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3) ●
시체가 없다?
사태가 발생하고 3달이 넘었다. 그간의 경험대로라면 이곳에는 시체가 있거나 아니면 일반좀비가 있어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변종이든 뭐든 눈에 보여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6월 더운 날씨로 인해 악취가 풍겨야 할 시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한 층 전부를 확인한 유미의 표정은 밝았다. 긴장이 풀린 채 아무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유미가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계단에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가 말았었다는 것이 떠올랐지만 바늘을 삼킨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인상이 써졌다. 유미는 내 구겨진 표정을 보곤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미안해 할 겨를이 없었다.
시체가 없다. 누가 치웠지?
문은 잠겨있었다.
누가 잠갔지? 왜 잠갔지? 잠갔다면 그자는 어디로 갔을까?
말 그대로 핏자국과 여기저기 터지고 찢겨진 흔적은 있었지만 고기조각 하나 남지 않고 깨끗했다. 시체를 끌고 간 흔적도 없었다.
시체를 들 것에 들어 실어 날랐다?
사방이 좀비였을 텐데?
좀비들을 죽이고 그 뒤처리까지 했다?
무엇 때문에?
빗치가 시체를 끌어갔을까?
이 빌딩이 변종들의 식육창고는 아닐까?
그런 쪽으로 생각이 돌아갔다.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무거운 침묵이 계속됐다. 5분 어쩌면 10분 넘게 아그리파 흉상처럼 인상을 쓰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인상을 써서 유미의 입을 막았지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꼼지락거리던 유미가 기어코 입을 열었다.
“아저...”
[조용]
수신호로 유미의 입을 막았다. 이곳은 대화하기 좋지 않았다. 감각은 계속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는 바로 직전에 닥친 살기에만 반응했다. 마비된 척 속였던 놈이 직접적으로 살기를 뿜어대기 전까지 심장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죽음이 임박했을 때 느껴지는 감각만 믿고 있기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창문 쪽으로]
[탈출로]
[확인]
바로 손만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도 수신호를 사용하자 유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처음 계획했던 대로 창문에 붙어 사방을 살폈다.
밖에 있는 일반좀비들의 숫자는 엄청났다. 고작 건물 앞쪽과 뒤쪽, 골목의 이면도로와 주도로 인접인 지역 차이인데 좀비들의 밀도는 수십 배 차이였다. 주도로에는 일반좀비들이 가득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반좀비들은 어디론가 서서히 이동하고 있었다. 마치 느릿하게 움직이는 파도처럼 일렁이는 좀비들의 물결. 잘못 움직였다면 좀비들 사이에 갇힐 가능성도 있었다. 추적자들이 추적하지 못했겠지만 했다고 하더라도 이런 좀비들의 물결까지 뚫고 따라올 가능성은 없었다.
[서쪽 확인-좀비 많음]
[동쪽 확인-좀비 있음]
[많나?]
[서쪽 보다 적음]
가까운 거리였기 때문에 수신호화 입모양을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했다. 유미는 내가 수신호를 시작한 뒤 바짝 긴장했지만 한 참 동안 아무런 기미도 없자 약간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내 행동에 따라 수신호로 신호를 보내고 발자국 소리를 죽였다.
주변을 찬찬히 살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분명히 뭔가 있다. 심장이 불안으로 짓눌리지 않았지만 이곳에는 무엇인가 있어야 했다. 잠긴 문. 그리고 사라진 시체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의혹?
그게 중요한가?
지금 중요한 것은 안전이었다.
몇 시간 전에 죽다 살았으면서?
의심?
시체를 끌고 간 것이 무엇인지 알아서 뭐한다고?
찾아서 어쩌겠다고?
그럴 필요 없었다.
[탈출]
[예?]
[즉시 이동]
[.......]
발자국 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다시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천장에 있는 환풍구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들어왔던 계단으로 내려가려는 순간 낮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투두두두두.
낮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창문이 가볍게 떨리는 느낌이었다.
드드드드드.
저공비행? 헬기?
[숙여]
유미와 나는 재빨리 파티션 아래로 몸을 숙였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데 정작 헬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처음 함정에 걸렸을 때, 그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감시카메라에 잡혔어?’
‘조용. 카메라에는 들어왔다는 것만 잡혔다.’
‘CCTV?’
