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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98화 (98/261)

영역정비 (1)

아더스 소속의 사내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 대답은 정해져있었다.

‘거절하죠.’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데 함께 했어야 했다고 반드시 후회할 것이네.’

‘지킬 것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뭘 지킬 수 있겠나? 인간성? 소중한 사람? 미래? 그 어느 것도 지킬 수 없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야.’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네?”

유미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쿡-찔렀다.

“아니, 세상이 참 그렇구나 싶어서.”

“예이 그게 무슨 소리에요.”

유미가 ‘흥- 말 안 해준다는 거죠?’라는 표정을 지었다.

“얘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아요. 전 시간이 많아요.”

넙죽 옆에 앉는 유미였다. 짧지 않은 이야기가 시작됐다. 유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더스 쪽에 가담하지 않기로 했다는 거네요?”

“그래. 무엇보다 그쪽에서 100% 사실을 말했다는 보장이 없어.”

사실 그랬다. 형광등을 바닥에 깔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붉은 위험지역 인근, 아더스의 근거지를 찾기 위해 타격조들이 수색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총소리를 내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사내가 진실을 위해 목숨을 건 것처럼 볼 수도 있었지만...

심리를 이용한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는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내 경고를 무시하고 올라온 것이다.

‘심리를 이용한 방법은 그들이 잘 사용하는 방법이지.’

그 말대로라면 심리를 이용하는 적들과 싸워온 아더스는 심리를 이용하지 못할까?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을 닮는 법이었다. 그러니 아더스나 방벽의 문제는 일단 제외하는 것이 좋았다.

“왜 아쉽니?”

유미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예전 같았다면 아더스에 흥미를 느낄 법했는데 마냥 행복한 표정을 짓는 유미였다.

“헤헤헤. 가입하면 떨어져 있어야 할 경우가 생기겠죠?”

“아마도?”

아더스라는 저항세력에 ‘가담’도 아니고 ‘가입’이라는 표현을 쓰니 뭔가 인터넷 카페 회원급으로 전락하는 느낌이어서 저절로 픽- 웃음이 나왔다. 유미는 자신의 웃음에 미소로 화답하는 내 팔에 얼굴을 비볐다.

“잘 거절하셨어요. 저는요 같이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절대적으로 믿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부담이기 전에 행운이자 행복이었다. 그리고 난 이 행복을 지키고 싶었다.

*

내가 없는 이틀 동안 유미는 틈틈이 영역표시를 했다. 하지만 비가 오면 체취가 씻겨 내려갔기 때문에 다시 표시를 해야 했다. 장마도 아니고 왔다 멈췄다 반복했다. 몇 시간 넘게 쏟아지다가 하루 이틀 쨍쨍하고 다시 몇 시간 펑펑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아- 또 오네요. 언제까지 이럴까요? 장마도 아니고 국지성 호우라니... 작년하고 비교해 보면 날씨가 정말 이상해졌어요.”

유미가 장대비가 쏟아지는 밖을 보고 넋두리를 했다. 비가 그치면 다시 영역표시를 하러가야 했기 때문이다.

“꼭 동물이 된 기분이에요. 곰이랄까? 저번에 말했던 거 있죠? 야생동물들이 막 비벼서 영역표시 한다고. 꼭 그런 기분이에요.”

어쩌다 한 번도 아니고 비가 그치면 순찰하듯 돌아다니며 꼬박꼬박 흔적을 남겨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

“아뇨. 생존자들의 싸움이 좀 많아졌어요.”

“그래?”

당연한 일이었다. 맨홀 변종도 사라지고 미도와 미노도 없어졌으니 생존자들과 약탈자들의 충돌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미도의 식육빌딩도 해결해야 했다. 방벽세력은 미도가 죽었다는 걸 몰랐기 때문에 언젠가는 빗치를 잡겠다며 그 빌딩으로 갈 것이 분명했다.

본래대로라면 생존자들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세상이 이렇게 된 상황에서 의료 인력은 제법 귀한 고급인력이었다.

“빌딩은 어떤데?”

“그 덫이요?”

“응.”

“주변을 약탈자들이 배회하는 것을 보면 며칠 지나지 않아서 약탈하러 갈 것 같아요.”

“흠- 생각 좀 해봐야겠다.”

아더스 사내의 말대로라면 마구잡이로 뒤섞인 상황에서 시작된 사태였기 때문에, 병에 대한 면역력도 개인 별로 제멋대로였다.

변종이나 빗치들은 생물병기에 가까웠기 때문에 방사능을 비롯한 생화학무기에서도 강했지만 일반 생존자들을 말 그대로 랜덤이었다. 병을 앓을 경우 어디로 튈지 몰랐다.

