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이크 mosaic (1) ●
열린 맨홀 뚜껑너머 별빛이 반짝였다.
[올라간다.]
끄덕.
[이상무.]
두더지처럼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지만 별다른 위험 요소는 없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편의점을 털었던 사람들과 그들을 구조하기 위해 덤프트럭을 몰고 왔던 사람들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갔기 때문인지 근처 좀비들의 밀도가 확연하게 줄어든 상태였다.
[주의]
좀비들의 밀도가 낮아졌을 뿐, 전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우회]
움직일 때마다 하수구 냄새가 폴폴 날렸다. 확실히 추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주변에 있던 좀비들의 밀도가 확연하게 줄었기 때문에 펜트하우스까지 가는 것은 수월했다.
그워어어어
고작 몇 미터 앞에 있어도 우리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가는 좀비였다.
[정지]
깜깜한 밤이었고, 하수구 냄새가 체향을 완벽하게 지웠기 때문인지 무사히 펜트하우스가 있는 동까지 도착했다.
삑-
잠가놓은 화물엘리베이터를 열고 들어가자 집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겁게 움직이는 화물엘리베이터 소리에 맞춰 저절로 애늙은이 같은 소리가 나왔다.
“진작 하수관으로 다닐 걸. 앞으로도 하수관을 애용하자.”
유미가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으... 농담이죠? 그렇죠?”
“아니 진심인데.”
“......”
내 진지한 표정을 본 유미의 동공이 점이 됐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고 하더니...”
“그러게요.”
유미가 국어책 읽는 목소리로 호응해왔다.
“목욕하고 싶다.”
“저도요.”
그렇게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다.
펜트하우스였기 때문에 방마다 욕실이 따로 있었다. 당연히 안방의 욕실이 제일 컸고 그곳은 내가 썼다. 커다란 욕조에 물을 두 번이나 갈면서 목욕을 했다.
그렇게 씻었어도 아직도 몸이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며칠 동안이나 씻지도 못한 데다 한나절을 하수구에서 돌아다녔으니 냄새가 몸에 밴 것 같았다.
“믿음이란 건가?”
전신이 갈기갈기 찢겼으면서도 날 위해 빗치의 발목을 잡았던 유미를 믿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했다. 믿을 놈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믿다니...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그랬다.
유미에게 살인을 종용하기도 했고 내 마음대로 이리저리 끌고 다니기도 했었다. 그런 나를 위해 유미는 전신이 찢겨가면서도 그것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내 무엇을 보고 유미는 끝까지 싸웠을까? 나라면 그럴 수 있을까?
유미가 내 위에 올라탔을 때, 어째서 유미를 버리지 않았을까?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모든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버리지 않았다. 떠날 수 있었지만 떠나지 않았다.
모순도 이만한 모순이 없었다. 내 피를 흡수해서 재생하는 순간부터 유미는 나와는 다른 존재였다. 처음에는 나와 비슷한 특이 케이스라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할수록 아니었다.
처음 죽였던 4인조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확실히 그랬다. 그들이 유미를 희롱해 내 마음을 꺾으려 했다고 보기에는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런 난잡한 상황에서 하고 싶을까? 멀지 않은 곳에 좀비들이 떼로 몰려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는 변종 두 마리와 생사를 건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바닥에는 덤프트럭이 치고 간 좀비의 육편이 널브러진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윤간을 한다?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내가 죽인 신입이 말했던 내용이 떠올랐다. 그렇게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건 빗치가 가진 특수한 능력이었다. 아니라면 어느 순간 반쯤 장난으로 위협하던 사내들이 정말 발정을 일으킬 리 없었다. 사내들의 행동은 발정이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도리가 없었다.
4명을 죽인 뒤에는 위화감이 더 커졌다. 일반적인 여자들이 보였던 것처럼 떨고 힘들어하던 유미는 하룻밤이 지나기도 전에 완벽하게 회복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를 일으켜도 될 법한 상황이었다.
강간 그것도 윤간직전까지 몰렸고 사람을 죽였다. 정신적인 타격이 심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빨리 회복하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언제 그랬었냐는 것처럼 유미는 정상적으로 반응했다. 그게 더 비정상적이었다.
