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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86화 (86/261)

영역 (2)

생존자들을 피해 인근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두런두런 들리는 목소리 맨홀 변종의 시체를 방 한쪽 구석에 밀어 넣고 단단히 밀봉한 다음 멀찍이 떨어져 생존자들의 뒤를 밟았다. 생존자들과 엮이지 않기 위해서는 저들의 근거지 위치를 대충 특정해두는 것이 좋았다.

“쯧- 이런...”

생존자들이 맨홀 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맨홀 변종이 인근에서 설치는데 당연히 길바닥으로 다닐 리 없었다. 생존자들에게 칼빈과 M-1이 있다는 소리는 K-1도 있다는 소리였다.

한국은 휴전국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곳곳에 무기고와 탄약고가 있었다. 공권력과 군대가 무너지기만 한다면 어지간한 소총이 풀리는 건 순식간이라고 봐야 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대부분 무장을 했다고 생각해야 했다.

물론 무장을 했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총을 쏘지는 못했다. 무장 세력들이야 헬기를 이용해 옥상에 자리를 잡고 쏴댄 다음, 여차하면 헬기타고 도망가면 그만이지만 일반 생존자들이 총기를 사용한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총소리를 듣고 몰려오는 물량좀비들을 감당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총기를 가지고 있는 건, 좀비를 잡기 보다는 사람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여기서 총 쏘면 ‘우리 전부 같이 죽는다.’는 엄포용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

맨홀 좀비의 시체를 끌고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니 유미가 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다녀오셨어요? 헤헤.”

뭐가 그렇게 좋은 방실방실 웃고 있는 유미였다. 그 웃음 때문인지 복잡했던 기분이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맨홀 좀비의 시체가 썩지 않도록 냉장고 하나를 통째로 냉동으로 바꾼 뒤, 시체를 보관 했다. 여름이라 빨리 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면 더 빨리 상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어- 그쪽은 생존자들이나 뭐 그런 사람들 없었고?”

“있었어요. 저번에 옥상에서 봤던 올백 머리 아저씨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있었고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살아남았더라고요.”

“그래? 지도에 위치 표시 좀 해 둬.”

“네~”

변종 좀비 특유의 체취가 몸에 베인 것만 같아서 벅벅 닦고 나오자, 유미는 밥을 차려놓고 있었다. 매번 먹는 캔 음식이거나 레토르트 식품이었지만 어쩐지 맛있게 느껴졌다.

유미는 내가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부른지 꼭 마주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혼자 먹기가 멋쩍기도 했고 혹시나 싶기도 해서 슬며시 입을 열었다.

“큼- 두유나 주스 같은 것도 먹기 힘들어?”

“네. 저도 먹는 거 참 좋아했는데, 영 못 먹겠네요.”

앓고 난 뒤 마냥 좋아진 것만은 아니었다. 피부가 빗치들처럼 질겨지고 육체능력도 급상승했지만 그 결과 바늘도 들어가지 않게 됐다. 예전처럼 링거로 영양을 공급하기는 힘든 상황이 됐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입맛은 완전히 변한 것 같았다.

“헤헤-그래도 더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어서 괜찮아요.”

“물은 그대로 마실 수 있는 거지?”

“그럼요. 근데 좀 많이 마셔요.”

“얼마나?”

“하루에 한 3리터 정도요. 좀 더 마실 때도 있고요.”

“뭐 다른 것도 안 먹는데 물이라도 넉넉하게 마셔야지.”

“왜요. 제가 얼마나 좋은 걸 먹는데요. 막 옛날에 사냥꾼들이 사슴 잡아서 피 먹었다는 소리를 듣고 끔찍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막 이해가 된다니까요.”

밝게 말하는 유미였지만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피식- 웃어주고 아까 만난 생존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그럼 확실히 무장을 했다는 소리네요.”

“그래. 괜히 부딪쳐서 힘쓸 필요 없으니까 그쪽은 어지간하면 다니지 말자.”

