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75화 (75/261)

열기 heat (1)

자신들이 사육당하는 것을 알고 있다? 알면서 구조신호를 보냈다?

나가게 해달라고 탈출을 도와달라고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이 아니라면?

이곳은 물자가 풍부했다. 여러 병원들이 모여 있었고 성형외과와 산부인과가 있어 병실에 들어갈 식자재도 넉넉하게 저장되어 있었다.

수술하다 중간에 정전이 될 것을 대비한 발전기도 따로 있었다. 일반 빌딩보다 훨씬 풍족한 공간에서 먹을 게 없는 밖으로 도망치겠다고 구조신호를 보냈을까? 아무리 물자가 많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들고 나갈 수 있는 분량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괴물을 죽이는데 도움을 구하려고 신호를 보냈다는 소린데. 이들은 전혀 싸울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싸울 생각도 없으면서 도와 달라? 모순이었다.

‘멍청하게 걸려 놓고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여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긴 그놈들의 창고라네.’

나이든 한의사의 말이 겹쳐졌다.

‘창고?’

그냥 창고일까?

권총과 석궁 그리고 둔기를 보고도 단발머리 여자와 늙은 남자의 얼굴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것들에게 이 무기가 별로 소용없다고 생각한다는 소리였다. 그러니까 이런 무기로는 여기에 있는 놈들에게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굳게 닫힌 비상구 문 너머, 비명소리가 마지막 절규와 함께 뚝 끊겼다. 그 소리에 흠칫-몸을 떠는 사람들이었다. 단번에 죽이지 않고 왜 저렇게 비명을 지르게 한 거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고? 협박? 아니면 길들이기?

이곳을 그것들의 먹이창고라고 생각하면, 그것들이 먹는 것은 사람. 식량을 보존하기 위해서라면 전부 죽이는 것보다 살려두는 것이 장기보존하기 좋았다. 이곳의 풍족한 식량과 물자가 그것들이 가져온 것이라면?

‘아? 생포해 갔네요.’

‘또? 보관했다 잡아먹기라도 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마트 인근에 자리 잡은 변종을 관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마트에 있던 놈도 사람을 죽이지 않고 생포해 갔었다. 마트에 있는 놈이 적극적으로 나와 사냥을 하는 놈이라면, 이곳에 있는 놈은 뭘까?

나는 구조신호를 보고 들어왔다. 구조신호를 보기 전에도 이 건물을 본 적 있었다. 간호사 복장을 한 여자들이 밖의 좀비가 불타오르는 것을 창문을 열고 구경하고 있던 건물이 바로 이 빌딩이었다.

좀비가 불타는 것을 구경했던 생존자들은 이곳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특히 남자들이라면 여자 간호사들이 모여 있는 이 건물에 관심을 보일 것이 분명했다. 좀비를 불태운 것이 사람이 아니라면?

“하아-”

한숨이 나왔다. 변종과 생존자, 생존자와 변종.

내가 이곳으로 올라오고 난 뒤 아래층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는 그걸 의미했다. 키우던 것 가운데 하나를 잡는 소리였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가 끌려갔을 것이다.

“제비를 뽑았나?”

내 중얼거림에, 얼굴 근육을 딱딱하게 굳히는 나이든 남자와 움찔-몸을 떠는 단발머리 여자였다. 한 시간이 넘도록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낸 것은 그런 이유였다. 아래층에 있던 사람이 죽고 난 뒤, 다음 차례가 정해져 있던 것이다.

일반적인 생존자였다면 계단을 타고 올라갔을 것으로 잠긴 이곳에 들어오지 못하고 이 아래층에 남은 한 사람과 마주치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놈들에게 잡혀갔을 것이다. 내가 이곳까지 한 번에 올라온 것이 변수였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불확실한 도움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대신 죽어줄 사람.

“큭큭큭큭-”

허탈과 분노가 새어나오는 웃음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 단발머리 여자의 목이 눈에 들어왔다. 필사적으로 신호를 보냈던 여자의 목이었다. 그 하얀 목선이 화이트 초콜릿처럼 녹아내릴 것만 같이 보였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을 물어뜯듯 움켜쥐었다.

손바닥과 손가락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만 같았다. 내 뜨거운 손에 닿은 단발머리 여자의 피부가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야들야들한 피부의 감촉이 손바닥에서 맴돌았다.

“여긴 그냥 창고가 아니라 덫이구나?”

컥- 끄윽- 목울대에서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한 손에 목이 잡힌 여자가 허공에 들려 버둥거렸다.

“너흰 사람을 낚을 미끼고.”

도움을 구하려고 신호를 보냈던 것이 아닌, 대신 희생할 사람을 찾았던 거라니. 웃음이 나왔다. 애초에 싸울 생각이 없는 자들이었다.

아마도 다음에 먹힐 차례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아래층에 있던 자들이 하나씩 잡혀 먹힐 동안 이곳에서 넉넉한 식량을 까먹으며 포동포동 살찌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들의 차례가 다가오자 부랴부랴 밖에서 대신 죽을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감정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전신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도와달라고 해서 뭣도 모르고 온 사람들을 넘긴 거지? 그렇지? 너흰 미끼니까 말이야.”

