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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73화 (73/261)

열기 fever (2) ●

열이 날 때는 체온을 낮춰주고 수분 보충에 유의해야 했다. 링거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없었다. 이렇게 고열에 시달리다 의식을 잃게 되면 수분 공급이 멈추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정맥을 통해 링거를 주사하는 방식의 수분공급 방법이 나오기 전에는 탈수현상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한 증상이었다.

“물을 마셔야 해.”

“으으으....”

힘들어하는 유미를 깨워 억지로라도 물을 마시게 했다. 2리터 생수 한 병을 통째로 마셨는데도 입술이 바싹 마른 채, 갈증을 호소하던 유미가 급기야 정신을 반쯤 놓았다.

“으... 으...”

의식을 잃는 것과 동시에 열이 펄펄 끓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고 고열?’ USB에서 봤던 내용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는 전신을 구속하고 격리조치를 취하라고 했었다. 유미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이미 한 번 앓으면서 변했기 때문에 면역이 됐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유미가 다시 의식을 찾았다. 의식을 또 다시 잃기 전에 물을 마시게 하고 피도 줬다. 어떻게든 당장 열을 내려야 했다.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아이스 팩을 만들어 체온을 식혀줬다. 링거가 없으니 식도에 관을 삽입해서라도 물을 넣어줘야 했다. 정수기에 달려있는 가느다란 관을 뽑아 콧구멍을 통해 밀어 넣었다.

“윽-윽-”

“삼켜봐. 그래.”

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또 다시 의식을 잃기라도 한다면 최소한 수분 공급을 해줄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차가워?”

힘겹게 고개를 가로젓는 유미였다.

“졸리면 자. 억지로 깨있지 말고.”

스르륵 눈을 감는 모습을 보니, 걱정됐다. 고온으로 인해 백치가 되거나 기억을 상실하거나 그런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뭔가 방법이 필요했다. 노트북을 꺼내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시 살폈다. 대증요법밖에 없었다. 해열제를 주고 수분을 충분히 보충해주는 것이 전부였다.

“해열제.”

해열제가 필요했다. 약국을 가야하나? 어지간한 약국은 털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어질- 갑자기 핑 돌았다. 유미를 돌보느라 몰랐는데 나도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잠깐 달아오르던 열기는 금방 가라앉았다.

이대로 간다면 며칠 뒤 나도 고열과 혼수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었다. 경구투약을 할 수 있은 해열제도 필요했지만, 주사제와 좌약 해열제까지 다양하게 있으면 좋았다.

의식을 잃었을 때 수분 공급을 해주기 위해서는 링거도 필요했다. 그런 것을 전부 구할 수 있는 곳은 종합병원이나 개인병원들이 모여 있는 곳이 유리했다. 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약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간호사들... 살아남은 간호사들이 있는 병원 건물. SOS 구조신호를 보냈던 그곳이 떠올랐다.

*

그냥 간다고 그들이 날 도울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내가 그들의 구조신호를 무시했듯 그들도 나를 돕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젠장.”

당연한 일이었다. 돕지 않았으니 도와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방법은 교환과 약탈 밖에 남지 않았다. 성인 남성 3배의 힘을 낼 수 있지만 내 컨디션도 정상은 아니었다. 유미처럼 고열과 혼수상태를 반복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도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했다. 도와달라고 신호를 보냈으니 저들도 원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사태가 발생한 지 4개월이 지났다. 120일이 지난 상황에서 뭐가 가장 필요할까? 식량이었다.

그리고 식량은 비교적 넉넉하게 있었다. 배낭에 유통기한이 임박한 식료품들을 쑤셔 넣었다. 비상용으로 내가 먹을 헬스보충제도 챙겨 넣었다. 상처를 입으면 재생을 하는데 단백질과 지방질이 특히 많이 소모가 됐다. 그런 점에서 단백질 보충제는 굉장히 유용한 비상식량이었다.

생수까지 챙긴 뒤, 유미에게 갔다. 유미는 다행히 의식을 차린 상황이었다.

“병원에 가서 약을 가져올 테니까 버티고 있어. 호스를 통해 물이 들어가도록 해놨으니까 불편해도 빼지 말고 있고. 알았지?”

마치 가지 말라는 것처럼 내 손을 힘없이 잡는 유미였다. 손을 꼭 쥐어줬다.