“네. 그래요. 근데 생존자들이 맨홀로 다닌다면서요. 우리도 맨홀로 움직이면, 그 사람들과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하수구 안에서 만났을 때가 문제였다. 우리를 일반인으로 보고 그냥 지나갈 것인가? 아니면 약탈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유미 혼자서 다닌다면 괴물로 보고 공격을 하겠지만 나와 같이 다닌다면 사람으로 착각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쪽에서 그냥 지나간다면 좋겠지만 폭발적인 매력을 숨길 수 없게 된 유미를 보고서 그냥 지나가리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낙관적인 추측이었다.

“뭐 지금은 변종 사체도 있으니까 몸에 냄새 좀 묻혀서 다녀보지 뭐.”

“우-으- 그 냄새는 싫은데.”

“매일 돌아다닐 것도 아니고. 귀찮아지는 걸 피할 수 있다면 그 정도쯤은 참아야지. 이번에 바짝 밖에 나가서 덤프트럭이나 트레일러트럭이라도 하나 구했으면 좋겠다. 그거 개조해서 캠핑카처럼 만드는 거야.”

덤프트럭보다 트레일러트럭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뒤에 있는 트레일러를 집으로 개조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트럭자체에 침대에 냉장고 건조기에 커피 메이커까지 완전 구비되어있기 때문에 나쁘지 않았다. 충격에 대비할 수 있는 외장만 더 붙여준다면 도시를 빠져나가는데 충분해 보였다.

“트럭에 침대랑 냉장고에 옷 건조기도 있다고요? 와 신기하네요. 밖에서 보면 되게 작아 보이던데 그런 건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비싼 트럭은 억 단위가 넘어갔다.

“그냥 아는 놈이 있었어.”

회사에서 잘린 뒤 유럽트럭인가 하는 게임을 접하고는 ‘그래 차라리 혼자 일하는 트레일러트럭 운전수가 최고다.’했던 놈이었다.

“그렇구나. 그런 트럭이 한 번에 딱 걸렸으면 좋겠어요.”

처음 계획은 올 해를 이곳에서 안전하게 보낸 뒤, 내년 쯤 도시에 저장된 식료품이 바닥이 나고 좀비들이든 변종이나 빗치들이든 독이 오른 생존자들과 거하게 충돌하기 전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 생존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니, 계획을 앞당겨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 세력도 아닌 생존자들이 저렇게 집단을 이뤄 움직인다는 것은 간과하기 힘든 일이었다.

대화의 내용을 떠올려보면 단순한 약탈자 그룹 같은 느낌은 아니었다. 단순한 약탈자들이라면 연장자에게 존대나, 반 존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벼운 의견 충돌과 말다툼이 자유롭다는 것도 그런 추측에 힘을 실어줬다.

“좋은 트럭이 한 번에 걸리면 좋지. 여유 있게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하수구로 이동하면 일반좀비의 이목을 속일 수 있다는 걸 안 생존자들은 점차 활동영역을 넓힐 것이다. 활동영역이 넓어진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물자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말했고 이는 생존자들의 생존능력이나 전투능력이 급속도로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붉은 색 지역에는 가지 않았지?”

“네.”

“경계지역은?”

“음- 생존자의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좀비들만 가득했거든요.”

“일단 거기는 그렇게 두고...”

말을 할까 말까 살짝 고민하던 유미가 살짝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데 느낌이 별로 안 좋았어요.”

“응? 기분이 나빴다고? 혹시 미도나 그쪽 느낌이었니?”

“비슷한데 뭔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좀 그랬어요.”

빗치들 사이에 영역이나 서열 다툼이 있었다면 그쪽에서 미도의 체취가 없어지고 유미의 체취가 흐르는 걸 보면 찔러볼 가능성이 있었다. 툭-툭-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쏟아지네요.”

“끙- 골치 아프네.”

“아- 그러게요.”

뒤늦게 내 한숨의 의미를 깨달은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마라고 하더니 마른장마인가 싶었다. 그렇게 장마철이 지나가나 싶었더니 아열대기후에서 내린다던 스콜처럼 비가 쏟아져 내렸다. 굵직한 빗방울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져 내렸다.