우극-저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킥킥킥-그렇지~죽인다~”

일그러진 판소리에 추임새를 넣듯, 저쪽에 앉은 사내가 웃음과 탄성을 같이 내고 있었다. 신경에 거슬렸다.

“지... 진정하게... 일단 진정하고 말로 해야지.”

단발머리의 목을 움켜잡은 내 팔을 붙잡고 만류하는 나이든 의사였다. 그는 매달리다시피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젊은 사내가 인사를 했다.

“소개가 늦었지만 보다시피, 그 아저씨는 한의사. 나는 피부과. 킥킥킥. 그 여자 그러다 죽겠는데? 그냥 죽일 거야? 아깝지 않아?”

킥킥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이름 소개도 아닌, 자기 전공을 말하는 남자였다.

“하-아까워? 이 상황에서?”

잘도 그런 소리가 나왔다. 확 거꾸로 치솟던 피가 훅 식는 느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해? 여기에 빗치가 있나? 그래서 피부과가 나에게 언질을 준 걸까? 혐오감과 분노 실망감으로 뒤범벅된 감정이 빠르게 진정됐다.

목을 움켜쥐었던 손을 펴자, 30cm정도 허공에 떴던 단발머리 여자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눈이 반쯤 뒤집힌 여자가 기침을 하며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커어억-흐윽-켁... 흐으으윽.”

“괜찮나? 괜찮아- 괜찮으니까 천천히. 숨쉬고...”

“흐윽-크윽- 흑흑흑”

“그래 천천히 됐어.”

한의사가 눈물콧물을 줄줄 흘리며 버둥거리는 여자를 보살피는 동안, 건들거리는 피부과 의사에게 다가갔다. 피부과 의사는 내가 다가가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내가 뻔히 보고 있는데도 양손으로 옆에 있는 두 여자의 가슴을 하나씩 움켜쥐고 주물럭거리며 킥킥대고 있었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당신 뭐야?”

“나? 피부과 의사라니까. 킥.”

이름을 말하지 않는 남자였다. 흉흉한 분위기에서 젖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있다니 제정신이 아니거나 아니면? 페로몬? 피부과 의사가 나에게 힌트를 준 건지 아니면 그냥 맛이 간 놈인지 아닌지 찔러봤다. 표정을 갈무리하고 피부과를 가만히 노려봤다.

“이 상황에서 뭐하는 짓이지?”

어쩌면 이 여자들 사이에 빗치가 숨어있을지도 몰랐다. 피부과 의사가 뭔가 내게 신호를 보낸 것인지 아니면 페로몬의 영향으로 발정을 일으킨 건지 확인하기 위해 짐짓 화난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내 화난 목소리에 아랑곳 하지 않고 피부과는 여유롭게 행동했다. 내가 자신을 보는 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긋하게 하던 일을 계속했다. 피부과 의사가 주물럭거리는 대로 하얀 젖무덤이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 뭉개지기를 반복했다.

“귀가 먹었나?”

“킥- 귀가 먹긴... 심신의 안정을 찾고 있는 중이지... 왜? 하고 싶어?”

발정이라면 이렇게 정상적으로 대화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그 놈들을 떠올렸어도 마찬가지였다. 바지를 벗고 껄떡대기 바빴는데, 피부과는 행동이 너무나 느긋했다.

빗치가 숨어있다면 긴장했을 텐데 그런 기미도 없었다. 혹시나 페로몬일까, 빗치가 있을까 싶어 촉각을 곤두세웠던 것이 서서히 풀어졌다.

페로몬이 아니라면. 여자들도 관음증 비슷한 건가? 낯선 남자가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데 자기 가슴을 주물러 대는 걸 그냥 둔다는 것은 이상했다. 게다가 두 여자 모두 무저항이었다. 그러고 보니 피부과 의사가 옆에 끼고 있는 두 여자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그러니까 몽롱하게 늘어진 것처럼 보였다. 뒤쪽에서 앉아있는 여자도 마찬가지. 피부과 의사의 곁에 있는 세 여자 모두 좀 이상해 보였다.

“마약? 설마 마약인가?”

내 표정에서 혐오감이 스치자 그걸 알아챈 피부과 의사가 다시 킥하는 소리를 내며 설명했다.

“킥-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프로포폴[propofol] 좀 줬어. 아 프로포폴이라고 하면 잘 모르지? 하얀 주사... 우유 주사 말이야.”

“수면제?”

“수면 효과도 있고 겸사겸사 다양한 효과가 있어, 제법 유명한 약인데? 모르나? 이게 제법 효과가 좋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제정신으로 얼마나 버티겠어? 안 그래? 잠이라도 푹 자고 좋은 꿈이라도 꿔야지.”

마이클 잭슨을 죽게 했다는 소문이 나도는 약이었다. 프로포폴은 수면유도제, 진정제, 안정제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잠을 푹 자게 만들고 미약한 환각효과까지 가지고 있어 신경정신과적인 효과가 있다는 말이 나도는 주사제였다.