여기도 감시카메라가 작동되고 있는 걸까? 헬리콥터가 접근하는 소리가 들리자 전혀 다른 생각이 들었다. 천장을 살피자 한 쪽 구석에 검은색 반구형의 물체가 박혀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쪽에서 살짝 빛나는 붉은 빛.
헬리콥터가 내는 소리는 이제 완연하게 가까워졌다. 창문을 흔드는 소리가 결정을 재촉했다. 생존자 그룹과 같은 자들일까? 스펙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전문적인 장비를 떠올려 본다면 헬기를 운용할 가능성도 있었다.
헬기를 동원해 이곳으로 왔다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잡아 죽이겠다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빗치와 변종을 죽이는 게 인류를 위한 것.'이라는 그 놈의 말대로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헬기라니.'
나지막하게 흘러나오려는 욕설을 꾹 누르고 정신을 집중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았다. 그냥 지나가는 헬기이기를 빌면서 신경을 곤두세웠다.
접근하던 소리가 어느 순간 딱 한 장소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싶었지만 그냥 지나가는 헬기가 아니었다. 머리 위, 천장을 타고 울리는 것만 같은 소리. 닫힌 창문 틈사이로 들리는 낮은 로터음은 헬기가 빌딩 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강습?!’
[뛴다.]
유미의 눈동자에 의문이 서렸다. 하지만 문을 박차고 계단으로 내달렸다. 계단을 점프하듯 뛰어내리자 유미도 내 뒤를 따라 필사적으로 달렸다. 투웅- 몸을 그대로 날렸다. 계단 20~30개를 단 번에 날아올라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비상계단이 있는 공간이 울림통이라도 된 것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몸이 허공에서 살짝 유영하며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순간 욱신-가슴이 쥐어짜졌다. 살기였다.
문짝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유미가 등 뒤에서 날 불렀다.
“아저씨!”
“계속 뛰어!”
진득하게 눌러오는 감각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옥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거기! 도망치지 마십시오!”
“밖은 위험합니다.”
“생존자들을 구출하러 왔습니다!”
“멈추세요!”
진중한 목소리. 신뢰감 있는 목소리가 비상구를 흔들었다. 그 소리와 함께 등 뒤를 바짝 쫓아오던 소리가 딱 끊겼다. 고개를 돌리자 유미가 제자리에 멈춰있었다. 유미를 보면서 내 몸은 그래도 계단을 박차 반 층을 한 번에 뛰어내렸다. 내 등을 붙잡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미가 날 불렀다.
“아저씨!”
“도망쳐야 해.”
“도망치실 필요 없습니다. 저희들은 특수수색대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층계를 탔다. 그 낮은 목소리 속에 발걸음 소리를 숨긴 것처럼 자박이는 소리가 끝없이 뒤따랐다. 저쪽도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말싸움 할 시간이 없었다.
“유미야. 또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셈이니?”
“저... 저는...”
“나를 따라 오든지 아니면 이곳에서 헤어지든지 네 선택에 달렸다.”
유미는 흔들리는 표정이었다. 이제까지 도망다니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지쳤던 것이다. 나도 지쳤으니 유미가 힘든 것은 당연했다. 유미는 나보고 함께 저 군인들을 만나자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저씨는요? 같이가요. 그만 도망쳐요. 네? 저 사람들은 군인이라잖아요!”
"유미야. 세상이 어떻다고 했지? 이 세상에서 군인이라고 하는 사람을 그냥 믿을 수 있을까? 난 믿지 못하겠어.
“저희들은 군인입니다.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해 왔습니다. 도망치지 마십시오!”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윙윙 울리는 중에도 묘하게 안정감을 주는 목소리였다. 그와는 별개로 느껴지는 묵직하게 느껴지는 감각. 하늘에서 뭔가가 짓눌러 내리는 것 같았다. 이런 감각인데, 이런 살기를 풍기면서 도망치지 말라고?
“난 간다.”
“아저씨!”
“저들은 군인 따위가 아니야! 설령 저들이 군인이라고 하더라도 난 간다.”
“저희들은 민간인을 보호하기 위한 특수수색대입니다.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그 순간 계단 창문 밖에서 로프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로프? 잠시 뒤 3~4개 층 아래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봤지? 우릴 포위 했다. 민간인을 구조하는데 이렇게까지 한다고 생각하니?”