아마 그 때부터 본능적으로 살짝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가까이 한다고 하면서도 어느 한도 이상은 가까워지지 않으려고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유미를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위해 유미는 목숨을 걸고 그것과 싸웠다. 이게 동료라는 건지도 몰랐다. 어쩐지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싫지 만은 않았다.
“젠장. 도착했다고 풀어지냐?”
욕조에서 나와 거품을 낸 타월로 몸을 벅벅 문질렀다. 벌써 5번도 넘게 닦았지만 찝찝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살리고 나도 그녀를 살렸다. 그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하아- 뭐냐 정말 나답지 않게...”
약간의 탄식이 섞인 나른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답다는 게 뭐지?
냉혹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
여고생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마무리하라고 종용하는 사람?
전신이 찢긴 유미를 버리지 않은 사람?
괴물이 됐다며 엉엉 울고 있는 여자에게 ‘너는 너.’라고 대답한 사람?
세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내가 나 다운 것’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죽이고. 쫓기고. 구했다.
‘나답다.’는 모습이 어쩐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생각은 곧바로 모습을 바꿨다.
‘나는 뭔가?’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재생력이 좋아지고 신체능력이 좋아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것뿐?’
멀쩡한 사람 넷이 발정을 일으킬 정도로 강한 유혹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는?
신입이 허겁지겁 스펙을 맞도록 할 정도로 페로몬이 가득한 방에서도 아무 이상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하-- 돌겠네.”
*
수신(修身)이라고 하는 의미를 이럴 때 써야 할지 모르겠지만 목욕이 아니라 어쩐지 수신을 한 기분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말은 참 어려운 주문이었다. 몸은 개운했지만 마음은 여러모로 복잡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잘 닦느라 늦었겠지.”
유미가 약간 불퉁한 표정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고 보니 유미의 얼굴도 좀 변했다. 체형도 변하더니 얼굴도 확실히 변했다. 체형도 좋아지고 얼굴도 예뻐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예뻐지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빤히 얼굴을 쳐다보는데도 유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나를 마주봤다. 유미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탐색했다.
“......”
“......”
피하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피할 필요도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인정해야 했다. 그녀를 인정함은 나를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미가 힐끔 나를 살피더니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때가 많았어요?”
“시끄러워.”
“많았구나?”
“안 많았다고. 아-진짜- 밥이나 먹자. 배고프다.”
배고프다는 내 말에 유미가 반가운 기색을 보였다.
“헤헤. 그럴 줄 알고 미리 만들어놨어요.”
“그래? 난 라면이나 끓여 먹으려고 했는데. 뭔데?”
툭- 커다란 중국식 팬에 가득 담긴 떡볶이가 식탁위에 올려졌다. 뭔가 미묘한 향기가 났지만 페이크였다. 척 보기에도 치즈 덩어리였다.
중국식 팬에 하나 가득 담긴 떡볶이를 찔러봤다. 말캉한 떡볶이 떡이 폭 들어갔다 치즈에 범벅되어 볼록 솟아 나왔다. 젓가락을 그냥 내려놓고 싶었지만 어쩐지 활활 타오르는 한 쌍의 눈 때문에 망연하게 찔렀다 뺐다 반복했다.
“이게 뭐지?”
“치즈-떡볶이요.”
치즈에 악센트를 넣어 강조하는 유미였다.
“그래 치즈떡볶이네. 네가 노래를 부르던 떡볶이. 심지어 네가 직접 만든 떡볶이다. 이렇게 왕창 만들어 놓고 너는 왜 안 먹어?”
“음... 글쎄요?”
오라질... 먹지도 않을 거면서. 유미는 그 좋아하던 떡볶이를 보고도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너... 설마... 나 혼자 먹으라고 한 건 아니지?”
“드셔 보세요.”
대답을 회피하는 유미였다. 어쩐지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너는? 배 안고파?”
헤실헤실 미소를 지은 유미가 살짝 얼굴을 붉히더니 모기가 기어가는 소리로 웅얼거렸다.
“괜찮아요.”
