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역정리 (1)
이렇게 보니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졌다. 미녀의 입이 고무줄처럼 길게 찢어지다니 실시간으로 호러영화를 보는 기분이었지만 덤덤하게 대꾸했다.
“둘이 붙어도 맨홀을 이긴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날 끌어들였잖아. 아닌가?”
“그래서?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당연히 위험요소를 최소화 하자는 거지.”
“그래서 우리의 능력을 까발려라?”
혹시나 싶어 찔러봤는데 확실히 이성적이었다. 이 정도로 생각이 있다면 일반적인 사람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었다. 아니, 20대로 보이는 나이를 생각해 보고 그 또래의 여대생들이 생각하는 패턴을 고려해 본다면 어떤 면에서는 더 낫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게 극단적으로 표현하지 말고, 나보고 성격 급하다고 하더니 만만치 않은데?”
내가 실실 웃으며 고개를 흔들자 미도 역시 길게 찢어진 살벌한 미소를 거두고는 본래의 그윽한 미소로 바꿨다. 길게 벌어졌던 미소가 정상적으로 변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영화의 특수효과처럼 보였다. 서로 미소를 주고받는 것을 봤는지 멀리서 유미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수신호를 보냈는데도 안절부절 뭔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유미였다.
“능력이야 뭐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은데, 맨홀을 우리 둘이서 잡기는 힘들지 않겠어? 저기 유미까지 합해 셋이 싸운다면 모르겠지만...”
유미 이야기를 하자 저절로 인상을 쓰는 미도였다. 확실히 유미가 적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미도 역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머리가 좋으니 내 앞에서는 연기할 법도 한데 그대로 감정을 내비칠 만큼 유미가 싫다는 소리였다. 단지 얼굴 한 번 봤을 뿐인데 이 정도였다.
“네 표정을 보니 유미와 같이 싸우기는 힘들 것 같고 어쩐다? 유미가 맨홀의 퇴로를 막는 걸로 하자고 했지?”
“그래.”
“그럼 너와 나 둘이서 맨홀을 정면에서 막아야 하는데, 가능하겠어? 싸워봤다며?”
“가능해.”
미도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맨홀을 정면에서 막는다? 미도와 싸워본 바로는 미도는 그렇게 강한 빗치가 아니었다. 지금의 유미가 작심하고 공격하면 5분 이내에 때려잡을 수 있어 보였다. 그런데 둘이서 맨홀을 막는 게 가능하다?
“나도 싸워봤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맨홀 뚜껑 한 번 막고 정신을 차리지 못했거든. 근데 그 놈을 우리 둘이서 막자고? 차라리 유미보고 막게 하고 우리 둘이 퇴로를 차단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건 안 돼.”
“어째서?”
“맨홀은 가장 먼저 미노를 죽이려고 할 건데, 그걸 저것에게 맡긴다고?”
변종은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빗치처럼 머리를 굴리지는 않더라도 매복을 하거나 함정을 파고 덫을 놓는 등 그런 정도는 무리 없이 하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원거리에서 불꽃을 일으키는 미노를 나중에 공격할 리 없다는 소리였다.
맨홀의 고추에 불을 질렀던 미노이니 만큼 미노를 보면 미친 듯이 달려들 텐데, 그걸 유미가 막아설 지 어떻게 아냐고 했다.
“그래서 너와 꼬맹이는 세트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저쪽도 이쪽과 마찬가지로 경계를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게 당연했다. 어차피 변종과 변종끼리도 영역 다툼을 하고 빗치가 변종을 처리하고 영역을 뺏으려는 마당에 이쪽을 맥없이 믿는다고 했으면 그게 더 이상할 것이다.
“생각은 알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둘이서 막는 건 불가능하다고 보이는데.”
“아니, 맨홀 놈이 던지는 것을 한 번만 막을 수 있으면 가능해.”
“한 번?”
“그래 한 번.”
“흐음- 작전이 있단 말이지? 말해봐.”
“일단 놈은 중량이 무거운 걸 던지길 즐겨하는 놈이야. 놈과 싸울 장소에는 미리 맨홀 뚜껑을 없애 버리고 도로표지판 같은 것들도 전부 잘라서 치워버리는 거지.”
“그리고?”
“미노가 놈을 태울 때까지 시간을 끌면 되는 거야. 나 혼자서는 놈을 막을 수 없지만 둘이서 막는다면 충분할거야.”
“놈이 하수구로 도망친다면?”
“하수구로 도망치지 않겠지만 만약 그쪽으로 도망친다고 하면 더 좋지. 하수구를 통째로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면 되니까 말이야.”
작전은 간단했다. 나와 미도가 맨홀을 공격하고 막는다. 미노가 그 동안 맨홀을 태워 재생능력을 무력화 시키면, 나와 미도가 재생능력을 상실한 맨홀을 처리한다는 것이었다.
“놈의 재생능력을 무력화 시키는데 얼마나 걸리는데?”
