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치는 생존자들 (2)
안현철은 그렇게 한 마디를 덧붙이고는 가만히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약탈자들이 나처럼 힘이 세다?’
뒤통수? 아니면 협박?
안현철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죽고 싶다는 건가?’
일단 대비를 하는 것이 좋았다. 꾹- 목에 있는 단추를 손으로 누르자 단추 안쪽에 있던 바늘이 손가락을 찔렀다. 따끔하면서 핏방울이 한 방울 새어나왔다.
‘쯧- 짜증나네.’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저렇게 나왔다는 건데, 어떻게 얻으려고 이런 식으로 나왔을까?
‘내가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나?’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태연한척 하지만 그 표정 뒤에 숨겨진 긴장감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일종의 도박이라는 건데. 나를 앞에 두고 도박을 할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는 건가?’
그건 그렇다고 쳐도 안현철 배짱은 좋지만 이래서는 목숨이 여벌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오래 살기는 힘들어 보였다.
“왜 웃으시죠?”
“그러니까 제가 사람 잡아먹는 약탈자들과 같다는 말입니까?”
그의 눈동자는 내가 들고 있는 캔 커피를 살짝 바라보곤 나를 쳐다봤다. 안현철이 다시 손수건으로 살짝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일반인들보다 월등하게 강한 힘에서는 말입니다.”
“이런, 정말 제가 막가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려고 이런 식으로 하는지 모르겠네요.”
“약탈자들과 당신이 다르다는 겁니까?”
“같다면 안현철씨는 방금 죽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도 전부 죽었을 겁니다.”
안현철이 낭패인 표정을 지으며 넥타이를 풀었다.
“후- 역시 힘들군요.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사람을 먹지 않고도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건 주사 때문이 맞습니까?”
내가 스스로 나는 식인종이 아니다. 스펙이 있다 이렇게 알아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게 하기 위해 약탈자와 나를 엮은 것이었다. 내가 걸리지 않으니 자기가 먼저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먼저 말하느냐? 아니면 안현철이 직접 묻느냐? 둘 모두 스펙에 대한 내용이 화제가 되는 것은 같았지만 둘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내가 먼저 스펙의 존재를 밝힐 경우에는 황씨와 청년이 스펙에 대한 이야기를 안현철에게 했다는 것을 덮을 수 있었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의 정보를 홀랑 말했다는 것은 신뢰하기 힘든 상대라는 선입견이 생길 수 있었다. 나와 틀어질 가능성이 있는 민감한 사안. 그렇다고 그 말을 듣고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나 큰 문제였다.
그래서 안현철이 선택한 방법은 약탈자들과 나를 엮어 내 스스로 스펙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도록 유도한 것이었지만 내 여유 있는 태도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처음부터 칼자루는 내가 잡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내가 순순히 대답을 하자 안현철이 재빨리 손수건으로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닦은 뒤 심호흡을 했다.
“그렇다면 그 주사를 구할 수 있습니까?”
“구할 수야 있지요.”
애초에 이 그룹과 만나려고 했던 이유는 방벽세력이 옐로우 플래그라는 집단을 운영하는 것처럼 아더스를 등에 업은 생존자 그룹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아더스에서 나오는 중화제나 스펙과 비슷한 약물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통로로 사용하려고 하기 위해서였다.
“거래 품목입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안현철은 내가 뜸 들이는 이유를 지레 짐작하고 흥분했다. 그를 잠시 진정시키고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좀 생각 좀 해보죠. 캔 커피는 간만이군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 안현철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안현철이었다.
역으로 생각해 봤다. 갑자기 ‘식인약탈자들과 네가 같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스펙이라는 약을 숨기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넘어가려고 생각하는 경우라면? 아마도 목을 축이겠다고 따 준 캔 커피를 마실 것이다.
캔 커피를 마시는 척하며 안현철을 살폈다.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안현철의 얼굴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몸의 반응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캔 커피를 따줬던 것도 이유가 있었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새 캔을 바로 눈앞에서 까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심리적으로 안전감을 주려고 한 것이다. ‘방금 네 눈앞에서 깠으니 문제가 없다.’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캔 커피를 까주지 않았다면, 캔을 뒤집어 볼 수도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까서 준 것이었다.
‘심리적인 방법이라. 이렇게 금방 다시 볼 줄은 몰랐는데? 수면제? 아니면 다른 것?’
