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역 (1)
언제부터였을까? 처음에는 그저 믿을 만한 사람으로 키운다는 생각이었다. 생존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살인을 종용하기도 했었고, 답답하게 굴 때는 네 갈 길로 가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유미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위태로운 시간을 함께 겪고,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면서 이런 관계가 되고 말았다. 맨홀 변종에게 붙잡히기 직전, 내 대신 몸을 날려 막는 모습에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말 그대로 뒤를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나보다 자기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서슴없이 몸을 던질 수 있을까? 입장을 바꿔서 생각했을 때, 나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 생각 때문에 나 역시 스펙을 밀어 넣을 수 있었는지 몰랐다.
믿음에는 믿음으로 사랑에는 사랑으로 응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진대, 평화로운 세상에서도 쉬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태연하게 저질러버린 우리였다.
“하아- 큭-”
나지막한 한숨이 나왔다. 픽-웃음도 나왔다. 이것이 인연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한 두 번은 우연적인 사건이라고 넘어갈 수 있지만 세 번은 아니었다. 만약 세 번 마주한다면 그건 운명일지 몰랐다. 세 번. 서로의 목숨을 붙잡고 지켜주며 버텨온 횟수.
어쩌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운명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이렇게 무너진 세상에서 함께 살고, 함께 죽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도둑놈 소리를 듣겠군.’
할 사람이 남아있다면 말이다. 잊고 있었던 씁쓸함이 입맛을 쓰게 만들었다.
“우웅-헤헤-”
꼬물꼬물 거리며 옆에 누워있는 유미의 모습을 보니, 저절로 웃음도 나오고 아련하기도 하고 착잡한 기분도 들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어림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그제야 내가 변한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은 모습. 기억에 남아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후- 다행이다.”
혼잣말을 해봤다. 제대로 발음이 나왔다. 잠복기간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시간이 걸릴 수도 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이대로라면 크게 문제가 될 조짐은 없어 보였다.
꼬르륵
밤새 피를 빨렸기 때문인지 수분도 부족했고 에너지도 부족했다. 배부른 암사자 마냥 행복하게 늘어져 자는 유미를 두고 재빨리 칼로리 보충을 했다. 식이섬유가 중요하다는데 제대로 된 채소를 먹지 못한지 오래였다.
식이섬유 하니까 변비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대변도 며칠에 한 번 꼴로 나왔다. 변비라고 하기에는 애초에 변의 양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마도 소화능력이 좋아졌거나 뭔가 변한 듯싶었다. ‘소변은 그나마 비슷하게 나오는데.’ 고개를 갸웃했지만 에너지 효율이 좋아졌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많이 먹은 만큼 싼다면 그것도 재앙이었다.
풉- 어쩐지 실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삼키고 옥외 테라스로 나가자,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며 7월의 쨍쨍한 햇살이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멀리 햇살 뒤로 검은 연기가 뭉클대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다. 골목 하나를 통째로 태웠기 때문에 인근 건물로 불이 번졌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불타오르고 있는 게 당연했다.
“역시... 번졌나?”
봉화연기처럼 굵게 올라간 연기를 좌표 삼았는지 헬기 두 대가 화재 장소를 향해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미도와 미노가 있던 빌딩에서는 대형거울이라도 사용해 반사판이라도 만들었는지 태양빛을 열심히 반사시켜 헬기가 이동하는 방향으로 구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쯧- 난감하군.”
저절로 고개가 저어졌다. 미도와 미노가 있었다면 무장 병력은 손쉬운 상대였다. 헬기에서 중기관총 탄통이 폭발이라도 한다면? 로켓포가 유폭되거나 헬기 조종사의 얼굴에 불을 질러버린다면 그걸로 끝이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둘 모두 죽은 상황, 저 신호를 보고 인근의 생존자들이 모이기라도 한다면? 풍부한 물자를 두고 피 튀는 싸움이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우웅- 일어났어요?”
어느새 조르륵 다가와 뒤에서 껴안는 유미였다. 등판에 얼굴을 비비대는 느낌이 따뜻했다.
“아- 맞다 몸은 좀 어떠세요? 어제 많이... 그러니까...”
밤 새 미친 듯이 피를 빨아먹은 것이 떠올랐는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안절부절 못하는 유미였다.
“일어나자마자 챙겨 먹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너는 괜찮고?”
“네? 네 괜찮아요. 아으- 죄... 죄송해요. 일찍 일어났어야 하는데.”
괜찮다는 뜻으로 유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다시 빌딩을 살폈다. 저쪽 사람들은 예전처럼 미끼 역할에 충실하고 있었다.
“저기- 그것들이 살던 빌딩이네요.”
