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스트 DUST-39화 (39/261)

편의점 (1)

이틀 동안 편의점 주변 정찰을 했다. 조심 또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꼭 나가야 해요?"

여고생이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깔끔하게 현실을 확인시켜줬다.

"네가 먹는 걸 생각해 봐라."

밖으로 나가는 것은 언제 나갈 것인지 시점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냥 덤덤하게 생각해서 그렇지 둘이 먹어대는 양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식량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면 부족했지 여유 있기는 힘들었다.

아무리 펜트하우스가 좋다고 하더라도 식량이 떨어지면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다. 안전한 요새라는 말은 식량이 넉넉했을 때나 가능했다.

내 말에 여고생은 한숨을 작게 쉬고 쌍안경으로 편의점 주변을 다시 살폈다.

“별 다른 특징은 없어 보이는데요?”

“그래도 잘 살펴봐.”

“뭐를 살펴봐야 하는 데요?”

“좀비들 숫자. 모여 있는 위치. 은폐나 엄폐할 수 있는 공간이나 지물들.”

“후아- 뭐가 그렇게 복잡해요? 그냥 아저씨가 보면 되잖아요.”

잔소리를 하자 가볍게 반항하는 여고생이었다. 나는 밥만 축내는 여고생을 키울 생각이 없었다. 같이 싸우기는 힘들어도 짐덩어리가 되지는 않아야 같이 살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솔직히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지금부터 교육시켜 놓으면 좀 편해질까 싶은 사심도 없지 않기는 했다.

“이것도 다 알아야 한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게.”

“네에.”

여고생이 내렸던 쌍안경을 다시 눈에 붙였다. 나보고 보라는 듯 고개를 열심히 흔들며 사방을 꼼꼼하게 살폈다.

“어때? 주변에 사람들은 없고?”

“좀비들이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은 없네요.”

공원처럼 가꿔진 건너편, 왕복 4차선 도로가 있는 곳은 빌딩 밀집 지구였다. 사태가 발생한 뒤 사무실이 많은 빌딩지역은 당연히 공동화 현상이 벌어졌어야 했다. 그런데 좀비가 많다는 것은 뭔가 이상했다.

“이상하네? 좀비가 없어야 하는데?"

"왜요?"

"저쪽 근처는 회사 밀집지역이잖아."

"그런데요?"

"이런 상황에서 회사를 다닐 사람들이 몇이나 있겠냐?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에 좀비들이 많겠지만...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아? 집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회사까지 꾸역꾸역 나와서 좀비가 됐다? 난 이상하게 보이는데?"

"음..."

"일단 한 이틀 더 관찰해보자.”

“네-에-에에.”

주의하고 경계하는 것은 아무리 자주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반사광에 눈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해.”

“알겠습니다. 아-아.”

“대답만 길게 빼지 말고.”

“눼!”

어둠에서 밝아진 눈은 장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확실했다. 랜턴의 빛을 쪼이면 단시간 동안 시력이 마비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단점이었다. 랜턴의 불빛에도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섬광탄의 불빛을 직접 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밤이 아니라 낮에도 마찬가지였다. 빛에 유독 민감해졌다. 반사광에라도 노출되면 말 그대로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게다가 팔다리가 쉽게 회복되는 것에 비해 눈은 더디게 회복됐다.

*

그렇게 사나흘 편의점과 인근을 관찰한 결과 위험종(?)은 없다는 결론이었다. 일반 좀비와 기본형들은 있지만 위험한 놈들은 없었다. 일반 좀비가 좀 많고 기본형들도 제법 있지만 대부분 동면상태였다.

숫자가 많으니 생존자들은 지레 짐작하고 편의점 쪽으로는 가지 않는 것 같았다. 편의점의 크기도 생존자들이 흥미를 접은 한 요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작은 편의점처럼 보였다. 실상은 달랐다. 긴 직사각형 모양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나도 맥주를 사러 가지 않았다면 ‘저 작은 편의점에 먹을 게 있으면 얼마나 있겠어?’ 하고 신경을 껐을지도 몰랐다. 알고 보면 상당히 규모가 있는 편의점이었다.

단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어지간하면 늦게까지 여는 마트에서 물품을 샀기 때문에 저 편의점이 발굴되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같은 위험도면 마트를 터는 게 합리적이니, 겉으로 보기에 작은 편의점을 털기 위해 많은 좀비들을 뚫고 갈 생존자 그룹은 없어 보였다.

“위험한 놈은 없지?”

“네. 며칠 동안 살폈는데 보이지 않았어요.”

콕 숨어서 대기하고 있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인근의 생존자들 움직임은?”

“에. 마트로 갔던 무리를 마지막으로 잠잠해요.”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마트는 변종의 사냥터였다.

“저쪽 길 말고 이쪽 길 건너에 있는 동네는 조용하고?”

“조용해요.”

우리처럼 강해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생존자 무리들 가운데 유독 강한 사람들은 없어?”

“특별히 강해보이는 사람은 없었어요.”

“조금이라도 이상한 사람이 있다 싶으면 기억해둬."

"알겠어요."

"저녁까지 이상이 없으면 오늘 밤에 나가자.”

“네. 근데 우리 나갈 수는 있는 거죠?”

“.......”

문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벌어졌다.

“이건 좀 어이없는 상황인데 말이지.”

“그렇죠?”

할 말이 없었다. ‘완전차단!’ ‘완벽 요새화!’를 했을 때는 좋았는데, 식량을 가져올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여고생도 겹겹이 차단된 격벽을 보곤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꽁꽁 막아놨으니 안전하다고 노래를 불렀구나. 설마 저걸 전부 도로 뜯어내고 나가자는 건 아니죠?”

“.......”