“미친놈.”

“사람하나 죽일 듯이 그래놓고 나보고 미쳤다니 너무한데? 난 이 아가씨들이 해달라는 데로 해준 것 밖에 없다고.”

저쪽에서 따로 떨어진 두 여자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앞치마를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미용실 직원 같았다. 그 옆에는 간호사복을 입고 있는 여자였는데 둘이 친구 같았다.

내가 쳐다보자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것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움찔 움츠러드는 두 여자였다.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이 이 변태 피부과 밖에 없다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그것들이 뭐지? 변종인가? 아니면 빗치?”

내 말에 가슴을 주물러대던 피부과의사가 눈을 반짝였다.

“변종이라니? 빗치는 뭐지?”

“하아- 여기 언제부터 있었지? 뉴스도 안보고 살았나?”

“킥-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여자들의 가슴에서 손을 떼고 내 말에 집중하는 피부과 의사였다. 내게 목을 잡혔던 단발머리 여자와 한의사도 궁금했는지 내가 설명하는 것을 멀리 떨어져서 듣고 있었다.

*

변종과 빗치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하자 피부과 의사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여자가 빗치가 되고 남성이 변종이 된다? 그 말대로라면 여기에 있는 것들은 빗치 하나와 변종 하나야.”

“변종과 빗치가 같이 있다고?”

처음 듣는 소리였다. 빗치에게 있어 변종은 그냥 종마나 마찬가지였다. 기본적으로 변종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변종과 빗치가 의사소통할 방법이 없었다. 혹시 그 변종이란 게 나 같은 타입일까?

말을 할 수 있는 변종이라면?

“그 변종이라는 게 말을 할 수 있나?”

피부과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잘 모르겠고. 저 양반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싶은데? 그 변종이란 거, 저 양반 외손자거든.”

피부과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한의사의 눈가에 있는 핏줄이 꿈틀하고 움직였다.

*

사태가 발생되고 종합병원이나 중대형 병원의 응급실은 미어터졌다. 병상은 환자들로 가득 차 얼마 지나지 정상적인 진료가 불가능해졌다. 병원이 마비된 것이었다. 그 때 결혼한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한다. 외손자가 고열로 정신을 잃었다는 소리였다.

계엄이 선포된 직후라 한의사는 외손자를 위해, 문을 닫았던 한의원으로 다시 나왔다. 약탕기와 다양한 한약재가 있었고 꼭 한약재가 아니더라도 이곳에는 다양한 병원들이 있었기 때문에 약을 구하기 쉽다고 생각해서 딸에게 외손자를 데려오라고 했다.

처음에는 고열을 동반했기 때문에 해열에 초점을 뒀고, 의식을 잃었을 때는 링거를 통해 영양보충을 해줬다고 한다. 죽을 줄 알았던 외손자의 상태가 호전되자 딸과 한의사는 기뻐했다. 하지만 비극은 그렇게 시작됐다.

“세진이 그놈이. 제 어미를 죽일 줄이야.”

한의사가 말을 하다 말고 부르르 떨었다. 변한 손자가 딸을 잡아먹었다. 자기 엄마를 잡아먹은 외손자는 한의사를 보곤, 배부른 미소를 지으며 너무 배가고파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한의사는 기절했다고 한다.

“말을 했단 말이죠?”

“그래... 똑똑히 들었네.”

자신이 엄마를 잡아먹은 것도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기절한 한의사를 그놈은 죽이지 않았다. 배가 불러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외할아버지인 한의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말까지 하는 변종이라. 영 불길했다.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초등학교 2학년... 9살이네...”

유미의 배다른 여동생이 변해서 된 그것과 비슷한 나이였다. 우연일까? 우연이든 우연이 아니든 그걸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하나는 그렇고 다른 하나가 문제군요? 다른 하나에 대한 걸 아는 분 계십니까?”

피부과가 킥-하며 대답했다.

“내가 알지. 그건 성형외과 환자였어. 성형수술을 받고 부작용이 생겨서 입원했던 환자인데, 어느 날 상태가 점점 나빠져서 종합병원으로 옮기니 마니 했었는데, 사태가 터졌지.

당장 종합병원이나 큰 병원들이 마비됐으니 이곳 병실에서 추이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게 됐거든...

뭐 상황이 점점 심각해져서 여기 갇혀 지내게 됐고 그 여자는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그냥 방치됐어. 자기 살기도 팍팍한데 누가 신경을 쓰겠어?

킥- 그랬는데... 죽었다고 생각했던 그 여자가 멀쩡하게 일어나더니 태연하게 사람을 잡아먹더라고.”

“그 모습을 직접 봤습니까?”

성형외과 치과, 피부과는 종합병원처럼 서로서로 도와주는 형식으로 협진을 했던 것 같았다. 성형외과 환자가 입원하는 동안 피부과에서는 피부 관리를 해주고 그랬다고 했다.

“불행하게도. 바로 옆에서 봤지.”

“근데 어떻게 살았죠?”

“그게 왜 살려줬는지 나야 모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