내가 약탈자들이나 약탈자들의 두목과 같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와 약탈자들이 같다고 말한 이유는 뭔가 대비가 됐다는 소리였다.
황씨와 청년이 안현철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단순히 내 괴력만 이야기 했을까? 아닐 것이다. 내가 변종과 싸우는 모습을 처음부터 봤으니 스펙의 존재. 그러니까 주사의 존재를 말했을 것이다.
스펙의 존재를 감추려고 했으면 변종이 황씨나 청년을 죽인 뒤 스펙을 사용했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 보라고 보여줬다. 당시에 급박하기도 했거니와 황씨와 청년이 보여준 것처럼 상식선에서 대화가 되는 그룹이라면 스펙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된다면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였다. 내가 돌아간다고 말하자, 안현철은 나를 불러 세워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이런 식으로 진행되다니...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 최악은 아니더라도 차악은 되리라고 생각했었는데 최악이었다.
내가 캔 커피를 입에 천천히 대는 것을 지켜보는 그였다. 자 어떻게 나올까? 내가 충분히 긍정적인 제스처를 취했음에도 이걸 그냥 마시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말릴 것인가?
안현철을 힐끗 거리며 캔 커피를 입에 댄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피식- 쓴 웃음이 나왔다. 대체 난 뭘 확인하고 싶었던 건가?
일반적인 생존자들이라고 마냥 도덕적이라고 믿고 싶었던 건가? 이들에게 있어서 스펙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였다. 그러니 쓸 수 있는 방법을 전부 쓴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도 어떻게든 잡은 뒤, 바닥까지 털려고 했을 테니 말이다.
입에 댔던 캔 커피를 바닥에 내려놓고 안현철을 노려봤다.
“확실히... 기분이 더럽긴 하네.”
“네? 무슨?”
안현철이 내 중얼거림을 듣고는 의아한 표정을 짓는 것과 동시에 반쯤 헐겁게 푼 넥타이를 잡아 당겼다. 휙- 잡아당긴 넥타이가 올가미처럼 안현철의 목을 감아 챘다.
“칵- 무-”
안현철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캔 커피를 입에 쏟아 넣고 목울 대를 쳤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안현철은 반항하지도 못하고 반쯤 캔 커피를 마시고 말았다.
요란스러운 소리가 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난입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총을 가진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꼼짝 마!”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내가 안현철의 목줄을 움켜쥔 것을 보곤 사람들이 눈을 부라렸다.
“컥-크윽-”
“거 다들 총 내려놓지? 쏘지 못할 거면서 말이야.”
넥타이를 휙 잡아 당겨 안현철을 방패로 삼았다.
“당신 지금 뭐하는 짓이야? 엉?”
“그러고도 무사 할 것 같아?”
“대표님을 풀어줘!”
“그냥 쏠 게 아니면 흥분들 하지 말라고. 이거? 그냥 안현철씨께서 커피에 뭘 탔는지 확인하고 있을 뿐이니까 말이야. 그리고...”
쾅! 테이블을 걷어차자 테이블이 접시처럼 뒤집어지며 날아갔다. 퍽-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테이블과 뒤엉켜 문 밖으로 튕겨나갔다.
“크악!”
“악!”
우수수 밖으로 튕겨나간 사람들은 차마 다시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문밖에서 총구만 겨눴다. 나를 노렸지만 총을 쏘지는 못했다.
나에게서 스펙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다가, 안현철이 고기 방패가 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포위만 하고 있었다. 안현철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컥-오해...”
“오해는 무슨 오해. 일단 좀 두고 보자고.”
안현철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변명했지만 서서히 발음이 뭉개졌다.
“죽이... 려는... 아니라...”
“죽이려는 게 아니었다고? 사람에게 이런 걸 먹이려고 했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쓰나.”
“그저... 안전... 가지고...”
그는 악착같이 뭔가를 말했지만 이미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만 나열하기 시작하는 안현철이었다. 대화를 하려면 방법이 잘못됐다. 문 뒤쪽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이럴 때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하던가? 그렇지 않나 황씨?”
문 뒤에서 저쪽에서 개런드 소총을 겨누고 있는 황씨를 보며 웃자, 황씨가 눈썹을 꿈틀 거리며 잇새로 소리를 냈다.
“그 사람 내려놓지.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나?”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냐고?”