결국 의료 인력은 매우 중요했다. 약탈자들이라고 의료 인력을 마구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는 방법은 여러 가지.’라고 했던 그쪽 사람들이라면 약탈자들에게 점령당하면 약탈자들의 편에 설 가능성도 많았다. 의료진이 포함되면 약탈자들의 생존능력이 올라가기 마련이고 곧 약탈자들의 세력화가 급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피곤하겠는데.’

13구역은 방벽세력들이 자신들의 영역과의 완충지대로 생각하는 구역이었다. 작전 반경 맨 끝에 위치한 구역.

“아우터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무시하는 놈들이니까 말이야.”

“병력이 생각보다 많다고 했죠?”

“응.”

“그 정도 무력이 있으면 왜 정상화를 시키지 않았을까요?”

유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거나... 뭔가를 하고 있겠지.”

“예에- 그냥 이렇게 둔다고요? 왜요? 뭘 해요?”

“그렇다는 거야. 진짜 그런 게 아니고.”

생존자들이든 약탈자든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아우터일 따름이었다. 빗치가 있다는 심증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까지 왔지, 그렇지 않다면 아더스와 싸우는 상황에서 이곳까지 올 리 없었다.

이 상황에서 의료진을 흡수한 약탈자들의 세가 불어나면, 방벽세력은 이 지역의 관리를 약탈세력에게 맡길 가능성도 있었다. 옐로우 플래그와 했던 방식으로 이 지역 주요 세력이 된 약탈자들과 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아마도 사냥에는 검은 개, 흰 개를 구별하지 않는 법이니까. 그냥 있으면 피곤해지겠는 걸?”

“네?”

“밖을 간접적으로 통제하려는 놈들이 우리 영역에 관여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그럼요? 진짜 떠나야 하는 건가요?”

유미는 떠나기 싫어했다.

“그렇게 가기 싫어?”

“여긴 우리 추억이 있는 곳이잖아요.”

추억인가? 유미는 상당한 애착을 보였다. 두 주먹을 앞으로 불끈 움켜쥐고 영역 사수의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이었다. 당장은 떠날 수 없었다.

사내가 건네 준 중화제 주사기가 떠올랐다. 가담을 거절했음에도 나에게 넘겨준 중화제였다. 그건 쓰기에 따라 스펙의 부작용을 일부 중화시키는 약이었다. 더불어 인육충동까지 어느 정도 조절이 된다고 했다.

‘자넨 언젠가는 오게 될 걸세.’

헤어지기 전 사내가 중화제를 건네주며 한 말이었다. 아더스에게서 뽑아내야 할 것도 있으니 일단은 조금 더 이곳에 있어야 했다.

방법은 둘... 아니 셋... 제일 먼저 떠오른 간단한 방법은 생존자든 약탈자든 씨를 말려버리는 것이었다. 변종과 빗치가 그렇듯 이 근처에 있는 생존자들 씨를 말려버리면... 아니,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옐로우 플래그가 돌아다니면서 정찰을 하고 있었다.

생존자들의 밀도가 급감한 지역은 빗치나 변종의 영역이라고 판단하고 방벽에게 보고를 올릴 것이다. 다시 엮일 가능성이 있었다.

“역으로 하는 것이 좋겠는 걸.”

“헤헤헤...”

*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지던 비가 언제 내렸냐는 것처럼 그치고 태양이 쨍쨍 내리쬐기 시작했다. 하수구에 쌓인 것을 뚫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일부는 물이 역류해 도로가 엉망이었다.

미도의 식육빌딩에서는 오늘도 여전히 구조신호가 보내지고 있었다. 빌딩 인근의 좀비들을 처리했기 때문에 구조신호를 보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빌딩 인근으로 모였지만 1층 로비에 있는 타죽은 좀비 시체들을 보고 선뜻 진입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식량이었다. 맨홀 변종이 죽으면서 통제 받고 있던 좀비들이 흩어졌고 그 여파로 맨홀 변종의 영역 전체의 좀비 밀도가 낮아졌다.

강력한 포식자가 사라지면서 아직 물건이 남아있는 마트, 편의점 등이 널려있는 지역이 공백지가 된 상황이었다.

약탈자들도 그 변화를 알아챘기 때문에 구조신호를 보내는 빌딩에 관심만 두고 물자를 확보하려 맨홀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킥- 오랜 만이군.”

피부과가 아는 체를 했다. 피부과 의사의 곁에는 세 여자가 몽롱한 표정으로 널브러져 있었다. 간신히 국부만 가린 차림이었지만 당사자들도 다른 사람들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래 다시 올라왔다는 건 결국 놈들을 처리했단 말이군. 큭- 진짜로 처리했다니... 빌어먹을 최악이야.”

피부과가 비틀어진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피부과는 직관적으로 이 다음에 벌어질 일을 파악하고 있었다. 피부과의 말을 듣고 한의사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처리? 그게 무슨 말인가? 처리했다니?”

