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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트 DUST-44화 (44/261)

충돌 (1)

강한 생존자 그룹과 만난다는 기쁨에 활짝 웃던 유미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저... 저희는 나쁜 사람 아니에요.”

유미의 항변에 굵고 낮은 목소리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거기 옆에. 보이는 곳으로 나와.”

“......”

사내의 낮은 목소리에 살기가 실리기 시작했다.

“빨리 안 나와?”

욱신. 살기에 반응하듯 가슴이 옥죄였다. 나가지 않으면 쏠 것이다. 사내의 살기는 진짜배기였다. 나가면? 저쪽은 원거리 무기가 있고 몇 명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저씨 이야기 좀 해봐요.”

유미가 내 팔을 끌어당겼다. 수신호를 했다. [머리 방어] 머리를 조심하라는 수신호였다. 유미의 눈이 동그랗게 됐다. 내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뒤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이마저도 못 알아듣고 멍청하게 행동했으면 답이 없었다. 생각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마치 처음으로 약탈자들을 죽였을 때처럼.

하아- 숨을 그러모아 쉬었다.

“당장 안 나와?”

짙어지는 감각. 가슴이 조금씩 조이기 시작했다. 위험하다. 이들은 일종의 꾼이다. 일단 말을 끌어야 했다.

“알았다고. 그것 좀 내려.”

일단 오른편 반신을 내밀었다. 머리는 최대한 천천히 내밀고 싶었다. 나가자마자 저쪽에서 내 머리통을 날려버리면 그걸로 끝이었다.

“씨발 장난해? 죽고 싶어?”

단단히 정신교육을 시켰어야 했는데, 워낙 알아서 잘했기 때문에 그냥 지나갔던 것이 문제였다. 쓴 웃음을 지으며 몸을 밖으로 뺐다. 여차하면 달려들 준비를 했다.

등산복을 입은 사내의 손에는 석궁이 들려있었다. 전방을 살짝 살폈다. 모두 넷. 석궁을 들고 있는 사람이 둘. 창이 둘이었다. 다시 슬쩍 살폈다. 석궁을 든 쪽은 허리에 리볼버 권총을 차고 있었다. 경찰들이 가지고 다니는 모델 같았다. 창을 든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부 무장으로 권총을 하나씩 들고 있다고?’

뭔가 이상했다. 총기는 좀비를 상대하는데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총소리는 상당히 멀리까지 퍼진다. 아무리 느린 좀비라고 하더라도 총소리에 반응할 것이다. 최소한 반경 150m~200m 안에 있는 좀비들이 몰릴 것이다. 게다가 총소리는 동면상태인 놈들도 움직이게 할 정도로 소음이 컸다.

그러니 냉병기를 써서 죽이는 것이 좋은데, 석궁까지 있으면서 따로 총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전부? 이런 상황에서 총기란 좀비를 죽이는 것보다는 사람을 견제하기 위한 무기라고 보는 게 맞았다. 이 자들 생각보다 위험한 자들이었다.

덤프트럭이 워낙 소리를 크게 내며 지나가, 승합차가 멈춘 것을 감지하지 못한 것이 실책이었다. 지나가다 우리를 보고 멈췄을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렇다면 저쪽 생존자 그룹에서 우리 둘이 도주하고 있다고 무전기로 알려줬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쪽으로 나와. 빨리.”

석궁은 생각보다 대응하기 까다로운 무기였다. 소리가 없다는 무음성이 가장 큰 장점이었고 생각보다 강력한 관통력을 가졌다는 것도 그랬다. 사냥용 석궁의 유효 사거리가 70m넘는 건 수두룩했다. 방패가 없으니 팔뚝으로 막아야 하는데 뼈로 막지 않으면 팔뚝을 관통하고 머리에 직격할 것이 분명했다.

상대방은 지옥에서 살아남은 베테랑들. 고작 15~20m가량 떨어진 거리라면 아차 하는 순간 머리통에 볼트가 틀어박힐 것이다. 덤프트럭이 요란하게 소음을 내고 있으니 재수 없으면 총을 꺼내서 쏠 가능성도 있었다. 여러모로 피곤한 상황이었다.