“사람들을... 그런 힘을... 그렇게 ”
안현철은 정신을 차리려고 필사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안현철의 목덜미를 붙잡고 황씨에게 말했다.
“이봐 황씨? 이런 세상에서 사람이 서로 도와야 한다고 했지? 이게 돕는 건가?”
내 말에 황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폭발 할 것 같은 표정으로 황씨가 고함을 질렀다.
“그래! 우리에게 그런 주사가 있었다면 개죽음 당하는 사람은 없었을 거다.”
“핑계를 대는 건가?”
“핑계가 아니라 사실이지! 약탈자들과 싸웠을 때, 네놈이 진즉 도왔다면 현상이도 죽지 않았을 거 아닌가? 아니야? 네놈들이 그런 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만 먹고 살겠다고 해서 일이 이렇게 된 것 아니냐고!”
“......”
내 침묵을 뭐라고 생각했는지 황씨는 언제든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인상을 썼다.
“뭘 원하죠?”
문 뒤에서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뭘 원 하냐고? 이거야 원 반대 아닌가? 나한테 원하는 것이 있어서 약까지 쓰려고 하지 않았나?”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생각이 짧았어요. 이제 그만 대표님을 풀어주세요.”
“이거야 원. 정말 답이 없군. 그렇지? 유미야.”
우직-
안현철의 목이 뒤로 꺾였다.
“으아아아!”
“쏴!”
탕!
총소리와 함께, 콰창!- 복도의 유리창이 박살나며 유미가 뛰어들었다.
*
뒤에서 유미가 가세하자.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됐다. 애초에 유미와 내 전투력은 일반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총성과 비명이 붉은 핏방울을 흘렸을 따름이었다. 총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제압당하자 나머지는 순식간이었다.
“정말 어이가 없네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죠?”
유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식인약탈자 무리들 때문에 심리적으로 압박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식량 문제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눈앞에 쥘 수 있는 힘이 보이자 잘못된 판단을 한 것이었다. 황씨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황씨는 눈을 부릅뜨고 죽어있었다. 딸과 사귀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을까? 변종으로 변한 현상이를 내가 문답무용으로 죽였기 때문일까?
아마도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이었겠지만 황씨도 그렇고 안현철도 그렇고 선의를 선의로 받아들이지 못한 건 사실이었다.
“수면제로 제압한 뒤, 어떻게든 입을 열게 하려고 했겠지.”
“고문이라도 할 생각이었나 보네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겠지.”
내 답변에 유미가 폭-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일단 시체부터 처리하자. 목을 자르거나 머리를 완전히 박살내.”
“알겠어요.”
유미와 내가 죽은 사람들의 머리통을 자르고 터뜨리자 무기를 버리고 항복한 사람들이 치를 떨었다.
“이... 이...”
“시체까지...”
“몰랐나? 시체들을 그냥 두면 좀비가 될 수도 있고 변종으로 되살아난다는 거?”
“......”
“......”
*
손을 댔으니 확실히 해야 했다.
생각했던 것 가운데,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이들은 끈끈한 동료애를 가지고 있었고 대부분 가족들과 같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총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만 골라서 제압하긴 했지만 그래도 죽은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5명. 안현철을 포함한 숫자였다. 하지만 그냥 단순한 5명이 아니었다. 황씨만 하더라도 딸과 부인 그리고 조카까지 딸려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사람들 입단속을 시켰지만, 조만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상황이 됐다.
“60명이라고 했는데? 숫자가 많은 걸?”
언뜻 봐도 100명은 넘어보였다. 사과를 했던 여자에게 묻자, 그녀는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오늘 오전에 다른 그룹과 합쳤어요.”
“그래서? 전부 몇 명이지?”
“죽은 사람들을 빼면 112명입니다.”
한 눈에 보더라도 여자와 아이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싸울 수 있는 연령대의 남자들은 잘해야 15명. 죽은 다섯이 아쉬웠다.
“비가 그치는 대로 하수구에 물이 빠지면 다른 그룹들도 함께 하기로 했어요. 인근에 있던 그룹들인데 그쪽도 독자적으로는 생존하기 힘들다고 생각해, 이쪽과 합치기로 했습니다.”
맨홀 변종이 있었을 때는 인육 약탈자든, 생존자든 돌아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상황이 이렇게 변한 이유는 맨홀 변종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맨홀 변종이 사라지자 식인약탈자들이 활개를 쳤고 생존자들도 그들을 피해 뭉치기 시작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