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3)
이놈이 왜 웃지? 아무리 약 기운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어색했다. 비틀린 미소가. 뭔가...
“뭐가 그렇게 웃기지?”
“아- 미안 당신 표정이 너무 웃겨서 말이야.”
확실히 비꼬는 어투.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내리 눌렀다. 이 남자는 내 신경을 긁고 있었다. 꾹 참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일부라도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이 있다면 공존... 아니, 좀비를 잡는데 쓸 수 있지 않나?”
사내가 내 말을 듣고 터지는 웃음을 간신히 참는 표정을 지었다.
“크.풉... 뭐라고? 공존? 좀비를 잡아?”
“이성이 있고 인간의 기억이 있다면, 그래 그것들에게도 가족이 있을 것이고... 기억이 있다면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돕지 않겠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내 말을 중간에 패대기라도 치는 것처럼 사내의 웃음소리가 사무실을 가득 채웠다.
“크하하하하핫. 뭐야? 응? 뭐? 기억? 대화? 가족?”
간신히 참았던 웃음을 터뜨린 사내의 분위기가 일순, 변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
그래.
그것은 광기였다.
살의.
분노.
그 모든 부의 감정으로 똘똘 뭉친 악의는 광기였다. 스펙이라는 약 때문에 이러는 건가? 아니 이건 단순한 약 기운이 아니었다. 이 사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감정이었다. 나를 노려본 사내가 픽-웃었지만 그 목소리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건 뒤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아- 그것들과 대화? 그것들이 기억이 있으니까 뭐? 인간의 변종쯤으로 생각하라고?”
꼭 자살하기 전에 말하는 것처럼 사내가 이죽거렸다.
블라인드 사이로 파랗게 날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새벽이 블라인드를 비집고 들어왔다. 사내는 파랗게 변한 얼굴로 악의를 표출했다. 이유 모를 악의가 내 가슴에 비수처럼 꽂히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도 죽은 건가? 근데 왜 나한테 이렇게 악의를 내뿜지? 내 표정을 본 사내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말을 해보겠다? 그게 뭔 줄 알고?”
“......”
뭐냐고? 변했더라도 이성이 있고 기억이 있으면 당연히 사람 아닌가? 식인종도 사람이라고 분류됐다. 사람을 먹는다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나와 유미는 사람을 먹지 않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나와 유미 뿐만 아니라 어딘가에는 그런 변종이나 빗치가 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었다.
"아무리 변했다고 하더라도 말이 통하고 판단 능력이 있다면..."
내 말을 중간에서 잘라버리는 남자였다.
“그것들이... 뭔데? 인간의 껍데기면 인간인가? 말을 하면 인간인가? 생각을 하면 인간이야? 엉?”
사내가 낮게 으르렁 거렸다. 상처받은 짐승과 같은 소리였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안다는 것처럼 사내는 으르렁 거렸다. 그건 타협의 여지가 없는 적의였다. 대체 세상이 어떻게 변한 걸까? 펜트하우스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동안 세상은 완전히 뒤집어져 있었다.
그냥 좀비가 창궐한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람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이렇게 적의를 불태우고 타협을 거부한다면 상황은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문화, 문명, 인간성에 대한 모든 관점이 100일도 지나지 않아 붕괴됐다는 소리였다. 씁쓸했다. 나도 살기위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이 사내와 이야기를 해보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겪은 상황은 그저 개별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사람을 죽였다. 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람을 죽였다. 내가 죽인 사람은 약탈자였고 날 위협하는 사람이었다. 죽인자도 죽은자도 사람이었지만 이 사내는 그걸 부정했다.
그는 자신이 죽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말을 할 수 있어도 판단능력이 있어도 인간과 똑같이 생겼어도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하는 사람이 내 앞에 있었다. 고작 100일도 지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인간에 대한 정의가 무너질 정도라고? 설마 그럴 리 없었다.
“그것들도 생각이 있다면 대화가 가능하지 않나? 놈들이 우릴 죽이겠다고 달려든다면 모를까, 놈들에게 싸울 의사가 없다고 해도 그들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나?"
"큭... 크흐..."
사내가 웃으며 계 해보라는 듯이 바라봤다.
"말도 하고 기억도 있고 이성도 있는데 대화를 못할 건 뭐지? 기억이 없다면 모를까 기억이 있다면 협상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나?”
내심은 나와 유미를 놓고 항변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일반인과 확연하게 달라진 우리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열을 낸 것일 수도 있었다.
“큭- 그래. 그렇지 그 이야기를 하다 말았군.”
언제 으르렁 댔냐는 것처럼 사내가 픽-썩은 미소를 지었다.
“빗치와 대화를 한다? 좋은 소리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어. 빗치들이 페로몬을 가지고 남자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야.”
“스펙에 페로몬에 저항하는 능력이 있다며? 약이 있으면서도 그런가?”
“아- 약이 만능은 아니지. 이것도 페로몬 농도가 짙어지면 소용이 없어지거든.”
농도가 짙어진다? 빗치와 한곳에 오래 있거나 아니면 가까이 붙어있을 때 문제가 생긴다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성이 있고 기억이 있다면 빗치를 통제할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함정에서 만났던 빗치는 그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이었다. 그런 것이 적극적으로 자발적으로 돕는다면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사내가 깊게 숨을 내쉬며 단언했다.
