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2)
압도적인 존재감 때문에 저절로 탄식 같은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뭐....?”
"....."
그 한 마디에 나를 향해 손을 내밀던 여자의 움직임이 살짝 멈춰졌다. 금방이라도 내 머리와 몸통을 분리시킬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던 여자가 앵두 같은 입술을 쓱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흐으응...”
날 보는 시선은 뭔가를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밖에서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의 신음소리가 가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언제 끊어져도 이상할 것 없어 보이는 가느다란 숨소리가 힘겹게 떨고 있었다.
“크으으으..”
다 죽어가는 신음 소리를 내던 사내가 뭔가를 딸그락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날 지긋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
“너 말 할 수 있어?”
“......”
말을 할 수 있냐고? 당연한 소리를... 이것이 뭘 생각하고 이런 질문을 하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단지 심장을 옥죄는 공포가 온 정신을 지배했다. 공포에 내리 눌린 심장과는 달리 내 시선은 여자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꼭 뭔가에 홀린 것만 같은 그 이중적인 느낌.
강박적으로 단검을 움직였다. 스각! 소리와 함께 올가미 하나가 끊겼다. 팔을 휘감았던 올가미가 풀어지면서 깊게 파고들었던 상처가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여자는 언제 뽑아들었는지 머리통을 하나 뽑아서 피를 들이키고 있었다. 꿀꺽-꿀꺽- 뜯긴 목에서 쏟아지는 피를 마시면서도 눈은 나를 보고 있었다.
한쪽 팔에 묶인 올가미를 푸는데 성공하자, 다른 쪽은 비교적 금방 끊을 수 있었다. 툭- 올가미를 모두 끊을 동안 그것은 내가 하는 짓을 쳐다보며 식사를 즐겼다.
마치 나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폭발적인 몸매에 완벽한 얼굴을 가진 모습이었지만 느껴지는 분위기와 압박감은 끔찍할 지경이었다. 무슨 이유로 당장 날 죽이지 않는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기회는 있다.' 죽은 자들은 방금 전까지 무전기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보고가 없다면 지원팀이 올 것이다. 이것과 생존자들이 싸울 때 몸을 뺄 기회가 올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시간을 끌어야 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이 같았는지 살아남은 사람은 끊임 없이 움직이고 신음 소리를 냈다.
“으으으으.”
바닥에서 처연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고통어린 신음소리가 무색하게 여자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오히려 신음소리가 신선도를 증명한다는 듯 남자의 손목을 뽑아버렸다.
"끄아아악!"
으직.
오물오물
여자는 꿈틀거리는 손가락 하나를 입에 넣고 씹었다. 닭발을 뜯어 먹는 것처럼 살을 발라먹은 그것이 퉷-손가락뼈를 뱉어내곤 소매로 입술을 훔쳤다. 소매를 따라 붉은 핏자국이 스르륵 번졌다. 턱- 숨이 막혔다. 생으로 사람을 씹어 먹다니.
닭발을 먹듯 손가락을 뜯어먹은 그것이 갸웃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넌 뭐지?"
"......"
“말 할 수 있어?”
"......"
"대답 안 해?"
심장이 옥죄였다. 말을 할 수 있냐고 물으면서 내뿜는 살기는 진짜였다. 여자의 모습을 한 그건 두 번 묻지 않을 것이다. 느껴졌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뭔가를 말해야 했다.
“무.. 뭐냐니? 무슨 소리야!”
살기를 버텨내며 소리치자, 여자의 눈 끝이 미미하게 휘었다.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다, 끄덕이더니 다시 갸웃했다.
“설마 했더니 진짜 말도 하네."
"......"
"발정이 나서 달라붙지도 않고...”
발정이 나서 달라 붙어? 무슨 소릴하는 거지?
“흐으으으으.”
바닥에서 들리는 신음소리가 그것의 말을 끊었다. 신음소리를 내던 사내가 악의를 숨기지 않고 그것을 향해 저주를 내뱉았다.
“으윽... 빗치년이...”
그것은 바닥에서 버둥거리는 사내를 내려다 보곤 무표정하게 한 걸음 걸었다. 우지직-뭔가를 딸각거리던 남자의 정강이를 살포시 밟고 지나가자 사내의 정강이가 호떡처럼 푹 꺼졌다.
“크아아악!”
딸각거리던 소리가 비명소리로 변했다.
“흐음...시끄럽게..."
"크으으... 농락하지 말고 죽여!"
사내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실핏줄이 터졌는지 눈이 붉게 번들거렸다. 마치 몽정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내의 하반신이 자동적으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사내의 모습을 본 그것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날 보며 말했다.
"제대로 걸리는데. 넌 왜 멀쩡하지?"
"무.. 무슨 소리야."
"피 냄새 때문인가?”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아름다운 얼굴을 한 그것이 인상을 살포시 찌푸렸다.
“킁. 뭔가 미묘한데? 당...!?”
펑! 파아아악!
다리가 으스러진 남자가 허리를 꿈틀거리다 뭔가를 눌렀다, 천장이 터지면서 붉은색 그물이 펼쳐졌다. 그것의 아름다운 얼굴 가죽이 험악하게 구겨지며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지만, 펼쳐진 그물을 피할 수 없었다.