일기예보라도 있었으면 괜한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 오전 내내 맨홀 변종의 체향을 바르고 다녔던 것이, 호우로 씻겨내려 갈 것이다. 다시 냄새를 묻히고 다닐 생각을 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근데 꼭 우리가 떠나야 해요?”

굵게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유미가 속마음을 살짝 비췄다. 영역-이곳은 우리 영역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유미였다. 그냥 느껴졌다. 나와 유미는 피로 이어졌고 그건 목숨과 목숨이 이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이곳에 있기에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유미는 강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적 인간이라는 말처럼. 인간은 도구를 만들고 도구가 있을 때, 육신의 한계를 넘어선 일들을 할 수 있기 마련이었다.

기술자들이 섞여 있는 생존자들이라면 다양한 함정을 만들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냉매를 담긴 통을 변종이나 빗치의 인근에서 폭파시켜 일순간 열려 버리는 방법을 쓸 수도 있고 미노와 미도가 했던 불바다 함정도 더 정교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들은 변종과 빗치를 잡기위해 더 강한 함정을 파고 성공하면 할수록 점차 집단의 규모를 키워갈 것이다. 커지고 강해지는 만큼 생존자들은 더 넓은 지역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만들고자 할 것이다. 생존자들과 함께 할 생각이 아니라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유미는 나를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새댁이 신혼집에 뭔가 애착을 보이는 것처럼 유미는 이곳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내가 그녀의 말뜻을 파악한 것처럼, 유미 역시 내가 떠나자고 한 의미를 대략적으로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나가야 하냐고 묻는 것은 나가고 싶지 않다는 내심을 보여준 것이었다.

“우리가 가지 않으면 피를 많이 볼 거야.”

“우리가 떠나면 피를 보지 않을까요?”

본질적인 질문이었다. 이 세상에서 피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마냥 어리게만 봤던 유미는 어느새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목숨을 건 싸움들이 그녀를 성숙하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의외인데, 네가 그런 말을 다하고.”

“어머. 그거 지금 절 무시한 거죠? 철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죠?”

손에 피를 묻히기는 쉬워도 묻은 피를 지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묻히지 않아도 될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너도 알다시피 한 번 손을 쓰면 확실하게 써야 해.”

“꼭 싸워야 하면 어쩔 수 없잖아요.”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전 아저씨만 있으면 되요.”

*

최소한 1년 이상 이곳에 있으려고 했던 생각이 급격하게 바뀐 이유는 불안 때문이었다. 서서히 커지는 불안? 처음 위층을 떠올렸을 때 느꼈던 불안이 떠올랐다. 막연한 불안감을 견디지 못하고 위층으로 올라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그 불안감을 무시했다면? 약탈녀들을 처음부터 전부 죽였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불안을 해결하는데 누군가의 목숨이 담보로 잡혀야 한다면 굳이 여기서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낮에는 헬기가 옥상을 수색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고 밤에는 변종이나 빗치가 침입할지 몰라 불안했다. 불안은 그렇게 조금씩 내 곁을 배회하며 조금씩 다가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떠나면 이 모든 불안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강원도 두메산골 동해가 보이는 그곳으로 가면 이곳처럼 안전하고 생활하기 곳을 찾을 수 있을까? 찾는다고 하면 그곳에서는 피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

유미는 싱글벙글 옷을 빨아 건조기가 있는 방에 널고 있었다. 저 행복한 표정을 조금 오래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영역을 지키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하더라도 예상하지 못한 경우가 생길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다. 트럭은 처음 계획대로 준비해놓고 그 외의 것을 대비하기로 했다.

“영역 표시를 해둔 것은 지금내리고 있는 비 때문에 씻겨 내려갈 거야.”

“?”

“맨홀 변종의 냄새를 계속 쓰려고 했었는데. 힘들게 됐다.”

