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4)
파랗게 환해지는 새벽, 사내의 얼굴도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파랗기 때문일까? 비틀린 미소가 도드라졌다.
하지만 내 눈에는 파란색도 비틀린 미소도 들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완전히 돌려서 날 보고 있는 사내의 모습만 보였다. 고개를 자유롭게 틀어? 전신마비 됐다는 새끼가?
“너....”
들고 있던 육포가 짓이겨 질 정도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내 눈빛을 담담하게 받으며 사내가 천천히 두 팔을 들어올렸다. 비스듬히 소파에 기댄 상태로 시간을 서서히 잡아당긴 것처럼 양팔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치 포옹이라도 할 것처럼 벌어진 두 팔. ‘아유 이제 아셨어요? 참 잘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멈춘 시간,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본 녀석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아주 느릿하게.
짝-
짝-
짝-
박수소리가 사무실을 공허하게 울렸다. 아주 느릿하게 박수를 친 놈의 두 팔이 허리로 내려갔다.
어디까지가 진실이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아니, 이놈이 한 말을 믿을 수 있나?
죽여야 하나? 죽이고 피해야 한다.
살의가 뭉클 피어올랐다.
내 살의에 화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녀석이 환하게 웃었다.
“아주 좋은 표정이야. 그래 이제 날 죽일 건가?”
“......”
“이성이 있으면 대화가 가능하다고 하시더니... 날 죽이고 싶은가 보네? 어차피 죽이는 것 밖에 생각하지 못하잖아. 네놈들은... 괴물 아니, 변종인가?”
“괴물이라고? 무슨 개소리아? 엉?”
“아니라는 표정 짓지 말라고. 처음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알아챘으니까 말이야. 이 방에서 폴폴 날리던 빗치의 냄새 때문에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니까. 연기를 하려면 처음부터 조심했어야지. 하긴 그 냄새가 아니었으면 나도 깜박 속았을 걸.”
“연기? 지금 이게 연기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네놈이 날 놔주기라도 할 건가? 아니잖아.”
“하--- 이런 씨발.”
“욕이 나와? 억울해? 뭐가 억울한데? 분해? 뭐가 그렇게 분하지? 화를 낼 이유가 없잖아. 네 놈이 괴물이든 아니든 날 잡아온 건 네놈이 한 짓인데 말이야.”
"어이가 없군."
“그래? 어이가 없다? 사실 내가 더 어이가 없어. 네 놈들의 대가리에 들어찬 생각은 먹고 죽이고 그 딴 생각 밖에 없으면서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았지? 응? 크크.”
“......”
"아니라고 하지 말라고. 그러고 보니 빗치는 어디있지? 이거 또 놀라운 일인데? 냄새를 풍기는 빗치가 말하는 변종과 같이 있다니 말이야."
냄새? 빗치의 냄새? 유미가 변종바이러스의 숙주? 바비가 변한 것에게 물렸었지. 그 여파인가? 생각하지 마라 그저 시간 끌기다. 저건 그냥 도발이다. 콰직- 들고 있던 마른 육포가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가감 없는 살기를 받고도 사내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여~ 그렇게 망설이지 말라고. 괜히 그렇게 고민하지 마. 꼭 사람 같잖아. 역겹다고.”
“......어째서?”
“뭘 어째서? 머리 굴리지 말고 하던 대로 하라고. 너 같은 '괴물'과 나 같은 ‘사람’은 서로 죽고 죽이고 그렇게 된 세상이니까 말이야.”
“닥쳐!”
놈은 내 눈을 보고 있었다. 마치 내 눈이 다른 것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맹수를 사냥할 때 눈을 피하지 않는다는 말을 나에게 적용시키는 것 같았다. 사내의 증오에 찬 눈동자만 바라보고 있었던 좁은 시야가 서서히 열렸다.
박수를 치고 허리춤으로 가져갔던 놈의 손에 쥐어진 것은 인슐린 주사기처럼 생긴 것이었다. 인슐린 주사기처럼 생긴 주사기에 찍혀있는 낯익은 기업로고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응? 안 올 건가?”
“......”
자신을 죽여서 내가 괴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길 바라는 것처럼 죽여보라는 표정을 한 놈의 얼굴과 녀석이 손에 슬쩍 쥐고 있는 주사기를 쓰려는 모습이 넓게 열린 시야에 들어왔다.
“올 거면 빨리 오라고.”
녀석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몸이 움직였다.
“하- 죽고 싶냐? 그럼 죽어!”
용수철처럼 튀어 머리를 발로 찼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속도. 하지만 리볼버를 가지고 있던 놈이 그랬듯 사내도 소파 옆으로 데록-굴러 내 발차기를 피했다.
