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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88화 (88/261)

다른 일상 (2)

밝은 가로등 불빛 아래 행복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공을 차고 뛰어노는 소리가 들렸다. 까르륵-소녀의 웃음은 나비처럼 팔랑거리며 허공을 날았다. 순간 세상과 시간이 정지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삐----

귀가 울렸다. 식량 때문에 싸우고 죽고... 좀비들과 악다구니를 벌이고 변종과 빗치들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일이 전부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 같은 평화로운 풍경.

학생들의 유쾌한 농담과 프로 농구선수 만큼이나 재빠른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잘 훈련된 개를 끌고 다니는 무장한 경비들의 모습만이 평화로운 풍경에서 보이는 유일한 이질적 요소였다. 경비들이 가지고 있는 총기를 보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멍청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니... 움직여야 했다.

강을 따라 인적이 드믄 곳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어이없는 풍경을 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을 그대로 두고 우거진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당장 아무나 붙잡아서 묻고 싶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세상이 망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경험한 것은 무엇일까? 분명히 계엄이 선포됐고 군대가 와해됐다고 했다. 군용트럭을 몰고 난입해 들어왔다가 그냥 도망친 군인들도 있었다.

내가 격리 된 건가?

아니면 이곳을 중심으로 생존자들이 모여 있는 요새가 만들어진 건가?

빌딩과 빌딩을 연결해 만들어진 방벽 뒤에 이런 풍경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둘 가운데 하나, 내가 격리된 것이든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멸망으로부터 격리가 된 것인지. 강 건너편을 봤다. 한강 건너 강북이 보였다. 건너편에 보이는 밝은 빛.

쿵-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전부 정전이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보는 건너편은 예전에 봤던 그 밝은 불빛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설마 내가 살던 곳이 격리된 것인가? 어항 속 금붕어처럼 그런 삶을 살고 있었단 말인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울렸다.

“어이. 거기!”

“예?”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수풀 속에서 경비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총구는 바닥이었지만 언제든 쏠 수 있게 방아쇠를 걸고 있었다. 살의가 있었다면 위기감응이 발동했겠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순간 갈등이 생겼다. 스펙을 맞지 않더라도 내 힘은 성인 3배에 육박했고 최근 들어 조금은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순발력도 마찬가지. 총구를 들기 전에 제압할 수 있었다.

혼자일까?

예민한 감각으로도 찾기 쉽지 않았다.

“아- 정말 귀신같으시네요. 하하- 수고하십니다.”

꽉 쥐었던 주먹에서 힘을 빼고 웃었으며 다가갔다. 너무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인가 살짝 긴장해 보였던 사내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며 강압적인 말투가 살짝 풀어졌다.

“통제선 근처까지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역시,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까?

“그냥 가슴이 답답해서 걷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담배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일단, 아이디 좀 확인하겠습니다.”

빌어먹을 신분증.

내가 쓴 웃음을 짓자. 사내의 총구가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스락 거리는 느낌과 함께 심장어림이 묵직하게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수풀 속에서 누군가 나를 조준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 말고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소리였다.

먹힐 만한 것이...

있었다.

목에 걸린 목걸이를 앞으로 쑥 내밀고 씁쓸하게 말했다.

“오늘 팀원들이... 그래서 정신없이 걷다보니...”

“응? 스포(Special Force)?”

“예...”

“타격대쪽 신입이었군.”

사내는 내 목에 걸린 막대와 USB를 보곤 경계를 풀었다.

“......”

“견디기 힘들다고 약에 의존하면 더 힘들어져.”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손을 흔들자 수풀 안쪽에서 날 노렸던 감각이 스르륵 사라졌다. 신입과 싸우면서도 느꼈지만 이런 사람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니. 하긴, 한국의 특수부대는 세계적으로 알아준다는 소문도 있었다.

특수부대 중심으로 대비를 했었나? 씁쓸한 표정이 저절로 나왔다. 내 씁쓸한 표정을 무엇으로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사내가 내 어깨를 툭툭 쳐주며 위로했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으니 어쩌겠나? 수리로 뒤쪽에 ‘애플트리’가 괜찮아. 씨큐리티(security) 박폰 소개로 왔다고 하면 잘 해줄 테니, 기분 전환하려면 한 번 가봐.”

“아-예. 감사합니다.”

“쯧- 탁탁 털어버려야지... 이미 지난 일 마음에 담고 있으면 큰일 나. 산 사람은 살아야지.”