냉장고에서 꺼낸 맨홀 변종의 체향은 특유의 냉장고 느낌이 감돌았다. 얼었다가 더운 날씨에 해동이 되면서 자연스러운 체향이 아닌, 이질적인 체향으로 변해있었다. 갓 잡은 생선은 특유의 싱싱한 느낌이 살아있기 마련이다. 그런 싱싱한 생선을 냉동실에 얼렸다가 뜨거운 여름 자연 해동시키면 갓 잡았을 때의 싱싱한 느낌과는 다른 비린내가 풍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어? 그럼 어떡해요?”

“이곳을 우리의 영역으로 하고 싶어 했지?”

유미가 배시시 웃었다.

“그럼 이제 우리의 흔적을 남기자.”

“네~”

기다렸다는 것처럼 대답하는 유미였다.

*

내 몸에서는 변종의 체향이 나오지 않았다. 유미의 말대로라면 뭔가 한 없이 좋은 느낌이라고 하는데, 뭔 말인들 못할까? 본래 콩깍지 기간에는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었다.

“정말이란 말이에요.”

“그래. 음. 믿어.”

믿는 것과는 별개로 일반좀비들은 나를 보통사람으로 인식하고 덤볐다. 나를 변종으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반해 유미는 달랐다. 확실히 그녀의 체향은 빗치와 같거나 유사한 것으로 보였다.

“네가 영역표시를 하면 주변에 있던 놈들이 찔러볼 가능성도 있어.”

“방법이 있으니까 뜸들이시는 거죠? 그래서요?”

“맨홀 변종의 영역까지 네가 흔적을 남기면 주변에 접해있던 놈들은 둘 가운데 하나로 생각할 거야.”

맨홀을 죽일 정도의 강자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이 영역을 차지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거나.

“우리는 변종이든 빗치든 무조건 이쪽으로 온다고 생각하고 함정을 파야해. 지도를 보면 총 8군데 정도가 함정을 파기 적당한 장소야.”

미도와 미노가 남기고 간 지도를 이렇게 유용하게 쓰게 될 줄 몰랐다. 미노의 발화능력을 사용하는데 유리한 장소였지만 우리가 쓰기에도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넘어오는 것들은 일단 함정으로 몰아넣고 체력을 깎아 먹은 뒤. 마무리를 해야겠지.”

“이번에는 제가 잡을 테니 그거 막 쓰지 마세요. 얼마 남지도 않았다면서.”

유미는 내가 스펙을 쓰는 것을 걱정했다.

이성그룹 Twin-Star Corporation

스펙을 편하게 쓰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USB에 나온 설명과 전혀 다른 효과와 부작용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효과는 더 좋았다.

30~40%가량의 신체능력 향상이라고 했는데 맞아보니 증가폭이 더 컸다. 체감한 바로는 족히 50%가 넘게 느껴졌다. 그걸 두 번 연속해서 맞았으니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처음 맞아서 100%에서 150%가 됐고, 여기에 다시 한 번 50%를 하면, 150%의 50%인 75%가 더해져 총 225%가 된 꼴이었다. 결국 본래보다 두 배 이상의 신체능력을 쓸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지금보다 두 배 이상 강해진 운동능력은 맨홀 변종을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로 막강했다. 그 정도의 강함이라면 빌딩에서 만났던 빗치나, 함정에 빠졌을 때 만났던 빗치,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던 그것과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점은 8~12시간 지속되는 효과가 아니라 1시간 남짓 정도라는 점과 칼로리 소모가 급격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때려죽인 것을 그 자리에서 뜯어먹어가며 싸울 일이 아니라면 40분 길게 잡아야 1시간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 뒤에는 식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을 확률이 높았다.

식욕과 파괴욕구 그리고 살의와 성욕이 뒤섞여 이성을 갉아먹었기 때문에 전투력은 높아졌지만 냉정한 판단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가장 큰 단점이었다.

내가 죽인 신입을 떠올려 보면 그 차이는 더 극명했다. 신입 놈이 보였던 광기나 살의가 스펙의 영향이라고 가정해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놈은 냉정함을 잃지는 않았었는데 나는 반쯤 미쳐 날뛰었다. 고함을 지르고 감정에 휩싸여 수백이 넘는 좀비들에게 달려들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다.

