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52화 (52/261)

현실 (1)

노출 콘크리트로 마감된 빌딩은 현대적 느낌의 세련된 건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외부조명도 들어오지 않고 인근의 가로등도 꺼진 적막한 도시에서, 노출 콘크리트 외벽도 그 세련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회색빛 음침함만 남은 빌딩이 오랜만에 찾아온 사람을 반겼다.

짧은 거리지만 거의 곡예를 하다시피 전력질주를 했기 때문에 전신에 땀이 났다. 900m? 1km? 1km는 훌쩍 넘겼을 것이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기에 추적의 위험은 없었지만 혹시라도 모를 추격을 피하기 위해, 빙 돌아왔다. 오면서 깔아 놓은 전선을 사방으로 흩었으니 어둠 속에서 추격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후하-후-

심호흡을 몰아쉬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유미는 벌써 자리를 잡고 생수병과 진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꿀꺽꿀꺽- 2리터 생수가 순식간에 반쯤 비워졌다.

물이 제법 풍족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나와서 보니, 물도 제법 많이 마셨다. 전반적으로 소모를 많이 한다는 소리였다. 따지고 보면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에너지 소모가 많아졌는데 물만 적게 소모할 리 없었다.

“후아- 아저씬요?”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이름을 교환했는데도 끝까지 아저씨로 불렀다. 하긴 오빠로 불리기엔 좀... 그랬다. 녀석이 시원하게 마시던 물병을 쿨-하게 내밀었기에 모르는 척 받아 마셨다. 유미가 ‘에? 바로?’하는 소리를 냈지만 무시했다.

*

사내가 깨어 난 뒤, 유미를 보면 빗치니 어쩌니 발광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혹시나 싶었지만 아무래도 신경쓰였다.

“유미야. 밖에서 망 좀 보고 있어라.”

“네?"

"이 사람이 눈을 떴을 때 여자와 함께 있으면 만만하게 볼 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 알겠어요.”

유미도 궁금한 것이 있었는지 사내가 의식을 되찾길 학수고대한 표정이었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가능성을 몰랐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가능성이 보이는데 피하지 않는 것은 바보짓이었다.

“망 볼 때, 한쪽만 보지 말고. 뭔가 보였다고 하면 양동일 지 모르니까, 다른 방향도 꼭 살펴.”

“알았어요.”

“궁금한 거나 꼭 묻고 싶은 게 있으면 나중에 시간을 줄 테니까.”

“치-네-”

유미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도 몇 시간이 지나서야 기절했던 사내의 입에서 소리가 났다. 예상보다 깨어나는 게 너무 오래 걸렸다.

“으으으윽.”

신음소리와 함께 20대 중반? 많아야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가 눈을 떴다. 어찌됐든 궁금한 것을 속 시원히 풀어주길 기대했다.

“어이 정신 차렸어? 물 좀 줄까?”

“당신... 누구?”

말이 약간 어눌한 것이 조금 걱정스러웠다. 혈색도 상당히 나빠 보였다. 잘못 잡아왔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그건 차차 말하자고. 한 참 기절해있었으니 목이 많이 탈 텐데. 팔 떨어지겠어. 어서 받아.”

물병을 든 팔이 떨어질 것 같다며 너스레를 떨자, 내 얼굴을 쳐다보던 사내의 시선이 물병으로 옮겨졌다. 꿈틀- 눈썹과 입술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무... 뭐야?”

“왜 그래? 어디 아파?”

“파. 팔이... 안 움직여. 다리도.”

“뭐라고?”

사내의 말에 순간 당혹스러웠다. 팔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감각이. 감각이 없어!”

“그럴 리가.”

사내가 나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당신 뭐야! 여기는 어디야? 날 어떻게 한 거야!”

“진정해. 일단 진정하라고.”

고함을 지르던 사내가 필사적으로 사지를 움직이려고 했지만 나무토막처럼 굳은 몸뚱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게 가능한가? 분명히 힘 조절을 했었다. 부러지거나 금이 갈 정도로 강하게 치지 않았다.

목과 후두부의 경계를 치면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는다고 들었는데 전신마비라니. 권투에서 후두부를 가격하는 게 반칙이라고 했지만 이해하기 힘들었다. 목이 부러져 죽었다면 이해를 하겠지만 목 아래 부분만 전신마비라니 어이가 없었다.

발광하는 사내의 입을 틀어막고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한 참을 발악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금방 진정하는 사내였다. 사내가 마음을 다잡았는지 소리를 내지 않았다.

"이봐 진정했어?"

"......"

이렇게 되면 골치 아파졌다. 정신을 차리면 어르고 달래서 정보를 캔 뒤, 풀어주려고 했었다. 내가 변종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한다면 상대방과 충돌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미묘해졌다. 의료시설이 멀쩡하게 돌아가는 상황이라면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서 전신기능장애는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혼자서 움직이지 못하니, 이 사내를 돌려주는 것도 문제였고 돌려준다고 한들 의미가 없을 가능성도 있었다.

막말로 가자마자 곧바로 안락사 당할 가능성이 컸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했다.

고문?

전신마비가 된 마당에 고문이 두려울까? 생각이 복잡해졌다.

*

목 아래로 전신마비가 됐으니 좌절이나 패닉에 빠질 줄 알았는데, 사내는 의외로 정상처럼 보였다. 정상이라면 울고불고 발광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담담하다?

정상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는 정상이 더 이상 남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사내가 정상이든 아니든 어떻게든 대화의 물고를 떠야 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까 잠시 침묵이 이어진 가운데 사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은 뭐야?”