“유혹해서 잡아먹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 문제는 빗치들이 변종을 만든다는 거다. 죽지 않은 남자들은 변종이 되지. 변종이 되면 말도 못하게 변하지만 사냥꾼의 본능은 남은 최악의 괴물이 된다. 만났으면 알 텐데? 설마 변종도 만나보지 못했나? 변종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인지 모른다면 말해주지. 중기관총에 쓰는 12.7mm탄도 제대로 박히지 않는 괴물이다. 완력은 고릴라와 비슷하거나 더 센 놈도 있고. 그런 괴물이 도시라는 정글에서 사람을 학살하고 다닌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걸 만드는 빗치와 대화를 하고 싶어?”
“빗치들 때문에 변종이 생기는 거라고?”
“그래. 빗치에게 물리고도 죽지 않은 남자들이 변종이 되지 그리고 변종에게 물린 놈들이 그 어정쩡한 동면좀비 괴물로 변하는 거고. 간혹가다 빗치에게 물린 놈들 가운데 변종으로 변하지 않는 경우는 동면좀비 괴물이 되기도 하고 그래.”
“자연적으로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동면 괴물이 생기지는 않나?”
“자연적으로 생겼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어디까지나 빗치든 변종이든 있어야 동면좀비가 생긴다는 게 이제까지 알려진 사실이다.”
“잠깐만, 있어야 변한다? 그 말은 꼭 물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물리면 확실히 변한다.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일이지. 하지만 그냥 바이러스가 아니고 변종바이러스야. 그게 문제지. 변종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는 빗치가 근처에 있다고 가정했을 때, 공기, 물 같은 것을 통해 변종바이러스가 전파될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소리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빗치든 변종이든 설치고 있는 동안은 일반 좀비가 아닌 동면 괴물이 늘어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고 더 나아가 변종바이러스가 더 확산될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소리였다. 해결 방법은 말살.
“......”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빗치를 보면 반드시 척살한다. 이게 생존자들의 원칙이야. 변종은 동면좀비 정도나 만들지만, 빗치는 변종을 만들거든. 아까 말했던 그 변종.”
“그래 알아.”
“그래 그 놈들은 말은 못하고 빗치보다 냉정하게 판단하는 능력은 떨어져도 본능적인 부분은 더 발달한 놈들이야. 똑똑한 맹수 같은 놈들이지. 똑똑한 원시인이라고 할까?”
“대충 빗치와 변종은 그렇다고 치고. 빗치로 변하는 여자들의 특징 같은 건 따로 있나?”
“특징? 심하게 앓지.”
유미가 떠올랐다.
“앓고 나면 전부 빗치가 되는 건가?”
“그렇지는 않아. 심하게 앓고 이겨낸 자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신체능력이 조금씩 증가하는 정도로 끝나는 경우도 있으니까.”
“......”
“가장 중요한 것은 내적이든 외적이든 변화가 생긴다는 거야. 내적이라고 하면 죄의식 같은 것이 없어진다거나... 크게 보면 성격이 변하거나, 기억이 변하기도 하고 그런 쪽이고 외적은 외모가 변해. 엄청나게 섹시하게 변하지.”
“둘 모두 일어나는 건가? 아니면 겉모습은 그대로에 내면만 변하는 케이스도 있나?”
“변이 바이러스다 보니, 뭐라 단정하긴 어렵군.”
파랗게 날이 밝아왔다. 블라인드 사이로 뚜렷하게 파란 새벽하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둠은 날아올라 자리를 피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들이 몸을 숨기고 황폐한 도시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미가 변종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은 사실이다. 그저 육체적으로 변화하는 정도에서 끝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바비에게 물렸다. 분명히 물렸기 때문에 뭔가 변화가 추가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위험하다. 등판에 상처가 났다고 해서 꼭 물렸다고 단정 지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상처가 난 것은 분명했고 마치 변종이나 빗치처럼 급속도로 신체가 재생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인아와 바비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 인아가 고함을 지르며 ‘그년 몸뚱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외쳤던 것이 떠올랐다.
바비가 그것으로 완전히 변했을 때, 외모가 그렇게 많이 변하지 않았다. 바비의 본래 외모가 더 아름다워질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것일 가능성도 있고 바비 자체가 이미 내적으로는 변화하고 있는 도중이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잠복기였을 가능성도 있고 여러가지 변수가 너무 많았다.
“설마 빗치로 변화하는 도중인 여자와 관계를 가지면? 물리지 않고 관계를 가져도 전염이 되나?”
“아- 점막과 체액을 통해 감염되는 것은 확실하다고 봐야지.”
“그럼. 즉시 변하나?”
“그렇지는 않아. 오래 걸릴 경우에는 한 달이 넘게 서서히 변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 덕에 피난처가 여럿 무너졌다.”
지하 1층에 있던 동면 괴물... 지하 2층에도 동면 놈들이 있었다. 최소한 뭔가가 일반 좀비에 변형인자를 넣을 뭔가가 건물 내부에 본래부터 있었다는 소리였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이게 아니다. 나와 유미가 어떻게 될 것인지가 중요했다. 갑자기 몰려드는 생각을 몰아낼 것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조용하다. 고요한 새벽 공기가 열린 창문을 통해 밀려들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블라인드는 먼지 앉은 유리를 긁었다.
확연하게 환해지기 시작한 밖이었다. 어제 이른 저녁을 먹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니 슬슬 출출해졌다.
뭔가 먹어야했다. 배가 고프면 예민해지고 실수가 생기는 법이니까. 그래 좀 진정하고 일단 먹자. 육포의 포장지를 찢었다. 찌이이익- 비닐 포장지가 바스락거리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리가 크게 느껴졌다. 신경이 예민해졌는지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어? 비닐봉지 소리?
뭔가 위화감이 들었다.
소음이 없어?
시끄럽지 않다.
조용해?
기침소리?
언제부터인가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육포를 든 채 고개를 들었다. 사내가 비틀린 미소를 감추고 날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