“그거 쓰지 않은 면 안 돼요?”

“스펙?”

“네. 스펙이요. 그거 별로 안 좋아 보이던데. 그냥 제가 잡을게요.”

“......”

“저 혼자도 잡을 수 있어요. 보세요! 얍!”

유미가 팔뚝에서 알통을 만드는 것처럼 척-하고 자세를 잡으며 헤헤 웃었다. 자기가 나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여유였지만 맨홀과의 싸움에서 유미의 약점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근육이 가진 출력? 맨홀 놈과 싸웠을 때 그다지 밀리지 않았다. 근소한 차이로 밀린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오차 범위 내였다.

순발력? 더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 않았다. 속도도 마찬가지 느리지 않았다. 하지만 종합적인 힘에서 보자면 유미가 확연하게 밀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힘은 필연적으로 질량과 관계됐기 때문이다.

유미의 근력이 변종과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역설적으로 체중 차이가 절대적 차이를 만들었다. 체격과 무게에 있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유미가 변종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결국 꼼꼼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의미고, 나도 싸워야 한다는 소리였다. 유미 혼자서 맨홀급 변종을 상대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안 돼. 너 혼자 싸우는 건 무리야. 지금 이 상태로는 나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맨홀 놈이 다른 변종을 먹고 섭식진화를 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유미에게 마지막 정리를 맡겨두기는 위험했다. 다음에 만날 놈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섭식진화를 무한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맨홀 변종만큼 혹은 그 보다 더 강한 놈이 나올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만약 그런 놈과 마주치게 된다면? 지금 상태로는 위험했다.

“맞다. 스펙도 이제 3번 분량 밖에 없다면서요?”

내가 강경하게 나오자 유미가 스펙의 분량을 가지고 걸고 넘어졌다. 스펙까지 맞고 싸우는 게 불안해 보였나 보다. 하지만 스펙을 쓰지 않고 언제까지 버틴다고 보긴 힘들었다. 이곳을 지키려면 스펙이 필요했다. 아니면...

본능적으로 눈길이 냉동실로 향했다. 변종 시체를 넣어둔 냉동실을 보자 반사적으로 침이 고였다. 고개를 흔들며 미친 생각을 지워버릴 것처럼 털어냈다.

“후- 그래. 그래서 우선 스펙을 더 구해야겠어.”

내가 고개를 흔들며 말하자 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펙을 더 구한다고요? 거기로 다시 간다는 거예요?”

“일단 그쪽으로 가야 스펙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말이야.”

“설마 혼자 가겠다고 하시는 건 아니겠죠?”

“이번에는 혼자 갔다 오는 게 낫겠어. 저번과 달리 하수구를 이용해 움직이면 금방 도착할거야.”

유미가 펄쩍 뛰었다.

“안돼요. 그 근처에는 그것들이 있는데 거길 혼자 간다고요?”

“일단 좀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봐.”

국지성 호우가 끝나고 나면 하수구가 범람할 것이다. 하수처리 펌프가 작동되지 않고 있으니, 일부구간 허리까지 하수가 차오른 곳도 있을 것이다. 그런 열악한 환경을 생각해 보면 비가 멈춘 뒤 며칠 동안은 생존자들도 하수구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반 생존자들과 충돌할 위험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변종과 빗치 그리고 다수의 일반좀비들이었다. 비가 내리는 것과 범람한 하수를 이용한다면 이들의 후각을 피해 움직이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러니까요. 하수 냄새와 비를 이용하면 빗치들도 저를 알아채지 못하는데 왜 혼자가려고 하냐고요.”

“하수 냄새는 비를 맞으면 지워지기 마련이야. 그리고 싸우다 보면 체향이 짙어지잖아. 혹시라도 교전하게 되면? 상처를 입거나 의식을 잃게 되서 체향을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정말 위험해진단 말이야.”

“그래도 혼자 보낼 수는 없어요. 같이 가든지 아니면 가지 마세요.”