“최소한 5분...”
“5분? 미쳤군.”
“우리 둘이서 공격하면 더 빨리 끝낼 수 있어.”
“생각해 보지.”
영 아니었지만 일단 운을 떼자 미도가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날 붙잡듯이 말했다.
“사실 말이야. 더 확실하게 끝내는 방법이 있어.”
“뭔데?”
“그 방법에는 미끼가 필요해.”
미끼를 바라보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는 미도였다.
*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유미가 도도도 달려왔다. 힐끔힐끔 뒤를 살피며 불퉁한 표정을 짓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아저씨 저것들과 같이 움직일 필요가 있어요?”
‘사람을 잡아먹는데...’라고 웅얼거리는 유미였다. 여러모로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유미는 빗치에 가까웠고 나는 변종에 가까웠다.
“유미야. 나도 마냥 기분이 좋은 건 아니야.”
“그럼 저것들과 힘을 합할 필요가 없잖아요. 저것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지 어떻게 알아요? 믿을 수 없어요.”
어쩌면 빌딩에서 빗치에게 당했던 것 때문에 더 적대적일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믿을 수 없다는 말에는 동의했다. 맨홀을 죽이고 난 뒤 이 근방을 장악한다면 그 둘이 어떻게 나올지 몰랐다. 어쩌면 맨홀을 죽이데 성공한 뒤 곧바로 나를 노릴 가능성도 있었다.
“대비를 해야겠지. 나도 저들을 100%믿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알겠어요.”
이미 대비해둔 패가 있었다. 쓰지 않으면 좋겠지만 쓸 때가 온다면 써야 했다.
“컨디션은 정상으로 돌아온 거 맞지?”
“네.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아요.”
“좋아 오늘부터 훈련이다.”
“아저씬 상대가 안 될 텐데요.”
“뭐야? 이것이!”
“히히-”
*
이번에 앓고 난 뒤에는 정말 단단하고 질겨진 유미였다.
어지간한 타격은 씹어 먹고 무시했다. 대충 몸으로 때워가며 덤벼들었기 때문에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딘가의 전투민족도 아니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 강해지고, 아프고 나면 강해지고 나도 그냥 아플 걸 그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무 세게 했나요?”
“아니 잘했어.”
방패 째로 팔이 꺾이고 척추가 반으로 접히는 경험은 다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빈약한 재생능력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씩 효율적으로 변했다고 해야 하나?
내 재생속도는 유미의 급속재생에 비해 턱없이 느렸지만 나름 효과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마도 워낙 자주 부러지고 찢어지다 보니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변한 재생능력은 이랬다. 팔과 척추가 부러지면 예전에는 동시에 재생됐다. 척추가 부러지면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척추와 팔이 똑같이 동시에 재생이 됐기 때문에, 둘 모두 재생이 되기 전까지 하반신 마비 상태로 버둥거려야 했다. 척추와 팔을 똑같은 비중과 속도로 재생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팔과 척추가 동시에 부러지면 척추부터 최대한 빨리 재생이 됐다. 둘 동시에 재생하는 것보다 중요한 척추부분이 먼저 재생됐기 때문에, 비교적 빨리 재생이 됐고 그 결과 금방 기동력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그래봐야 또 접혔지만...”
“히히- 그래도 정말 좋아지셨어요.”
“위로하는 거냐?”
“아니에요. 진짜로 좋아졌어요. 어제 보다는 오래 버티셨다니까요.”
“끄응- 됐다.”
유미와의 대련은 점차 격해졌다. 확실히 한계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 상대가 있는 것은 좋았다. 내가 아무리 격하게 달려들어도 유미가 전부 받아줄 수 있었기 때문에 금방 늘었다. 몇 년은 운동해야 얻을 수 있는 흘리기 같은 기술도 써먹을 수 있을 정도로 체득하는 데 성공했다.
*
그렇게 거의 보름 동안 훈련을 하면서 미도와 몇 차례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 나와 이야기를 했을 때는 어느 정도 신뢰를 했던 미도가 유미를 보고 난 뒤에는 완전히 돌아선 느낌이었다. 미도는 유미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날 경계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유가 있을 텐데. 그쪽으로는 이야기 자체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 보여준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적잖이 힘들었다. 힘들게 이야기를 끝내고 돌아오자 유미가 도도독 달려들었다.
“그래서 맨홀은 언제 잡기로 했어요?”
“모레, 놈이 사냥터를 정한 것으로 보이면 내가 유인하기로 했어.”
“예? 어째서요?”
“변종이나 빗치들은 대략적으로 상대방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아저씬요? 아저씬 뭐가 느껴지세요?”
“나? 아니?”
“그럼 변종은 아저씨를 느끼는데 아저씬 변종이 어디있는지도 모르고 있다는 소리잖아요?”
레이더가 있는 놈과 없는 놈이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소리였다.
“그건 아니고. 뭐랄까 나는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해. 변종 특유의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그래도요. 육안으로 봐야 할 상황이면 누가 가도 상관없잖아요.”