치직-무전기에서 소리가 났다.

-두 놈 찾았나? 오버.

“그래. 여기 있다. 여자 하나 남자 하나 맞나 오버.

-맞다. 그 두 놈과 일행이 있는지- 치직- 식량은 어디에 뒀는지 확인바람 오버.

“알았다. 시간이 있나? 오버.”

-편의점 창고에서 물건을 전부 싣는데 50분 정도 예상한다. 그 놈들이 제법 많이 가져간 것 같으니 꼭 회수하기 바란다. 오버.

“걱정마라. 오버.”

유미의 표정이 노랗게 떴다.

“어이 예쁜이 좀 기다리라고. 야... 들었지?”

굵직한 목소리를 내는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방패도 없고 유미는 둔기도 잃어버린 상황. 내 둔기는 등에 매고 있었지만 지게에 가려져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한 사람은 여유 있게 나를 향해 석궁을 겨누고 있고 다른 사내들은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지게까지 지고 다니고 토끼 굴에 많이 쟁여 놨겠어.”

휘익-

“토끼?”

“그러게 딱 토끼처럼 생겼네. 순하게 말이지.”

“상판들을 보니 어찌 살아남았을까 몰라.”

“야. 이거 견적이 안 나오는데?”

휘파람을 불며 사내들이 걸쭉한 목소리로 킬킬댔다. 아래에 깔리면 토끼처럼 앙앙 댈 것처럼 생겼다며 키득거리는 사내들이었다. 은근한 협박 뒤에 묻어나오는 진득한 살기. 유미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좋은 사람들도 있겠지. 분명히 좋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 이들도 좋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의 거점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이들은 든든한 식량탐색조일 것이다. 다만 그 그룹 밖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비 없는 약탈자일 것이다. 모든 것은 관점의 문제.

“왜? 왜 이러세요?”

낮고 굵은 목소리를 가진 사내가 유미를 끌어당겼다. 유미의 얼굴은 이제 하얗게 질려있었다. 안 끌려가려고 힘을 쓰면 당연히 안 끌려 갈 수 있겠지만, 다른 한 사람이 석궁을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인지 유미는 힘을 쓰지 못하고 그대로 폭 딸려갔다.

유미의 말에 어이가 없는지 사내가 되물었다.

“뭐? 왜 이러세요?”

푸하하하핫

“왜 이러냐고?”

“큭큭큭. 미치겠네.”

“이러지 마세요도 아니고 왜 이러세요?”

사내 넷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유미의 어이없는 말에 일순 긴장이 확 풀린 사내들이었다. 그 틈을 타, 숨을 계속 크게 쉬었다. 근육에 산소를 축적하고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 세웠다.

“아 씨발-웃다가 뒤지겠네.”

“왜 이러냐니?”

“허?”

“저 표정 봐라 진짜 모르는 표정이다.”

크하하하

“까보면 다 똑같으면서 내숭은?”

사내들에게 둘러싸인 채 자신을 대상으로 걸쭉한 입담을 주고받는 것에 패닉에 빠진 유미였다. 이게 그녀가 생각하던 좋은 사람들의 정체일 것이다.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린 유미가 날 쳐다봤다. 나는 그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쳐다봤다.

“이런 년이 아직도 남아있었네.”

“야. 걔 처음 아닐까?”

“그럼 이 새끼가 고자겠지.”

큭큭큭.

“야 이거 운다.”

“진짜? 손도 안 댔는데?”

“와 씨발 진짜네.”

“확인 좀 해보자.”

유미의 바지를 벗기려고 했다. 유미가 뾰족하게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자 따귀를 올려붙이는 남자였다. 짝 소리와 함께 고개가 확 돌아가는 유미였다. 나를 애절하게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나는 그 눈동자를 담담하게 응시했다.

여기서 목숨을 걸고 달려든다? 사내들은 내가 달려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의도적인 도발인 것이 뻔히 보였다. 어찌됐든 이대로 구해주면? 유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었다. 내가 인간관계의 편린을 깨닫기까지 두 여자가 죽었다. 여기서 유미가 깨닫지 못한다면, 유미가 깨닫게 될 때는 그녀가 무참히 겁탈당하고 죽거나, 내가 죽었을 때일 것이다.