*

유미를 설득하는데 제법 오래 걸렸다. 유미와 내가 같이 자리를 비운다면 그 동안 영역을 뺏길 수 있었다. 냄새가 지워진 빈 영역에 뭐가 얼마나 들어설 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미도와 미노가 장악하고 있던 지역은 유인되는 사람들만 잡아먹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 생존자들이 많았다.

인간을 노리는 놈들이 빌딩 주변의 지역을 노릴 것이 분명했다. 스펙이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전투보조 밖에 안됐다. 실제로 싸우고 관리하는 것은 유미가 해야 할 상황이었다. 제대로 싸우려면 스펙이 필요했다.

스펙이 가진 부작용이나 그와 관련된 데이터도 필요했다. 그걸 가지고 있을 만한 장소는 한 군데 밖에 없었다. 스펙 주사기에 찍혀있는 선명한 마크, 주사제에도 같은 마크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스펙 주사기를 만지작거리자 유미가 걱정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TSC 본사까지 가실 생각인가요?”

유미의 눈동자가 선뜩한 빛을 냈다.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저번에는 본사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사단이 났다.

함정이 있던 구역 전부를 통제할 수 있는 기업이라면 확실히 TSC( Twin-Star Corporation 이성그룹)밖에 없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러니까 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는 상황. 하지만 이 마크와 USB에 있던 자료의 내용으로 보면 대량으로 스펙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그곳 밖에 없었다... 내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유미가 재차 다짐을 받았다.

“약속하세요. 안 간다고.”

“그래. 안 가.”

스펙 주사기를 꽉 쥐자 뽀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사기에 찍힌 뚜렷한 마크, 두 개의 별이 뫼비우스의 띠를 순환하는 것처럼 그러진 로고가 선명했다.

무장 세력이 이성그룹과 연계되어 있다면 혼자 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내가 필요한 것은 스펙이었지 진실을 파헤치는 게 아니었다.

“진짜 약속 했어요.”

“혼자 거기까지 갈 생각은 없으니까.”

말을 살짝 얼버무리자, 유미가 여차하면 다시 뜯어 말릴 기세를 뿜어댔다.

“그래. 그래. 약속했어.”

두 손을 들고 약속했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걱정 모드로 전환하는 유미였다.

“위험하면 그냥 오세요.”

“알았어. 걱정 말고. 맨홀 놈의 영역까지 전부 표시하고 여차하면 함정에 넣어서 터뜨려버려 혼자 싸우려고 하지 말고.”

“제 걱정은 마세요.”

유미가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으로 날 배웅했다.

*

한 번 시작된 집중호우는 제법 번갈아가며 내리기 시작했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감안하면 다른 변종이나 빗치가 이곳에 관심을 갖기까지 최소 일주일가량 여유가 있어보였지만 2~3일 이내로 돌아오기로 했다.

당일치기도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넉넉하게 여유를 갖고 무장 세력의 함정을 흔든 뒤 스펙과 무기를 챙기기로 했다. 가능하다면 보급품을 모아둔 곳을 파악하면 더 좋았다. 이왕이면 한 번에 왕창 터는 것이 유리했다.

큼지막한 방수배낭을 짊어지고 내려간 하수도는 예상대로 엉망진창이었다. 허리가 아니라 가슴까지 푹 빠지는 곳도 있었고 말라 비틀어졌었던 대변이 둥둥 섬처럼 떠 있기도 했다. 오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후각과 시각이 어느 정도 마비가 될 때까지 뭔가 집중해서 생각할 거리가 필요했다.

스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때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피했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하자 생각도 변했다. 스펙이 필요하고 스펙의 성능이나 부작용을 자세히 알아야 할 상황이 되자, 생각은 자연스럽게 스팩에 찍힌 이성그룹을 들고 파기 시작했다.

“이성그룹이라.”

이성그룹은 회장의 재임기간이 20~25년 이내라는 짧은 재임기간을 갖는 것으로 유명했다. 정력적으로 일할 나이에 회장에 취임하고 늦어도 65세 무렵에는 후계에게 물려주고 은퇴를 하는 풍조는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독특한 특징이었다. 100년 무려 100년이라는 시간동안 번창한 그룹이 이성그룹이었다.