라면 먹고 싶었는데 강제로 떡볶이를 먹게 되다니. 그것도 치즈 떡볶이였다. 윤기가 좔좔 흐르는 떡볶이에 치즈가 왕창 얹어진 비주얼은 딱 유미 취향이었지 내 취향은 아니었다. 자기 취향대로 만들었으면서 왜 날 쳐다보는지...
“왜? 그렇게 보는데? 그냥 같이 먹자.”
“헤헤... 아니에요.”
치즈 떡볶이라고 주장하는데 색이 뭔가 조금 미묘했다. 붉은 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갈색도 아니었다. 치즈 때문에 양념 색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설마 하는 마음으로 떡을 하나 입에 넣었다.
“.......!”
“어때요? 맛있죠?”
“너... 춘장 넣었냐?”
“춘장을 조금 넣으면 감칠맛이 더해진다고 해서요.”
“케첩은?”
“새콤한 맛을 더하려고요.”
“간장은 간 때문에?”
“네. 소금을 넣는 것보다 간장이 좋다고 하던데요?”
“그 간장... 조선간장 넣은 거지? 저쪽에 있던 거.”
“와- 어떻게 아셨어요?”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근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 뒤에 이어지는 오묘한 신맛과 젓갈 특유의 향취는 분명...
“묵은 김칫국물은 왜 넣었는데?”
“밥 볶아 드시라고요.”
포기하고 다시 한 번 씹는 순간, 치즈 속에 숨겨진 참치가 뭉텅이로 씹히면서 미더덕 터지듯 참치 기름이 삐죽 새어나왔다. 참치 기름과 치즈가 엉키면서 무간지옥을 만들었다. 그 지옥 속에서 여러 양념들이 아우성쳤다.
“.......!”
“맛있죠?”
모든 걱정과 근심이 날아갔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
그냥 버릴 수는 없었다. 칼로리가 높았기 때문이다. 유통기한이 한참 넘어간 치즈라고 하지만 치즈는 치즈였고 참치 캔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저것 쏟아 넣어 초-고칼로리로 타오르는 혼돈을 그냥 밀어 넣었다.
“참- 개성적인 맛이구나.”
“괜찮죠?”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치즈가 참치를 감싸고 안에 있는 참치는 기름을 그대로 머금고 있게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렇게 만들라고 해도 만들기 어려웠다.
유미는 내가 잘 먹는지 감시했다. 아닌가? 감시가 아니라 뭔가 기대하는 표정인가? 약간 식은땀이 나는 것을 숨기고 멋쩍게 말했다.
“다음에는 같이 먹었으면 좋겠다. 함께 먹어야 더 맛있지.”
내 말에 유미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대답을 회피하는 걸 들켰나? 아무리 나라고 하더라도 형용하기 힘든 맛을 맛있는 것처럼 먹기는 힘들었다.
“......”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뭔가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러고 보니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인사를 하지 않았구나. 맛은 어떻든 날 생각해서 만들었으니 잘먹었다는 인사 정도는 해주는 게 좋았다.
“고맙다. 잘 먹었어.”
“......”
달그락- 설거지를 하기 위해 다 먹은 그릇을 챙기던 유미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움직였다.
*
아침에 일어나자 두통 때문에 인상이 써졌다. 잘 먹기만 하면 피로해지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무리를 했었나 보다. 그러고 보니 방문을 잠그지 않고 잠들었다. 습관적으로 문을 잠그고 잤었는데 의외였다.
“일어나셨어요?”
“넌 잘 잤어?”
“네...”
“그래? 난 몸이 좀 무겁네. 머리도 아프고. 몸살인가? 끄응-”
“......”
어쩐지 살짝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참신한 맛의 떡볶이 이후로 유미에게 뭔가를 시키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미가 뭘 하겠다고 하기 전, 먼저 주방으로 돌입했다.
종일 더부룩한 위장을 달래는 데는 얼큰한 라면만 한 것이 없었다. 고춧가루를 팍팍 뿌려 화끈한 라면을 끓였다.
“으챠- 라면 다 됐다. 어서 먹자.”
유미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시고 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