대답대신 쓴 웃음만 지어주고 발걸음을 돌렸다. 사내의 목에 걸린 것은 붉은 색 바탕에 검은 실선이 두 개 그어진 막대였다.

반대 방향으로 다시 걸었다. 방금 전에 경비를 만났던 곳은 탄천 인근이었다. 빌딩이 있는 곳은 빌딩과 빌딩사이를 틀어막아 장벽을 만들고 옆쪽으로는 탄천의 제방을 이용해 차단했다는 소리였다.

*

무턱대고 걷는 것은 위험했다. 기계식 시계를 차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을 아는 것은 문제없었지만 돌아다니는 경비들을 보니 일정 시간이 지나면 통행금지가 있을 것 같았다. 통금 시간에 돌아다니다 걸리면 아까처럼 대충 넘어가긴 힘들 것이다.

아까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쪽에서 접근했다면 목걸이를 걸고 있다고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안쪽에서 접근했기 때문에 좋게 넘어갔던 것이다.

어쩌면 목걸이가 일종의 인식표 역할이나 아이디의 역할을 하는 하는지도 몰랐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목을 유심히 살폈다. 7월 중순 국지성호우를 뿌린 뒤라 그런지 습하고 더웠다. 사람들은 목이 파인 반팔이나 민소매 옷을 입고 있었기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있었다. 모양은 크게 3가지 원형, 삼각형, 정사각형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간혹 타원형이나 이등변삼각형 직사각형 모양도 있었지만 전부 목에 걸고 있거나 손목에 팔찌처럼 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전부 여름옷을 입고 있는데 반해, 나는 긴팔 옷을 입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나를 향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분명 다시 검문을 받게 될 것이다.

척 봐도 나는 이질적이었다.

5개월이 넘게 자란 머리를 대충 쳐냈었기 때문에 엉성하고 덥수룩한 머리 하수구에서 구르고 한강에서 헹군 칙칙한 냄새가 풍기는 젖은 옷. 몸통만큼이나 커다랗지만 축 늘어진 배낭. 꼭 패잔병 같았다.

‘아- 그래서 그냥 넘어갔던 건가?’

눈치 보지 말고 신경 쓰지 말고 걸어야 했다. 긴소매를 걷어 팔뚝을 드러내고 아직 덜 마른 머리를 뒤로 넘겨 올백이 되게 했다. 그리고 지하철역이 있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육지로 이동했던 자들이 지하철입구를 통해 내려갔었다. 지하철로를 통해 병력을 움직인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방벽과 가까운 곳에 있는 지하철역 인근에 주둔지가 있을 것이다. 주둔지 근처에는 보급창이 있을 것이고 스펙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혼란스러웠다. 30분 동안 걸어서 이동하면서 이곳은 너무나 평화로웠다. 다른 점은 넓은 길에 승용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것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전거, 전기자전거 같은 것을 타고 다닌다는 것만 다를 뿐, 자연스러운 일상과 다를 바 없었다.

밝은 간판은 사람들에게 손짓하고 있었고, 거리엔 제법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말끔한 복장. 깨끗한 거리. 행복한 사람들... 이곳과 대비된 방벽 건너편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속고 속이며, 죽고 죽이는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유미는? 기다리고 있을 그녀가 떠올랐다. 이곳에 그녀는 올 수 없었다. 너무 아름다워진 외모는 한 눈에 그녀가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줬다. 안전에 대한 욕구, 편안함에 대한 갈망, 잃어버린 일상에 대한 그리움이 마음을 흔들었다.

“하- 바보 같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여기는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공간이었다. 평화로운 일상이 살아있지만 이미 일상에서 벗어나버린 우리가 있을 곳은 없었다.

*

지하철역이 있던 곳까지 걸어가면서 느낀 점은 의외로 사람들이 많다는 것과 그 많은 사람들이 전부 잘 생겼다는 것이다.

예전에 길을 걷다가 사람들을 만났을 때 ‘아 이 사람들 참 호감 있게 생겼구나.’ 이런 사람들이 길바닥에 널려있는 기분이었다.

돌아다니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나 중학교 한 반에 한 두 명 정도 보일 녀석들. ‘고놈 참 똘똘하게 생겼네.’ 그럴 놈들만 모아놨는지 눈에 띄는 녀석들마다 똘똘해 보였다.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길바닥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마다 이런 모양이니 위화감까지 살짝 들었다.

*

이곳에서 하루 혹은 이틀은 보내야 했다.