“아저씨!!!”

유미가 소리를 질렀다. 그 눈동자에 대고 수신호를 보냈다. 너에게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 곳에서 빠져나오고 싶다면.

[죽여]

수신호를 본 유미가 믿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나를 쳐다봤다.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유미의 선택이었다.

“오 씨발 아저씨였어?”

“뭐야 그거 아저씨 나오는 영화.”

“큭큭큭. 어쩐다? 저 아저씨는 그 아저씨가 아닌 갑네.”

“존나 새끼 얼은 거 봐라.”

찌이이익- 바지가 밀려 내려지고 상의가 찢겨졌다. 하얗고 뽀얀 두덩이가 반쯤 드러났다 다시 찢긴 옷 사이로 숨었다.

“아저씨! 아저씨!”

도와달라고? 도와줄 수 있다. 그래서 내 손에 피를 묻히고 너는 순결한 새처럼 그 자리에서 있을 건가? 그 힘을 가지고 그냥 당할 건가?

눈물을 홍수처럼 흘리며 나를 보는 유미의 얼굴을 억지로 비튼 사내였다. 츄릅-혀를 깨물지 못하게 턱관절을 잡아 누른 채 유미의 입안에 굵직한 혀를 밀어 넣어 휘저었다. 냉정하게 담담하게 있으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보니 머리 꼭대기 까지 피가 몰리는 느낌이었다.

“후아... 썅~ 양치질도 하고 다니네.”

“무슨 맛?”

“존나 괜찮은 맛?”

한 사내가 주섬주섬 바지를 내리자 옆에 있던 또 다른 사내도 바지를 내렸다.

“야 씨발. 하나씩 가자고 하나씩.”

“입은 뒀다 뭐하게.”

“아 새끼 진짜.”

내가 나서서 사람들을 죽여주기를 바라고 있나? 그 힘을 갖고 그렇게 능욕 당하는 걸 선택하는 건가? 난 눈을 돌리지 않고 유미를 바라봤다.

그 간절한 눈빛에 수신호로 대답했다.

[싸워!]

싸워라! 도와주마.

제발 도와달라고 어떻게 해달라고 나를 보고 부르르 떨었다. 흔들리는 눈동자. 애원하는 몸짓에 수신호를 다시 보냈다.

[공격!]

지킬 것이 있다면 움직여라. 네가 저항하면 내가 도와주마. 내 손에 피를 묻히고 싶다면 너의 의지를 보여라. 이것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 너와 내가 같이 있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네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겁탈당하는 것을 선택한다면 난 혼자 돌아갈 것이다.

유미의 머리맡에 자리 잡은 사내가 바지를 내렸다. 검고 굵직한 것이 발기된 채 꺼떡였다. 그것을 본 유미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체념했나? 그렇다면 날 믿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저항의지도 없단 말인가? 과연 저 아이가 목숨을 걸고 날아오는 맨홀 뚜껑을 막아냈던 그 아이인가? 사람들을 죽일 수 없다고 자기를 버린 건가? 충격으로 망가졌나? 강하다고 했으면서? 그 힘으로 저항하지 않고 그저 그렇게 있으려고 한 건가? 그래? 내 손에 피를 묻히기를 원한다? 그것이 네 선택이라면......

전신의 근육에 힘을 줬다. 팽팽하게 긴장하는 근육. 나를 겨누고 있는 석궁을 노려봤다. 머리와 심장만 피하면 됐다. 유미의 입에 굵직한 것이 밀고 들어가려는 순간, 아래쪽을 공략하던 사내가 소리를 질렀다.

“이년이 팔 안 놔?”

짜증나는 표정으로 윽박지르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얗고 가냘픈 손가락이 자기 위에 올라탄 남자의 팔을 잡고 있었다. 사내의 화난 목소리 끝이 공포와 경악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년... 무슨 뭐...”

유미의 손가락이 사내의 팔뚝을 파고 들어가자, 떨리던 목소리가 으스러지는 소리로 변했다.

우두두둑-으직!

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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