“하?”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그것은 정말 사람 같았다. 인육을 먹는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면 괴물이라는 것을 믿지 못할 정도로 사람처럼 보였다. 그것은 짜증난다는 것처럼 그물을 잡아당겼다. 으지지직- 뭐로 만들어졌는지 재질을 알 수 없는 그물이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물이 끊기기 전에 쳐야 했다. 그것이 내뿜는 압박감에 저항이라도 하는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피를 연소시킨 것 마냥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바닥에 널브러진 둔기를 들어, 그물을 찢고 있는 그것을 향해 휘둘렀다. 그물에 엉켰으면서도 그것은 용하게 둔기를 비켜 쳤다. 바벨을 용접해 만든 둔기가 매끄러운 팔뚝에 미끄러지듯 옆으로 밀렸다. 쾅! 그것의 팔뚝을 부러뜨리지 못한 에너지가 엄한 벽에 구멍을 냈다.
“호? 오아?”
그것은 약간 멍청한 소리를 냈다. 날 보는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호기심으로 변했다. 내가 자신을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것 같았다. 꼭 신기한 것을 보는 눈빛이었다.
“지금 날....”
뭐라고 지껄이는 그것의 머리통을 향해 다시 둔기를 휘둘렀다. 휘가각-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휘둘러진 둔기가 허무하게 허공을 두들겼다. 그물에 엉켜있으면서도 놀라울 정도의 반사 신경을 보이는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떠냐!”
그대로 그것의 몸을 끌어안고 문 밖 복도 있는 쪽으로 태클을 먹였다. 뒤통수가 바닥에 틀어박히자 그것의 얼굴이 호기심에서 짜증남으로 변했다.
"하? 이게 정말..."
“아저씨!”
복도 끝에서 석궁을 든 유미가 소리를 질렀다.
“쏴!”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볼트가 쏘아졌다. 팍- 머리를 향해 날아간 볼트를 여유 있게 팔뚝으로 막는 그것이었다. 어지간하면 관통할 볼트가 얇은 팔뚝을 관통하지 못했다. 단단했다. 그것이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호홋~이것들이...”
으지지지직
붉은 그물이 두둑 소리를 내며 찢어지기 시작했다. 막아야 했다. 석궁도 통하지 않고 때려도 소용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순간 사내가 움틀 거리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두 다리가 으스러진 남자가 필사적으로 뭔가를 잡으려고 했다.
어깨가 뭉개져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사내의 눈동자와 내 시선이 교차됐다. 나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던 사내의 시선이 일순 자기의 허리춤에 달린 무전기 비슷한 것으로 옮겨졌다. 사내의 눈빛은 그걸 의미했다.
붉은 버튼이 달려있는 무전기?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아저씨!”
유미가 계속 석궁을 쐈지만 가죽에 상처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건 아랑곳 하지 않고 서서히 그물을 찢었다.
“뛰어내려!”
남자의 허리춤에 달려있는 것을 잡아채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유리창이 깨지며 몸이 수직으로 부유하는 감각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변했다.
콰직- 주차된 차량 지붕이 푹 꺼지며 경적을 눌렀는지 요란한 경적소리가 사이렌 소리처럼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등판과 골반이 쪼개질 것처럼 아팠다.
통증을 내리 누르듯, 손에 꽉 틀어쥔 기기의 붉은 버튼을 눌렀다.
쿡-
콰아아아앙!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폭음과 함께 사방으로 돌덩어리와 유리파편이 쏟아져 내렸다. 비처럼 내리는 잔해를 뚫고 내달렸다. 그 먼지와 폭연 사이로 영혼 없는 소리를 내뱉는 좀비들이 서서히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
폭발음 때문인지 도로는 좀비들로 바글바글했다. 10m를 달리기도 전에 좀비 무리들과 마주쳤다.
크어어어
우오오오
내달리던 발걸음을 그대로 박차 뛰어올랐다. 멀리 뛰기는 7m가량은 너끈히 뛸 수 있었다. 점프는? 3m는 어려워도 2m가량은 충분했다. 건물 2층 에어컨 실외기에 착지하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실외기를 매달아 놓은 앵글이 구겨지며 기울었다.
점프를 한 번 더해 4층 에어컨 실외기에 매달린 뒤 창문을 깨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아- 참았던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하아- 길게 다시 심호흡을 하고 바로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옥상으로 올라가 내가 도망친 방향을 살폈다. 별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뭐하는 놈들이지?”
함정에 폭탄까지 매설해 놓고 있다고? 이쯤 되면 그건 그냥 단순한 생존자 그룹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죽자 살자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다는 건 더 납득되지 않았다.
‘만기전역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게 가능하나?’
죽음의 공포에 접하면 인간은 이상 행동을 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그런 게 없었다. 승합차를 타고 있던 놈들이 떠올랐다. 나와 유미가 죽인 넷도 그랬다. 그들도 두려워하면서도 공포에 떨지 않았다.
마치 뭔가 공포를 억제하는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움직였다. 머리통이 날아가고 팔이 꺾이는 모습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리볼버를 꺼내 쏘는 게 가능할까? 그저 훈련을 잘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빗치라고?”
빗치라고 불렀다. 그런데 분명히 무전에서는 유미를 가리켜 빗치라고 했다. 여성형 변종을 의미하는 소린가? 방금 마주친 그것도 이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하실에서 변한 바비와 유사했다. 지금 만난 것이 존재감도 능력도 압도적이었지만 큰 맥락에서 보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었다.
뭐든 정보가 필요했다. 이대로 간다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당할 것 같았다.
폭탄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건물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추격자들은 폭음과 연기를 보고 모여들 것이다. 그리고 일반 좀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변종이나 동면괴물도 움직일 것이다. 최악을 피하려면 빨리 이동하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포로를 잡으려면 지금이 가장 좋은 기회였다.
우선은 유미와 합류해야 했다. 혹시라도 모를 사태가 벌어져 둘이 떨어지게 된다면 만나기로 정해 놓은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에 보이는 조금 높은 건물. 고만고만한 높이의 원룸 밀집촌에서 유독 눈에 띄는 건물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