100년의 세월동안 끊임없이 사세를 확장한 그룹이 이성그룹이었다. 친일논란, 세습논란, 정치자금, 탈세혐의와 같은 굵직굵직한 위기에도 이성그룹은 건재했다.

정치계와 경제계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성그룹은 수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언제나 승승장구했다.

자국민에게 바가지 씌워 수익률 높이는 꼼수기업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도 다른 대기업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있다는 관행론을 대세론으로 만들어 비난여론을 잠재울 정도로 저력 있는 기업이었다.

‘이성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

‘한국이 망한다면 먼저 이성이 망한 뒤일 것이다.’

그만큼 압도적인 인지도와 지지도를 가진 기업이 이성그룹이었다. 4대 회장 재임 시, 첨단 전자제품과 디스플레이 메모리 반도체에 집중하던 이성그룹은 각 분야에서 세계 1~2위를 달성하는 기염을 토했다.

축적된 기술력을 바탕으로 생체전자공학, 의용전자공학 분야에 투자- 생체전기로 작동 가능한 마이크로칩을 만들고 대량 생산하는데 성공하는 쾌거를 이뤘다.

모두가 세계최대 전자회사라고 칭송할 무렵 새로 5대가 취임하면서 엄청난 선언을 했다. ‘앞으로 그룹의 미래성장 동력을 의료제약/생명유전공학/생명보험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성생명보험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 시작했고. 이성그룹이 운영하는 종합병원과 연계한 제약회사들의 주가도 덩달아 요동쳤다.

갑자기 그룹 주력 산업을 의료제약/생명유전공학/생명보험으로 하겠다는 파격적인 발언을 왜 했을까?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는 보이기 시작했다.

앞주머니에 들어있던 스펙이 딱딱하게 느껴졌다. 이성이 본격적으로 투자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투자하기 시작했다는 소리였다.

생명공학과 유전공학 기술을 가진 소규모 회사들을 공격적으로 인수 합병하기 시작한 이성그룹경제연구소는 어느 날 갑자기 ‘유전자 다양성과 경제적 효과.’라는 다소 동떨어진 연구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유전자적으로 유사한 유전자로만 유지가 되고 있는 한국에 유전자적 자극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경쟁력 있고 건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1천 만 단위의 외국인들을 적극 수용해 다(多)유전자 다(多)문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다소 기묘한 보고서였다.

당시에는 다양한 유전자 풀의 확보를 주장하는 보고서라는 말도 있었고 임금을 낮추려고 하는 자본가적 탐욕의 소산이라고 말하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최소한 10년 전에 이성그룹은 뭔가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뭔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약/유전공학 분야로 주력사업을 바꿨으며 유전자관련된 보고서를 낸 것이었다.

USB에 있던 내용이 떠올랐다. 한신·아와지 대지진(阪神・淡路大震災, はんしん・あわじだいしんさい), 속칭- 고베 대지진은 1995년에 일어났었다.

그 여파에 대한 내용을 이성그룹이 알고 있었다면?

갑자기 그룹 주력 산업을 바꾼 것도 이해됐다. 그렇게 본다면 유전자 다양성이라는 말은 그냥 우연히 나온 말이 아닌, 특수한 연구결과를 반영한 내용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게 뭘까?'

USB에 나온 참여 기업 목록에 이성그룹이 있었다. 이성그룹 하나만 참여했을까? 이성그룹 하나만 알고 있었을까? 이성그룹은 다른 재벌, 언론, 정치, 법조인들과 끈끈한 혼맥으로 얽혀있기로 유명한 그룹이었다.

이런 혼맥을 놓고 보면 재벌들이나 정치인, 법조계, 언론인들은 사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당시 대기업들의 움직임들이 손에 잡히는 것처럼 보였다. 너도나도 의료/제약/보험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대기업들 관련된 뉴스가 떠올랐다.

“후- 빌어먹을 새끼들... 그나마 원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 필요한 건 스펙이다. 다른 생각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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