“크... 크흐흐흐... 영감님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까? 자유가 됐다는 겁니다. 그 괴물 놈들이 죽었다고요. 크크크크.”

한의사가 날 노려봤다. 급격하게 올라간 혈압 때문인지 노기 때문인지 안구의 실핏줄이 툭-하고 터져나간 한의사가 와락- 내 멱살을 쥐어 잡았다.

“세진이는!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어떻게 됐어! 어?”

우둑-

“크억!”

내 멱살을 움켜쥔 팔을 비틀어 떼어내자 한의사가 탄식같은 비명을 지르고 떨어져나갔다. 피부과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정 줄 놓은 여자들의 가슴을 주물러대며 중얼거렸다.

“크크큭- 빌어먹을... 하... 빌어쳐먹을...”

단발머리 간호사, 미용실 직원과 그 친구 이렇게 3명의 여자들만 두려운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괴물들은 죽었습니다. 더 이상 미끼의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네.. 이놈... 이놈의 새끼... 세진이를... 세진이를 죽였냐. 네놈이 죽였냐고?”

“아니요. 전 죽이지 않았습니다.”

“......”

나에게 분노를 쏟아내던 한의사가 푸르르 떨면서 입술을 옴짝였다.

“그럼... 그럼 누가 죽였냐?”

“무장한 사람들이 죽였지요. 헬기를 타고 온 사람들이었는데.. 아마도 구조신호를 보내신 적이 있지요? 그들이 죽였습니다.”

“그놈들이 세진이를 죽였다고?”

“네.”

피부과는 이제 반쯤 광기에 빠진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크크크큭- 그래서 다시 이곳까지 온 이유가 있을 텐데?”

역시 피부과는 감이 좋았다.

“이제는 구조 신호를 보내지 마십시오. 주의를 끄는 것은 위험합니다.”

"어째서죠? 괴물을 죽였으니 우리를 구조해 주러 다시 올 지도 모르잖아요?"

"그들은 괴물의 사체가 목적이었습니다."

"뭐야? 그 놈들이 세진이의 시체를 가져갔단 말이냐!"

"무슨 실험을 한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피검사를 해서... 적합대상이라는 것을 찾아 방벽 안으로 데려가더군요..."

"적합 대상이요?"

단발머리 간호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네 적합 대상이요. 그렇게 방벽 안쪽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는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합니다."

"서.. 설마.. 생체실험?"

단발머리 간호사와 미용실 직원, 그 친구가 쑥덕였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이 정도라면 방벽 세력에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여러분은 자유가 됐으니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크하하핫! 그렇겠지 그렇고말고. 우릴 지켜주던 울타리가 사라졌으니까 말이야.”

피부과가 웃으면서 날 쳐다봤다. 내가 돌아왔다는 것을 피부과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응? 뭐라고 불러드릴까? 구원자? 지도자. 아니면 주인님? 큭.. 크하하핫!”

“글쎄요. 전부 아니군요. 그냥 이웃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뭐? 이웃? 큭크하하하핫! 이-웃? 좋지. 그것도 좋고말고. 그래서 우리의 친절한 이웃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이곳까지 왕림하셨는지 들어보자고.”

정신 줄을 놓은 여자들을 주무르던 손을 떼고 피부과가 날 노려봤다.

*

“그러니까 이사를 한 뒤, 인근의 생존자들과 연합해 일종의 자치 단체를 만들라?”

피부과의 표정이 한 없이 진지해졌다.

“너는 참여하지 않을 거고?”

“도와는 주겠지만 전면에 나서고 싶지는 않고 싶군.”

피부과와 나는 서로 말을 놓기로 한 사이였기 때문에 편하게 말했다. 피부과가 팔이 퉁퉁 부은 한의사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정이 있겠지. 말해 달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말해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고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자치단체를 만든 뒤 뭘 원하는 거지?”

“간단해. 그저 살면 되는 거야.”

“그게 전부? 이러지 말지?”

피부과가 꿍꿍이가 뭐냐는 표정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약탈자들이 이 근처를 장악해 버리면 내가 있는 곳이 피곤해져서 말이야.”

“하긴 너 혼자서 살아남았을 리는 없으니까 말이지.”

피부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아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과도한 호의라고 보이는데?”

“호의에는 호의로... 호의가 어렵다면 최소한의 관심 정도로 답해주면 좋겠어.”

“킥- 크핫! 그러지. 일단 나와 이 세 사람은 네 말대로 하지. 제법 규모가 큰 생존자들과 합류하는 게 가장 현실적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피부과가 내 의견에 따르기로 하자. 한의사와 단발머리 간호사 그리고 미용실 직원과 그 친구도 내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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