“그래.”
“흐-응... 저 사람들 아직도 낚시질 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것 같네. 미도와 미노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유미는 입을 꾹 다물고 뭔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
헬기에서 내린 병력은 다시 총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인근에 있던 좀비들을 소탕했다. 맨홀 변종의 영역이었기 때문인지 다른 변종이나 빗치와 교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일반좀비라고 하더라도 물량에는 장사가 없는지 아니면 가져온 탄이 떨어졌는지, 다시 돌아가는 헬기였다.
“그냥 가네요.”
“아마도 변종이나 뭔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 온 것 같아.”
무장 세력은 변종과 빗치가 없어 보이자 적당히 손대중하고 철수한 듯 보였다. 불길은 인근으로 더 번지지는 않고 있었다. 불길과 연기를 보자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유미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요. 그 맨홀 변종 시체는 갑자기 왜 타오른 거죠?”
마지막에 갑자기 맨홀 변종의 몸에 불길이 피어올랐다.
“음... 아니다. 확실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무슨 생각인데요? 네?”
맨홀 변종이 미노를 먹었다. 공교롭게도 그 뒤에 불꽃이 붙었다는 것은 미노의 능력인 발화능력인자를 흡수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유미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죽거나 죽음의 위기에 가까우면 급격한 진화를 이뤘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둘을 합하면 얼추 비슷한 그림이 그려졌다.
미노를 먹고 진화의 요건을 흡수한 상황에서 나에게 맞아죽을 상황에 처하자 급격한 진화를 일으켰다. 며칠 혹은 몇 달에 걸쳐 일어나야 할 변화를 단시간 내에 만들려고 하다 폭주해 불이 붙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네에? 그럼 변종이 다른 변종을 먹고 더 세질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맨홀 변종도 예전에 맨홀 뚜껑을 던졌을 때보다 훨씬 강했으니까 말이야. 어쩌면...”
맨홀 변종은 편의점에서 생존자 그룹에게 난타 당했던 변종을 잡아먹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미노까지 잡아먹었다. 둘을 잡아먹고 어느 정도 강해졌다면 그런 방식으로 계속 강해지는 것이라면 이 승자는 인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죽은 것을 먹는다.’와 ‘살아있는 것을 죽여서 먹는다.’ 사이에는 채울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게 된다면 변종과 빗치의 숫자는 서서히 감소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변종과 빗치가 소수만 남게 된다면? 소수는 토벌이 가능했다. 미사일도 있었고 최악의 경우 소형 전술핵을 떨어뜨리는 것도 가능했다.
지금처럼 여러 곳에 퍼져 있을 때는 쓸 수 없겠지만... 변종과 빗치의 숫자가 줄어 몇 마리 남지 않게 된다면 충분히 써 볼만 한 방법이었다.
“아.! 그럼 그냥 시간이 흐를 동안 조용히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
“네?”
유미는 물음표를 동동 떠올렸다.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야. USB의 자료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서로 싸워 감소가 된다면 무장 세력들이 악착 같이 추적해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겠지.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숫자가 줄 테니까.”
“하지만 그래서 죽이려고 할 수도 있잖아요. 막 서로 잡아먹고 센 놈이 생기면 감당이 안 되니까...”
“흠... 그럴 수도 있지. 그래서 아직은 모르겠다고 한 거야.”
서로죽고 죽이고 먹고 먹혀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진 변종이나 빗치가 탄생하면 어떻게 될까? 정말 재앙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걸 미연에 막으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 찝찝한 건 사실이었다.
“뭐라고 단정하기 힘든 걸 고민하는 건 여기까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을 할 필요도 있고 말이야.”
맨홀 변종이 사라졌고, 미도와 미노까지 빠졌으니 거의 한 개 동에 가까운 면적이 공백이 됐다. 변종이나 빗치가 없이, 동면좀비와 일반좀비만 남은 비교적 안전한 영역이 된 것이다. 이걸 이대로 둔다면 다른 지역에 있던 변종이나 빗치가 이 영역을 노리고 밀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었다.
“영역표시를 할 수 있으면 좋은데 말이야.”
“영역표시요?”
“그래.”
변종은 어떻게 영역표시를 했을까? 체향? 체향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어느 정도 표시했을까? 곰 같은 것들을 나무에 등을 비벼 자기의 영역임을 표시하곤 했다. 맨홀 변종도 그런 방식으로 영역을 표시했을까? 가능했다.
“일단 맨홀 놈의 시체를 가지고 한 바퀴 돌아야겠어.”
“그거 죽은 거 알아채면 어떻게 하려고요.”
“설마. 짐승들도 구별하지 못하는데 변종들이 구별하겠어?”