“........”
유미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잠시 그 자리에 대기해 주십시오.”
“무장을 해제하고 그 자리에 대기해 주십시오.”
위와 아래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들렸다. 반사적으로 바로 옆에 있는 비상구를 잡아당겼다. 9층으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역시나 잠겨있었다. 둔기로 손잡이를 박살냈다. 콰직- 문고리가 박살나며 구멍이 뻥 뚫렸다.
몸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더 해줄 말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화분을 들어 천장에 있는 검은색 반구를 향해 집어던졌다. 화분이 수류탄처럼 CCTV를 쓸어 버렸다. 탈출로는? 헬기가 상공에 있으니 일반좀비든 변종이든 빗치든 이쪽에 몰릴 것이 분명했다.
자동차 같은 육상운송 수단만 있다면 총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했다. 총소리를 듣고 일반좀비든 동면좀비든 변종이나 빗치나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헬기가 있다면? 총을 쏠 만큼 쏘고 하늘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그러니까 저쪽은 중화기, 자동화기로 무장했을 가능성이 컸다.
변종이나 빗치는 45구경 ACP탄에도 어느 정도 내성을 가지고 있었다. 동면좀비도 5.56mm 나토탄으로 치명상을 입히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좀비들이기 때문이었다. 나와 유미의 피부는 상처도 잘 입었다. 재생능력이 좋을 뿐 물리저항을 가진 좀비들이나 변종, 빗치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9mm탄을 사용하는 K7소음기관단총이라고 하더라도 나와 유미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입구를 틀어막기 위해 그대로 사무용 책상을 번쩍 들어올렸다. 유미가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군인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보다 날 믿고 따라온 것이었다.
“바리 케이트를 쳐야 해. 문을 틀어막을 테니까 책상 좀 가져와.”
“.......”
유미는 말없이 책상을 가져왔다. 저쪽은 1분도 지나지 않아 입구는 책상과 집기류로 쌓인 조그만 동산으로 가로막혔다. 몇 분이 지나자 저쪽에서 문을 두들겼다.
쿵! 쿵!
“문 여십시오!”
“이러지 마십시오!”
“대피소로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우릴 그냥 내버려 둬!”
“그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끄시면 우리 모두 위험해 집니다.”
“변종이나 빗치가 오면 어떻게 하시려고 이러십니까?”
“빨리 문을 여세요.”
천장에 마감된 석고보드를 뚫고 전선을 잡아 뺐다. 천장이 갈라지며 전선이 낚싯줄마냥 죽 딸려 나왔다.
“아저씨 정말 도망쳐야 하는 건가요? 헬리콥터면 군인들이잖아요.”
유미는 정신적으로 지쳐보였다. 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었다.
“군인일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
“정말 우리를 보호하는 게 목적이라면 로프를 타고 아래층을 미리 차단하지는 않았을 거다. 도망치지 못하게 포위하지는 않았을 거야.”
“그럼... 어째서 이렇게... 하는 거죠?”
“이유는”
말문이 잠시 막혔다. 말해도 될까? 그 놈에게 들은 것을 말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침묵 속에서도 내 손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천장에서 잡아 뺀 전선을 로프처럼 둘둘 말면서 창문 밖을 살폈다.
주도로가 아닌, 이면 도로에 닿아있는 모텔 건물과는 10m정도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8층 모텔 옥상으로 뛰어내린다면 일단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쾅! 바리 케이트로 쌓아둔 집기들이 흔들거리며 문틈이 조금 벌어졌다. 치누크 같이 대형헬기가 아니라면 블랙호크나 수리온일 가능성이 컸다. 둘 모두 탑승 인원을 꽉 채워서 왔을 가능성은 없었다. 중기관총을 장착하면 탑승 인원은 6~7명 정도.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로 예상됐다.
“마음 단단히 먹어라. 말해줄 테니.”
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모텔 옥상이 보이는 방향의 유리창을 박살냈다. 유리창이 박살나자 헬리콥터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뛰어!”
유미와 동시에 달려 나갔다. 공중에 잠시 부유하는 감각과 함께 심장이 꽉 조여 왔다. 모텔 옥상에 착지하며 고함을 질렀다.
“문으로 달려!”
투두두두두!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와는 다른 소리, 중기관총이 불을 뿜는 묵직한 소리가 온몸을 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