숙박시설이 있을 지 아니면 없을지 모르겠지만 통행금지가 되기 전 안전하게 쉴 곳이 필요했다. 하수구는 제외, 내일 오전에 하수냄새를 풍기며 돌아다니는 것은 미친짓이었다.

‘쉬고 옷을 빨고 머리를 다듬어야 하는데.’

이것저것 물건을 사면서 은근히 정보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커피 전문점의 투명한 유리창 너머 한 여자가 계산을 하고 있었다.

카드? 현금?

여자는 자신의 팔목에 걸린 팔찌를 내밀었다. 팔찌에 달려있는 타원형 펜던트를 인식기에 대는 것으로 결제가 됐다. 상점을 지나치면서 계산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전부 목에 걸고 있는 펜던트나 팔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대거나 그런 방식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다.

패스트푸드 체인점에는 전부 수제 햄버거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더 신기한 것은 가격이었다. 3T. 햄버거 세트에 3T라는 가격표는 이곳에서는 기존의 원화가 통용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다.

‘써 볼까?’

목에 걸고 있던 막대에 손이 갔다. ‘사용 가능할까?’ 긴 스틱형 막대는 경비들과 보안 같은 무장인력들이 가지고 있는 신분증이자 일종의 신용카드 같은 것이었다. 아니었다. 만약 정지가 됐거나 실종 신고가 된 상태라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일단은 조금 더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인 점은 스마트 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직 인터넷이 복구되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인터넷이 아니라 인트라넷(내부 전산망) 정도를 만들어 구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가진 목걸이를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현재 시각은 오후 10시입니다. 자정부터 내일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시작되오니, 시민여러분들께서는 통행금지에 적극 협조하여주시기 바랍니다.]

통행금지시간이 다가왔다는 안내방송이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빨리 움직여야 했다.

*

‘역시.’

예상대로였다. 지하철역 인근에 있는 호텔들과 모텔들 주변으로 장갑차와 전차가 세워져 있었다. 이곳저곳에 삐져나온 중기관총이 이곳이 주둔지임을 나타냈다.

그래도 경계가 아주 삼엄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안으로 들어갈 여지가 있어보였다. 이곳 한 곳만 주둔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지하철역과 연계된 인근 숙박시설을 주둔지로 사용한다면 최소한 3~4곳에 나눠져 있다는 소리였다.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둘 이었다. 옥상을 통해 이동하는 방법과, 하수구를 이용하는 방법. 둘 가운데 하수구는 아웃이었다. 냄새를 풍기며 다니는 것도 문제였고, 최악의 경우 독안에 든 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옥상으로 이동하는 것도 감시카메라나 경비병에게 걸릴 위험이 있었지만, 여차하면 스펙을 써서 도주하는 게 가능했다.

감시카메라와 경비병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한 뒤, 옥상과 옥상을 고양이처럼 건너 뛰었다. 자작- 낮은 소리가 옥상을 울렸지만, 장갑차가 움직이며 내는 굵직한 소리에 가려졌다.

철컥- 옥상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주변을 다시 확인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멀리 한강이 보였다. 강 건너편에 보이는 밝은 불빛들... 한강 건너편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폐쇄? 격리였나?’

씁쓸한 마음에 더 먼곳까지 훑어봤다. 지평선을 찾으려는 것처럼 멀리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으려고 했다. 찬란한 불빛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어지다 어느 순간 뚝 끊겨 버렸다.

"어?"

저- 먼 곳은 어둠이었다. 빛을 감싼 암흑이었다.

하?- 이유 없이 웃음이 새어나왔다.

순간적으로 아찔했던 심정이 안온해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망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면 기뻐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혼란스러워하고 충격 받다니 모순도 이런 모순이 없었다.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진정되고 보니 상황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일부지역을 방벽으로 차단해 격리 보호를 하고 있었다. 이곳의 일상은 선택 받은 자들의 일상이었던 것이다.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이 어둠을 부정하는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

안으로 들어가자 엘리베이터도 제대로 작동되고 있었고 복도에도 불이 들어와 있었다. 모텔 특유의 어두운 조명이 아닌 밝은 조명이었다.

민간군사기업(PMC. Private Military Company)의 숙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방문을 열어봤다. 딸깍! 잠겨있었다. 열쇠구멍을 보니 조그만 정사각형 구멍이 뚫려있었다.

목걸이를 풀러 열쇠구멍에 넣어봤다. 들어가기는 했지만 열리지는 않았다. 목걸이가 열쇠의 역할도 겸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한쪽에 층별 안내가 붙어있었다. 숙소가 있고 1층에 식당 지하 1층에 세탁실과 건조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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