사냥꾼들이 곰 가죽이나 호랑이 가죽으로 표시를 해 사냥감의 이동경로를 제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니까 변종의 시체라도 충분히 통할 만 했다.
“지도 좀 보자.”
“가져올게요.”
즉석에서 생각한 것이지만 제법 괜찮은 생각 같았다. 제일 큰 위협은 변종과 빗치였다. 그것들이 계속 안으로 몰려든다면 그걸 처리하겠다고 무장 세력이 오갈 것이고 결국에는 또 엮일 것이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강원도 동해바다 쪽으로 넘어갈 계획인데 힘들게 싸우고 다닐 필요가 없었다. 조용히 내년 정도까지만 이곳에서 살다 넘어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여기요.”
“아- 고마워.”
미도가 가지고 있던 지도였다. 빌딩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영역이 파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그 두 배는 될 법한 맨홀 변종의 영역이 주황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맨홀 변종의 영역은 미도와 미노의 영역을 반쯤 둘러싼 것처럼 표시되어있었다.
“이쪽은 붉은 색으로 표시됐네요? 뭘까요?”
유미가 지목한 부분은 아래쪽이었다. 북북 신경질적으로 표시한 붉은색 표시였다.
“붉은색 하면 일단 위험이라고 봐야 하는데. 빗치의 영역일까?”
신경질적으로 박박 긁어놓은 것을 보면 꼭 유미를 보고 신경질을 냈던 모습이 떠올랐다.
“네?”
“뭔지 모르겠지만 그쪽 부분으로 굵게 표시를 한 것을 보면 좋은 건 아니겠지. 일단 그쪽은 주의하도록 하자.”
“알겠어요.”
계획은 간단했다. 변종의 영역 경계 부분에 변종의 시체를 가지고 가서 전부 비벼놓고. 미도와 미노가 있던 영역에는 유미가 흔적을 남기기로 했다. 그렇게 영역표시를 해놓으면 어지간해서는 오지 않을 것이다.
“표시했는데도 오면 어떻게 해요.”
“영역 표시를 했는데도 온다면 죽여야지. 이제 여기는 우리 영역이니까 말이야.”
“헤헤-”
우리 영역이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유미가 살살 웃었다.
*
맨홀 변종의 시체를 끌고 움직이는데 반사적으로 입에서 침이 살짝 고였다. 스펙의 부작용에서 벗어났음에도 그 잔재는 끈질겼다.
“후- 이거야 원.”
이래서는 스펙을 또 쓰기가 꺼려졌다. 두 번을 연달아 썼기 때문에 그럴까? 남은 스펙은 3회 분량이었다. 유미는 스펙 주사기에서 새어나온 향 만 맡아도 몸서리를 쳤다. 그런데 스펙 맞은 내 피는 왜 그렇게 잘 먹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벅벅- 한쪽에 맨홀 놈의 시체를 북북 긁어대고 다른 쪽으로 이동했다. 싸울 때는 몰랐는데 변종의 몸에서는 심하게 냄새가 났다. 뭐라고 할까 노린내라고 해야 하나? 육식동물이 가진 체향 비슷한 것이 제법 강하게 나서인지 일반좀비들이 근처로 다가오지 않았다.
움직이니까 죽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일반좀비들이라 구별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가만히 피 냄새를 풍기며 한 곳에 있었다면 변종의 시체를 먹겠다고 달라붙었을 것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일반좀비들이 다가오지 않으니 돌아다니는 게 편했다. 하수도를 타고 돌아다녔으면 피곤했을 텐데, 다행이었다.
한 맨홀 변종의 영역으로 표시된 지역을 얼추 돌면서 흔적을 남기고 이제 맨홀 놈이 영역을 확장하려고 한다는 방향, 펜트하우스 쪽으로 가는 방면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명의 시체를 갈가리 찢어둔 방향이었다.
“괴물 놈...”
나지막한 목소리가 코너 건너편에서 들렸다. 분노에 착 가라앉은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보란 듯이 찢어 논 겁니다.”
“좀비들이 손을 대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에게 경고한 겁니다.”
“이 개 새끼를...”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합니까? 수방사라도 가서 무기를 챙겨야 한다니까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새끼야. 수방사는 털려도 진작 털렸다.”
“씨발 어쩌자는 건데? M-1이나 칼빈으로 싸워? 지난주에 터지는 거 못 봤어?”
“총을 쏴서 어쩌겠다는 건가? 좀비들이 총소리를 듣고 몰려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럼 괴물 놈과 식칼로 싸우란 소립니까?”
“아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으면 싸워야죠.”
“식량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살며시 발걸음을 돌렸다. 생존자들과 엮여서 좋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