“그냥 평범한 생존자다.”

사내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사방을 살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 팀은? 나를 버리고 간 건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기 때문인지 기억을 하지 못하는 사내가 우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른 사람? 여기 있는 사람은 나 혼자다. 그리고 당신과 같이 이동하던 사람들은...”

잠시 이야기를 끊자 사내의 눈에서 절박함이 언뜻 스치고 지나갔다.

“......”

“급하게 어디로 이동하던 중이더군. 뭔가를 추격하는 것 같던데."

"어디서?"

"멀리서 지켜봤지, 보다시피 나 혼자서 무장한 사람들을 불러 세우기가 좀 껄끄러워서 말이야. 게다가 정말 빨리 이동하더군 당신을 업고 따라가기는 벅찼어.”

“어떻게 된 거지?”

“맨 뒤에서 가던 당신이 갑자기 푹 쓰러지더군. 당신 일행들은 당신이 쓰러진 걸 모르고 계속 이동을 했고. 쓰러진 당신을 내가 주웠다.”

“어째서?”

사내의 질문은 당연했다. 이런 세상에서 의식을 잃은 사람을 구한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든 것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적당히 이야기를 만들어 경계를 풀고 시작하는 것이 좋았다.

“뭐 비빌 언덕을 만들고 싶어서 말이야. 구석에서 틀어박혀 살다가, 먹을 게 떨어져 밖으로 나와 보니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더군. 혹시 다른 생존자가 있는가 싶어 왔다가 주운거지.”

“그냥 마음씨 좋게 주웠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기회라고 생각해서 데려왔지.”

“기회?”

“뭐 그쪽 생존자 그룹과 안면을 틀 기회라고 할까? 세상이 이 모양이라 그 쪽에서 내 말을 믿을 것도 아니겠고... 기절해서 낙오한 당신을 데려가면 끼워줄까? 아니면 말이라도 붙여볼 수 있지 않을까? 대강 그럴까 싶어서 챙겼는데 이런 상태일 줄은 몰랐지.”

짐 덩어리였는지 몰랐다는 뉘앙스를 일부러 풍겼다. 그게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말에 사내가 인상을 썼다. 역시 내 말투가 그의 신경을 건드린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려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침묵을 지키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후- 그럼 이제까지 혼자 살았단 건가?”

말이 상당히 짧고 직설적인 사내였다. 많이 잡아도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데, 말투가 참... 그랬다. 대답대신 어깨를 으쓱 한 번 올리고 지나가듯 딴 소리를 했다. 혼자 살았다고 직접적으로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어깨를 으쓱한 것으로 사내의 질문을 무마하고 중얼거렸다.

“아- 궁금한 게 정말 많았는데..."

"......"

"당신 상황을 보니 뭘 물어볼 상황이 아니네.”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벌렸던 사내의 목구멍에서 말이 아닌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났다.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약간 충혈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윽고 사내의 입에서 약간 미묘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큭... 허리 가방에서 주사. 주사를 놔줘.”

허리춤에 있는 색을 열어보니 약품과 주사기가 있었다. 꼭 인슐린 주사기처럼 생긴 주사기였다.

“그냥 놓으면 되나?”

“빨리 찔러.”

목덜미에 주사기를 대고 뒤를 눌렀다. 칙-소리와 함께 주사액이 들어가자 덜덜 떨리던 몸이 진정이 됐다. 경련을 일으키던 눈꺼풀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충혈됐던 눈도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놀라웠다.

“뭐지? 마약인가?”

사내가 반사적으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약기운이 갑자기 퍼져 일순 풀어지는 것 같았다.

“스펙...”

스펙? 스팀 팩 줄임말인가? 약간 말이 늘어지는가 싶더니. 눈빛에 힘이 돌아오는 사내였다. 그 반응을 보면 마약류는 아닌 것 같았다. 얼굴 근육을 잠시 움찔 거리던 사내가 카페인을 과다 복용한 직장인처럼 또릿또릿해졌다. 전투각성제가 분명했다. 게다가 진통효과까지 있는 것 같았다.

“스펙? 그거 전투각성제지? 정부가 남아있나? 군대가 유지되고 있어?”

“......”

사내는 가만히 날 쳐다봤다.

아닌가? 정부가 아니라면?

신형 전투각성제라고 하면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개발되고 있다고 했었다.

“그 주사! 출처는? 미군인가? 생존자들은 미군의 지휘를 받고 있는 건가?”

사내는 가만히 날 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당신 정말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았군.”

“......”

“뭐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안 미쳤으니까.”

“......”

“몸은 이래도 머리는 정상적으로 돌아가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미친 것은 아니었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였다. 전신마비가 됐으면서도 패닉에 빠지지 않은 것은 약 때문이었다. 유미를 겁탈하려고 했던 자들이 죽기 직전까지 죽음의 공포에 빠지지 않고 움직였던 것이나, 변종과 싸우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전투자극제 때문이었다. 그럼 그건 어디서 구할까? 제약시설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후- 그래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건가?”

“그래. 대충이라도 좀 알려줬으면 좋겠군.”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지? 혹시 담배 있나?”

혹시나 싶어 가지고 다녔던 담배를 꺼냈다. 치익-소리와 함께 불꽃이 일었다. 쿨럭-작게 기침한 사내가 다시 한 모금을 빨고 중얼거렸다. '빌어먹을...' 사내의 낮은 목소리는 모든 것을 체념한, 어쩌면 무엇인가를 각오한 기이한 음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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