“구조신호를 보냈던 그 빌딩 있지? 병원들 많이 입주한 빌딩. 거기로 가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구조신호를 보냈다는 것은 도움이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내가 도움을 준다면 내 요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는 얄팍한 생각도 있었다. 사실 다른 대안도 없었다. 구조신호를 보냈다는 건 생존자들이 있다는 소리였고 생존자들이 있다는 소리는 좀비들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구분된 장소라는 의미였다.

생존자들이 없는 건물에 가면 변종이 있을 지, 빗치가 있을 지, 하다못해 좀비들을 수색하면서 다녀야 했다. 지금은 그렇게 수색을 하고 다닐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빨리 해열제와 링거, 주사제 같은 약들을 챙겨야 했기 때문에 생존자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

비교적 안전하다고 확인된 하수구를 통해 이동했다. 비가 왔었기 때문에 하수구는 진창으로 변해 엉망이었다. 유통기한이 임박한 음식들을 대충 밀어 넣은 배낭 끝에 하숫물이 찰랑거렸다.

헬기가 추락하고 한 시간 가까이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좀비들의 밀도가 상당히 많이 줄었지만 남은 놈들이 제법 있었다. 일반좀비 따위야 죽이고 지나가도 좋겠지만 덤프트럭이 깔아버리고 간 좀비들의 시체가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보면, 죽이는 건 놈들에게 식량을 만들어 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링-

맨홀 뚜껑을 열고 올라가자, 총소리가 나던 곳으로 움직이던 좀비들 가운데 뒤쳐졌던 것들이 배회를 하고 있었다. 하수도의 악취와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로 자국을 만들며 병원 건물로 향했다.

아마도 성형외과 쪽으로 입원한 환자들과 입원환자를 돌보던 간호사들이 사태 발생이후 갇힌 것으로 보였다. 일반종합병원이라면 좀비가 순식간에 확산됐을 것이다. 좀비들이 불타는 모습을 구경하던 여자들이 간호사들이라면 최소한 약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필요한 약만 챙겨서 나오면 그만이었다.

덜컹!

잠겨있었다. 병원건물이라 그런지 통유리로 만든 것처럼 매끄러운 외양이라 맨손으로 올라가기는 무리였다. 역시 화장실이 있는 건물 옆쪽으로 향했다. 1층 화장실 창문이 있고 도둑을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쇠창살이 박혀있었다.

쇠창살을 힘으로 뽑아 버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훅- 탄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

병원 특유의 냄새 속에 숨겨진 것은 고기가 타서 눌러 붙은 냄새였다.

소독약 냄새와 함께 풍기는 고기 탄 냄새는 좀비가 불탄 냄새일 것이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비상구를 알리는 녹색불이 꺼져있었다. 사태가 발생한지 4개월, 전기가 들어올 리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사물을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다행이었다. 건물 밖에서 몇 마리 좀비들이 낮은 소리를 내며 다가와, 두꺼운 강화유리문 안쪽을 잠시 쳐다보더니, 흥미를 잃고 몸을 돌이켰다. 고기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것을 맡고 흥미를 보였다가 지나가는 것 같았다.

일반좀비는 그냥 일반좀비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닐지도 몰랐다. 흥미를 보인다는 것은 처음 보는 현상이었다. 기존에 생각했던 것처럼 반사적인 본능만 남은 것이 아니라면? 상황이 복잡해졌다.

어쩌면 USB에 있던 자료처럼 급속도로 변형이 일어나고 있는 증거일 지도 몰랐다. 만약 일반좀비들도 진화하고 있는 것이라면?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변할 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복도 여기저기는 새카맣게 탄 좀비들이 널려있었다. 타버린 좀비를 살짝 밟아보니 파삭-소리와 함께 으스러졌다. 완전히 탄화되어 숯덩이가 된 좀비사체였다. 차라리 유미를 업고 올 걸 그랬나?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 유미를 데려오는 것은 위험했다.

덜컹- 비상계단은 잠겨있었다. 둔기로 문고리를 부수고 올라가는 방법도 있지만 이곳을 전부 수색할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엘리베이터 통로를 이용해 올라가기로 했다.

엘리베이터 문을 좌우로 벌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 구석에 사다리가 붙어있었다. 엘리베이터 와이어를 타고 20층까지 올라가야 하나 싶었는데, 사다리가 있다면 편했다.