“진짜. 끔찍하게도 잘 막아놨네요. 먹을 게 떨어지면 여기서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어요.”

생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 탈출 방법 하나 꿍쳐두지 않았을까. 옥상으로 올라가면 동력비계가 있었다.

“동력비계요?”

내가 짭짤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여고생이 인상을 썼다. 요놈 오냐오냐했더니 인상을 써?

비계(飛階)는 건설, 건축 등 산업현장에서 쓰이는 가설 발판이나 시설물 유지 관리를 위해 사람이나 장비, 자재 등을 올려 작업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시설물 등을 의미했다.

이 가운데 동력비계 같은 경우, 곤돌라와 비슷한 놈도 있었다. 뭐 간단히 말하자면 외벽관리를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장치였다. 일종의 외부 작업용 간이 곤돌라? 엘리베이터? 그쯤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이걸로 밖으로 나간다고요?”

"나가는 건 문제가 아닌데. 가지고 오는 게 문제겠군."

6개의 로프에 매달린 비계가 바람에 흔들렸다. 끼익 소리를 내며 60~70m상공에서 흔들리는 동력비계를 보고 여고생이 고개를 흔들었다. 비계의 길고 좁은 공간은 말 그대로 협소했다. 이걸 타고 내려가는 건 좋지만 식료품을 싸들고 들어오기는 힘들었다.

"진짜 이걸로 움직일 거예요?"

“음.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화물엘리베이터를 써야 하나?”

건물 주변에는 좀비들이 상당히 많이 몰려있었다. 요새화를 한다며 용접하고 차단격벽을 내렸기 때문에 소리에 유인된 놈들이 제법 많이 있었다. 일반좀비들이야 몰려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몰려오길 원했다. 좀비들이 많이 몰려있으면 다른 생존자들이 이 건물에 접근하지 못하니까 좀비 방어벽이라고 생각하고 좋아했다. 근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스스로 발을 묶은 꼴이었다.

*

“아저씨 믿지?”

내 능글맞은 목소리에 녀석이 한 숨을 푹 내쉬었다.

“하나도 안 재밌거든요.”

생각은 간단했다. 위험종은 모르겠지만 동면좀비들과 일반좀비 놈들은 시력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 시각은 제쳐놓고 주의해야 할 감각은 후각과 청각이었다. 작전 성공의 핵심은 좀비들의 후각과 청각을 교란 시킬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있었다.

몇 차례 실험을 해 본 결과 소리가 난다고 모든 종류의 좀비가 몰리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좀비들은 소리가 나면 몰리는데 동면좀비들은 그냥 동면상태를 유지했다. 어느 정도 소리를 구분한다는 의미였다. 급습을 할 수 있는 동면좀비를 최대한 피해서 이동하는 동선을 짤 필요가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놈들 위치를 지도위에 표시해."

"그... 동면괴물이요?"

"그래 그 동면좀비. 그 놈들은 처음 급습을 하니까 놈들의 사정권에서 벗어난 루트를 찾아보게."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을 표시하면 되죠?"

"어."

"일반좀비들 유인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생각이 있으니까 시키는 거나 잘 해."

핸드폰의 알람을 맞춰놓고 비닐봉지 낙하산에 핸드폰을 매단 다음 한쪽에서 낙하를 시켰다. 잠시 뒤 핸드폰의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자 일반 좀비들이 어기적거리며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됐다. 후추 뿌려.”

후추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걸로 후각과 청각 일부를 교란시켰을 것이다. 일반좀비들은 독한 후추냄새 때문에 청각에만 의존해 몰려다니기 시작했다. 그것을 확인한 뒤 화물엘리베이터를 작동시켰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화물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하게 내려가는 동안 여고생이 중얼거렸다.

“후- 굶어죽지 않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거네요.”

“뭐 그렇지.”

강해졌다고 하지만 그 강함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했다. 식량이었다. 게다가 여고생과 내가 강해졌다고 하지만 그건 상대적인 의미의 강함이었다. 숫자의 폭력 앞에는 어떻게 될 지 몰랐다.

밖에는 말 그대로 바글바글 몰려있었다. 수백에 가까운 좀비들과 괴물들이 있는 곳을 지나가야 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화물엘리베이터 안을 가득 채웠다.

“근데 아저씬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아요?”

“뭘?”

“그냥요. 이름도 묻지 않고. 어떤 사람인지 말도 안하고. 지금도 그렇잖아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이마에 딱-밤을 놨다.

“아코- 왜 때려요!”

“꼭 나가기 전에 그러고 싶냐? 영화 같은 거 보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고생이 먼저 잘랐다.

“됐어요. 흥!”

상당히 서운한 표정이었다. 딱-밤을 놨던 부분을 슬쩍 쓰다듬어줬다. 손을 확 밀치고 짜증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만히 있었다. 나름 강해지기도 했고 훈련도 열심히 했지만 무서울 것이다. 나도 사실 불안했다.

안전한 곳에 있다가 개방된 곳으로 나가야 한다는 두려움은 의외로 컸다. 포위가 된다면 어떻게 하지? 위험종이 숨어있으면? 화물엘리베이터가 느릿느릿 1층을 향해 움직일 때마다 정지시키고 싶었다. 그냥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럴 정도니 여고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입맛이 썼다.

“한유현.”

내 목소리에 여고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내가 큼-하고 멋쩍게 고개를 돌리자. 녀석이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나유미에요. 잘 부탁해요."

"뭘 부탁해..."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여고생은 그런 나를 보고 쿡-하고 다시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시샘이라도 하는 것처럼 거친 기계음이 났다.

기기기기깅-

화물엘리베이터가 무거운 소리를 내면서 멈췄다. 두툼한 스테인리스로 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깜깜한 밤. 우리에게는 더 이상 어둡지 않은 밤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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