쿠당탕-소파가 걷어차여 뒤로 날아갔다. 옆으로 피하면서 놈은 들고 있던 스펙을 주사했다. 크릭-치익-주사기에서 약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차갑게 식었다. 진정하자. 그 빠른 발차기를 가볍게 피한 놈이었다. 흥분해서 휘둘러봐야 소용없다. 내가 죽였던 놈들과는 달리 이놈은 진짜였다.
이런 놈이 신입이라고? 빌어먹을 뒤죽박죽이 됐다. 군대가 밀렸는데, 이런 놈들이 있다고? 하아-숨을 깊게 쉬고 어깨를 풀며 놈에게 물었다.
“뽕 그렇게 자주 맞아도 되냐?”
내가 이죽거리며 묻자, 예상대로 놈이 허연 이를 드러내며 대거리를 했다.
“안 좋지. 근데 너 같은 괴물들과 싸우려면 오용, 남용은 필수 더...”
말을 하면 호흡이 흐트러진다. 놈이 시간을 끌기 위해 대답을 하느라 호흡이 흐트러진 순간, 주먹을 휘두르며 돌진했다. 라이트 훅을 날리고 놈이 피하면 회전력을 이용해 왼쪽 팔꿈치로 찍는다.
붕-훅을 피하고 몸을 비틀어 팔꿈치를 날리는 것과 동시에 무릎아래의 중심이 무너졌다. 놈이 내 중심축이 되는 다리를 건드린 것이다. 태클?
“하- 이게...”
웃기지도 않았다. 성인 남성 3배 이상의 힘을 가진 상대에게 태클이라니. 다리를 딱 붙이고 중심을 아래로 내리 깔며 녀석의 몸을 부둥켜안으려고 했다. 잡히면 그대로 허리를 꺾어버릴 심산이었다. 일단 허리부터 꺾어 놓고......
다리를 낚아채며 태클을 시도하는 것처럼 페이크를 쓴 놈은 다리가 목표가 아니라 내 팔이 목표였다. 근력이 강해져도 강화할 수 없는 곳은 관절이었다.
팔목을 낚아채듯 부여잡은 놈의 팔을 마주잡기 위해 어정쩡한 자세로 왼팔을 가져가자. 오른팔을 붙잡았던 것을 미련 없이 놓고 미꾸라지처럼 옆으로 빠져 등 뒤로 달라붙었다.
*리어 네이키드 초크(Rear naked choke)? 인간이 맹수를 죽일 수 있는 맨손기술이라고 알려진 리어 네이키드 초크였다. 녀석의 두 팔이 내 목을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컥-뭔가 아찔한 느낌이었다. 심장어림이 무겁게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순식간에 내 뒤를 잡은 뒤, 목을 졸라 경동맥을 압박하는 놈이었다.
빗치나 변종들은 피부나 근육이 일시적으로라도 단단해졌지만 나와 유미는 보통 사람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걸 녀석이 느꼈으면 뭔가... 대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졌지만 소용없었다.
심장을 압박하는 묵직함은 점점 더 심해졌다. 내 감각대로 사내는 내 목을 휘감은 느낌이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겠지만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조여 댔다.
죽거나 죽이거나, 사느냐 죽느냐 둘 가운데 하나 밖에 없었다.
힘은 내가 분명히 더 강했다. 스펙을 연달아서 맞은 사내의 완력도 일반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한 방만 딱 한 방만 맞히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았다.
리어 네이키드 초크라는 건 종합격투기 방송에서나 봤었던 기술이었다. 위험한 기술이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 내 힘이라면 분명히 그냥 힘으로 풀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신감 있게 놈의 팔뚝을 잡아 당겼다.
으득
'안 뜯어져?'
“크흐흑!”
팔뚝이 풀리지 않았다. 어째서?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팔뚝이 풀리지 않는다면 손가락! 즉시 놈의 손가락을 하나 잡아 뒤로 젖혔다. 녀석의 새끼손가락이 힘없이 뒤로 꺾였다.
-으직-하지만 목을 조르는 두 팔은 열쇠로 잠근 것처럼 풀리지 않았다. 손가락이 뜯어질 정도로 너덜 거림에도 놈은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미친 이래도 풀지 않는다고?'
"크아아아!"
약지와 중지를 한꺼번에 뒤로 잡아 빼듯 꺾었다. -와자작- 손가락이 나무 젓가락 부러지듯 부러졌다. 그래도 내 등 뒤에 붙은 놈은 떨어지지 않았다. 고통을 모르는 강철 바이스가 조여지듯 계속해서 파고들었다.
