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기 fever (3) ●
지금 필요한 건 양약이고 주사제인데. 하필 한의사라니. 아니, 한의학에서도 해열하는 방법은 많았다. 한약도 있었고 침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한의사십니까?”
“......”
“한약이라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열을 내리는 혈 자리라도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큼-큼- 헛기침을 하는 나이든 사내였다.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시간만 끈다면 의미가 없었다.
건네줬던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그냥 약국으로 가기로 했다. 처방전이 필요한 전문의약품을 구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두 사람의 행태로 볼 때 시간이 얼마나 걸 릴 지 몰랐다. 상황이 괜찮았다면 천천히 대화를 하면서 거리를 좁혔겠지만 시간이 없었다.
“도시를 빠져나갈 생각이라면 장마가 끝난 뒤, 며칠 후 하수구를 이용해서 움직이는 걸 추천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미련 없이 올라왔던 엘리베이터 통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자 두 사람이 날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리게... 이대로 나갈 수 없네. 아니, 가는 것은 위험해.”
여자와 나이든 사내가 동시에 날 말렸다.
나가는 게 위험하다고?
“예? 그게 무슨 소리죠?”
내 질문에 여자가 가까이 다가와 다급하게 말했다.
“그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이라뇨?”
이곳에는 생존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변종과 빗치가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반 좀비들은 올라오면서 봤지만 전부 타버린 시체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건 죄책감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그것들이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어요.”
확인해야 했다.
“정확하게 말해보세요 뭐가 있다는 소리죠? 뭐가 어떻게 막는다는 거죠?”
“아니요. 그...”
“제대로 말하세요. 여기서 뭐하고 있던 겁니까?”
“여긴...”
윽박지르듯 소리를 지르자, 여자는 말을 못하고 우물우물했다. 흐느끼는 여자를 다독이던, 늙은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그놈들의 창고라네.”
“창고?”
무거운 침묵이 켜켜이 쌓였다.
*
“그러니까 이곳은 그놈들이 사람들을 가둬놓고 꺼내먹는 창고라는 소리군요.”
“......”
“......”
나이든 사람은 환갑에 가까운 나이로 보였다. 어쩌면 더 많을 지도 몰랐다. 한의사 가운으로 보이는 생활한복은 오랫동안 세탁을 하지 못했는지 후줄근했다.
끈질기게 신호를 보냈던 여자는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간호사들은 대부분 어깨까지 오는 긴 머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특이하게 이 여자는 단발머리였다. 그것도 상당히 짧은 쇼트 커트였다.
누군가 미용기술이라도 있는지 짧게 쳐진 단발은 금방 자른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1층에 미용실도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내가 쳐다보자 단발머리 여자는 고개를 시선을 회피했다.
“전 시간이 없습니다. 약을 구해서 나갈 겁니다.”
"어떻게 나갈 생각인가? 놈들이 아래에서 지키고 있을 텐데?"
"날 막는 다면 싸워야지요."
"......"
권총과 석궁, 그리고 메이스를 늘어 놓고 검검을 했다.
내가 싸울 준비를 하자, 늘어 놓는 무기를 가만히 살피던 나이든 사내가 묻지도 않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
“군인인 줄 알았네... 총소리가 났거든.”
총소리가 나서 군인 인줄 알았다? 좋게 말하자면 개소리였다. 내 침묵이 껄끄러웠던지 사내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했다.
“총소리가 나서 주변을 살폈더니 반사되는 빛이 있더군. 쌍안경 같았어, 그래서 군인들이 쌍안경으로 수색을 하는 걸로 생각했지... 군인이나 경찰 그런 사람인 줄 알고 말이야.”
유미도 나도 쌍안경으로 주변을 살폈으니 쌍안경의 반사광을 보고 총기를 가진 사람이거나 군인, 경찰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소리였다.
“응답이 없어서 오지 않을 줄 알았어요.”
단발머리 여자도 거들었다.
“그래. 오지 않을 줄 알았지... 반응이 없어서 쌍안경을 어디서 구한 일반인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늙은 사내와 단발머리 여자가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고열과 혼수상태를 반복하는 유미가 아니었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몸에서도 열기가 피어올랐다 식는 증세가 반복되지 않았다면 확실히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뭐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문제는 약을 구해 돌아가는 것이었다.
“됐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놈들의 시선을 끌어주기만 하더라도 쉽게 싸울 수 있었다.
'인원은?'
젊은 남자 하나와 여자 셋은 저쪽에서 끼리끼리 놀고 있었다. 저기 여자들 가슴을 주무르고 있는 비교적 젊은 남자도 가운을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의사 같았다. 이 상황에서도 가운을 입고 있다니 참 대단해 보였다.