“그렇지는 않아. 꼬맹이가 나를 보고 인상을 쓰기는 하는데, 그 놈도 다른 변종과 내 느낌이 다르다고 하더라고 꼬맹이도 변종을 느낄 수 있다면, 맨홀도 꼬맹이를 느낄 수 있을 지도 몰라. 그렇게 따지면 맨홀을 유인하는데 내가 제격이야.”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다면 어쩔 수 없었다.
“꼬맹이가 맨홀거기를 태웠다면서요? 멀리서 꼬맹이를 보면 발광을 하며 쫓아오지 않을까요? 아저씨보다 꼬맹이가 더 확실한 미끼일 텐데요?”
“일리는 있는데, 꼬맹이는 신체능력이 워낙 떨어져서 힘들어.”
꼬맹이도 변종이니 사람보다는 월등한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보다도 못한 신체능력에 지구력이나 순발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유인하겠다고 앞에서 알짱거렸다가는 순식간에 따라잡힐 게 분명했다.
“그럼 그... 빗치가 유인하면 되잖아요.”
“그쪽도 그렇게 이야기 하더라고. 유미 네가 유인하면 어떻겠냐고...”
“칫- 그냥 우리끼리 해요. 네?”
“생각해 보기는 했는데. 맨홀과 싸운 이야기를 들어보니 둘이서 상대하기는 쉽지 않은 놈이야.”
“제가 잡을 수 있다니까요.”
“놈이 도망치지 않는다고 했을 때나 그렇지. 놈이 도망치면? 지구력 사냥이라고 하게?”
오래된 사냥방법 가운데 하나가 지구력 사냥(Persistence Hunting)이었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들보다 순발력이 좋았다. 순발력이 좋고 힘이 좋다는 것은 그만큼 칼로리 소모가 크고 힘을 쓴 뒤, 휴식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였다.
이에 착안 사냥감이 에너지를 보충하고, 휴식을 취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계속 압박해 탈진시키는 사냥 방식이 지구력 사냥이었다. USB에 나온 변종 사냥 방식도 넓게 보면 지구력 사냥에 해당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유미나 내가 쓰기는 힘들었다. 우리도 변종이나 빗치처럼 폭발적인 에너지 소모를 통해 힘을 냈기 때문이다. 놈이 도망치면 그걸 추격하는 우리들도 에너지 소모가 많았다. 놈이 도망치며 사람을 잡아먹고 체력을 회복하면? 오히려 우리가 역으로 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도 아저씨가 미끼가 되는 건 반대에요.”
유미는 강경하게 내가 미끼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맨홀 놈은 사냥을 즐기는 놈이야. 그러니까 적당히 자극하고 도망치는 나를 잡기위해 달려들 거야. 잘만 움직인다면 녀석의 에너지를 소모시킬 수도 있어. 녀석은 먹지 못하지만 난 이게 있잖아.”
물에 탄 근육보충제를 흔들며 말하자 유미가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저번처럼 다른 사람들을 노리면 어떻게 해요”
“그럴 가능성이 적은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조심해서 유인할 테니까...”
물론 더 큰 먹이가 나타나면 그쪽으로 가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또 생존자 그룹과 엮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래도.”
“그만. 계속 시간만 끌면 이야기가 반복되기만 해. 걱정해줘서 고맙다.”
유미는 아주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도 계속 중얼거리는 유미였다. 말이 유인이지 맨홀 변종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는데, 유인하다 잡히면 어떻게 할 거냐고 하더니 급기야 그딴 계획을 세운 빗치부터 때려잡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것을 뜯어 말려야 했다.
*
맨홀을 잡기로 계획한 당일 장비를 점검하며 말했다.
“퇴로를 혼자 차단하고 있어야 할 네가 더 걱정이야.”
“제 걱정은 마세요.”
유미가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획 돌렸다. 정말 너무 많이 변해서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나마 말투가 표정이 그전과 비슷해서 유미다 싶었지, 외모만 보자면 같은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맨홀이 네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면 절대 무리하지 말고 발만 묶어. 괜히 힘 뺄 필요 없어. 위험을 자초할 필요도 없고. 혼자 잡는다고 절대 욕심 부리지 마. 알았지?”
“알겠어요.”
유미가 내 목에 걸린 막대기를 한 번 쓰다듬으며 말했다. 신입의 목에 걸려있던 것이었다. USB과 같이 걸려있을 때는 인식표나 열쇠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던 유미가 폭-품에 안겼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보는 모습. 가슴이 약간 뭉클했다.
“제 걱정하지 말고 부르세요. 바로 갈게요. 알았죠?”
“내가 해야 할 말은 네가 하네.”
유미가 살포시 웃으며 보청기처럼 생긴 리시버를 귀에 꽂고 먼저 움직였다. 굴비처럼 꿰인 동그란 바벨이 차가운 금속음을 내며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