우적- 너덜거리는 손가락 3개를 잡아 뜯었다. 손가락이 3개나 뜯겨져 나갔음에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고 등판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놈이었다.
온몸을 던지는 것처럼 벽에 등을 때려 박았다. 쿵! 쿵! 벽에 걸린 액자가 박살나고 장식장이 터져나갔다.
콰직- 사무실 한쪽에 세워진 스탠드의 갓이 구겨졌다. 어느 순간 머리가 멍해지면서 시야가 깜깜해지려는 것 같았다.
틱-손에 뭔가가 잡혔다. 그대로 뽑아 등판에 붙은 놈을 향해 찔렀다....
푸우욱-
기괴한 소리와 함께 뜨겁고 축축한 것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지만 목을 조른 팔뚝에 자물쇠라도 채운 것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
푸욱! 푸욱! 감촉이 있었으니 어딘가 맞았을 것이다. 분명히 얼굴에 봉이 틀어 박히고 있을 텐데, 놈은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빌어먹을! 죽어!"
있는 힘을 다해 봉을 쑤셔 박았다. 뼈가 부러지고 가죽이 찢어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푸카칵! 사정없이 쑤시고 들어간 봉을 더 깊숙하게 박아 넣어 흔들었다. 으지지직-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놈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내 입에서는 참았던 신음 같은 숨소리와 욕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커헉! 흐학. 콜록... 쌰아아앙.”
놈의 팔을 떼어내고 보니, 스탠드의 알루미늄 금속 자루가 녀석의 얼굴을 비스듬히 뚫고 들어가 있었다. 광대뼈를 뚫고 들어간 스탠드는 30도 정도의 각도로 왼쪽 광대를 파고들어, 오른쪽 대각선 위 머리통 방향을 쑤신 것으로 보였다. 오백 원짜리 동전보다 두꺼운 스탠드 봉이 놈의 얼굴을 뚫고 휘저어 사방은 피바다였다.
“아저씨!”
유미가 한껏 긴장한 표정으로 석궁을 들고 뛰어내려왔다.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박살난 사무실과 얼굴에 스탠드 봉을 박은 채 죽어 자빠진 사내를 본 유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이게 무슨 일이에요.”
“.......”
유미가 가까이 다가서자 피 냄새와는 다른 달콤한 향기가 났다. 놈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녀석이 스펙을 빨리 놔달라고 했던 이유도 어쩌면 이 방에서 났던 유미의 체향 때문일지 몰랐다. 이 체향이 빗치의 페로몬 냄새라면?
“아저씨... 왜 그렇게 보세요... 무. 무서워요.”
“하아- 설명할 시간 없다. 바로 나가야 해.”
유미를 보던 시선을 돌렸다. 나도 모르게 유미를 노려본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았다. 딱히 발정도 나지 않았고 유미에게 뭔가 위화감을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사기를 치려면 99%진실에 1%의 거짓을 섞는다고 했어.'
신체능력이 소폭 상승한다고? 이게 소폭 상승하는 거라고? 아무리 두 번 중첩해서 맞았다고 하더라도 거의 일반인 두 배를 넘나드는 힘이었다. 게다가 손가락이 생으로 뽑혀도 전투력이나 전투의지가 깎여나가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고개가 절래절래 흔들어졌다.
스펙의 성능도 거짓말이 분명했다. 그런 놈의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은 내가 직접 판단해야 했다. 사내의 허리춤에 있는 색과 인슐린 주사기 같은 주사기를 챙겨 넣었다. 놈이 가지고 있던 물품을 순식간에 쓸어 담았다.
“저... 뒤지시는 건가요?”
“어. 이놈이 가지고 있는 건 전부 챙겨야겠어.”
시체를 뒤적이는 모습을 보고 유미는 주저주저했다. 나도 모르게 약간 딱딱한 목소리가 나왔다.
큼- 멋적어 작게 기침을 하고는 계속 뒤졌다. 제일 처음 보이는 것은 놈이 차고 있던 목걸이었다. 목걸이는 막대기처럼 생긴 군번줄 같은 것과 USB처럼 생긴 것이 매달려 있었다.
툭- 목걸이를 끊고 팔찌와 반지를 비롯해 챙길 수 있는 것은 전부 챙겼다. 유미는 선뜻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내 몸에서 풍기는 진한 살기와 경계심을 느낀 것 같았다.
“후- 신경이 예민해져서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너도 짐 챙겨.”
“예...”
놈의 말을 신뢰하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미 들은 말을 듣지 않은 것처럼 지울 수는 없었다.
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아직도 초크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지, 아니면 피 냄새 때문에 질린 건지 정신이 멍했다. 약간 몽롱한 몸을 다그쳐 곧바로 옥상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