20층 빌딩에서 구조신호가 왔던 곳은 18층이었다. 모두 세 대의 엘리베이터가 운영됐기 때문에 엘리베이터 통로는 넓었다. 엘리베이터 옆을 지나가자 안쪽에서도 탄 냄새가 나는 것을 보니 좀비가 타죽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시체가 탈 정도의 고온인데 엘리베이터가 멀쩡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면 복도에서 봤던 탄 시체들도 신기했다. 고열로 불탄 것이 분명한데 주변에 큰 피해를 내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끼드드득- 18층에 도착해 렌치를 이용해 엘리베이터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낮은 소리가 어두운 복도를 울렸다. 진입하기에 앞서 살짝 렌치로 두들겼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다시 짧게 세 번. 나에게 보냈던 모스부호를 소리로 바꿔 내보냈다.

일반좀비들이 있다면 소리를 듣고 몰려올 것이고 변종이나 빗치가 온다면 곧바로 엘리베이터 통로를 통해 탈출할 생각이었다. 사람이라면? 자신이 보낸 모스부호를 고대로 치는 것을 보고 확인하려고 할 것이다.

“거기 누구요.”

약간 나이 먹은 목소리, 50대? 60대? 그쯤 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은 음색이지만 아직 힘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영양상태가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급한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생각해보니 병원은 의외로 좋은 환경이었다. 영양제가 들어있는 링거는 식사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고, 물도 마찬가지였다. 여차하면 증류수와 생리식염수도 넉넉하게 있을 테니, 버티기 괜찮은 환경이었다. 게다가 이 빌딩에는 편의점도 있었고 군것질 자판기도 여럿 있었다.

여기에 좀비들을 불태워버릴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장기간 버틸 만한 공간이었다.

“낮에 거울로 구조신호를 보냈습니까?”

“......”

미묘한 침묵이 계속되는 것이 조금은 이상했지만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저쪽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약탈자인지 아닌지도 모를 상황이었고 따지고 보면 급한 것은 나였다.

“해열제와 링거, 영양제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

답답했다.

“좌식 해열제도 필요합니다. 그냥 달라는 게 아니라 여기 식량을 좀 가져왔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등에 매고 있던 배낭을 코너 쪽으로 내밀었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손만 슥 나와 배낭을 가져갔다. 다시 또 침묵이었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계속 끈다면 약국으로 가서 약장을 뒤지는 게 더 빠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래를 할 생각이 없다면 돌려주십쇼. 약국에서 대충 챙겨가겠습니다.”

약국으로 내려가겠다고 말하자, 침묵을 깨고 남자의 목소리가 날 불러 세웠다.

“잠깐만... 잠시만 거기서 기다려주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빨리 하세요.”

부스럭 거리며 움직이는 소리가 코너 건너편에서 들렸다. 생존자들이 몇 명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젊은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20대 중반? 후반? 목소리만 따지면 그 정도 되는 여자 목소리였다.

“구조 신호는 제가 보냈어요.”

“그래요? 여기는 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요? 다른 생존자들도 제법 있어 보이고요.”

“사실...”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천천히 다독이면서 사정을 들어줄 입장이나 상황은 아니었다.

“구조 신호를 보고 이곳으로 오기는 했지만, 제가 누구를 구조하고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당장 효과 좋은 해열제와 링거, 주사제가 필요합니다. 항생제도 필요하고요.”

“......”

여자가 우물주물거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 인내심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코너 바깥으로 가 얼굴을 들이 밀었다. 내가 코너를 돌아나오자 여자와 나이든 사내가 움찔 놀랐다.

무기를 들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두 사람은 빈손이었다.

“약이 필요합니다. 당장 여기에 없다면 이름과 어디에 있는지 장소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

“올라오면서 확인해 보니, 계단을 이용하지 않고 가는 방법도 있습니다. 조금 위험하지만 엘리베이터통로에 사다리가 있더군요. 고소공포증이 없다면 사다리로 내려갈 수 있을 겁니다. 저도 엘리베이터통로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고요.”

내가 필요한 것만 챙겨서 빨리 돌아가 봐야했다. 이곳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유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몰랐다.

“저기...”

“이런 세상이다 보니, 솔직히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네요. 제가 필요한 것만 챙기면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가 필요한 것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솔직하게 말하는 게 이렇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단발머리 여자가 주저주저하며 나이든 사내를 쳐다봤다. 나이든 사내의 눈 꼬리에 주름이 잡혔다. 그러고 보니, 나이든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생활한복 비슷하게 생긴 가운이었다. 꼭 한의사들이 입는 그런 옷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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