그렇다면 남자 둘에 여자 넷... 여섯인가? 한쪽 구석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여자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여덟 명이었다.
“전부 8명인가요? 남자 둘에 여자 여섯?”
“그렇다네.”
남자의 숫자가 적지만 병원의 특성상 의사 하나에 간호사 4~5명인 경우가 많으니 그렇게 따진다면 비슷한 비율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빗치 아니면 변종이겠지만, USB에 나온 말대로 바이러스를 이용한 강제 진화, 강제 변이라면 예상하지 못한 괴물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었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했다.
“그것들은 뭡니까? 뭔지 봤습니까?”
내 말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작게, 비상계단 쪽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고음의 비명 소리가 애처롭게 발버둥 쳤다.
아래층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 비명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강박적으로 양옆에 있는 여자들의 가슴을 주무르던 남자가 반쯤 실성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킥- 뭐긴 뭐겠어?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지 킥-킥-”
늙은 사내와 단발머리 여자가 몸을 미미하게 떨었다. 저 구석에 따로 있는 두 명의 여자들도 자기들끼리 손을 붙잡고 있었다. 괴물이라는 소리, 그것들이라는 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은 말 그대로 피식자의 모습이었다.
두려워하는 모습 속에 숨겨진 짙은 무력감이 느껴졌다.
싸움도 도전도 응전도 탈주도 없는 체념.
그 모습은 그저 사육당하는 자의 모습이었다.
도축될 날만 기다리는 그 체념한 눈빛이 싫었다. 무기력한 가축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습은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투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은 무죄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싸우고 견뎌서 쟁취하는 것이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내 배를 찔렀던 인아와도 같이 생활 할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는 상황에서 대놓고 싸웠던 그녀의 모습에서 내 모습을 봤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뭔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사육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앉아서 여자 가슴이나 주무르고 있으면서 나갈 수 없다니, 웃기는 소리였다. 짜증나는 마음을 다잡고 정보를 모았다.
“그놈들이 몇 마리나 있습니까?”
“하나... 아니 둘이네.”
하나라고 말하는 순간 여자가슴을 주무르던 사내가 킥-소리를 냈다. 그 기괴한 웃음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둘이라고 고쳐 말하는 나이든 남자였다. 살짝 얼굴을 씰룩이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생긴 건 어떻게 생겼습니까? 인간형입니까?"
"끄응- 그.. 그래.."
단발머리 여자와 나이든 사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상정외의 괴물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빗치 아니면 변종이라는 소리였다.
뭐든 두 마리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USB에서 봤던 정보에 따르면 변종들은 개별적인 영역을 가진 것처럼 움직인다고 했었다.
동면좀비들이 합공을 하거나 일반좀비들이 떼로 몰려드는 특징이 있는 것처럼 변종들은 주로 혼자 움직인다고 했었다. 그러니까 변종들은 일종의 맹수처럼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혼자 다니는 것을 즐겨한다고 했었다. 놈들이 변종이라면 두 마리가 한 곳에 있을 경우는 드물었다. 뭔가 특수한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면 편의점에서 마주친 변종, 맨홀뚜껑을 던졌던 놈도 처음에는 혼자였다. 우리보다 사람들이 많이 있는 편의점 쪽으로 갔던 것이 떠올랐다. 그 둘이 처음부터 합공을 했다면 편의점을 털던 생존자들을 전멸시키는 것도 순식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다.
일반좀비를 움직이는 것도 그랬다. 편의점에서 처음부터 싸웠던 놈은 일반좀비를 이용하지 않았다. 혼자 날뛰었다. 하지만 맨홀 뚜껑을 날렸던 놈은 일반좀비를 이용해 서서히 포위망을 구축하면서 공격을 했다. 변종이라고 하지만 그 둘은 확연하게 달랐다.
둘이라면 변종이 아니라 빗치일 가능성이 높았다. 빗치라면 더 힘들었다. 상대가 뭐든 하나도 벅찬 상대였기 때문에, 각개격파 밖에 답이 없었다.
놈들과 싸울 생각을 하자, 저절로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전의(戰意)가 온몸을 달궜다. 숨을 쉴 때마다, 후끈- 뜨거운 열기가 뿜어졌다. 전의 때문인지 아니면 이상 징후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달아올랐다.
하아- 깊게 숨을 쉬자 뜨거운 수증기가 폐를 통해 밖으로 뿜어지는 것 같았다. 해열제를 먹어야 했다.
