킥- 총에 맞아 구멍이 뚫려도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덤비더라고. 심지어 죽은 자기 동료들을 뜯어먹기까지 하면서 말이야. 크크큭.”
“버티면 올 줄 알았는데 너도 오지 않고, 탄약도 거의 다 떨어져서 이제 죽는가 싶었는데, 지나가던 헬기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미친놈들을 쏴대더군.”
헬기? 타격조가 인근을 수색하고 있었던 건가? 하필 총격전을 벌이는 것이 들켰고?
“방벽? 타격조?”
“크크크큭- 그래. 자신들은 신인류의 수호자 하더라고. 그 말을 듣더니 말총머리 년이 눈이 돌아가서 매달렸지. 여기서 구해달라고... 데려가 달라고 그 시끄러운 년이 말이야 개념 없이 분위기를 깼어.”
“수호자의 정체를 깨닫게 됐겠군.”
“아- 그년은 확실히 깨달았지.”
종구가 비틀린 웃음을 참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거렸다.
번들거리는 종구의 눈빛은 완전히 맛이 간 사람의 눈빛이었다. 위험했다. 피를 사용할까? 피 냄새가 퍼져, 1층까지 가려면 오래 걸릴 것이다.
유미는 1층부터 수색을 하며 올라오고 있었다. 소음기를 달지 않고 쐈다면 아래층까지 소리가 들렸겠지만, 소음기를 썼기 때문에 1층에 있는 유미가 소리를 들었을 가능성이 없었다.
언제든 뒤에 있는 여자를 뿌리치고 스펙을 맞을 준비를 했다. 감각대로라면 변종이나 빗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단발머리는 근거리에서 쏜 9mm 총탄이 몸에 박히지 않았다. 다른 년들도 그렇다고 가정하면 빗치는 아닌데 강화가 됐다는 건가?
“피검사를 하더니 적합 판정을 받았다고 하면서 묻더군. 워커 프로그램(A Worker Program) 에 참여하겠냐고.”
“워커 프로그램?”
종구가 한의사를 힐끗 쳐다봤다. 한의사는 종구의 설명을 들으면서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큭큭큭 웃고 있었다. 젊음을 되찾았기 때문일까? 종구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앞에 있는 종구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꼭 내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건...”
그 식인종 두목. 그놈도 이런 느낌을 줬었다. 내가 화들짝 놀라자 종구가 어깨를 들썩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래 워커 프로그램. 그런데 말이지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 놈들이 보여준 자료대로라면 아주 멋진~ 원더풀한 세상이 된 거야. 안 그래? 큭큭큭큭.”
“크하하하핫!”
종구 광기어린 웃음에 화답하듯 한의사도 웃었다.
“그 새끼들은 생체 실험하는 놈들이라고 했잖아. 그 망할 워커 프로그램도 생체실험일지 모르는데 그걸...”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종구가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래. 알지 왜 모르겠어. 하지 않으면 대안이 있나? 이 원더풀한 세상에서 당장 죽거나 천천히 죽거나 죽게 생겼는데 말이야. 큭큭큭. 우린 너 같은 힘이 없었으니까 말이야. 실험실의 생쥐 신세 밖에 남은 게 없더란 말이지.”
프로그램 이름은 상징적이지만 특정한 의미를 갖기 마련이었다. 워커-노동자 프로그램? 강제로 조종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실험일까? 종구도 그렇고 한의사도 몸이 건장해졌다. 육체노동자를 만들려는 실험일까?
“그 미친 새끼들이 노가다가 필요하데?”
“큭.. 큭큭큭크크크.”
“크하하하하핫”
종구와 한의사가 배꼽을 잡고 웃는데도 여자들은 무표정했다.
위화감. 이들이 빗치들이라면 유미와 미도처럼 그랬어야 했다. 유미가 황씨 딸을 적대했듯 으르렁거려야했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물건 보듯 아무런 감정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이 풍기는 살기는 감정이 없는 살기. 한의사의 감정에 따라 종구의 명령에 따라 반응하고 있었다.
“후아- 정말 실컷 웃었네. 고마워. 영어로 A Worker는 꿀벌을 의미하지. 일벌 말이야. 일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