"약국은 어디있죠?"
"정말 갈 생각인가?"
"그럼 여기서 죽치고 있으라는 소립니까?"
"......"
크릭-총알이 들어있는 리볼버가 빙글 돌아갔다. 권총을 간단하게 확인하고 허리춤에 찔러 넣었다. 그 모습을 불안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석궁에 볼트를 걸며 말했다.
“지금까지 놈들을 어떻게 막았습니까?”
“......”
단발머리 여자와 나이든 남자가 서로를 쳐다봤다.
“막은 방법이 있을 것 아닙니까?”
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비상구 입구에 바리 케이트도 없었다. 달랑 비상문이 닫혀있을 뿐이었다.
“바리 케이트도 안 친 겁니까?”
“......”
이제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설마 막을 생각도 안하고 있었다고?
“무기는? 무기는 뭘 썼습니까?”
그러고 보니 주변에 무기가 될 만한 것도 없었다. 변종이 아니라 일반좀비라도 올라온다면 앉아서 죽을 생각인가 싶었다. 아니, 처음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일반좀비들도 상당히 빨리 움직였을 때였다. 그런데 무기가 없었다.
내가 주변을 살피자, 나이든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다는 소리였다. 4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병원이니까 약은 있겠지요? 수면제라든지 신경안정제 그런 걸 써봤습니까?”
“놈들에게는 바늘이 들어가지 않아.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효과가 있을 지 미지수고.”
“해봤습니까?”
“그게...”
“놈들의 피부가 그렇게 단단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
“불은 효과가 있지요?”
불 이야기를 하자,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아래층에 좀비들이 불타죽었던데 불은 누가 지른 겁니까?”
갑자기 작게 헛기침을 하곤 입을 다물어 버리는 남자였다. 다그치는 시선을 보내자 고개를 슬쩍 돌려 내 눈빛을 피했다. 다른 사람들을 쳐다봤지만 모두 날 피할 따름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이대로 있을 겁니까?”
“......”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도와주러 왔든 어쨌든 나는 이방인이었다.
찬물을 끼얹는 것처럼 냉담한 반응. 무시하는 반응? 아니 두려워 침묵하는 반응이었다. 입을 다문 모습 속에 숨겨진 이기심은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냥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이었다.
혐오스러웠던 감정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다르다는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던 것이다.
목숨을 걸고 싸우던 신입이 떠올랐다. 그 끝없는 광기와 증오가 더 인간적이었다. 전신이 으스러진 상황에서도 기폭장치를 바라보던 사내의 눈빛이 떠올랐다.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그들은 확실히 인간이었다.
그에 반에 이들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았다.
“식량은 얼마나 있습니까?”
“......”
모두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구석에서 여자 주무르다 빨아대다 난리를 치던 사내가 쪽-소리를 내며 가슴에서 입을 뗐다. 빨갛게 달아오른 가슴을 만족스럽게 쳐다본 사내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킥- 먹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여기저기 이것저것 먹을 게 많거든. 킥- 영양제도 넉넉하게 있고 저쪽에 보면 편의점에서 가져온 것들도 많이 남았어. 물도 충분하고. 여차하면 보약이라도 먹으면 되니까 말이야. 킥-”
식량문제는 없다는 소리였다. 그럼 남은 것은 마음의 문제. 사기의 문제였다.
“언제부터 여기에 갇혀있었습니까? 계속 여기 있을 생각입니까?”
“......”
“시끄러워! 당신이 뭘 안다고 그래.”
“녀석들과 싸워야 살 수 있습니다. 힘을 합쳐 싸워야 할 것 아닙니까?”
“그만해. 소용없다고! 우린 다 죽을 거야. 죽을 거라고!”
구석에 있던 두 여자 가운데 한 명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발광에 꾹 눌러 참았던 소리가 여과 없이 나왔다.
“닥쳐! 죽을 거면 인간으로 죽어. 모가지 비틀어진 닭처럼 버둥거리지 말고 싸우란 말이다.”
“다... 당신이 뭘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뭘 아냐고? 살려면 싸워야 한다는 건 안다. 나가려면 싸워야 한다는 건 알아.”
“괴... 괴물을 보기나 했어? 어? 찢겨죽는 거 보기나 했냐고! 멍청하게 걸려 놓고서.. 입만 살아가지고 뭘 하겠다고. 뭘 알아?”
멍청하게 걸려?
“조용히 해. 그런 뜻이 아니에요.”
구석에 있던 두 여자 가운데 한 명이 발작적으로 소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여자가 입을 틀어막다 시피하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